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사거리 100만-172화 (172/301)

# 172

제황 모습을 드러내다-1

#1

“이곳에 오시면서 전화하신 지시내용은 모두 정리해 뒀습니다. 이건 해킹에 대비해 통신 관련 기능을 모두 제거한 제품입니다.”

운전석에 앉은 그가 제황에게 조금 커다란 태블릿을 건넸다.

“흠”

태블릿을 받아든 제황은 그 내용들을 하나하나 꼼꼼히 머릿속에 주입했다. 계획은 되도록 머릿속에 완전히 숙지하고 움직이는 게 중요했다. 그래야 어떤 돌발상황이 발생하더라도 빠르고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다. 특히나 지금은 모든 계획을 뒤집어엎은 상태다.

“정리가 잘 되었군요. 급하게 부탁드린 건데.”

”가, 감사합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대로 제황님의 본래 신분으로 입국절차를 밟았습니다.“

”좋습니다.“

제황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황송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럼 먼저 이곳들을 먼저 들르죠.”

“예? 벌써 말입니까? 알리바이를 위해서라면 내일 즈음부터 이동하시는 게 좋으실 텐데. 내일부터 꽤 시끄러워지실 겁니다.”

“알고 있습니다. 단지 습관일 뿐입니다. 지도나 사진 따위로 보기는 했지만 저는 모든 곳을 직접 눈으로 보고 확인해야 하거든요. 그리고 내일부터는 이렇게 자유스럽게 움직일 수도 없지 않겠습니까.”

제황의 말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보면 내일은 제황의 진짜 데뷔전과 같다.

국제사회에 그 모습을 온전히 드러내는 것이니만큼 수많은 이들이 감시하고 또 접근할 것이다.

“아, 역시···. 알겠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거리가 멀어서 시간이 걸리실 텐데.”

“상관없습니다.”

“알겠습니다. 모시겠습니다.”

제황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데릭이 세단의 속도를 높였다. 제황의 말대로 하려면 오늘 꽤 오랜 시간 운전을 해야 하리라. 밤새도록 버지니아 곳곳을 돌아다닌 제황과 데릭은 늦은 새벽이 되어서야 숙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데릭이 준비한 곳은 한적한 호수 근처에 있는 대저택이었다.

“본래 저희가 사용하는 안전가옥을 준비했지만 그럴 필요가 없어졌기에 급한 대로 별장을 마련했습니다. 마음에 드시는지···.”

“좋군요.”

별장이라고 말했지만 거의 작은 저택 수준이다. 깊은 숲 가운데 위치해 있기에 제황의 마음에도 쏙 들었다. 물론 전부 마음에 드는 건 아니다.

“그런데 경비인력이 너무 많은 것 아닙니까? 삼분에 일만 배치하셔도 될 것 같은데...‘

제황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하자 데릭의 눈이 커졌다.

평범한 이들의 눈으로 본다면 아마 사람은커녕 인적 하나 찾기 힘들 것이다. 그렇지만 이 부근은 밀령들이 물 샐 틈 없이 은신해 있는 상태다. 그가 보유한 이들뿐만 아니라 버지니아 전역에 깔린 거의 모든 밀령들이 이곳에 모인 상태다. 물경 그 숫자만 140명... 그중 엄선된 100명이 이 부근에 쫙 깔려 있다. 아무리 그의 능력이 뛰어나다고 하더라도 밀령은 무적성에 선택받은 소수중에서도 은신에 특화되어 엄선된 인재들이었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뉘앙스를 들어보면 짧은 시간 안에 그들 모두를 파악한 것 같았다.

설마 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그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자신에게 생각은 필요하지 않다.

”알겠습니다. 삼분에 일로 줄이겠습니다.“

”좋습니다. 그럼 이만 쉬죠. 내일부터 꽤 바빠질 테니까요.“

”알겠습니다.“

#2

그 날 새벽 평범한 이들은 모두 곤히 잠자리에 들어 있을 시간, 정보를 다루는 이들이라면 모두 신경이 곤두설 어떤 소식이 알려지자 그들은 누구보다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특히 미국과 한국 사이에 이해관계에 있는 정보계통기관들에서 유독 심했는데 그 이유는 현재 그들 사이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대한민국의 한 인물이 갑작스레 미국의 버지니아로 이동했기 때문이었다.

“확실한 거야?!”

“정확합니다.”

그는 베일에 싸인 인물이었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무적성에서 두문불출하는 건 둘째치고 그 움직임이 너무나 은밀하여 그가 하고자 하는 일은 완전히 끝낸 후에야 간신히 그 자취들을 쫓는 수준이었다. 은밀하기만 할까? 흔적들을 끌어모아 추측과 유추를 통해 알아낸 것들만 모두 모아도 무시무시하다 못해 거의 세계구급 결전병기라고 표현이 적당한 인물이었다.

