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8
궁기의분노-1
#1
씨이이이잉
날카로운 유선형의 동체를 지닌 검은색의 날렵한 항공기가 미국버지니아주에 위치한 뉴포트공항 활주로에 내려앉았다. 안전이 검증된 항로로 운행하기에 거의 공중형 몬스터와는 만나지 않지만, 행여 불상사를 대비해 과거에 사용되던 항공기보다 훨씬 빠른 이 항공기 출입문에 통로가 연결되자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하나둘 내리기 시작했다.
“즐거운 여행 되시길 빕니다.”
눈웃음이 짙은 스튜디어스의 인사를 받으며 한 남자가 걸어나왔다.
통유리 사이로 내리쬐는 따가운 햇볕이 부담스러운지 짙은 선글라스를 낀 그는 천천히 통로를 걸었다. 한 손에는 고급스러운 007가방을 든 그의 몸에 걸친 건 이태리 명품 슈트 중 명품 중의 명품으로 통하는 브리오니가 틀림없다. 20대 후반의 날카로운 콧날과 인상을 지닌 동양인 남자는 다른 사람들에 섞여 천천히 통로를 벗어났다.
“방문 목적이 어떻게 되죠?”
“비즈니스입니다.”
“얼마나 체류하실···.”
입국심사를 하는 뚱뚱한 흑인 여성의 표정이 날카롭다.
남자에게 이것저것 묻던 그녀는 고개를 끄덕인 뒤 그의 눈에 대고 기계를 조작한 뒤 번쩍 하고 플래시를 터뜨렸다. 그다지 좋은 기분은 아니다.
“미합중국이 운용하는 오라클시스템의 감시를 받는 것에 동의하십니까?”
“네.”
남자의 대답에 그녀가 그의 여권에 도장을 쿡 찍었다.
“미스터 한, 버즈니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그녀의 말에 고개를 까딱한 남자가 선글라스를 낀 후 공항을 벗어나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따로 큰 짐은 애초에 없었다. 상당히 낡은 오래된 공항의 퀴퀴한 냄새와 온갖 사람들이 뿜어내는 땀 냄새가 콧속을 자극한다.
위이잉! 철컹! 위이잉!
그때 그의 곁으로 두 명의 무장한 군인이 지나쳤다. 가벼운 파워드슈트를 걸친 그들은 선글라스 너머로 사람들을 감시하고 있었는데 그들의 손에 들린 소총과 가슴에 끼워진 대구경의 살벌한 권총이 눈에 띈다.
그들의 주위로 어린아이들이 지나치지만, 누구도 그 군인들을 신경 쓰지 않는다. 완전히 생활에 녹아있는 것 같다.
-얘들은 정말 특이하네. 저런 걸 들고 다니는데도 아무도 신경을 안 쓰니.
-응. 워낙 총기가 생활화된 나라니까. 몬스터가 출현하고 총기규제가 완전히 풀려버리다 못해 오히려 무장을 권장하는 사회가 된 거지. 우리나라 사람들은 총기가 부분적으로 허용되었어도 거의 들고 다니지 않지만 여기는 생필품과 마찬가지야.
궁기의 말에 답하며 제황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으로 게이트를 빠져나갔다.
앞서 입국심사에서 흑인 여성이 말한 오라클시스템은 과거 수많은 적국으로 인해 노이로제에 걸린 미국이 만들어낸 시스템이었다.
사람이라는 건 인간이든 헌터든 모두 기본적인 에너지의 파장을 지니고 있다. 이 파장은 사람마다 모두 고유의 개성을 가지는데 오라클시스템은 이 파장을 읽어 시스템에 등록시키는 것이다.
오라클시스템은 그 사람이 기존에 어떤 신분을 지녔든지 간에 상관하지 않고 그 파장을 데이터에 입력시킨다. 그렇기에 그 어떤 방법으로 자신을 숨기더라도 이것을 피해갈 수 없다. 헌터들마저도 말이다.
