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사거리 100만-174화 (174/301)

# 174

무적성의왕자-1

#1

끼이익

제황을 태운 최고급 세단이 도심 내에 있는 하얀색 8층짜리 건물 앞에 멈췄다. 건물 정문 간판에는 조금은 낡은 붉은색 십자가가 그곳이 적십자병원임을 가르쳐준다.

대융합 당시 준전시를 대비한 통합적인 의료서비스가 필요함에 따라 미국 곳곳에 난립하던 민간의료기관들은 거의 반강제적으로 하나로 통합되었다.

부작용도 컸지만, 덕분에 미국의 미친 민간의료체계가 어느 정도 제자리를 찾게 해준 계기가 바로 이 적십자병원이다.

지금에야 정부의 지원이 부실하여 다시금 민간의료기관들이 생겨나고 병원비가 과거처럼 미친 듯이 치솟고는 있지만 아직은 많은 이들이 이 병원을 이용하는 추세다. 각설하고 병원 앞에 멈춰선 세단에서 제황이 내려서자 데릭을 포함한 이십여 명의 밀령들이 제황의 뒤로 도열 했다.

“좀 낯간지럽네요.”

무슨 영화에 나오는 조폭 두목이라도 된 느낌이다.

“어색하시겠지만 오늘은 적응하셔야 합니다.”

“어쩔 수 없죠.”

마치 병원을 점령하러 온 것 같은 포스를 뿜어내고 있기에 사람들이 앞다투어 길을 만들어준다. 실상은 ‘문병’ 일뿐이지만 말이다. 물론 단순한 문병은 아니다. 오늘 하려는 일들의 시작은 이곳이 될 테니까.

“뭐, 권제할아버지가 움직일 때랑 분위기가 비슷하니까 상관없겠죠.”

“지...지당하십니다.”

무적성의 지배자 권제를 그냥 ‘할아버지’ 라고 표현하는 제황의 말에 데릭의 고개가 땅에 닿을 듯 숙여 졌다. 제황은 모르겠지만 이 순간 데릭의 머릿속에는 권제와 제황이 동일선상으로 올라가 있다.

“가죠.”

“예!”

제황은 속 편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오늘 제황이 연기하려 하는 건 ‘권제’ 였다. 권제의 기본 성향은 ‘패왕’ 그러니 그에 걸 맞는 행동을 보여야 한다.

“모시겠습니다.”

끄덕

데릭의 말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정문이 활짝 열린다.

척척척...

제황이 걸어갈 때마다 사람들이 모세가 홍해를 가르듯 좌우로 벌어졌다. 제황의 뒤를 이열종대로 따라붙는 밀령들의 포스에 아무도 입을 열지 못한다.

“병원장이 대기 중이라는데 어떻게 할까요.”

“대신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아, 그리고 자질구레한 것들도 좀 부탁드리죠.”

“알겠습니다.”

밀령 하나를 손짓으로 불러 지시를 내려 제황을 안내하게 하고 데릭은 십여 명의 밀령들을 병풍으로 이끌고 사라졌다. 잠시 후 3층의 한 병실 앞에 도착한 제황이 가볍게 노크를 한 후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병실 내부에는 세 사람이 있었다. 간병인 의자에 앉아 있는 엘리와 그녀의 뒤에 걱정스러운 얼굴로 침상을 바라보고 있는 티모시 그리고 침대에 누워 있는 썬이 있다.

“누구...”

티모시는 문을 열고 들어온 낯선 이에게 경계심을 보였다. 하긴 얼굴을 후드로 가린 상태이니 그럴 만도 하다.

“접니다. 티모시”

“음?”

낯선 동양인 청년이 자신을 아는 체하자 그가 고개를 갸웃했다.

제황이 손으로 얼굴을 슥 문질렀다. 타이밍 좋게 궁기가 제황의 얼굴에 가벼운 역용술법을 펼치고 그가 익히 아는 그 얼굴이 나타났다.

“아, 자네는...”

티모시의 얼굴에 경악이 어렸다. 당시 폭발을 생각하면 시체도 남기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죽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멀쩡이 나타난 것이다.

“자네 무사했군!”

“예. 다행히 피했습니다.”

다가선 티모시가 제황의 어깨와 손을 잡았다.

그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미안하네. 어제 일은 내 못난 자식놈이···.”

티모시는 제황에게 어제의 일을 설명하려 했다. 제황이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걸 모르는 것이다.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드님을 그렇게 원망하지는 않습니다.”

그러자 티모시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뭔가가 생각났는지 심각한 표정으로 말한다.

“그런데 어떻게 여기 온 건가. 자네가 여기 있으면 위험하네.”