“지금껏 잠자코 있다가 왜 갑자기!”

“모르지요. 이제 준비가 끝났으니 움직이는 것일 수도 있고 말입니다.”

“이봐. 그 준비가 끝났다는 말이 대체 무슨 소린지 알고 있기나 하는 소리인가? 그 정도 되는 인물이 준비가 끝났다라고 생각한다는 건 전세계 헌터사를 갈아엎어 버릴 수도 있다는 소리야.”

“후우, 수면 아래서 움직이던 이가 왜 갑자기...”

밝혀진 것은 그의 나이가 24살이라는 것과 그의 본명 그리고 헌터가 되기 전까지의 행적 뿐이다. 그 이후로는 전혀 밝혀진 것이 없을 정도로 극도의 정보제한 속 인물이었다.

누군가는 그를 무적성에서 만든 가공의 인물이라고 추측하기도 했다. 드러난 행적이 너무 무지막지했다.

그의 진짜 정체는 바로 권제라는 얼토당토않은 추측이었지만 꽤 많은 이들이 그 추측을 허황 대다고 무시하지 않았다.

외부로 조금씩 드러나는 그의 능력은 애써 자신들이 나서서 축소했다.

만약 그들이 유추하고 있는 그의 능력이 세상에 알려진다면 세상은 그를 중심으로 아니 대한민국을 중심으로 재구성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이가 갑작스레 미국의 버지니아에 입국한 것이다. 그것도 무려 위장된 신분 같은 것이 아닌 본래의 신분으로 모두의 감시를 속인 채 말이다.

”확인 결과 사실이었습니다.“

극도의 보안장비들로 둘러싸인 어느 방 안...

침중한 목소리가 울렸다.

”허, 우리 미합중국을 방어하는 보안시스템이 이리 허술했던가.“

보고를 모두 전해들은 남자가 맥이 풀린다는 듯 넋두리를 한다.

”공항으로 들어왔다면... 오라클 시스템은 어떻게 등록이 되었지? 분명 그가 정상적인 경로로 입국했다면 오라클시스템에 등록되는 걸 피할 수는 없었을 텐데?“

오라클시스템은 일반인보다는 헌터를 겨냥하여 만들어진 시스템이었다. 특히 은신과 같은 능력을 지닌 이들을 통제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그러나 무적성의 조치는 그리 허술하지 않았다. 비록 그 시작이 제황의 변덕이었을 뿐이지만 모든 일은 철두철미하게 처리되었다. 단순한 데이터 조작이 아닌 실제 제황으로 분한 사람이 입국했다. 이전에 제황이 썼던 가상의 인물인 한이라는 이 또한 실존하는 인물로 완벽히 대체했다.

”예전 저희 쪽에서 극비리에 입수한 그의 고유에너지 파장과 완전히 달랐습니다.  데이터상으로만 입국이 확인되었을 뿐 그 진위가 모두 불분명합니다.“

”뭐야?!“

우당탕!

놀란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고 의자가 나뒹굴었다.

”오라클시스템이 해킹이라도 당했다는 건가? 역추적 결과는!“

”놀랍게도...해킹의 흔적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오라클시스템은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중입니다.“

해킹은 없었다. 무적성은 무척이나 아날로그적인 방법을 사용했으니까.

물론 이들의 눈을 영구적으로 속일 수는 없기에 곧 밝혀지기야 하겠지만 지금은 완벽히 속아버렸다.

”이럴 수가...“

머릿속이 완전히 헝클어지는 느낌이다. 과학적이며 체계적인 시스템을 통해 차근차근 모아왔던 그에 대한 정보 전부가 폐기되어야 할 처지다.

더 놀랄 것도 없다. 그의 부하가 하는 말은 한마디로 눈뜨고 코를 베인 주제에 코가 없었다는 것도 지금까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공항을 통해 버젓이 들어왔는데 오라클시스템 또한 뚫려 버렸다.

더욱 치욕적인 것은 이것을 알려준 것이 바로 무적성이라는 것이다. 그나마 다행이라는 건 오라클시스템과 관련된 이야기는 자신들에게만 알려줬기에 전세계 정보기관의 놀림거리가 되는 수치는 피할 수 있었다. 무적성이 그들에게 아량을 베풀은 것이다. 미합중국의 보안을 책임지는 기관의 수장인 자신에게 말이다.

“이건 현재 미정부가 대한민국에 행하고 있는 일련의 사태에  대한 정면도발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연하겠지. 이로써 우리 미국이 자랑하는 오라클시스템이 무용지물이라는 걸 알려준 것과 같으니까.”

