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5
천황클랜 멸망의 날-1
#1
“앞으로 어쩔 생각이냐.”
“수련해야죠.”
9성헌터가 되었음에도 제황의 머릿속에는 아직도 온통 수련 생각뿐이다.
“9성 헌터면 좀 쉬는 건 어떠냐.연애도 하고”
“은신불가능 상태에서의 전투 능력을 키워야 합니다.”
제황이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물론 그와 지겨울 정도로 비슷한 부류인 권제는 오히려 부럽다는 듯 제황을 바라본다.
“제길, 곧 죽어도 무적성 경영해 보고 싶다는 말은 안 하는군. 남들은 차마 엄두도 못 내는 자리건만···.”
장난처럼 던지기는 하지만 제황에게 무적성을 경영해 보라고 한 건 빈말이 아니었다. 아니 예전부터 줄기차게 이야기하던 문제다. 얌전하게만 이야기했을까? 때로는 강요하기도 또 때로는 유혹하기도 하며 몇 년간 지겹도록 제황을 설득했다.
그러나 제황은 요지부동, 돌부처가 따로 없다.
‘권제의 후계자, 무적성의 지배자’
대한민국을 아우르며 전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무적성의 일인자 자리다. 어떤 이는 이 자리에 앉는 것을 평생에 소원으로 삼는 이들도 부지기수다. 그만큼 강력한 권력을 쥘 수 있는 자리이며 온갖 부귀영화가 약속된 자리다. 권제가 태산과 같이 버티고 있기에 차마 그 시도조차 하지 못할 뿐이지 만약 그 일인자의 자리가 공석이었다면 무적 성은 그 일인자의 자리를 쟁취하기 위해 하루도 바람 잘 날이 없었을 것이다.
물론 권제는 그것을 무척 권장한다.
‘언제든 도전해라. 이기면 이 모든 것이 네 것이다.’
권제의 이 말에 현혹(?)된 몇몇 주제 모르는 불나방들이 덤볐던 적도 있었다.
결과야 뭐 뻔하지 않은가. 딱 죽지 않는 선에서 권제의 합법적 샌드백이나 새로 만든 무공의 모르모트 신세가 되었을 뿐이다. 참고로 가장 처절하게 두들겨 맞은 건 다크나이크 클랜의 클랜마스터 흑검이었다.
권제와 나이 차이가 안 난다며 맞먹다가 하루 밤낮이 지나도록 피똥을 지리게 두들겨 맞아 그 후로는 무적성 쪽으로 고개도 안 돌린다. 그리고 무적성의 신경을 거스르지 않는 선에서 소심한 반항을 계속하는 다크나이트 클랜이었다.
아무튼, 그 이후 권제에게 도전하는 이는 없었다. 여든 살이 훌쩍 넘는 고령임에도 나이를 거꾸로 먹는지 갈수록 강해지는 권제였는데 사실 여기에는 제황의 공이 컸다.
심심하면 불러서 붙으니 제황과의 싸움 속에서 무련천가의 지고한 비전들을 어느 정도 체험하게 되었고 그 경험을 발판삼아 자신의 무공을 차근차근 발전시켜 나갔다.
무술에서는 천재적이라는 말이 부족할 정도로 뛰어난 권제였지만, 그가 보유한 무술은 일정한 벽을 넘지 못했었다. 아무리 천재라 해도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는 없었다. 그 자신이 가진 무술의 격이 너무나 낮은 것, 그러나 용혈무나 무련궁술과 같은 무련천가의 고절한 비전을 접하니 젊었을 적보다 오히려 더 성장이 빨라지고 있었다.
권제는 원한이든 은혜든 잊지 않는 사람이었다. 과거에는 제황의 할아버지에게 수차례 목숨을 구함을 받았고 이제 그 손자에게는 진정한 무술의 본질을 알게 되는 기회를 얻었다.
그렇기에 권제는 제황이 원하면 언제라도 무적성을 건내 줄 생각이었다.
물론 자신의 작디작은 욕심 한 가닥이기는 섞이기는 했지만...
“흠...”
뭔가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으로 입꼬리를 실룩거리던 권제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지금부터 말할 내용을 통해 제황을 무적성에 좀 더 긴밀해지도록 하고 싶었지만 제황에게 더 그런 시도를 하는 것이 이제 구차하다고 느낀 것이다.
“네게 선물이 있다.”
“예?”
뜬금없이 선물이라는 말에 제황의 고개가 갸웃한다.
제황의 어리둥절한 표정을 보며 권제는 조금은 득의만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마치 무적성의 일인자는 이 정도 힘이 있다는 것을 자랑하는 것처럼 말이다.
“아무래도 내가 그 백린이라는 놈의 흔적을 찾은 것 같다.”
“아!”
권제의 말에 제황이 눈을 크게 떴다.
