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2
9티어몬스터? 어쩌라고 -3
#1
퉁...씨이이잉!
시위를 탈출한 화살이 까마득한 하늘 위로 날아올라 점이 되었다.
-무슨 짓이야. 정신 차려.
처음으로 화살이 빗나갔다. 그러자 눈치빠른 궁기가 딴생각에 빠져있는 제황의 정신을 일깨웠다.
-아, 그냥 스킬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 중이야.
-스킬이 왜?
무려 9티어몬스터와 대결하는 와중에 딴생각이라니 한바탕 잔소리를 퍼부을 것 같지만 의외로 궁기는 차분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말로 설명하기는 좀 어려워. 대략 이런 거야.
꽈드드득...
비천궁에 화살 한 대가 걸렸다. 조금 전까지는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쉴 틈 없이 갈겼지만, 이번에는 조금 간극이 있었다. 한차례 심호흡을 한 제황이 시위를 놓자...
콰아앙!
맹렬한 폭풍우와 함께 붉은 강기 한 가닥이 하늘 위로 쏜살같이 사라졌다.
-스킬을 안썼네.
-응.
궁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제황이 궁기안을 집중했다. 까마득한 상공에 있는 궁기의 눈을 통해 지상에서 열심히 도망치고 있는 베히모스가 보인다. 초장거리 저격에 필수인 탄착점을 보이게 만들어주는 ‘비상하는화살’ 도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결과는 명중이다. 꽤 아픈지 두들겨 맞은 머리를 거칠게 털고 있는 베히모스가 보인다.
-훈련하다가 생각해보니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더군.
-어떤?
-세이브가 사람들에게 부여하는 스킬에 붙은 숙련도라는 것 말이야. 너도 알 거야. 내가 가진 주력스킬들 그러니까 무련천가의 비전들에는 이제 숙련도라는 게 안 붙는다는 거.
-그렇지. 그 미친놈이 지워버렸지.
궁기가 미친놈이라 정의한 이는 바로 제황에게 온전한 무련궁술을 전수해 준 전대 가주 천강이다.
제황의 말대로 백두산에서 천강에게 제대로 된 계승을 받은 후로 무련천가의 비전들에서 숙련도라는 게 사라졌다.
“비의(秘意)에 숙련도라니 가당키나 한가.”
세이브라는 지구통합방어시스템이 우리 차원의 지구를 지키기 위해 각성자를 만들어 스킬을 부여한다는 말에 신기해하던 전대가주 천강은 숙련도라는 시스템을 설명하자 광소를 떠뜨렸다.
“그 세이브라는 놈이 많이 급했나보군.”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그 말 그대로다. 얼마나 급했으면 쓰레기들만 잔뜩 찍어 내서 전장에 세웠을까 말이다.”
천강은 현시대 헌터들을 쓰레기로 깎아내렸다.
“뭐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지. 진정한 무인을 길러내기보다는 쓰기 좋은 적당한 도구들을 만드는 합리적인 판단이기도 하니까. 그렇지만 너만은 알고 있어야 할 것이다. 그 숙련도라는 것으로 인해 굳이 없어도 될 벽이 헌터들의 앞에 만들어졌다는 것을 말이다.”
“...”
“깨달아라. 네가 평생을 두고 참오해야 할 화두이다.”
그 후로 몇 번 더 물었지만, 천강은 그에 대해 더 말해주지 않았다. 단지 ‘깨닫지 못하면 도달할 수 없는 길이다.’라는 한마디로 일축해 버렸을 뿐이다.
그리고 지금 제황은 천강의 말이 조금씩 이해되고 있었다.
-세이브는 인간에게 스킬을 부여하는 게 아니라 스킬의 씨앗을 뿌리는 거야. 그 씨앗을 키우는 건 개인의 몫···. 천강님이 말씀하신 건...
퍼어엉!
“시스템이 부여한 숙련도에 안주해 버려 아무 생각 없이 스킬을 사용하다가는 ... 딱 그 정도에서 멈춘다는 거야. 스킬의 급도... 숙련도도 모두 떨쳐내야 궁극에 오를 수 있다는 게 아니었을까?”
제황은 왜 천강이 자신의 상태창에서 무련천가의 비전들의 숙련도를 없애버렸는지 이해했다. 한마디로 착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끊임없이 비전에 대해 고민하고 탐구하고 자신의 것으로 갈고 닦아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라는 것이다.
세이브가 내려준 스킬이 아니라 자신의 것으로 만들라는 것이다.
그리고 제황은 지금 그 첫말을 조심스럽게 떼고 있다.
“퍼어어어어엉!”
-내가 이해한 게 맞아?
제황이 궁기에게 넌지시 묻는다.