제황이 이곳에서 말썽을 일으키고 그 모습을 경찰들이 운용하는 센티넬이라는 감시드론에게 고유에너지파장을 읽히는 순간 오라클시스템은 제황을 범죄자로 인식해 버림과 동시에 그에 대한 정보는 실시간으로 모든 사회안전망에 노출되고 미국 내에 그 어떤 서비스든 이용할 수 없게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미국에 있는 내내 오라클시스템이라는 감시시스템을 염두에 두고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제황의 얼굴은 그런 패널티 속에서 빌런짓을 해야 하는 사람치고는 무척 평온했다.
-가장 먼저 가야 할 곳이 어디라고 했지?
-여기서 열 블록만 택시 타고 가면 돼!
궁기의 목소리가 참 우렁차다.
#2
제황이 도착한 곳은 뉴포트 공항에서 남쪽으로 이십여 킬로미터 정도 거리에 있는 슬럼가였다. 그의 목적지는 낡은 변두리 시가지의 후미진 골목 구석에 있는 작고 아담한 제과점이었는데 그다지 치안이 좋은 곳은 아닌 듯 거리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제황을 데려다준 택시기사가 제황에게 경고했다. 이곳은 오라클시스템의 센티넬도 무용지물인 곳이라 명품양복을 입은 동양인 청년이 걸어 다닌다는 건 날 털어달라고 시위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이다. 물론 제황에게는 해당사항이 없는 이야기다.
오히려 센티넬도 잘 오지 못하는 곳이기에 이곳을 선택한 거니까.
골목으로 걸어 들어가니 제황의 곁으로는 어느새 어린아이 크기로 실체화한 궁기가 나타나 간판을 바라보며 외쳤다.
“왔노라! 마마의 사탕계단!”
씩씩하게 현관을 열고 들어가니 고풍스러운 접시를 닦고 있던 푸근한 살집을 지닌 흑인할머니가 궁기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는다.
“마마의 사탕계단에 온 걸 환영한다 예쁜 아가씨”
천상에서 사는 천사도 그 아름다움에 경탄할 아이가 눈을 반짝거리며 들어오니 절로 미소가 떠오르리라. 진열장을 돌아다니며 갖가지 달콤한 것들을 한가득 고른... 아니 거의 쓸어담다시피 한 궁기가 제황에게 눈을 반짝거린다. 물론 제황은 그것을 거절할 생각이 없다.
이것은 약속이었으니까.
지갑을 꺼내 현금으로 셈을 치르고 가게를 나서며 궁기를 내려다보니 어느새 대부분의 간식들이 무한고로 사라졌고 그녀의 손은 이미 큼직한 상자 하나를 솜씨 좋게 해체하고 있다.
-좋냐?
-응! 좋아.
활기 있는 궁기의 목소리를 들으니 제황도 입가에 미소가 그려진다.
어찌 보면 궁기가 보여주는 모습은 참 단순하면서도 다채롭다. 그 모습에 가식도 없고 숨김도 없다. 기쁨이나 분노 같은 감정을 있는 그대로 내뿜는다. 단순하다는 건 비하의 의미가 아니다. 대인관계가 그리 좋지 못한 제황은 그녀와 대화를 하면 기분이 편안해진다. 어쩌면 그것은 수천 년을 살아오며 터득한 것일지도 모른다.
궁기가 밝은 표정으로 얇은 은박으로 포장된 초콜릿 껍데기를 까고 있는데 그 표정이 무척이나 심각하다. 귀엽다는 생각에 초콜릿을 슬쩍 건드려 보려는데···.
“크르르...”
“워...”
살기 가득한 목 울음소리와 함께 하마터면 궁기에게 야무지게 깨물릴 뻔했다. 제황은 궁기의 입에서 삐죽이 튀어나온 긴 송곳니를 보면서 식은땀을 삐질 흘렸다. 천사같기는 개뿔, 지금 이 모습은 피에 굶주린 뱀파이어의 그것 같다.
