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2
주고받기-1
#1
후우우우웅
저스틴포인트 앞 전장에는 기묘한 침묵이 감돌았다.
오크들은 여전히 꾸역꾸역 저스틴포인트로 향하지만, 전장의 한구석에는 마치 시간이 정지된 듯한 광경이 연출되고 있었다. 저스틴포인트에서는 간간이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는데 그게 누구인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법하다.
“취익! 주군을 해한 놈이 근처에 있다!”
1만에 달하는 정예오크들이 백린과 헬칸의 시체를 중심으로 정체 모를 적과 대치 중이다. 주군의 곁에 붙어 있는 인간남자의 신원보증은 헬칸과 오랜 세월 함께 했던 한 제사장이 그의 얼굴을 알아봄으로 해결되었다.
제사장은 헬칸을 공격한 이를 찾아 모든 오크를 동원하려 했지만 그건 백린이 말렸다.
그가 선조에게 들은 무련천가는 수색으로는 절대 찾을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그렇기에 이렇게 기묘한 대치상황을 유지하고 있었다.
물론 마냥 기다리는 건 아니다. 그도 믿는 구석이 있다.
-대제사장이 오면 한 번 붙어볼 만할 겁니다. 이야기를 들으니 전속으로 달리면 내일 새벽에는 도착한다니 기다리면 됩니다. 그리고 그거 말고도 방법은 많아요.
-웃기고 있네! 적은 사신이다. 피도 눈물도 없는 노련한 사냥꾼임과 동시에 최강의 암살자야.
-압니다. 알아요. 노친네 X 알이 쪼그라들어서···.
-이노옴! 넌 모른다.
-맞습니다. 저는 모릅니다. 그렇지만 이제 제 나이 여든셋입니다. 먹을 만큼 먹었고 겪을 만한 일은 다 겪었다고요. 그리 쉽게 당하지는 않습니다.
-흥! 여든 먹은 노인네라는 놈이 아직도 만화책이나 보고 다니냐.
-그러게요. 그 버릇은 못 끊네요. 후후후
백린이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그렇다. 믿지 못하겠지만 그의 나이는 여든셋이었다. 무려 대융합 시대를 겪은 세대였다.
-지겹네요.
-멍청한 것. 벗어나라. 이곳에서는 네가 이기기 힘들다.
-하, 수만에 달하는 오크들 사이에 보호받고 있는데도 위험하다고요?
-흥. 수만이 아니라 수십만에 둘러싸여 있어도 소용없다.
-상대를 너무 과대평가하는 것 아닙니까? 오크 수십만이면 국가 전복도 노릴 수 있습니다.
-그것들이 너를 지켜주지는 못하지. 명심해라. 넌 천주백가의 마지막 적통이라는 것을...
-압니다. 후우.
선조의 말에 백린은 과거를 떠올렸다.
그래 그날이다. 그는 군대를 제대한 기념으로 일본에 놀러 갔다. 과거에도 만화책을 구하러 몇 번 가기는 했지만, 이번에는 야스쿠니 신사라는 걸 한번 보고 싶었다. 무슨 마음으로 갔는지는 모른다. 그냥 무작정 끌려서 떠났다. 야스쿠니 신사도 보고 황궁도 한 번 보고 그냥 그런 마음이었다. 그때는 몰랐다. 그날이 가족과의 마지막이었을 줄이야.
도쿄에 도착해 야스쿠니 신사 근처 토쿄역에 첫발을 내딛던 날 그날이 하필이면 게이트가 열린 그날이었다. 대융합···. 세 개의 차원이 처음으로 부딪힌 날... 거대한 게이트가 열리고 갖가지 몬스터들이 튀어나와 일본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했다.
평소 지진대피훈련이 생활화된 일본인들이었기에 일사불란하게 도망치는 듯싶었다.
그러나 그것도 산더미 같은 덩치의 몬스터가 사람들을 육포 만들 듯 쫙쫙 밟아버리자 모두 미쳐서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렇게 사람들에게 이리저리 떠밀려 그가 도착한 곳은 야스쿠니신사의 근처에 있는 일본 천황의 고궁이었다.
그리고 그는 마치 홀리듯 어딘가로 끌려 들어갔다.
처음 가는 곳이었지만 그는 누가 이끄는 것처럼 계속해서 깊숙한 지하로 향했다. 지키는 이들도 없었다. 아니 그 와중에 지키는 이들을 찾는 건 무리였으리라.
