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5
언노운헌터-1 (수정)
#1
은신스킬이라는 건 어떻게 보면 반칙과 같다.
물론 보통의 은신계열 스킬들은 약점을 지니고 있다. 저급의 은신스킬은 이동 중에 작게나마 그 허상이 드러나고 혹 그것이 완벽한 은신이라 해도 열형상 카메라나 전문적으로 은신체를 잡아내는 장비 등은 피하지 못한다.
그러나 암혼보는 그 모든 게 가능하다. 말 그대로 다른 차원에 있는 은신스킬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암혼보 또한 약점은 있다. 아니 모든 은신스킬들이 가지는 태생적인 약점이었는데 그것은 바로 은신 중 공격시 발생하는 소리였다.
외부로 울려 퍼지는 소리는 어쩌지 못한다. 그렇지만 제황이 보유한 용혈무는 그 사용자에게 최고의 정숙성을 제공하기에 지금까지는 소리도 무시할 수 있었다. 용혈무는 오크들의 민감한 청각까지 무시할 수 있기에 마음을 놓았고 그러다가 백린에게 스킬의 발사음을 노출당해 한 방 크게 먹었다.
그래서 지금 제황은 모든 공격을 비천격에 있는 무음시를 통해 사용하는 중이다.
또한, 중간중간 한 번씩 공중을 향해 화살을 날리는데 그 모든 것을 ‘춤추는’ 속성을 이용해 방향을 교란하고 있었다.
-일단 포착은 못하는 것 같아.
-좋아. 일단 이놈들부터 벗겨내야지.
제황은 자신이 상대를 얕봤다는 것을 인정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오크들을 얕봤다. 워낙 많은 숫자를 사냥했기에 한순간이나마 오크 따위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골로 갈 뻔했다.
백린이라는 놈 때문이 아니라 오크 때문이다. 백린은 오크를 제 몸처럼 이용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일종의 거미줄이었다. 이들이 있는 한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그래서 같은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아예 자신의 강점인 거리로 승부하기로 했다. 현재 그는 오크들에게서 계속 멀어지며 위치를 새롭게 잡아나가는 중이다. 궁기가 말했다.
-천주백가는 모든 주술을 다 쓴다고 보는 편이 좋아. 환술, 진법술, 백주술, 흑주술, 혈주술, 부적술 등등 이걸 가지고 마음대로 가져다 붙여서 사용할 수 있어.
-알아. 그래서 거의 모든 것에 만능이라는 거지?
이전에도 천주백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바 있었다. 그리고 궁기와 함께 내린 결론은 이것이었다.
-뭐 예전에도 말했지만, 그냥 힘으로 때려 부수는 수밖에 없어. 대신 허점이 생기기를 바라지는 마. 내가 아는 천주백가라면 허점처럼 보이는 함정을 가득가득 둘러놨을 테니까.
-좋아.
제황은 궁기안에 잡히는 백린을 노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야간시, 추적시가 모든 시각 정보를 최적화하고 있다.
‘그래도 허점이 없다면 만들어 봐야지.’
간헐적으로 공격하고 있는 건 밑밥을 뿌리는 것이다.
상대가 계속해서 자신을 탐지하도록 유도하면서 주변을 차근차근 부수고 있다.
지금까지 겪은 주술이라는 건 주변 지형지물을 많이 이용하니 주변을 청소하는 중이다.
주변을 돌려깎으면서 상대를 압박하는 중이다.
‘시작해볼까.’
꾸준히 마나는 모이고 있고 이제 절반가량 찼으니 슬슬 본격적으로 시작할 때다. 제황은 상대와 자신을 두고 비교해 봤다. 상대는 만능형의 능력자다. 주술로 거의 모든 부분의 능력을 커버할 수 있다.
결론은 치명적인 한 방을 노려야 한다.
제황은 자리에 멈춰섰다.
오크들의 영향권에서 꽤 떨어졌기에 행여 암혼보가 풀려도 이제 걱정은 없다.
-화살이 얼마나 남았지?
