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7
언노운헌터-3
#1
“그런데 왜 저들이 제게 직접 접근하지 않고 저런 지저분한 수를 쓰는 겁니까?”
잠시 입을 축인 조용기가 다시 말했다.
“이렇게 말하면 우습지만 잘 통하니까. 본래 권력을 가진 이들은 복잡한 수를 쓰지 않아. 같은 일이라도 단순화시켜 처리해 줄 수 있는 게 권력이니까.
어차피 X 물은 우리나라 언론이 전부 뒤집어쓸 테니 뒷짐만 지고 있다가 과실을 따 먹는 거야. 이전부터 자주 쓰던 수법이지. 각성한 지 얼마 안 된 디바우저면 한국 내에 있는 클랜들을 통해 수작을 부린다네. 자네도 알다시피 우리나라 정부의 헌터에 대해 대우가 그렇게 좋은 게 아니니 정떨어지는 짓 몇 번 시킨 뒤 슬그머니 접근해 눈이 번쩍 할 정도로 좋은 혜택과 돈을 쏟아부어 설득하는 거지. 과거 그런 식으로 국적을 바꾼 헌터들이 꽤 된다네. 자네도 들은 건 있지?”
“예. 아카데미에서 배웠습니다.”
굳이 새로울 건 없다. 아카데미에서는 헌터들에게 레이드에 필요한 지식과 더불어 각국이 어떤 식으로 영입전쟁을 벌이는지도 꽤 자세히 알려줬다. 물론 그 말로가 대부분 안 좋은 쪽으로 끝나는 게 공통점이지만 말이다.
“그래. 그리고 자네 같은 이는 그런 자잘한 수법은 통하지 않으니 이런 짓을 벌이는 거라네. 노리는 거야 뻔하지. 우리 무적성에 대한 여론을 악화시켜 성내에서 자네에 대해 입지를 좁아지게 만드는 것이지. 그 후에 은밀히 접근해 자네와 천천히 얼굴을 익히는 거야. 뭐 가능성이 영 안 보인다면 일찌감치 포기하고 이번 일을 빌미로 무적성으로부터 뭔가 양보받거나 말이야.”
“양보요?”
“그래. 양보.”
“미국이 무적성에 양보받을 게 있나요?”
제황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자신을 노리는 거야 이해가 간다. 과거부터 미국의 인재수집욕심은 유명했으니까. 게다가 미국은 대융합사태가 벌어짐과 동시에 가장 발 빠르게 헌터 전력을 최우선적으로 육성한 나라였다. 기존의 수많은 군수업체는 몬스터의 출현으로 대활황을 맞아 눈부신 성장을 이루었으며 몬스터부산물에서 나오는 신소재를 통해 제 2의 도약을 준비중이다.
그런 남부러울 것 없는 나라가 고작 대한민국의 무적성에게 바라는 게 있다니···.
“지금까지는 양보받을 게 별로 없는데 이번에 만들지 않았나.”
“아, 저스틴포인트군요.”
“그래.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첫째 저스틴포인트 주변에 산재한 특수광맥들이 있고 둘째로는 남쪽으로의 진출로라는 거지. 자네도 알다시피 남동쪽으로는 괜찮은 땅덩어리가 하나 있지.”
“일본 방향이죠.”
지구와 엘어스의 지형이 완전히 같은 건 아니다. 그렇지만 큰 덩어리로 보면 매우 비슷한 모양을 가지는데 그것은 세 개의 차원으로 나뉘기는 했지만 거의 비슷한 지정학적 변화를 겪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한국의 남동쪽에 일본이 있다. 그리고 일본은 아직 그곳에 제대로 진출하지 못했기 때문에 발만 디디면 땅을 선점할 수 있다.
“그렇지. 그리고 내가 알아본 바로는 이번 일의 대가로 무적성이 얻은 저스틴포인트에 대한 지분에 한 발 걸칠 권한 같은 걸 미디어를 보유한 그룹에 제시한 모양이더군. 대현이 무너졌으니 모두 촉각을 세우고 있었겠지. 한마디로 저 나팔수들을 움직인 건 우리나라의 거대기업들이라는 거야.”