그리고 그리 크지 않은 그러나 낡고 오래된 자물쇠와 거대한 금줄 비슷한 게 치렁치렁 걸린 문을 발견했다. 그곳이 일본 황가의 보물창고였다. 지겨운 인연이 끈이 잠들어 있는 곳
후일 물으니 자신을 불렀던 건 바로 그였다고 한다. 족보를 까마득히 거슬러 올라가야 찾을 법한 그의 선조... 천주백가의 마지막 가주였던 백일기의 혼이 수십 세대를 거쳐 자신의 후손을 불러들인 것이다. 아주 더럽게 끈질긴 조상이다.
낡은 동경에 봉인되어 있던 선조와의 첫 만남은 그리 유쾌하지 못했다.
당시 그가 한 짓으로 인해 대략 10년간은 거의 원수 보듯 했었다.
그도 안다. 분명 그날 선조를 만나지 못했다면 그는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후일 그는 그 만남이 저주라는 걸 깨달았다. 그를 한국에서부터 부른 건 선조였고 만약 그때 한국에서 부모님 곁에 있었다면 부모님과 여동생을 살릴 수 있었을지도 몰랐으니까.
그렇지만 그건 이미 먼 과거다.
-뭔 헛생각을 하느냐. 어서 빨리 천주축지술을 펼치래도!
-좀 있어 봐요. 무작정 도망쳐서 일이 해결됩니까? 상대가 아무리 무련천가라고 해도 사람인데 말은 통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무슨 나쁜 짓 하는 것도 아니고... 뭐 중간 과정에 나쁜 짓 좀 하긴 했지만...
악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어디 내놓고 다닐 정도로 떳떳한 짓도 아닌 건 그도 안다.
주술을 실험하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했고 그를 위해 천황클랜과 적당한 거래를 했었으니까.
그렇지만 그들이 삼천교와 거래를 시작하고 그의 주술이 삼천교로 흘러들어가는 것을 안 백린은 어떤 외국여자를 가르치는 것으로 그들과의 인연을 끊었다.
삼천교는 후일 오크들을 통해 정리할 생각할 생각이었다.
-크흐흐흐. 넌 그놈들을 모른다. 일단 널 시체로 만든 다음 차분하게 대화를 시작하려고 할걸.
-흥. 그러니까. 처음부터 죄를 짓지 말던가. 이게 뭡니까.
-뭐야?
-그렇잖습니까. 사실 까놓고 세상에 이런 일이 벌어진 근본적 이유가 뭡니까?
백린의 타박에 노인의 입이 처음으로 다물어졌다. 그렇다.
세상에 이런 괴기스러운 일이 일어난 근본적 이유...
차원이 합쳐지고, 몬스터가 나타났다.
사람들은 인류의 종말이라고 떠들었고 실제로 종말 할 뻔 했다.
그리고 그 범인은 바로 바로 천주백가였다.
-아니, 돌아가셨으면 그냥 얌전히 승천하시지 무슨 미련이 남아 동경 따위에 혼을 봉인하신 겁니까.
-그건 우리 천주백가의 명맥을 잇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내가 죽으면 백가의 모든 주술을 사라지니까!
-그냥 싸놓은 똥은 치우고 가야겠다는 생각은 안드시고요?
-흥! 난 후회하지 않는다. 끊임없는 탐구! 술법의 끝을 본다! 신의 힘에 한 걸음 더 나아가라! 그래! 그 모든 것의 시발점! 성산! 그리고 무련천가! 난 부러웠다! 무련천가가 가진 그 힘! 신벌의 화살! 삼신가 중 유일하게 허락된 그 힘! 그걸 연구할 수만 있다면 신의 힘에 한 발 더 가까이 갈 수 있었으니까! 그래서 흑룡을 끌어들였고 삼신가를 이간질시켰고 여의보주를 훔치려 했다!
-네네. 또 미쳐 돌아가시는 우리 선조님. 주술에 미치신 우리 선조님. 주술 빼고는 아무것도 관심이 없으시죠. 그래서 혼만 남으셔서도 일본놈들을 꼬셔서 주술 가르쳐 주면서 음양사들을 키우고 그들을 살살 구슬려서 교토에 집법천마진을 설치하시고 실험삼아 차원 결계를 찢으셨군요.
-이놈아! 그건 좀 더 원대한 계획이었다. 세 개의 차원이 하나로 되는 것은 좀 더 완전한 차원이 된다는 뜻!
보아라. 태고적 신의 힘에 의해 세 개로 찢어진 차원이 다시 합쳐짐으로 다시금 인간의 영혼에 잠들어 있던 이능들이 깨어나지 않았느냐! 인간이 본래 가지고 있던 힘! 차원의 격이 올라갔다는 뜻이다. 먼 미래에는 모두 우리 천주백가를 칭송할 것이다.