“어딜 감히···.”
“그래. 그래. 너 맛있게 먹어.”
“안 그래도 그럴 참이야. 냠!”
입안에 초콜릿 하나를 톡 까넣은 궁기의 눈에 별이 반짝거린다.
꼬리라도 있으면 기분 좋음에 살랑살랑 흔들릴 것 같은 표정이다. 상자에서 다시금 하나의 초콜릿을 꺼낸다.
“가자. 찍어둔 목표들을 이동하는 데만 열흘은 걸릴 거야. 늦기 전에 밀령이랑 만나야 해.”
“알았어.”
먹는 것에 정신이 팔려 자꾸 발걸음이 느려진다.
한숨이 나오지만, 더 채근하지는 않았다. 본래 공항에서 작업을 도와줄 밀령이 기다리겠다고 했지만, 굳이 이곳에 들르는 것을 밀령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기에 약속시간을 따로 정했다.
“맛있어?”
“응. 머릿속이 팍팍 튀는 것 같아. 줄까?”
“아니”
제황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필요할 때는 먹지만 굳이 이곳에서 저 단 걸 입에 넣고 싶지는 않다. 그건 그렇고 분명 종류는 호랑이라고 했는데 저렇게 단 것을 끊지 못하는 걸 보면 뭔가 웃긴다. 호랑이도 고양잇과인데 고양이는 원래 초콜릿 같은 건 치명적이지 않나 하고 생각하며 슬쩍 그녀를 바라봤다. 그런데 그녀가 보이지 않는다.
“음?”
고개를 조금 더 돌린 제황은 궁기의 뒤에 바싹 달라붙어 그녀의 목을 팔로 조인 채 자신을 향해 권총을 내밀고 있는 덩치 큰 흑인을 발견했다. 목에서부터 드러난 팔까지 온갖 문신으로 가득한 그 흑인은 흉측한 얼굴로 제황을 노려보고 있다.
딱 봐도 노상강도였다.
“꼼짝 마!”
“...”
아마 제황의 고급 슈트를 보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것 같다. 제과점에 들어올 때부터 묘한 눈초리를 감지하기는 했지만 설마 덤빌까 싶어 아예 생각도 하지 않았다. 어찌 보면 이건 제황의 책임이기도 했다. 이런 슬럼가를 와 본 것이 이번이 처음이었고 노상강도를 만난 것도 처음이었다. 그렇기에 대처가 늦었다.
궁기를 보니 그녀는 초콜릿 껍데기 까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다.
아마 저 껍데기를 다 깐 후에 손을 볼 예정인 것 같다. 권총을 든 일반인 노상강도 따위는 그녀가 의식해야 할 범주에도 들지 못한다. 몇 번이나 다시 말하지만 초근접에서는 제황도 궁기에게 덤비지 않는다. 그녀의 지금 현신한 상태가 성인이 아닌 아이의 몸이지만 그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저 노상강도를 그가 믿는 신의 곁으로 보내주는 데는 말이다.
“이 미친년!”
그러나 둘을 협박하던 흑인은 눈앞에 이 고급슈트의 동양인 애송이도 또 자신이 우악스럽게 조이고 있는 붉은머리 소녀도 전혀 자신에게 신경 쓰지 않은 채 초콜릿만 까고 있자 분노가 폭발했다. 사실 그는 눈앞의 동양인을 살려 보낼 생각이 없었다. 그렇지만 무턱대고 총을 쏘지 않은 건 행여 그가 걸친 명품 슈트에 피라도 묻을까 하는 노파심 때문이었다.
이 동양인을 죽인 뒤 소녀는 으슥한 곳으로 끌고 가서 재미를 본 뒤 이런 아이를 비싼 값에 사줄 놈들에게 넘길 셈이었다.
분노한 그가 궁기의 손을 '탁' 쳐버렸다.