제황이 굳이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제황의 작은 움직임은 이미 미국에 크나큰 타격을 줘버렸다. 물론 사실을 알면 목덜미를 잡고 넘어갔을 것이다. 너무나 간단한 방법이었으니까. 그들이 실수한 것은 상대의 의도를 너무 확대해석한 것과 자신들의 보안시스템을 너무 과신했다는 것이었다.

“그가 왜 왔을까요.”

“모르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도 그는 그가 왜 하필 버지니아에 나타났는지에 대해 수많은 경우의 수를 떠올렸다. 자신들이 상정한 그의 능력을 가지고 버지니아 내에서  저지를 수 있는 일들이 터졌을 때 자신들이 막을 수 있는가? 아니.. 사전에 알 수나 있는가.

“아니, 그가 한 짓인지 알 수나 있는가.”

시름이 깊어졌다.

버지니아에는 너무나 많은 중요시설이 산재했다. 그곳들과 ’그를‘ 대입하면 할수록 그의 등골은 오싹해져만 갔다.

“일단 만나봐야겠어. 준비하도록”

“알겠습니다.”

“무슨 의도로 왔는지 먼저 알아내는 게 우선이야. 아직 그와 우리는 직접적인 접촉이 없었으니 이참에 그것을 알아내는 것도 좋겠지.”

“넵!”

“아, 그의 대한 보안레벨을 권제보다 높이도록 지시해. 그는 권제보다 위험하다.”

남자의 말에 그의 부하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권제는 현재 보안레벨 최상위권에 랭크된 중요인물이었다. 그보다 높은 인물? 유일한 8성 헌터 둘밖에 없다.

“어째서입니까.”

그의 부하는 어렵사리 의문점을 제기했다. 가급적 상관의 지시에 의문을 표하지 않고 이행하는 게 이 조직의 방침이다. 그러자 남자가 혀를 차며 답했다.

“권제는 그나마 안전하다. 그는 분류상 딜탱커지. 또한 무적성의 상징이자 대한민국의 상징이야. 그러니 쉽사리 움직일 수 없어. 그렇지만 그 ’제황‘ 이라는 친구는 원거리 딜러임과 동시에 한계를 알 수 없는 은신능력자다. 그리고 권제처럼 운신을 제약하는 것들도 없으며 가장 중요한 건 그의 나이는 고작 20대 초반이다. 무궁무진한 성장 가능성에 오라클시스템을 뚫고 제집 드나들 듯할 수 있는 인물이야. 이 정도면 상상할 수 있지 않나? 아직도 그가 8성 헌터들보다 덜 위험하다고 생각하나?”

“아닙니다.”

“그럼 나가봐.”

“예.”

그의 부하가 문을 열고 나가자 그는 오른쪽 두 번째 서랍을 열었다.

정말 되도록 열지 않는 서랍이지만 오늘은 어쩔 수 없다.

서랍 안에 든 고풍스러운 목갑을 꺼낸 그는 그것을 열어 안에서 길죽한 흑갈색의 뭔가를 꺼내 들었다. 그것을 들어 향기를 잠시 맡은 그의 손가락이 슬쩍 움직였다. 그러자 그 끄트머리가 마치 칼에 잘린 듯 매끈하게 잘려나간다.

“빌어먹을···. 능력을 이런 것에 쓰게 될 줄이야.”

딱...

손가락을 치자 그의 손가락으로부터 푸른 불꽃이 피어오르고 그 불꽃을 시가의 끝에 가져다댔다.

“후우...”

길게 빨아 쭉 들이킨 그는 눈을 감고 향기의 맛을 음미하려 했다. 그러나... 쿠바산 시가 특유의 그 맛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이, 내가 이 정도로 긴장한 건가.”

그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지 이미 예견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독백하듯 말한 그는 천천히 그가 알고 있는 것들을 말하며 사실들을 하나하나 정리해 나갔다. 그의 특이한 정보정리 방법이었는데 그는 몇 개의 진짜 기밀들은 서류나 데이터가 아닌 순수한 그의 머릿속에만 집어넣어 두기도 했다.

“결론은 암살도 불가능 수준, 회유가 먹힐 확률도 회의적, 능력은 8성, 공격력은 8성 이상, 성장가능성 SSS급... 빌어먹을 제발, 큰일이 없기를...”

깊고 깊은 수면 속에 숨어있던 고래가 드디어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정보를 취급하며 또 그것을 업으로 삼는 그로서는 고래의 실체를 확인할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했다.

그가 대체 왜 그곳에 갔을까.

그때 그의 책상 위에 있는 조금은 낡은 컴퓨터 모니터에 하나의 메시지창이 떴다. 그리고 그것을 본 순간 그는 쓰디쓴 표정을 짓고야 말았다.

“어떻게, 예상이 빗나가지 않나.”

그의 모니터 안에는 단 하나의 메시지 창이 망멸하고 있었다.

[8성헌터 엠페러 버지니아로 이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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