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4
주고받기-3
#1
궁기의 말에 제황의 표정이 우스꽝스럽게 변해버렸다.
-에이, 설마 내가 저런 술법들 따위 하나 못 풀 거로 생각한 거야?
-아니,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부분이라서 그렇지. 그래서? 다 풀었어?
-은신을 지우는 술법은 다 풀었는데 정신제어 술법은 조금 더 걸려!
-정신제어?
제황의 머릿속은 또다시 멍해졌다.
-몰랐어? 방금 넌 두 가지 술법에 당한 거야. 하나는 은신을 못 쓰게 만드는 것, 하나는 네 정신 보정을 어마어마하게 낮추는 것!
과연 상태창을 열어보니 그녀의 말대로 정신 능력치가 4 이하까지 떨어져 있었다. 다행히 마나량에는 영향을 끼치지 않지만, 정신 능력치가 이렇게 심하게 떨어져 있으면 원래의 능력을 발휘할 수 없다. 암혼보 또한 본디 검은 글씨였는데 붉은 글씨로 변해 있다.
제황은 그제야 자신이 왜 그렇게 오크들에게 당했는지 이해가 갔다.
-고마워!
-아니, 뭘 그 정도로···.
궁기가 없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
제황은 일단 몸에 난 상처들을 긴급재생으로 치유한 뒤 머릿속을 정리했다. 우습게 본 적은 없지만 생각 보다 강하다. 한 번 말리니 계속 꼬인 격이다. 생각을 정리한 제황이 이를 깨물었다.
-풀어줘.
-그래! 해제!
궁기의 말과 함께 제황은 상태창의 암혼보가 붉은색에서 본래의 검은색으로 변한 걸 발견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바닥까지 깎여 있던 정신 능력치도 본래대로 돌아 왔다.
“후우...”
한숨을 내쉰 제황은 눈을 감았다.
무려 천년의 걸친 대결에서 자신이 너무 병신같은 모습을 보였다는 생각에 제황은 쓴웃음을 지었다.
“2차전이다.”
#2
한 손에 금적령술의 수인을 맺고 있던 백린은 다른 손을 열심히 움직여 다른 수인을 맺기 시작했다. 핏빛에 마나가 꿈틀거리며 손안에 모여들었다.
“비명횡사의 장”
음울하게 올라오는 붉은 마나가 작은 구체를 이뤘다.
추적형의 스킬이며 적중하는 순간 상대의 생명력을 계속해서 흡수하는 주술로 그가 주로 애용하는 공격기 중 하나다. 당하는 이의 마나를 에너지삼아 죽을 때까지 생명력을 빨아내기 때문에 말 그대로 상대를 비명횡사하게 만드는 기술이다.
-뭐하냐? 이야기 먼저 나눈다더니? 평화주의자 후손님께서 왜 이러실까?
-흐흐, 뭐 그냥 기회 되면 그냥 죽여버리는 것도 좋을 것 같기도 하고...
-그래. 잘 생각했다.
처음으로 둘의 의견이 합치되었다. 그때 금적령술의 수인을 맺고 있던 손에서 파팍 하며 스파크가 튀었다.
“헛!”
백린이 놀라서 손을 내려다봤다.
금적령술이 깨짐과 동시에 공중에 둥둥 떠 있던 부적도 훅 하고 불타버린다.
“이게 어떻게!”
두 개의 술법이 동시에 깨질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백린이다.
무려 엔드릴의 파편을 제물로 사용해 펼친 것이었다. 백린은 빠른 속도로 다시금 수인을 맺고는 조금 전의 위치로 금적령술을 펼쳤다. 그러나 손에 걸리는 게 없다. 상대가 완전히 벗어난 것이다.
-큰일 났네. 그걸 어떻게 풀었지?
자신도 풀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한 술법이다.
특히 부적을 통해 붙인 정신계 디버프는 그의 스킬 중 하나로 상대가 아예 알아채지도 못하는 특징을 지녔다. 그런데 그 둘이 깨졌다.
결과를 통해 이야기하면 상대는 자신 정도 되는 술법가라는 뜻이 된다.
“그게 말이 돼?!”
그런 괴물 같은 공격력을 지닌 인간이 자신 정도의 술법가? 농담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끌끌, 내 이럴 줄 알았지. 이놈아. 무련천가가 그렇게 우습게 보이더냐. 오크 따위에게 맡기고 있었으니 이런 사달이 벌어지는 거다.
-아니, 뭐 우습게 본 건 아니라고요! 그리고 지금 누구 편드는 겁니까!
울상을 하며 백린은 남아있는 엔드릴의 조각들을 주위에 뿌리기 시작했다.
-뭐하냐?