인류에게 한정된 종말의 모래시계 속 모래의 양을 우리가 늘린 거니 말이다.
-이야기는 똑바로 하시죠. 그 짓으로 죽어간 인간이 당시 수십억이었습니다. 신이 할 일이 없어서 차원을 나눴겠습니까! 그리고 일을 벌이셨으면 수습할 방도도 해놓으셨어야죠!
-시간이 없었다. 차원결합에 겁먹은 그 음양사놈들의 수장 세이메이놈이 나를 봉인하리라고는... 그리고 그 당시 찢어놨던 차원의 틈이 그렇게 커졌을 줄은...
-네. 그래서 이 후손이 늙어 죽지도 못하고 망각도못하는 몸이 되어서 조상님이 치신 사고 수습하러 빨빨거리며 돌아다니고 있죠.
-망각이 없는 건 우리 백씨 가문의 혈통을 깨운 것뿐이다. 늙지 못하는 건, 미안하구나.
노인은 사과했다.
늙지 않는다는 것. 축복일 듯 보이지만 이건 그에게 저주와도 같았다. 선조와 처음 만난 그 보물창고에서 선조는 그에게 대뜸 시간을 붙잡는 술법을 걸어버렸다.
여든을 살면서 사랑하는 이 하나 만나지 않았겠는가. 그렇지만 그 사랑하는 이와의 시간적 괴리는 그에게 인간이라는 자각을 지키기 힘들게 만들었다.
“아무튼, 저는 피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비록 가문의 업이든 제가 지은 죄로 인한 것이든. 그리고 그만한 힘도 갖췄다고 생각합니다.”
그 말과 함께 백린이 뒤에 맨 태도를 쓰다듬었다.
천황가의 삼신기 중 하나였던 이것. 일본놈들은 쿠사나기의 검 어쩌고 하지만 봉인을 푼 진정한 모습은 삼신가 중 하나인 창궁신가의 신물인 창궁룡검이었다. 삼신가의 힘 중 전쟁을 담당하던 창궁신가를 상징하는 보검. 비록 창궁신가의 힘을 잇지는 못했지만 오크로드의 무기였던 엔드릴과 비견되는 강력함을 가지고 있었다.
-후우, 그래. 안다. 그래도 일단 이곳을 먼저 벗어나는 게 어떠냐.
-아직입니다. 그런데 대체 저놈은 언제 움직일지 모르겠네요.
-흥. 멍청한 놈. 넌 다행인 줄 알거라. 지금 저쪽에서 가만히 있다는 건... 널 확실히 끝장낼 수단이 없다는 소리다. 신벌의화살은 저 헬칸놈에게 썼을 테니 그나마 다행이군. 그렇지만 만약 널 죽일 확실한 수단이 갖춰진다면 내 말대로 도망치지 않은 걸 후회하게 될 거다.
-네네. 알겠습니다. 굳이 그러지 않으셔도 저도 준비하고 있습니다. 오크들도 있고요.
-흥. 저것들을 뭘 믿고...
-두고 보십시오. 저도 구르고 구른 놈입니다. 놈은 저에게 시간을 준 걸 후회하게 될 겁니다.
#3
“백린이라는 놈이겠지?”
“모르지.”
바스락...
“좀 조용히 먹어.”
“아, 먹는 것 가지고 타박이야.”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는지 알면 그런 말은 못 할 텐데?”
“어머, 자연의수호자! 이세계의 자연까지 걱정하는 거야?”
“닥쳐. 간식벌레”
제황은 지금 궁기가 까놓은 초콜릿 껍데기를 하나하나 주워서 무한고에 집어넣고 있다. 흔적을 남기지 않는 버릇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줍고 있다. 필생의 대적을 눈앞에 두고 쓰레기나 치우고 있으니 날카롭게 세운 감각이 절로 무뎌지는 것 같다.
“너무 그러지 마. 난 지금 끓어오르는 화를 참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먹는 거야.”
“핑계 좋다. 그만 먹고 들어가.”
“쳇! 알았다.”
혀를 찬 궁기가 붉은 연기로 변해 사라졌다.
한숨을 내쉰 제황은 몸을 낮추고 골짜기 밑을 내려다봤다. 가장 완벽한 공격을 위해 택한 곳은 저스틴포인트 옆으로 나 있는 상당히 가파른 절벽이었다. 천주백가로 추정되는 이와의 거리는 약 900m. 다른 이라면 모르겠지만 제황에게는 가장 이상적인 공격 범위다. 공격과 추적, 이탈이 가장 적당한 위치임과 동시에 말썽꾸러기 궁기가 간식을 까먹기도 가장 안전한 곳이다.
