소설리스트

내 사거리 100만-187화 (187/301)

# 187

천황클랜 멸망의 날-3

#1

“무, 무슨...”

정박사는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상대의 얼굴을 보려 했을 뿐이지만 단순히 머리를 드는 것으로는 그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키도 180센티였는데 고작해야 상대의 가슴만 보인다. 두어 걸음 물러나서야 그는 상대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꿀꺽

그는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상대는 그냥 가만히 서 있어도 위압감이 들 지경인데 인상은 조폭 저리 가라 할 정도로 흉악하다. 거기에 그를 바라보는 표정이 그리 호의적이지 않다.

턱...

“다시 말해봐. 고졸이 뭐 어째?”

“아니, 난...”

사회적 위치나 자존심 따위는 지금 그의 몸을 지배하는 원초적인 공포 앞에 무의미했다.

눈앞의 사내가 손을 들어 올리는데 그 손의 크기까지 범상치 않다. 가볍게 주먹을 말아쥐는데 주먹 크기가 무슨 수박만 하다. 다리가 바들바들 떨리고 안색이 창백해진다.

“동철님 일반인입니다.”

그때 그의 곁으로 다가온 이루미가 동철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아니 이 사람이 지금...”

인상을 찌푸린 동철이 뭐라 말하려 했지만 이루미는 그의 말을 칼같이 잘랐다.

“제황님께 폐가 되는 행동이십니다.”

“쩝...알겠수.”

절레절레 고개를 흔든 동철이 어깨를 으쓱하고는 조용히 물러났다. 절대자인 권제에게 매번 두들겨 맞으면서도 꼬박꼬박 말대꾸하는 동철이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이 여자를 잘못 건드리면 ‘6성급 잔소리’로 그의 정신을 괴롭히기에 대하기 꺼림칙한 여자다.

“물의를 일으킨 점 죄송합니다.”

이루미가 정박사를 돌아보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세계최초의 9성 헌터를 보좌할 팀을 관리하는 부서장의 위치에 있는 그녀이기에 굳이 저자세일 필요는 없지만, 그녀는 정박사에게 사죄의 뜻으로 고개를 숙였다. 자신이 곧 제황의 얼굴이라 생각하는 그녀는 누구에게도 함부로 대하는 않았다.

그러나 그것도 상대를 봐가며 하는 법, 그녀의 행동은 정박사의 기를 살려주는 꼴이 되었다. 거한에 의해 위축되어 떨었던 자신이 부끄러운지 그의 목소리에 분기가 섞여 있다.

“내, 내 이번 일은 학회 차원에서 정식으로 항의하겠소!”

“죄송합니다.”

“모두! 나갑시....흠흠”

그는 늘 하던 버릇처럼 이곳에 있는 S대 출신의 학자들에게 모두 나가자고 하려 했다. 세를 과시함과 동시에 모임을 망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기에 평소 그가 자주 애용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그는 곧 말을 얼버무렸다. 지금 이곳에서 그를 따라 나올 이는 아무도 없어 보인다. 특히 이루미의 뒤에 서서 기분 나쁘게 웃고 있는 여자는 둘째치고 평소 자신에게 손을 비비며 ‘힘’ 좀 써줄 것을 간청하던 학자들이 전부 그를 외면하고 있다.

치욕과 부끄러움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다.

“두고보자.”

이곳에 더 있을수록 꼴이 우습게 변하리라는 것을 깨달은 그는 서둘러 그곳을 벗어나려 했다. 구경하던 이들을 거칠게 밀치며 입구 쪽으로 빠져나가는데 마침 문을 열고 들어오는 한 남자가 보인다.

정박사는 욱하는 심정에 그를 거세게 밀쳤다. 한시라도 바삐 이곳을 벗어나고 싶기에 한 짓이었으나 밀려난 건 오히려 그였다. 아니 밀려나다 못해 마치 바위를 밀친 것처럼 그의 몸이 뒤로 꼴사납게 넘어졌다.

정박사에게 밀쳐질 뻔한 남자가 고개를 돌려 그를 보며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뭡니까?”

뿌드득...