“웃기는군요. 무적성의 이권을 자신들 마음대로 미리 재단하다니. 그걸 믿습니까.”
“유서 깊은 지독한 사대주의의 결과물이지. 후후”
조용기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고 제황은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겼다.
그다지 알고 싶지 않던 더러운 거래의 뒷이야기를 들으니 이번 일에 대한 조금의 답답함은 가셨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조용기의 진짜 속마음이 조금은 보이는 것 같다. 이것은 추리나 통찰력을 통해 엿보는 것이 아니다. 여의보주를 얻음으로써 제황은 단편적으로나마 신의 힘을 얻었다. 그렇기에 일반적인 인간과는 다른 격을 지녔기에 그보다 낮은 이들의 감정이나 생각을 조금은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진짜 사과하시려던 건 미국의 접근을 사전에 차단해 버리신 것에 대한 거였군요.”
뜬금없는 제황의 말에 조용기의 눈이 커졌다.
마치 저격을 날리듯 단숨에 진실을 꿰뚫고 들어왔다.
“그래서 저들의 입을 일부러 막지 않으셨고요.”
“...”
둘 사이에 정적이 오갔다.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조용기가 이내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허허, 들켰는가.”
“네. 조금 오글거리기는 하지만 대충 이해했습니다.”
조용기가 준 정보와 그의 내면을 가볍게 읽음으로써 추측 가능한 것들을 종합한 결과 제황의 결론은 조용기가 ‘쇼’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글거린다고 표현한 것은 대략 이런 것이다. 이 일의 끝에는 아마 무적성이 상당한 손해를 감내해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무적성은 그것을 무릅쓰고 제황을 보호한다. 우리는 너를 이만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 저 비열한 미국 놈들이 하는 짓 봤지?
뭐 대략 이런 것이다.
“이거야 원···. 이거 작전 입안한 놈한테 들을 때는 꽤 그럴듯했는데 막상 당사자에게 감상을 들으니 정말 손발이 오그라드는 것 같군. 그런데 어떻게 알았나. 내가 이 정도로 연막을 뿌리면 알아채지 못하는 게 정상인데.”
“과거에 몇 번 경험이 있거든요.”
“경험이 있어?”
“예. 옛날에 연애편지 보내는 애 중에 꽤 극성스러운 애들이 몇 있었는데 제 앞에서는 얌전하고 희생하는 척하면서 다른 애들이 접근하려고 하면 성격이 드러나던 애들이 있었습니다.”
“흠흠, 거 아무리 비유를 해도...”
담담히 말하는 제황의 목소리가 더 타격이 큰지 조용기가 얼굴을 붉히며 연신 생수를 들이켰다.
“노파심에 말씀드리는데 저는 무적성 소속이라는 것에 아무 불만이 없습니다. 그러니 굳이 이런 짓을 하실 필요 없습니다. 물론 맹목적인 건 아닙니다. 현재까지라는 말씀입니다.”
“휴우, 그런가. 내 자네 볼 면목이 없군.”
정작 본인은 밀당 따위를 할 생각이 없는데 굳이 나서서 구정물을 일으킨 격이 되었다. 무려 자신의 얼굴에 X칠을 하며 말이다. 그러나 지금 말한 것은 제황의 진심이었다.
“예전에 권제께서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왜 무적성이 다른 클랜들처럼 클랜이라는 이름을 쓰지 않고 굳이 ‘성’이라고 말하는지 말입니다.”
문상 조용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권제 황정민이 처음 무적성이라는 이름을 내걸었을 때 자신도 그곳에 있었다.
눈을 감으면 젊은 날 권제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클랜은 헌터들의 권익 보호에 최우선으로 한다. 물론 그들의 뜻을 비하하고 싶지는 않다. 그것은 그들의 정당한 권리니까. 그렇지만 나 또한 그들과 같은 생각이라는 건 아니다. 내가 이곳을 굳이 ‘성’이라고 표현한 건 인류를 구하기 위해서 초개와 같은 목숨을 버렸던 수많은 내 동료들의 뜻을 계승하기 위해서다. 그렇기에 난 클랜이라는 이름을 피하고 싶다. 무적성은 헌터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이를 위한 최후의 피난처다. 후일 이 지구에 최후의 날이 온다고 하더라도 최후의 일인이라도 더 살리기 위한 방주···. 그것이 이 무적성이다. 무적성은 모든 이를 보호한다. 그렇기에 성이다.”