-잔뜩 약이 올랐을 테니 방어술진 먼저 짜야죠!
‘비명횡사의 장’ 이라는 공격술법은 일찌감치 포기했다. 이전에 무련천가의 가주가 날린 화살 공격의 강력함을 생각하면 지금은 방어를 공고히 해야 할 때다.
-그걸로 되겠냐?
-후후, 방금 새로 만든 따끈따끈한 겁니다. 관통공격에 강점을 지닌 방어술법이니 너끈히 막아내겠죠. 한 번 막고 다시 나타나면 금적령술 한 번 더 걸고 조져버리는 거죠. 대략 5분 정도는 유지 가능한 것 같은데 그 안 에...
-뭐 좀 더 당해야 정신 차리겠군.
-말을 해도!
구시렁거리며 백린은 계속해서 방어술진을 만들어갔다. 이것은 매우 고도의 작업이 필요한 술법이지만 그는 슬쩍슬쩍 손을 뻗는 것만으로 그것을 해내고 있었다. 아마 이 술진의 복잡함을 아는 이가 본다면 기함했으리라. 능숙함을 넘어서 달인의 경지라고 말할 수 있는 진법 구축이었으니까. 그렇지만 자신이 구축한 방어술진이 너무 미약한 것에 대해 후회를 시작한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씨아아아앙!! 파아아아아앙!
“으악!”
백린은 그의 방어술진을 거세게 때려오는 충격에 속이 진탕되는 걸 느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금적령술의 수인을 맺는 건 잊지 않았다. 금적령술은 시전자가 원하는 위치 지름 100m가량의 안의 범위에 시전자에게 적대적인 이를 찾아서 은신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스킬이었다.
“그쪽이냐!”
백린은 그가 항시 발동되도록 해놓은 탐지술법이 가르쳐주는 방향을 향해 금적령술을 날렸다.
그러나 걸리는 게 없다. 얼굴에 난감한 빛이 어린다. 분명 화살이 날아온 쪽을 향해 주술을 사용했는데 빗나갔다.
“제길...”
실패한 것을 깨달은 그는 계속해서 방어술진을 구축해 나갔다.
씨아아앙! 파아앙!
“큭! 금적령술!”
계속해서 예측되는 곳을 향해 술법을 날리지만 걸리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런 그를 조롱하는 듯 화살을 계속해서 다른 방향에서 날아왔다.
오크들이 길길이 날뛰지만, 오크들도 별다른 대책이 없다.
“어떻게! 이렇게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거지?!”
백린은 고개를 저었다. 동서남북을 가리지 않고 날아오는 화살 공격으로 인해 위치를 잡아낼 수 없다.
“빌어먹을! 금적령술!”
최대한 마나를 담아 사방으로 주술을 뿌려대지만, 그러나 역시 걸리는 건 없다. 그리고 그 오답에 대한 벌칙 같은 수십 발의 강기다발이 마구잡이로 날아와 꽂혔다.
“크흡!”
이번 공격은 치명적이었다.
관통공격에 강점을 지닌다고 자신하던 방어술진이 터져 버렸다.
상대는 그의 방어술진을 말 그대로 힘으로 무식하게 찢어 버렸다.
이중으로 만든 최후의 방어술이 아니었다면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을 것이다.
충격으로 인해 공중을 날아간 백린이 바닥을 굴렀다.
그의 주변은 말 그대로 쑥대밭이 되었고 그의 주변을 지키던 오크들도 날벼락을 맞았다.
수십 마리의 오크가 떼죽음 당했다.
백린은 허망한 표정으로 주변을 돌아봤다. 이것저것 함정주술을 준비해 놨는데 모조리 엉망을 만들어 버렸다. 이것 또한 분명 노리고 한 짓이다.
-무련궁술은 화살을 수족과 같이 움직일 수 있지. 적은 계속해서 방향을 속이고 있는 거다.
-알면 좀 가르쳐 주던가!
-멍청한 놈! 알아도 못 막는 거다! 아마 네가 죽을 때까지 원거리 저격을 해댈걸?
-탐지주술은 왜 안 먹히는 겁니까.
지금까지 그의 탐지주술을 벗어난 이는 없었다. 본디 은신을 사용하는 이에 강점을 지닌 만능형 술법이다.
-네가 애용하는 탐지주술의 기본 요체는 세상의 모든 소리를 추적하는 거다. 아무리 자신을 은신으로 가려도 소리는 어쩌지 못하니까. 그렇지만 무련천가의 은신술은 최상급이다. 발사음을 잡아내지 못하면 무용지물이야. 상대가 너에 대해 분석한 것 같다. 소리 없는 화살을 쓰는 걸 보면
-소리가 없다? 그렇다면...