-먼저 움직이지는 않을 것 같은데? 시간이 지나면 네가 불리한 거 아냐?
-뭐 그건 그렇지.
궁기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제황도 알고 있다.
5호가 보내 준 몇 가지 자료가 있었는데 그 자료에는 오크들의 새로운 군세가 곧 합류한다고 되어 있었다.
저 천주백가의 놈이 오크들과 친분이 있는지 오크들은 놈의 편이다. 만약 오크의 새로운 군세가 도착한다면 오크들이 조직적으로 수색에 들어갈 것이다.
-차라리 빨리 왔으면 좋겠군.
-왜?
-조금이라도 움직일 테니까.
수만의 오크가 더 추가된다고 해도 상관없다. 그 이유는 제황은 지금 전쟁을 하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천주백가만 죽이면 된다.
-움직여라.
제황의 눈이 매섭게 빛났다. 그리고 그 말에 화답하듯 드디어 백린이 먼저 행동을 시작했다. 갑자기 허공중으로부터 수십 개의 기둥이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둥들에 둘러싸인 오크들이 갑자기 부들부들 떨며 괴성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끄어어어억!”
“크으윽!”
오크들의 피부가 붉게 변함과 동시에 거대해지기 시작했다. 일반적인 오크들의 거의 세배 가까이 커져 거의 거인의 형상이 된 그것들의 숫자는 총 스물이다.
-적혈마인이군.
그렇다. 나타난 것은 적혈마인이었다. 과거 천황클랜의 암살대인 사사키가 부하들의 피를 제물로 변신했던 그 마물이다. 나타난 적혈마인의 크기는 예전에 봤던 그것보다 훨씬 거대했다.
-무슨 속셈이지?
제황이 고개를 갸웃했다. 셀 수 없는 오크들에게 둘러싸여 있으면서 굳이 저런 걸 만든 이유가 떠오르지 않는다.
-방패 대용이겠지. 예전에도 그렇게 써먹던 것들이니까.
-그런가?
궁기의 말이 틀리지 않는지 그것들은 촘촘히 원을 만든 채 어디론가 이동하기 시작했다.
-도망이라면 한심하군.
제황은 그 원 중심부에 그려진 붉은 원을 보며 혀를 찼다.
그 오랜 시간 동안 궁리해 낸 것이 고작 저것이라면 정말 실망이다.
우드드득
애기살이 들어간 비천격을 시위에 걸고 턱밑까지 당겼다. 비록 신벌의화살을 쓰지는 못하지만 그의 무기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만약 내놓은 답이 저것뿐이라면 이게 답이다.
‘춤추는 강기의 소나기!’
파아아앙!
강렬한 소닉붐을 일으키며 애기살은 선과 같이 되어 목표물을 향해 날아갔다. 한 발의 화살을 날림과 동시에 다시 한 대의 애기살을 시위에 건 제황이 이번에는 공중을 향해 한 발을 쏘아 올렸다.
‘비상하며 춤추는 강기의 화살’
파아앙!
적혈마인들을 향해 일직선으로 날아간 애기살이 우산과 같이 쫘악 하고 펼쳐짐과 동시에 적혈마인들을 향해 소나기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전에 사사키와 싸우던 제황과 지금의 제황은 전혀 다른 존재다. 그리고 스킬 또한 훨씬 강해졌다.
“우어억!”
“크아아악!”
몸집만 거대한 그것들은 강기의 소나기를 이겨낼 재간이 없었다. 기껏해야 육체적인 단단함 뿐이다. 절반의 적혈마인이 쓰러졌고 순간 잠시나마 방어벽이 허물어졌다. 동시에 공중으로부터 수직으로 내리꽂히는 두 번째 붉은 빛줄기!
퍼어어어어엉!
빛줄기가 내리꽂힌 순간 나머지 적혈마인과 그 주변에 있던 오크들이 삽시간에 짜부라들며 피떡이 되어 버렸다. 마치 중력에 눌려버린 듯 둥근 원이 파였다. 그 공격으로 적혈마인과 그 주변에 있는 오크 백 여마리가 단숨에 죽었지만, 제황은 오히려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 이것은 그가 연출한 상황이 아니다.
-어째서?
두 번째 공격으로 중심에서 보호받고 있을 붉은 점을 일격에 꿰뚫으려 했는데 마치 충격이 분산되듯 주변에 있던 오크들이 죽어 나간 것이다. 불길함이 머릿속을 스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