“그래. 그렇군. 참 내가 부끄러워.”
붉어진 낯빛을 가리려 손을 얹었다. 부끄럽다. 대한민국 경제계의 거인인 자신이 부끄럽다. 가진바 권력이 많아질수록 부끄러움은 사라지고 그곳을 타협과 계략으로 채웠던 자신이 부끄럽다. 지금 눈앞에 앉아 있는 채 서른도 되지 않은 이 솜털 뽀송한 아이의 얼굴을 보기가 너무 부끄럽다.
사실 그가 굳이 이런 짓을 꾸몄던 것은 제황이 무적성에서 이룬 것들이 너무 크기 때문이었다. 헌터가 조직에 소속되는 이유가 뭘까? 뭔가 하나라도 얻어가고 싶기 때문이다. 그것이 조직이라는 든든한 뒷배든 조직이 제공하는 서비스든 말이다.
그렇지만 까놓고 말하면 무적성은 제황에게 해준 게 별로 없었다. 제황은 그냥 혼자 잘 컸다. 아니 큰 것도 아니다. 들어올 때부터 강했다. 그렇기에 행여 무적성에 대해 실망하는 마음이 있을까 이런 짓을 생각한 것이다. 물론 그는 언론과 그들의 뒤에 숨어있는 이들이 일으키는 똥물에 슬쩍 노만 담갔을 뿐이지만 말이다.
정말 오랜만에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을 다시 느끼는 문상 조용기였다.
“괜찮습니다.”
“아니야. 자네가 오랫동안 잊고 있던 걸 깨우쳐 줬어. 허허. 이번 일은 내일이면 모두 잠잠해질 걸세. 내 책임지지. 그리고 미안하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조용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얼굴에는 허허로운 표정이 가득하다. 마치 깨달음을 얻은 듯 아니 뭔가 커다란 것을 내려놓은 듯 기쁨과 허탈함이 공존하는 표정이다. 그가 문밖으로 나서자 제황은 그가 사라진 문을 바라보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괘씸하지 않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다.
식당에서 어떤 헌터가 말했듯 내부총질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이것은 비단 한국의 재벌들과 언론들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미국 또한 마찬가지다. 그들이 유능한 헌터들을 긁어모으는 이유? 간단하다. 이제 세계는 헌터 전력이 곧 패권과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과거 세계의 경찰이라는 이름으로 패악질을 부릴 수 있었던 패권국이라는 타이틀을 다시금 노리는 미국이다.
“뭐 상관없지.”
그렇지만 그들을 굳이 나서서 단죄할 생각은 없다. 그건 문상 조용기에게 모두 맡기면 된다. 지금 그에게는 더욱 중요한 일들이 있으니까.
그때 허공중에 궁기가 퐁하고 나타나더니 능숙한 솜씨로 테블릿을 꺼내 무릎 위에 올렸다. 혀를 반쯤 빼문 채 독수리 타법으로 뭔가를 열심히 두들기는 게 귀엽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저게 뭐하는 짓인지 궁금하다.
“뭐해?”
“미국쪽 비슐랭 가이드 찾아보는 중...”
궁기의 대답에 제황이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왜 갑자기 뜬금없이 저걸 보는 걸까.
#2
다음날 조용기의 호언장담 한 것처럼 어제만 해도 무적성을 물어뜯던 언론사는 일제히 입을 꾹 다물었다. 인터넷 실시간 검색어 1위부터 10위를 가득 채우던 무적성에 대한 각종 음해는 모두 사라졌다. 마치 어제 자신들이 무슨 말을 했냐는 듯 태세변환을 한 언론사들은 이번 무적성의 일에 앞다투어 찬사를 보내기 바쁘다. 그나마 조금 부끄러움을 아는지 조그마한 비판을 섞기는 했지만, 어제와 비교하면 애교 수준에 불가했다.
문상 조용기는 장담대로 단 하룻밤 안에 그들 모두를 닥치게 만들었다.