-천여 발?
-많이도 썼네.
소모성의 물품이기에 항상 넉넉히 비축해 두는 편이지만 그것도 이제 거의동이 났다.
-한번 두들겨 보자.
-좋아.
[화신체]
궁기의 버프가 시작되자 고양되는 마나의 느낌을 받으며 제황은 천천히 시위를 당겼다.
무련궁술로 근 몇만의 오크를 두들겨 잡은 덕분인지 전보다 마나의 운용이 편해졌다. 그리고 이제 새로운 공격 방식 하나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시위를 한계까지 당긴 제황의 눈이 매섭게 빛났다.
‘춤추는 소나기 연사!’
퓻! 퓨퓨퓨퓨퓨퓻!!
제황의 손이 잔상을 일으킬 정도로 빠르게 움직였다.
이전에도 이 정도의 속도는 낼 수 있었지만 지금 가한 공격들은 평범한 공격이 아니었다. 두 개 이상의 인첸트를 가한 상태에서 약 20여 발의 화살에 춤추는 속성과 소나기의 속성을 실었다. 꽤 많은 마나를 소모하지만, 적에게는 진짜 화살이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느낌일 것이다.
그렇지만 진짜 공격은 이것이 아니다.
제황은 다시금 비천격을 시위에 걸었다. 몸을 최대한 낮추고 궁기안을 통해 화살이 나아갈 궤적을 읽는다.
‘무음시!’
비천격에 내제되어 있는 스킬이다. 이것은 공격에서 발생하는 모든 소리를 흡수해 버리는 능력이 있다.
‘비상하며 춤춰라. 폭발하는 강기의 화살!’
후우욱!
비록 소리는 없지만, 그 반동은 여전하다.
공중으로 몸이 떠오른 제황은 그 반동에 저항하지 않고 몸을 뒤로 날렸다.
그 와중에도 눈은 두 번째로 발사한 공격에서 떼지 않았다.
강력한 에너지를 내재한 화살이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채 빠른 초저공비행으로 적을 향해 미끌어져 갔다.
동시에 하늘로부터 화살의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마치 자주포의 (Time On Target)처럼 곡사와 직사를 이용한 시간차 공격!
먹히면 좋고 안 먹혀도 상관없다. 먹히지 않으면 먹히지 않는 이유를 분석해 새로운 공격 방법을 고민하면 된다. 그것이 사냥꾼의 마인드다.
이윽고 회심의 한 수가 적에게 작렬했다.
첫 공격을 막는데 급급하던 백린이 제황의 두 번째 공격에 당황한 표정이 역력하다.
뭔가에 가로막히는 듯싶었지만, 화살에 내재한 폭발 속성이 터지며 그대로 백린을 집어삼켰다.
비상하는 속성은 실패 0프로에 달하는 명중률과 속도를, 춤추는 속성은 오크들 사이를 저공비행으로 날 힘을, 강기는 화살에 강기를 실을 수 있게, 마지막으로 폭발은 그 강기를 최근접에서 폭발시켜 버린다. 무려 네 가지 속성을 지닌 단일 공격으로는 제황이 가진 공격 중 두 번째로 강력한 공격이다.
콰콰콰콰콰쾅쾅!!!
백린을 비롯한 주변 모든 것을 집어삼킨 강기의 폭발은 그 세력권 안에 든 모든 것을 집어삼키며 소멸시켜 나가기 시작했다. 강기의 속성을 지닌 폭발은 단순한 폭발이 아니다. 몬스터의 방어막까지도 무용지물을 만드는 마나속성 무시에 특화된 공격이다.
제황은 이번 공격이 크던작던 적에게 피해를 줄 수 있을 것이라 자신했다.
그러나···.
“응?”
제황의 머릿속에 의문점이 솟아올랐다.
소리는 요란했지만 마치 거대한 진공청소기가 생겨난 것처럼 모든 것이 쑤욱 하고 빨려 들어간 느낌이다. 아니 그것은 느낌만이 아니었다. 허공을 채우고 있던 맹렬한 마나의 빛과 선이 한순간 핏빛으로 물들더니 주변의 모든 것을 빨아들인다.