다시금 굴욕적인 모양새가 된 정박사가 이를 갈았다. 이번 상대는 이제 갓 2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솜털도 가시지 않은 애송이다. 눈에 번쩍 뜨일 미남에 한눈에 봐도 고급스러운 명품 슈트를 걸치고 있었지만 지금 정 박사는 연이은 치욕으로 그런 것을 고려할만한 이성이 남아 있지 않았다.

“가! 감히 날 밀쳐! 이 빌어먹을! 여긴 뭐 이딴 것들만!”

정 박사는 자신이 상대를 밀려다가 오히려 넘어진 것은 까맣게 잊었는지 홀이 떠나가라 욕을 했는데 이 정도면 적반하장도 수준급이다. 물론 그가 이렇게 목소리를 높이는 것도 다 이유가 있었다. 그가 보기에 상대는 절대 헌터가 아니었다.

육체적 단련치를 기반으로 능력의 보정을 받는 헌터들은 마법 계열 유저들이라도 모두 한 근육한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상대는 근육 한점 보이지 않는 날렵한 몸. 게다가 얼굴은 고생 한 번 해본 적 없다는 듯 뽀얗다. 온갖 험지로 몬스터를 사냥하러 다니는 헌터는 절대 저런 얼굴이 아니다. 그는 상대가 자신과 같은 먹물이라고 생각했다. 20대 초반이니 잘해야 대학원생 정도? 다른 박사들이 데려온 조수 정도라고 그는 추측했다.

그리고 그는 조금 전 자신이 밀려난 것은 자세가 좋지 못했을 뿐이라고 이해했다.

“내가 이딴 곳에 다시는 오나 봐라. 비켜!”

자리에서 일어난 정박사가 그를 지나쳐 밖으로 나가려 했다. 그렇지만 그의 멱살을 쥐어오는 손이 있다.

꽉!

“당신 뭐라고 했지?”

“커억...”

단순히 멱살을 붙잡혔을 뿐인데 마치 강철로 된 갈고리에 잡힌 기분이다.

“이, 이거 놔!”

“다시 말해봐···. 뭐? 빌어먹어?”

“이···! 이! 너! 너! 내가 누군지 알아?!”

“당신이 누군데?”

“나 한연회 부회장이야! 너도 이 바닥에서 밥숟가락 놓고 싶어?!”

한연회는 한국몬스터연구학회의 준말이다. 물론 제황이 그 말을 알 턱이 없다. 학자들 사이에서나 쓰는 말이니까.

“한연회? 그게 뭔데?”

“이! 이익! 무식한 새끼! 이거 안놔?”

“하...”

한국몬스터연구학회의 부회장이라고 말하면 물러날 줄 알았는데 상대는 콧방귀도 뀌지 않는다.

말이 통하지 않자 정 박사는 고개를 돌려 이루미를 찾았다.

이 모임의 주인공인 그녀라면 남자를 말릴 수 있으리라. 과연 그녀가 이쪽으로 서둘러 다가온다. 그러나 그는 곧이어 눈을 휘둥그레하게 떴다. 곁에 다가온 이루미는 오히려 남자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안절부절못했기 때문이다.

“제황님 죄송합니다.”

“뭡니까. 이 무례한 사람은”

앞으로 함께 일할 이들이기에 얼굴 한 번을 비춰야 한다는 이루미의 말에 오랜만에 정장을 입은 제황이었다. 그런데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쌍욕을 그것도 그가 가장 싫어하는 욕을 들었으니 기분이 이루 말할 데 없이 더럽다.

“그게···.”

이루미가 머뭇머뭇했다. 사실 그녀도 그의 이름을 잘 모른다. 그녀가 뽑기는 했지만, 무려 70여 명의 얼굴을 모두 기억할 수는 없는 법이다. 부회장이니 뭐니···. 고작 그런 듣보잡들까지 신경 쓰기에 그녀는 요즘 너무 바쁘다.

“이런 사람도 이루미님이 뽑으신 겁니까?”

제황은 이런 이를 뽑은 이루미를 흘겨봤고 그 눈빛에 이루미는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으로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제황을 보좌하는 부서장으로 각 팀의 팀원들이 처음 만나는 날인데 하필이면 첫날 이런 불상사가 벌어진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제황이다.