선조의 말에 백린은 그가 보유한 주술들을 모조리 머릿속에서 훑기 시작했다. 망각이 없는 그의 뇌는 모든 정보를 하나의 도서관 형태로 정리해 뒀다. 필요에 따라 뽑아 쓰기에 시간이 좀 필요하다.
“소리가 아닌 다른 것으로 탐지를 해야... ! 마나의 파공과 공명을 역추적!”
실마리를 찾은 그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그것을 가지고 하나의 술법을 조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생각해 낸 술법을 눈앞에 펼친 그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제길, 필요마나 2000...”
그가 가진 레전드 스킬인 ‘술(術)의주인’은 일종의 사전 시뮬레이션을 통해 술법의 조합이 가능하도록 만들어주는 스킬이었다. 별 거 아닌 듯하지만, 사전 시뮬레이션이 가능하다는 건 단숨에 수십 가지의 주술을 실패 없이 필요에 따라 조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런 식으로 만들어진 주술은 모두 마나의 소모가 극심했다. 사용은 가능하지만, 그만큼의 대가로 마나를 가져가는 것이다.
“그래도 엔드릴이 있어서 다행이군.”
금적령술을 쓸 때와 마찬가지로 필요한 마나를 엔드릴을 통해 보충할 수 있다는 게 다행이다. 조금 전 공격으로 많은 조각들이 날아가 버렸지만, 아직 몇 개 챙겨 놓은 게 있다. 백린은 엔드릴의 큼지막한 조각을 손에 쥔 채 숨을 골랐다.
“탐지주술 기(氣)”
워낙 많은 주술을 인스턴트로 뽑아낼 수 있기에 스킬의 이름은 가볍게 짓는 편이다.
주술의 준비가 끝난 그는 숨을 골랐다. 수인의 결을 맺는 것과 동시에 발사할 수 있도록 왼손에 담았다.
이제는 위치를 찾을 방법이 생겼다. 조용히 공격하기만을 기다리면 되는 것.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공격이 들어오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엄청난 화살 공격을 퍼붓더니 막상 준비가 끝나니 공격이 들어오지 않는다. 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사방을 둘러볼 때다.
-멍청한 놈!
-네?
-위다! 위!
-아니 위라는 게 무슨...
슈우우우욱! 슈슈슉슈슉! 슉슉!
“뭐! 뭐야!”
티리리리리리링!!!
밤하늘으로부터 엄청난 숫자의 화살들이 마구잡이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마치 수백 명의 궁수가 일제히 그를 향해 화살을 쏘아대고 있는 느낌이다.
그리 강력하지는 않다. 그의 방어술진에 모두 막히는 중이니까. 문제는 그 숫자였다.
마치 과거 한 번 경험했던 미니건과 비슷한 속도의 화살 공격이다. 그렇지만 이 화살공격은 미니건보다 훨씬 지독했다. 공격자의 위치도 소리도 없다. 말 그대로 묵묵히 쏟아지는 중이다.
“이, 이래서는! 빌어먹을!”
한 손만으로 방어술진을 펼치던 그는 욕지거리하며 왼손에 담아뒀던 탐지주술 기(氣 )를 풀어버리고 두 손을 머리 위로 들었다. 상대는 술사의 약점을 잘 알고 있었다. 어떤 술법이든 그 시작은 손이라는 것, 물론 그 정도 되는 술법사라면 입만으로도 술법의 발동은 가능하다. 혹은 부적을 통해 발동시키거나. 그렇지만 이 정도의 공격을 막아내기 위해서는 손을 써야 했다.
그를 위해 오크들로 주변을 둘렀지만 아까 전 강력한 강기폭격에 방패를 든 오크들은 떼몰살을 당했다. 당최 언제 끝날지 모르는 화살의 비가 계속해서 쏟아지자 그는 급한 마음에 외쳤다.
-좀 어떻게 해봐요!
-이놈아! 나도 전력을 다하는 중이다! 밑을 봐!
-헛?
선조의 말에 고개를 내리는 순간 그는 발견할 수 있었다. 그의 가슴에 걸린 동경이 공중에 떠서 맹렬히 하얀빛을 쏟아내고 있었는데 그 동경(銅鏡) 앞에는 줄기줄기 빛을 뿜어내는 화살이 하얀빛을 꿰뚫으려 계속해서 파고들어 오는 중이었다.
공중에서 내리꽂히는 공격에 정신을 팔리게 만들어 놓고는 실제 공격은 이것이었다.
-준비해라!
선조의 말에 답할 겨를도 없이 그는 이를 질끈 깨물어 입에 피를 냈다.
가급적 쓰기 싫었던 흑주술을 쓰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