-응? 나한테 물어봐? 설마 네 생각에 자신이 없는 거야? 호호
묘한 웃음으로 대답을 회피하는 궁기다.
-아니, 단지···. 넌 이미 알고 있었을 테니까. 아니야?
-난 몰라. 스킬? 능력? 기예? 비전? 난 그런 걸 생각하면서 써본 적 없는걸?
-그래. 그 대답이면 됐어.
궁기의 대답에 제황은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궁기는 그가 첫발을 내딛고 있는 경지의 다음을 자연스럽게 가르쳐주고 있었다.
-대체 그 경지에는 언제 도달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현기(賢氣) 한 자락 없는 말이지만 제황은 그녀의 그 말속에 숨겨진 뜻을 어렵지 않게 유추해냈다. 굳이 힘의 발현을 의식하지 않는 경지... 어쩌면 평생을 두고 참오해야 할지도 모른다.
-슬슬 현실로 돌아와. 다 왔어.
-그래.
궁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제황은 발끝으로 느껴지는 대지의 진동을 가늠하며 활을 내렸다. 놈이 오고 있다. 근 한 시간가량 신나게 두들겨 맞은 분노에 의해 눈이 돌아간 베히모스가 말이다.
“와라.”
제황의 읊조림이 끝남과 동시에 거대한 바위 하나가 폭발하듯 공중으로 흩날려버렸다. 자욱한 먼지 속에 흉광(凶光)을 줄기줄기 흘리고 있는 두 개의 붉은 눈동자가 떠올랐다. 그 것은 약 400여 미터가량 떨어진 곳에 우뚝 서 있는 제황을 뚫어지게 노려보고 있다.
“꾸어어어어어억!”
“그놈 참 시끄럽군.”
분노에 찬 베히모스의 피어가 온 대지를 울렸지만, 그 분노가 가리키는 당사자인 제황은 귀를 한 번 후비는 것으로 가볍게 무시해 버렸다. 그러나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는 다르게 속으로는 한껏 긴장의 끈을 당기는 중이다. 무려 ‘신벌의화살’을 제외한 모든 수를 썼음에도 한 시간가량을 버틴 것이다. 가히 최강의 몬스터라고 할 수 있다.
지금껏 쏟아부은 것들의 전체 공격력을 합치면 7티어나 8티어 몬스터 수 마리는 레이드 할 수 있을 만한 힘이었다. 그런 공격을 쏟아부었지만 베히모스는 아직도 생생히 살아있다.
“그래, 이 정도는 돼야 목숨을 걸만 하겠지.”
그럼에도 제황이 베히모스를 자신의 앞으로 데려온 이유는 간단했다.
한계 속에 자신을 몰아붙여 그 한계를 뛰어넘는다. 목숨을 걸고 부딪히고 도전하는 전사가 되어야 할 때다.
아마 지금 그를 보고 있을 누군가가 제황의 생각을 안다면 기겁을 하겠지만 이것이 제황의 선택이었다.
그러기 위해 ‘압도자 세트’ 도 챙겨 입었다.
“붙어보자.”
발끝에서부터 시작된 긴장이 허벅지를 타고 올라 머리끝을 짜릿하게 만든다.
몸을 최대한 낮춘 제황이 베히모스를 향해 손가락을 까딱이며 도발했다.
“와라. 싸우자.”
“꾸어어어어억!~”
제황의 그 말에 답하듯 크게 포효한 베히모스가 제황을 향해 미친 듯이 돌진하기 시작했다.
#2
나란에 누워 전면을 바라보고 있는 세 쌍의 눈동자가 있다. 그들 중 하나가 몸을 벌떡 일으키며 외친다.
“저...저 미친!”
“가만히 있어!”
저도 모르게 뛰쳐나가려는 엘머를 엠페러가 붙잡았다.
“지금 저놈이 자살하려고 하잖습니까!”
“일단 지켜봐! 생각이 있겠지.”
엠페러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물론 그도 상식적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의 초인적인 시선 속에 상대는 아무리 봐도 탱커로 보이지 않았다. 그 자신이 입고 있는 슈페리얼 세트 아티펙트는 탱커 전용의 중갑이었다. 그뿐일까? 안에 껴입는 타이츠 또한 최신 기술이 집약된 것이고 아티펙트 외부에도 복합 장갑을 둘렀다.
이 정도는 둘러야 9티어 몬스터와 비벼볼 수 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상대의 장갑은 평범했다. 휘날리는 망토 속에 언 듯 보이는 갑옷은 금속으로는 보이기는 하지만 너무나 슬립하다.
그러나 나서지 않는 것은 저 싸움은 그가 자초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나서지 않았다. 엠페러는 이미 그를 자신과 동등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기에 존중해야 한다.