재미있는 건 우리나라가 아니라 미국이었다.
갑자기 한국 내 친미적 기업들의 행동이 돌변한 것에 발맞추지 못하고 헛발질을 했다는 것이다. 미국방부 대변인을 통해 저스틴포인트로의 미군 파견을 발표했다. 그리고 그에 대한 국내의 분위기는 싸늘함 그 자체다.
그 이유는 예전 저스틴포인트가 아직 삼천교와 오크들에 의해 점령당해 있을 때 우리나라가 저스틴포인트 수복을 위한 미군파병을 꾸준히 요청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은 그것을 질질 끌며 지지부진했었는데 속사정을 까보면 이유는 간단했다. ‘대한민국 길들이기’
그런데 막상 순수 대한민국의 전력으로 탈환에 성공하자 이제야 그 무거운 엉덩이를 떼고 미군을 파견한다는 것이다. 피는 이쪽에서 다 흘렸는데 느긋하게 들어오겠다는 그들의 행태는 우리나라 국민들의 정서상 그것을 용납하는 게 어불성설이다.
그리고 거기에 백미를 찍는 현 미국의 대통령 ‘도람프’ 의 망언이 곁들여졌다.
‘오크들과 삼천교에 의해 저스틴포인트가 함락당한 것은 전적으로 대한민국에 책임이 있으니 이번 미군파견에 대한 분담금은 전적으로 대한민국이 책임져야 한다.’
이 말로도 뒷목을 붙잡는 국민들이 여럿인데...
결정적인 건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온 미국 거대양당 중 하나인 XX당의 극우적 성향의 상원의원이 한 망언 때문이었다.
‘은혜를 모르는 대한민국의 작은 헌터클랜이 쓸데없는 비밀작전을 펴서 미국이 피를 흘렸다.
대체 출처가 어디인지 아니면 아침에 거하게 약을 빨고 헛소리를 지껄인 것인지는 상관없었다. 그가 본디 대중의 인기만을 통해 상원의원의 자리를 차지한 입 털기만 좋아하는 고위헌터 출신이라는 것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한 번 찾아가 봐야겠네.”
“호호호...”
제황의 말에 궁기만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태블릿을 열심히 두들길 뿐이다.
#3
제황은 무적성에 한 달 정도의 장기휴가를 요청했고 그것은 무리 없이 승인되었다.
가볍게 짐을 싼 제황은 궁기리와 궁기산 일대에 지어지고 있는 무련천가의 새로운 본가를 둘러보며 공사 진행 경과를 점검하러 내려갔다.
워낙 쏟아부은 돈이 많고 그 돈의 원출처인 제황이 모든 것을 최고로 요청했기에 궁기리 주변의 지역의 경제는 지금 때아닌 호황이었다. 대규모 토목공사를 단독으로 추진한다는 무적성 소속의 고위 헌터가 내려왔다는 소식에 내로라하는 지역 인사들은 둘째치고 수백 수천의 사람들이 그의 얼굴을 보기 위해 몰려들었다. 물론 그 시도는 제황의 정중한 거절 때문에 한정적인 인원에 대해서만 접견을 허락했지만, 아무튼 제황은 그렇게 본가가 있는 궁기리에서 정신없는 시간을 보냈다.
-어중이떠중이들의 시선은 모두 돌렸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총관님. 굳이 직접 진행하실 필요는 없는데...
-아닙니다. 사실 제가 문상님에게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런 식의 평화로운 일처리가 불만이었습니다. 재벌 몇 놈 본보기로 손봐주는 것으로 끝이었다면 밀령들의 사기에도 치명적이었을 겁니다. 마침 조용히 손을 봐주고 싶었는데 오히려 제가 감사할 뿐입니다. 한 다리 걸치는 것뿐 아닙니까. 하하
나길환의 목소리가 밝다. 그는 제황에게 미국이 공격당하면 가장 아플 곳을 손수 찍어줬다.
단순한 분풀이가 아니다. 아주 제대로 긁어줄 영양만점의 한 장소를 지목해줬다.
-예. 그럼 계속 서포트 부탁 드리겠습니다.
-네. 제가 눈과 귀가 되어 드리겠으니 놈들에게 진하게 한 방 부탁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