엘어스에서 돌아온 제황은 권제에게 그의 가문인 무련천가와 천주백가의 이야기를 밝혔다. 두 가문에 얽힌 비사 모두를 밝히지는 못했지만, 그 외 이야기는 모두 알렸다.
과거 제황은 목적과 목표를 분명히 했다.
목적이 무엇인가. 선조 대대로 전해 내려온 가문의 숙명을 완수하고 굴레에서 벗어난 무련천가를 만드는 것이다.
그렇기에 목표는 천주 백가에 대한 추살령을 완수해야 한다는 것. 바로 무련천가의 가주인 자신의 손으로 말이다.
제황은 천주백가와의 악연을 홀로 해결하려 했다. 타인의 손을 빌리게 된다면 행여 그 목적이 흐려질까 염려한 마음이었다. 사실 초반에는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그가 얻은 것들은 강력했으니까.
그렇지만 상대해본 천주백가는 만만치 않았다. 단순한 무력한 비교 뿐만 아니라 상대가 가진 역량과 지내온 세월을 고려한 것이다. 그렇기에 목표를 조금 수정했다.
‘내 모든 전력을 다해 천주백가를 추적하여 천주백가를 지운다.’
여기서 전력이라는 말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한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권제에게도 그 사실을 이야기하고 무적성 차원에서의 추적도 시작했다.
“이 사진을 보렴. 네가 얼굴을 안다니 확인해 보거라.”
권제가 사진 한 장을 제황에게 내밀었다. 복원한 흔적이 있는 조금은 흐릿한 그 사진 속에는 엘어스에서 봤었던 백린이 조금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역시 궁기가 말한 대로
상대는 시간을 거스르는 자였다.
“예. 맞습니다.”
“후우, 다행이구나. 긴가민가 했었는데...네가 말했던 비슷한 능력들을 사용했던 이를 기록한 내용을 부산 헌터사 뭇국 기록보관실에서 찾았다. 그 친구 과거 한국에서 활약했던 이였더구나. 대융합이 있고 대략 5년 정도 지났을 때 일본에서 건너와 부산 쪽 클랜에서 활동했고···. 당시 활동했던 이름은 ‘백준성’ 본래는 일본인이 아닌 토종 한국인이다.”
“그렇군요.”
제황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융합이 있고 5년 때의 모습이라면 거의 견제와 같은 나이일 것이다.
“좀 재수 없는 케이스다. 하필 일본에 여행을 갔을 때 대융합을 만나 그곳에서 각성하고 5년 만에 돌아와 보니 서울에 사는 가족의 생사를 알 길이 없고 부산에서 서울로 가는 길은 괴물에게 막혔었으니까. 그 후로 부산 클랜에서 괴물과 싸우며 클랜의 요직까지 올라가 서울까지 가는 통로가 뚫리는 날 실종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권제가 서류철 하나를 꺼내 제왕에게 건넸다.
손으로 작성한 어떤 서류의 스캔본이었는데 약 세 장 정도 되는 내용으로 백준성에 대해 나와 있었다. 그것을 읽던 제황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주로 검을 사용했군요.”
“그래. 상당히 거대한 외날 도를 사용했다고 하더군.”
서류상에 나타난 백린은 주술 비슷한 것보다는 외날 도를 주로 사용하는 근접딜러 역할을 했다고 한다. 위기 시마다 서포터 계열의 스킬들도 간간이 사용하긴 했는데 대전 쪽에서 기습적으로 맞닥뜨린 7티어 몬스터 무리와 싸울 때 거대한 거인을 소환해 냈다고 적혀 있었다.
거인에 대한 사진은 없지만 그 묘사된 내용을 보면 두억시니가 확실했다.
“7티어 몬스터 20마리를 단숨에...”
“그래. 당시 목격자가 얼마 되지 않았고 워낙 그 전과가 비정상적이라 공식기록으로는 남지 않았지만 네 말이 사실이라면 정말 엄청난 업적이지.”
“그렇군요.”
적힌 내용은 짧았지만 지금까지 막연했던 백린에 대한 이미지가 조금은 선명해졌다. 비록 수십 년 전의 기록이지만 그가 검을 잘 쓴다는 것도 알지 않았는가.
“이건...”
특이한 기록도 몇 개 쓰여 있었다.
몬스터의 마나석 연구를 시도했다는 것인데 작게나마 성과도 있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몬스터의 마나석에 대한 연구가 부족해 단순한 전리품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리고...
“세 개의 차원이 하나가 되면 죽은 이를 되살릴 수 있다라고?”
제황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2
“배, 백린님! 어째서...”
“그냥 편히 가라.”
츠컥...
이마에 칼자국이 난 대머리 사내의 목을 시원하게 날린 백린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칼을 떨쳐 묻은 피를 털어냈다.
“크큭, 백린. 충성의 대가가 이것이오?”
양다리가 잘린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초로의 사내가 백린을 올려다보며 분노에 찬 목소리로 읊조린다. 그러자 조금 씁쓸한 표정의 백린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어쩔 수 없다. 나도 급해졌거든.”