슈우우우우
그리고 그곳으로부터 거대한 뭔가가 일어서기 시작했다.
붉은 음영으로 이루어진 잔상 같지만 분명 형태를 이루고 있다.
이윽고 완전한 실체화가 끝났다.
“크아아악!”
웅장한 포효가 대지에 울리고 그곳으로부터 폭풍과 같이 뿜어지는 압도적인 존재감에 주변에 있던 오크들이 모두 땅에 쓰러졌다. 모습을 드러낸 것은 붉은 피부를 지닌 거대한 거인이었다. 거의 20여 미터에 달하는 압도적인 덩치에 터질듯한 근육을 지닌 그것은 왕방울 같은 거대한 눈을 뒤룩뒤룩 굴리며 사방을 쏘아봤다. 붉게 타오르는 듯한 머리카락에 멧돼지와 같은 기다란 이빨을 지니고 있다.
-두억시니를 부르다니···. 흑주술까지 사용할 수 있다는 건가?
-두억시니?
-그래. 두억시니! 도깨비들의 왕! 두억시니를 아직 묶어두고 있었다니···. 조심해 저놈도 나처럼 신성(神性)을 지닌 놈이야.
궁기의 말에 제황은 공격을 멈췄다.
지금 궁기의 목소리에는 긴장감이 가득하다.
-강한가?
-당연하지. 신성을 이루었다는 건 나와 비슷한 존재라는 뜻이야. 나도 한때는 저 두억시니처럼 저 천주백가에 묶여 있었어. 적혈마인 알지?
-그래.
-적혈마인은 두억시니를 모방해 만든 놈들이야. 물론 두억시니의 진짜 힘에는 발끝도 미치지 못하지. 더 가공할 건 두억시니가 있는 곳에 적혈마인을 소환하면 적혈마인들이 더욱 강해진다는 거야. 마치 우두머리와 같은 역할을 하지. 아무튼, 예상 밖이야. 두억시니는 흑주술 계열이라 천주세가 놈들이 다루기 꺼리던 놈인데···. 저것까지 불러내다니···.
-젠장···.
궁기의 말에 제황은 더 공격하지 않았다.
힘을 가늠하기 힘든 새로운 강타자가 나타났으니 처음부터 다시 분석해야 한다. 재미있는 건 상대에게서 나오는 기파가 공격보다는 수비적이라는 것이다. 저 두억시니를 불러낸 백린이라는 자는 지금 제황과 더 싸울 생각이 없다.
입가에 점점이 묻은 피를 훔쳐낸 백린은 제황이 있는 쪽을 지그시 노려보며 손을 옆으로 뻗어 공간을 갈랐다.
대화는 없었지만 제황은 느끼고 있었다.
그가 하려는 말을 말이다.
“다음에는 군더더기 다 빼고 제대로 붙자는 건가···.”
백린은 천천히 공간 안으로 사라져갔고 잠시 후 찢어졌던 공간이 아물어지며 두억시니 또한 흐릿하게 변해 사라져 버렸다.
휘이이...
거대한 부피를 자랑하던 두억시니가 사라진 자리를 향해 바람에 불기 시작했다.
오크들은 그들을 지휘하던 백린이 사라지자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오크히어로들이 서둘러 남은 병력을 추스르기는 했지만, 대제사장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혼란에 휩싸이리라. 아니 헬칸이 사라진 이상 엔드릴 오크는 이제 구심점을 잃었다. 그렇기에 백린도 그들을 버린 것이다.
***
붉은 피가 묻은 빛나는 금속 파편을 집어든 제황이 그것에 묻은 피를 유심히 바라봤다.
이 금속파편에 묻은 건 그 백린이라는 이의 피. 새롭게 얻은 명황안을 사용해 보려는 것이다.그때 궁기가 말했다.
-잠시만...
-왜?