티모시가 주위의 눈치를 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어떻게 보면 그와 엮임으로써 이런 사달이 벌어졌는데도 오히려 제황을 걱정하고 있다. 마음이 올곧은 사람이다.

“애초에 저는 빌런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어제는 사정이 있어서 그랬던 겁니다”

제황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랬군. 역시...후우”

티모시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옆에 있던 엘리가 일어나 제황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죄송해요. 제가 남편을 말리지 못해서···.”

“아닙니다. 결과가 안 좋게 흐르기는 했지만, 당시 그분에게는 그게 제일 나은 선택이었을 겁니다.”

제황이 이해한다는 듯 말하자 그녀는 한숨과 함께 고개를 돌려 썬을 바라봤다.

“썬은 좀 괜찮습니까?”

“아무래도 당시에 버스가 터지는 걸 보고 정신적으로 충격을 받은 모양이에요. 의사가 시간이 지나면 괜찮을 거라고 했지만...”

말을 잇지 못한다. 그녀는 썬의 볼에 입을 맞추며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제황의 눈에는 감출 수 없는 부러움이 감돌았다. 능력이 뛰어나면 뭘 하겠는가. 돈이 많은 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제황은 고아였다. 성인이 훌쩍 넘었지만 제대로 된 준비도 없이 두 부모를 잃은 제황에게 부모님의 자리는 상처duTek.

상처는 아무는 게 아니다. 단지 세월이 지나고 먼지가 앉아 그것이 잠시 가려지는 것일 뿐이다. 그렇기에 이 가족들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슬픔에 잠기는 이 작은 아이를 보고 싶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제황이 잠든 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닐세. 바보 같은 내 아들놈 때문이지.”

또다시 그때가 떠오르는지 얼굴이 붉게 변하는 티모시다. 그때 정중한 노크 소리와 함께 데릭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제황님, 모두 처리했습니다.”

“그래요?”

“예. 일단 오늘까지의 병원비는 모두 완납했고 이곳보다 좀 더 좋은 의료서비스가 있는 큰 병원으로 옮기기로 했습니다. 또한, 차후에 썬 양의 치료에 필요한 모든 비용 또한 저희 쪽에서 부담하기로 이미 이야기 끝냈습니다.”

“잘하셨습니다.”

제황과 데릭과의 대화를 옆에서 듣고 있던 티모시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제황에게 물었다.

“지금 이게 무슨···.”

“들으신 대로입니다.”

“그걸 왜 자네가...”

“그저 제 마음의 짐을 덜고 싶은 것뿐입니다.”

“아니, 그래도...”

티모시는 거절하려 했다. 생명의 은인의 뒤통수를 친 주제에 더 도움을 받는다는 건 이치에 맞지 않다. 그러나 제황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지금 경제적으로 조금 힘드신 줄로 압니다. 그러니 거절하지 마십시오. 썬을 위해서입니다.”

제황은 이미 이곳에 오기 전 티모시 가족의 재무사정을 모두 파악해서 온 상태였다. 가장 큰 문제는 역시 그들가족들의 집이자 전 재산이나 마찬가지인 무장버스가 파괴된 것이었다. 국가에서 보상을 약속한 상태지만 그것이 곧장 실행되기를 바라는 건 무리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최소 한 달 길면 서너 달은 필요할 텐데 그동안 그들 가족의 수입은 제로였다. 게다가 티모시는 현금을 무장버스에 보관했었는데 그 또한 불타버렸다.

보상을 바라기는 무리다.

더군다나 티모시의 두 자식인 클락과 제니를 빼내기 위해서는 변호사를 선임해야 하는데 지금 그들 가족에게는 자금이 턱없이 부족한 상태였다.

“그럼 썬은 엄마와 같이 병원을 옮기시고 티모시는 저와 함께 어딜 좀 가시죠.”

“음? 어딜 말인가?”

“일단 빼앗기신 걸 되찾으러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황이 빙그레 웃으며 말하자 티모시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는 엘리에게 말했다.

“어멈아. 내 잠시 다녀오마.”

그러자 엘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제황이 범상치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눈치챈 것 같다. 제황을 따라 병실을 나온 티모시는 병원 복도에 늘어서 있는 이십여 명의 밀령들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제황은 병실이 좁아 그들을 복도에 대기시켜 놨었다. 척 봐도 범상치 않은 이들 이십여 명이 마치 제황을 호위하듯 서니 그 위화감과 포스가 상상 이상이다.

“자, 자네. 대체 정체가 뭔가?”

“헌터입니다.”

#2

버즈니아 북부에 위치한 주방위군 기지는 과거 체서피그만에 위치한 인구 170만을 자랑하던 노퍽이라는 거대항구도시에서 발생했던 초대형 게이트 사태 이후로 설치된 기지였다.