향후 무적성을 이끌어나갈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물론 제황은 그럴 생각이 없지만···.)

그녀의 상사인 것을 떠나서 그에게는 항상 완벽한 모습만 보여주고 싶던 이루미였다. 그런데 그녀가 뽑은 이가 제황을 향해 모욕적인 말을 지껄였다.

“그 한국몬스터연구학회라는 곳에 소속된 사람이 이곳에 더 있습니까?”

“예. 예. 몇 명 있는 걸로...”

한국에서 원활한 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가입해야 하는 곳이기에 반수가 조금 넘는 이들이 그곳에 소속되어 있었다.

제황이 단호하게 말했다.

“모두 잘라버리세요. 아무에게나 함부로 하는 이런 사람이 있는 곳이라면 굳이 안 봐도 뻔하군요.”

“즉각 조치하겠습니다.”

이루미가 대답했다.

고개를 끄덕인 제황이 정박사의 멱살을 놓으며 밀어버렸다. 힘없이 밀려 바닥에 쓰러졌지만 정박사는 지금 정신이 없었다. 둘의 대화를 모두 들은 그는 지금 뭔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남자는 이루미보다 훨씬 높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제황...헉!”

지금 그가 쌍욕을 했던 이의 이름이 9성헌터와 같다는 것을 깨달은 그다.

뭔가 말을 해야 하는데 입도 열리지 않는다. 멀어져가는 그의 귓가로 한 여자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어머, 이렇게 크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는데···. 정말 죄송해요. 호호. 저는 그냥 소소한 복수나 하려고 했는데 정박사님이 숟가락 놓게 생기셨네요.”

#2

“후우”

제황은 가부좌를 풀고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좀 더 있고 싶었지만, 문밖에서 느껴지는 누군가의 기감에 더 있을 수 없다. 느껴진 지 약 두 시간가량 되었는데 미동조차 없다.

개인수련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자 이루미가 복도 한쪽에 정자세로 서 있다.

“어쩐 일로...”

“보고드릴 게 있어서 왔습니다.”

“그냥 노크하고 들어오시죠.”

“수련 중이신 것 같아 기다렸습니다.”

당연하다는 듯한 그녀의 대답이다.

“다음에는 그냥 노크하고 들어오세요.”

“그렇지만 수련을 방해드릴 수는···.”

“저는 괜찮습니다.”

“예. 앞으로는 그렇게 하겠습니다.”

“후우...”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제황이 이루미에게 말했다.

“제 방으로 가죠.”

“알겠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수련실에 서서 보고를 받을 수는 없기에 제황은 그녀와 함께 그의 방으로 향했다. 숙소의 거실에 있는 소파에 제황이 먼저 앉자 이루미가 그의 오른쪽에 조심스럽게 앉아 들고 있던 결재판을 제황의 앞에 놓았다.

서류의 첫 장은 전담부서 신설의 전반적인 진행 상황이 일목요연하게 적혀 있다.

결재서류를 읽던 제황이 물었다.

“부서건물을 새로 올리는 건가요?”

“네. 현재 건설용지를 닦는 중입니다. 공사가 시작되면 약 이 주일 정도 걸릴 예정입니다.”

“그렇군요.”

“혹 추가하시거나 크기를 늘리고 싶으신 시설이 있으시면 추가하겠습니다.”

“아뇨. 이대로 그냥 진행하세요.”

“알겠습니다.”

첫 장의 내용은 별 것 없었다. 공사의 진행 상황과 어제 불미스러운 일에 연루된 이들을 모두 계약 해지했다는 내용이 전부다.  고개를 끄덕이며 첫 장을 넘긴 제황의 눈살이 찌푸려진다. 앞 장과는 다르게 글씨가 엄청나게 많다.

“이게 뭐죠?”

제황은 눈을 현란하게 하는 글씨들로 빽빽하게 차 있는 서류에서 눈을 떼고는 이루미에게 물었다.

“금일 오전 7시까지 접수된 각국의 몬스터 레이드 요청서입니다.”