제황의 물음에 답하지 않은 채 궁기가 제황의 옆으로 현신했다. 그러고는 그 피에 살짝 혀를 가져다대더니 이내 눈을 파르르 떤다.
"역시..."
"왜?"
"제대로 된 천주백가의 피야. 그리고..."
"그리고?"
“피에 새겨진 주술들을 훑었는데···.”
잠시 말을 멈춘 궁기가 눈을 뜨며 말했다.
“시간을 붙잡힌 자... 최소 50년 이상이야.”
”시간을 붙잡힌 자? 그게 무슨 말이야.“
”천주백가의 가주만이 펼칠 수 있는 주술이야. 시간을 붙잡아 늙지 않는...“
”설마 불로불사?“
”아니. 수명도 그대로고 죽기도 하지만 대신 늙지만 않아. 그렇지만 최전성기때의 몸을 죽을 때까지 유지하는 비술 중 하나지. 아무튼 내 말은 그 백린이라는 인간의 나이가 최소한 50살은 넘었다는 거야. 아니 현재의 모습이 20대 중반 정도니까 최소 70살이 넘었다고 해야 하나?“
궁기의 설명에 제황은 생각에 빠졌다. 궁기의 말대로라면 상대는 최전성기의 몸을 가진 채 최소 50년 이상 천주백가의 주술을 배우고 익혔다는 뜻이 된다.
”만만치 않구나. 후우“
#2
이틀 후 지구의 무적성으로 돌아온 제황은 권 왕에게 엘어스에서의 일에 대해 보고를 마친 후 잠시 휴가를 가졌다. 권왕에게는 엘어스에서의 피로를 풀기 위해서라고 했지만, 사실 백린에 대한 추적을 위해서였다.
처음에는 그 추적이 쉬울 줄 알았다. 왜냐하면, 새롭게 얻은 ‘명황안’ 이라는 유니크급 추적 스킬이 새로 생겼으니까. 마침 엘어스에서 백린의 것으로 추정되는 피까지 얻어왔기에 곧바로 추적에 들어가려 했다.
그러나... 제황은 아주 큰 것을 간과했다.
명황안이라는 추적스킬은 상대의 피를 섭취하면 무려 한 달간 사방 천 킬로미터 안에 있는 이를 추적할 수 있다고 되어 있었다. 쓰인 대로라면 이 명황안에 걸리는 순간 상대는 절대 도망치지 못한다. 그렇지만 제황이 간과한 것이 있었으니 세이브가 주는 스킬들은 모두 숙련도라는 것을 가진다는 것이었다.
[숙련도 부족으로 추적이 불가합니다. 현재 추적 가능 범위 10㎞]
-내가 바보 같아.
-응. 나도 그렇게 생각해.
완전무장을 후 추적 준비를 끝마친 채 명황안을 발동 시킨 제황은 자신의 멍청함에 괴로워하며 무장을 풀었다. 숙련도가 올라가는 속도를 생각할 때 설명에 나온대로 1000km를 추적하려면 몇 년은 걸릴 것 같다.
-밥이나 먹어.
-그래.
가문 일생일대의 숙원인 천주백가의 대한 추격의 실마리를 놓쳤다는 생각에 상심한 제황은 휘적휘적 식당을 향해 걸어갔다. 식당을 문을 열고 들어가니 마침 식사 시간인지 꽤 많은 이들이 자리를 채운 채 열심히 밥을 먹고 있다.
제황이 식당에 들어서자 꽤 많은 이들이 자리에서 황급히 일어나 제황에게 고개를 숙였는데 그것은 제황이 현재 6성의 헌터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실상은 7성을 뛰어넘어 8성에 근접한 상태이지만 애초에 그것을 판가름해 줄 이가 전세계에 두 명 밖에 없는 건 둘째치고 7성에서부터 8성의 단계는 누군가가 판단해 주는 것이 아닌 그만큼의 업적을 세상에 증명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제황은 높은 라이센스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인사치레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제황은 그들에게 가벼운 목례를 한 뒤 배식을 받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