첫 게이트 발생 당시 그 위치가 도심 한복판이라는 것으로 인해 대처가 늦어 무려 50만 명의 무고한 시민들이 희생된 후에야 설치된 주방위군 기지는 이제 헌터들과 관련된 수많은 시설을 갖추는 것과 동시에 몬스터 사체의 1차 가공공장과 2차 가공업체 등이 들어섬에 따라 하나의 거대한 상권의 중심을 이루는 그런 기지였다.

그리고 그 기지 한편에 있는 주방위군 소속 헌터 사무실에는 지금 꽤 많은 헌터들이 모여 시시덕거리고 있었다.

“대장, 잘 쓰겠습니다.”

한 헌터가 스마트폰에 찍힌 0의 숫자를 세며 옆에 거드름을 떨며 앉아 있는 헌터를 향해 경례를 붙였다.

“그래. 다른 놈들한테도 똑같이 분배했으니까 그렇게 알아.”

“아무렴요. 그런데 이거 정말 우리가 꿀꺽해도 되는 겁니까?”

“흥, 뭐 어쩌겠어. 가뜩이나 빌런들 때문에 위에서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을 때 걸려든 그들이 재수 없었던 거지. 재판이다 뭐다 6개월은 걸릴 텐데···. 반년 지나서 증거물 찾겠다고 와봤자 우리는 여기 없지. 안 그래?”

“맞습니다. 그때 즈음이면 저희는 게이트 내부로 순환 근무에 들어가겠죠.”

“그래. 뭐 분위기 좀 안 좋으면 좀 더 연장신청 해버리면 되는 거고 놈들이 고용한 변호사가 뛰어나다면 뭐 대충 절반 정도만 위로금으로 던져주면 되는 거야. 이 짓 한두 번 해보나.”

“역시 대장밖에 없습니다.”

“나가봐. 참 그리고 애들 입단속 잘하게 해. 특히 햄프턴 그 자식.”

“알겠습니다. 제가 입 꽉 틀어막겠습니다.”

부하가 문을 열고 나가자 그는 슬그머니 자신의 스마트폰을 꺼내 그의 비밀계좌를 확인했다.

[20,000.00$]

“후, 뭐 이런 소소한 용돈 벌이라도 없으면 무슨 재미로 살겠어.”

목숨을 걸고 몬스터를 레이드하는 평범한 헌터들에 비해 주방위군소속헌터라는 건 위험과는 거리가 먼 직종이었다. 가끔 웜홀 등에서 튀어나온 몬스터 웨이브 사태 때나 위험할 뿐 평소에는 거의 헌터 관련 사건에 차출되거나 하는 일밖에 없었다.

덕분에 20대 초에 시작해 이제 40대 후반으로 다가가는 그는 이제 고작 3성 헌터 라이센스만 가졌을 뿐이다. 그러나 그는 그것이 그다지 아쉽지 않았다. 주방위군소속 헌터라고 하면 어디서든 알아주기 때문이다.

과거 미국 사회의 군인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헌터들에도 영향을 미친 것이었는데 사실 그 이면을 살펴보면 주방위군 소속 헌터들은 몬스터를 레이드하는 헌터들에 비해 그다지 내세울 건 없었다. 단지 같은 헌터라는 이름으로 수혜를 받고 있는 입장이랄까.

“나나에게 멋들어진 저녁밥을 사준 후...”

최근 한창 공들이고 있는 미모의 바텐더의 늘씬한 몸매를 떠올리며 그는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이만불이면 오늘밤 그녀의 살맛을 보는데는 부족함이 없으리라. 아랫도리가 뻐근해짐을 느끼며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때였다.

벌컥!

“대장!”

나갔던 부하가 헐레벌떡 들어오며 그를 부르자 한창 기분 좋은 상상에 빠져있던 그가 인상을 쓰며 고개를 돌렸다.

“왜! 무슨 일이야.”

“그, 그게...”

“천천히 말해!”

부하의 안색이 심상치 않은 것을 느낀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그 어제 연행한 둘 있잖습니까.”

“그런데?”

“풀려날 것 같습니다!”

“뭐야?!”

저도 모르게 고함을 지른 그는 이윽고 사무실에 자신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는 그의 부하를 끌고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그게 무슨 말이야!”

“그게 그 부모 되는 늙은이 있잖습니까.”

“그래. 알아.”

“그 사람이 뒷배가 보통이 아닌 것 같습니다. 웬 헌터들을 끌고 왔는데 분위기가 장난 아닙니다. 지금 특수사령부 사령관님이랑 헌병대장이 직접 내려왔습니다.”

부하의 말에 그는 머릿속이 멍해짐을 느꼈다. 특수사령부는 그가 소속된 주방위군헌터부대의 지휘부를 말하는 것이었다.

“가보자!”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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