“아아...”
겨드랑이에 초콜릿 상자를 끼고 있던 궁기는 껍데기 까기가 끝나 드디어 입에 넣으려던 초콜릿이 땅바닥에 떨어지자 순간 그대로 몸이 경직되었다.
지금 그녀의 눈에는 초콜릿이 바닥에 떨어지는 게 마치 슬로우모션 마냥 느껴졌다. 그녀의 순발력이라면 중간에 받아낼 수 있었지만, 그녀의 목을 죄고 있던 흑인의 거대한 팔뚝이 그녀의 그 행동을 잠시나마 제지했다.
그리고 끝내 초콜릿은 땅바닥에 떨어졌다. 지저분한 흙이 묻은 그 초콜릿을 보는 순간 궁기의 두 눈이 마치 수백 마리의 오크를 학살할 때처럼 붉게 타올랐다.
“아악!”
궁기가 비명을 질렀다.
무려 한나절을 날아온 머나먼 타국 땅에서 만난 정말 맛있어 보이는 초콜릿이다. 이 근방에서 살 수 있는 미슐랭가이드에서 유일하게 별 세 개로 인정한 초콜릿을 처음으로 입안으로 영접하는 영광스러운 시간이다. 그런데 그 첫 시작이 흙투성이가 되었다.
“미친년 꼼짝하지 마!”
“이···. 새끼가···. 뭐라는 거야.”
제황은 귀에 번역기능이 있는 헤드셋을 끼고 있지만, 궁기는 그런 게 없으니 그 흑인노상강도가 하는 말을 알아들을 리 없다.
아니 사실 그녀에게는 그것을 알아듣든 말든 상관없었다.
후욱...퍽!
잔상을 일으키며 몸을 회전시킨 궁기의 오른손이 흑인의 옆구리를 향해 빠르게 끊어쳐 버렸다. 단 한발이었다.
“컥...”
퍼엉
궁기의 주먹이 그의 배에 움푹 들어가는 순간 그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노상강도질 중 당한 사고에 가까운 죽음이지만 궁기의 주먹에 박애사상 따위는 탑재되어 있지 않다.
“휴.”
축늘어진 흑인이 뒤로 스르륵 흘러 쓰러졌고 그걸 본 제황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범죄자기는 하지만 일반인을 죽었다. 가장 우려해야 할 일이 터진 것이다. 게다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제키!”
“저 자식들이 제키를 죽였어!”
“헌터야!”
어디 그렇게 숨어 있었는지 수 명의 거대한 덩치들이 사방에서 쏟아져 나왔는데 조금 전 죽은 놈의 친구로 보인다. 문제는 마치 한국사람들이 지나가던 거지도 스마트폰 하나는 들고 있는 것처럼 저들은 익숙한 손길로 몸 곳곳에서 총기를 꺼내든다는 것.
“이놈들이!”
그러나 제황이 생각하는 가장 큰 문제는 지금 궁기가 무척 열이 받아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제황이 나서서 그것을 말리기 전에 이미 궁기의 두 주먹은 거대한 덩치들을 모조리 거대한 샌드백으로 만들어 버렸다는 것이었다.
파파파파파팍! 팍팍팍! 퍼퍽!
“으아아아악! 마녀! 괴물! 쏴!”
비명을 지르며 어떻게든 반격을 하려 했지만 궁기는 너무나 빨랐다. 그들에게는 총 한발 쏠 시간조차 궁기는 허락하지 않았고 눈깜짝할 사이에 그녀의 주변에는 거대한 덩치들이 걸레가 되어 버렸다. 그때 어디선가 요란한 사이렌소리를 울리며 푸른 불꽃을 내뿜는 검고하얀 색의 드론 한 대가 이쪽으로 쏜살같이 날아왔다.
“하아”
미국에서 벌이고자 했던 일들의 난이도가 모두 한 단계씩 상승해 버리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