“레이드 요청서라···.”

찌푸려진 인상을 풀지 않은 제황이 다시금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많기도 많다. 뒷장을 들춰보니 역시나 같은 내용의 향연이다. 크게는 국가에서부터 작게는 갖가지 단체명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는데 대부분 8티어에서 9티어 몬스터 레이드 요청이다.

“전부 캔슬시킬까요?”

“아뇨, 헌터가 몬스터 레이드 요청을 안 받을 수는 없죠.”

제황은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레이드는 강제사항이 아니기에 내키는 것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적힌 것 중 몇몇 눈에 거슬리는 내용들이 보인다.

“앞으로 레이드 외에 행사 따위를 요청하는 건 받지 마세요.”

“예. 알겠습니다.”

유력정치인 따위와의 오찬이나 기자회견 등을 두고 하는 말이다.

레이드요청서들을 다 넘기니 마지막 한 장이 남았다.

마지막 장에는 제황과 관련된 국내외 동향이 간단하게 적혀 있었는데 그것 중 하나가 제황의 눈길을 끌었다.

‘일본정부에서 세계헌터사무국에 천황클랜 수뇌부 집단 실종사건의 참고인으로 천제황 소환요청’

제황이 고개를 갸웃하며 이루미에게 물었다.

“천황클랜에 무슨 일이라도 벌어졌습니까?”

미국에서 돌아오고는 워낙 매스컴이 시끄러워 뉴스쪽은 일절 눈길도 돌리지 않은 제황이었다.

“예. 어제 오전 일본 천황클랜의 수뇌부들이 단체로 실종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그래요?”

제황이 눈을 빛냈다. 이루미에게는 아직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천황 클랜은 백린의 흔적이 가장 짙은 곳이기에 예의주시해야 하는 곳이다.

“네. 문제는 과거 교토에서 벌어졌던 천황클랜 테러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되신 적이 있으신데 아무래도 그것과 관련해서 일본정부에서 제황님을 범인으로 의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도 않은 일에 의심을 받으니 억울할 만도 하건만 제황은 오히려 피식 웃었다.

“재미있는 추측이네요. 그런데 제 알리바이야 너무 확실하지 않나요?”

어제는 거의 무적성 내에만 있었기에 굳이 결백을 주장하려 노력할 필요도 없다.

“예. 맞습니다. 그래서 그 내용을 담아 답신을 했는데 아무래도 저쪽에서는 못 믿는 눈치입니다.”

“한통속이라 이거군요.흠.”

“네.”

굳이 믿어달라고 할 생각은 없다. 아니 오히려 조금 괘씸하기까지 하다. 과거에 동철과 같이 교토클랜을 엉망진창으로 만든 적은 있지만 그건 오히려 천황클랜이 대현클랜과 벌인 짓에 비교하면 약소하기 그지없는 짓이었다. 당시 마음 가는 대로 행했다면 아마 일본 내에 있는 천황 클랜의 지부를 전부 순회공연하면서 박살 내 버렸을 것이다. 그나마 제황이 저들에게 아량을 베푼 것인데 은혜도 모르고 대뜸 자신을 세계헌터사무국에 찌른 것이다.

“대한민국헌터사무국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권제님의 영향력 하에 있는 인사들은 항의서한을 보낼 것을 주장하고 있지만, 내부 의견 충돌로 아직 이견조율 중인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친 일본성향 인사들이 많은지라...”

“그런가요?”

고개를 끄덕인 제황이 앞전에 넘긴 레이드요청서를 다시 펴들었다.

꽤 많은 숫자의 일본 쪽 레이드 요청이 보인다. 산악지대가 많은 일본의 특성상 굵직한 몬스터가 전국에 고루 분포해 있었는데 특히 9티어 몬스터에 대한 레이드 요청도 두 건이나 있었다. 가뜩이나 일본은 방사능 때문에 헌터들이 레이드를 꺼리는 국가 중 하나다.

“여기 있는 일본쪽 요청은 전부 캔슬해 버리고 앞으로 일본 쪽에서 오는 것들은 모두 사무장님 선에서 잘라버리세요.”

“조치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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