‘아마 초근접 회피를 통한 근거리 공격이겠지.’
엠페러가 예상한 그의 전투플랜이다.
‘회피탱커’
탱커 중에 신체의 속도가 빠른 이들이 택하는 탱킹 방법이다. 자신처럼 몬스터의 공격을 정면에서 받아내거나 흘리는 것이 아닌 피하면서 탱킹을 하며 어그로를 잡는다. 주 공격 방법은 카운터어택이었는데 몬스터가 큰 공격을 했을 때 나타나는 허점을 공략하는 것으로 꽤나 난이도 있는 탱킹 방법이었다.
그렇지만 회피탱커를 지향하는 헌터는 별로 없다.
그 이유는 일단 위험하다는 것. 속도를 얻기 위해서는 중장갑을 포기해야 한다.
중장갑을 포기한다는 건 몬스터의 공격 한방에도 그로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이고 그렇기에 공격대의 안정성이 떨어진다. 두 번째 이유는 다년간의 경험을 통해 몬스터의 패턴을 모조리 읽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외우는 것이 아니다. 읽어야 한다.
간혹 헌터들 중에 자신은 몬스터의 패턴을 모두 외웠다고 자신하는 병신들이 있다.
티브이에 나와서 화면을 띄워놓고 자랑스럽게 몬스터의 패턴을 설명하는 입만 산 멍청이들이다.
그는 절대 그런 헛소리를 하는 헌터를 자신의 팀에 두지 않는다. 아니 상종도 하지 않는다. 레이드는 게임이 아니다. 몬스터는 데이터 덩어리도 아니다. 몬스터도 개성이 있고 같은 개체라도 강한 정도는 천차만별이다. 어떤 놈은 비만이라 속도가 느릴 수도 있고 어떤 놈은 태어날 때 부모빨 잘 받아서 마나가 더 많을 수도 있다.
어떤 놈은 물어뜯는 걸 더 좋아할 수도 있고 또 어떤 놈은 겁쟁이라서 조금 두들기면 바로 전장을 이탈하기도 한다. 그런 몬스터에게 무슨 패턴이 있겠는가.
물론 태생 상 비슷한 패턴을 보이기는 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회피탱킹을 할 만큼 경험이 쌓인 헌터라면 회피탱커가 얼마나 힘든지 잘 알고 그렇기에 대부분의 회피탱커들은 보조탱커 혹은 근접딜러의 길을 걷는다.
그렇게 생각에 잠겨 있던 엠피러의 귀로 요란한 파공음이 들려온다.
콰아아아앙!!!
천지를 진동하는 폭음이 외떨어져 있는 셋이 있는 곳까지 울렸다.
그리고, 셋은 동시에 탄성을 내질렀다.
“저...저게 뭐야!”
“저 무슨!”
엠페러는 지금 그가 보고 있는 게 진짜인가 하는 착각마저 들었다. 일단 회피탱킹은 맞다. 그렇지만... 회피탱킹? 저게 회피탱킹이라고 할 수 있을까?
“저런 스킬도 있었어?”
“주군이 모르시는 걸 제가 어떻게 압니까!”
“제길! 보이지도 않아! 무슨 순간이동이야?”
셋은 눈을 부릅뜬 채 지금 베히모스와 일대일을 벌이고 있는 이를 바라봤다. 아니 바라본다기보다는 그의 잔상을 쫓는 것는것만으로도 벅찰 지경이다.
슈슉! 파팟! 슛!
빠르다는 것은 안다. 지금 그들의 눈에 보이는 그는 엄청난 속도로 베히모스를 농락하는 중이니까. 잔상이 보일 정도로 빠른 속도...그렇지만 중간중간 아예 잔상조차 사라져 버린다.
그때마다 넷은 사라진 상대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 왜 넷인가 하면 싸우고 있는 베히모스도 상대를 찾지 못해 헤매고 있으니까.
“빌어먹을!”
엠페러는 자신의 눈을 저주했다. 스페셜등급의 탐지스킬이 보조하는 극대화된 시력으로 지금껏 단 한 번도 적을 시야에서 놓치지 않았다. 그런데 전투의 당사자도 아닌 관전자의 처지에서 보는 것임에도 쫓을 수가 없다. 그것이 말해주는 것은···.
“나보다 강하다.”
그는 이 순간 그것을 인정했다.
공격력 하나만은 자신을 뛰어넘는다 생각했었다. 그렇지만 만약에 경우 그와 모든 것을 걸고 싸운다면 최소한 양패구상까지는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지금 저 모습은 어떤가.
“그는...9성 헌터구나.”
엠페러의 말에 모두가 침묵했다. 그들도 마음속으로는 인정해 버렸다.
진짜 9성 헌터가 나타났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