촤아아악!
사내의 목을 날린 백린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못 할 짓이네.”
거대한 지하 회의실 안···. 피냄새가 자욱하다. 널린 시체는 무려 스무구였는데 그들 중에는 눈에 번쩍 뜨이는 미녀도 있었다. 물론 지금은 한낱 고깃덩어리일 뿐이지만...
-어차피 저놈들도 그다지 억울하지는 않을 거다. 언젠가 이렇게 끝날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을 테니.
-그거야 그렇죠.
“나모사만다발타남라니달사바하”
몇 개의 수인을 짚은 뒤 부적을 던지자 바닥에 널려있던 시체들이 녹아 물처럼 변해버렸다.
“천황클랜은 대충 정리했고... 보자. 나에 대해 알고 있는 녀석들이 또 어디가 남았나.”
망각이 없는 기억력을 가지고 있지만 지금 이것은 다른 누군가에게 묻고 있다. 그 말을 하며 백린이 슬쩍 손을 떨치자 지하 회의실 테이블 밑이 일렁거리더니 한 사내가 나타났다. 은신스킬을 이용해 숨어있었지만, 백린의 눈을 피하지는 못했다.
“사, 살려...”
고개를 박고 바들바들 떨고 있는 남자의 앞으로 다가간 백린이 말했다.
“그러게 왜 날 팔아먹을 생각을 했지?”
“저, 저는 반대했습니다. 저, 저놈들이 천황클랜을 존속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그것을 협상카드로 삼으려는 낌새가 보여서 저, 저는 설득하기 위해 이렇게 모았던 겁니다.”
남자는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변명을 했다.
“그래? 켄타` 녀석은 네 소행이라고 하던데?”
“아닙니다!”
그의 바짓가랑이라도 잡고 싶지만 그러면 단숨에 목이 달아날 것 같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이곳에서 그가 살 확률은 매우 희박했다. 그가 알고 있는 백린이라면 이미 대충 눈치챘을 테니까.
물론 그도 잘 알고 있었다. 이번 비밀회동을 주재한 것은 바로 자신이었으니까.
그럼에도 이렇게 시간을 끌고 있는 건 믿고 있는 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나에 대해 또 알고 있는 놈들이 있을까?”
백린은 조금 전 물음을 다시 꺼냈다. 그러자 그는 고개를 맹렬히 저으며 답했다.
“절대 그럴 일은 없습니다. 외부에 발설하는 순간 백린님의 술법으로 곧바로 머리가 터지는 걸 아는데 저희가 어찌 감히···.”
“그래. 내가 너희 머리에 금제를 좀 걸어놓기는 했지. 그런데 말이야.”
퍼억!
“큭!”
백린의 발끝이 남자의 명치를 갈겼다.
“너 같은 쥐새끼가 있어서 내가 안심을 못하는 거야. 이래서 일본애들은 못 믿는다니까. 시간 끄는 것 좀 적당히 해라. 아! 먼저 저승 간 네 부하놈들한테 안부 전해주고...”
“헉, 그...그걸 어떻게!”
이 모임의 제1원칙은 절대적인 비밀엄수였다. 그렇기에 이곳에 모일 때는 부하를 일절 대동하지 않는 게 원식, 그렇지만 그는 오늘 비밀리에 천황클랜의 자랑인 최정예암살부대 전원을 이 주위에 배치했다.
“내가 가르쳐 준 어설픈 술법 냄새를 풀풀 풍기는데 그걸 못 알아채면 그게 이상하지.”
“108명의 5성 헌터를...”
“숫자만 많은 어중이떠중이들을 믿은 건가? 뭐 아무튼 고맙다. 에너지야 많으면 많을 수록 좋으니까...”
“예?”
촤아아악!
백린은 대답하기도 귀찮다는 듯 목을 쳐버렸고 남자의 목이 빙글빙글 공중을 날았다.
사내의 목을 친 창궁용검을 한차례 쓸어본 백린이 검을 검집에 집어넣은 후 손을 모았다.
“그래도 행여 아는 놈이 더 있을지 모르니...”
위이이이잉...
그를 중심으로 거대한 마법진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바닥에 고여있던 액체들이 마치 마법진에 흡수되는 듯 사라지고 마법진은 조금씩 찬란한 빛을 내뿜으며 회전하기 시작했다.
“뭐, 대략 사흘 정도 후면 발동인가?"
인위적으로 만드는 게이트는 아무리 그라도 시간이 필요했다. 그만큼 엄청난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고차원의 술법. 특히나 이번에는 상당히 거대한 게이트를 만들 생각이다. 시간계산을 마친 백린이 술법을 끝맺었고 빙글빙글 돌던 마법진의 바닥에 녹아들듯 사라졌다.
그곳으로 뚫린 다크어스의 게이트 하나면 도쿄 정도는 싹 쓸리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