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9
줏어먹기-3
#1
“폭파준비시키세요. 외성벽을 파괴하고 시간을 벌어야 합니다.”
소피아가 차갑게 말했다.
“그렇지만 아직 교도들이...”
쫘아악!
그녀의 곁에 서 있던 십이사도 중 하나가 단숨에 운용요원의 목을 베어버렸다. 무엇으로 베었는지도 모르게 스치고 사라지지만 공중으로 분리된 남자의 머리가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허엇”
조금 전까지만 해도 곁에서 함께 일하던 수석운용팀장의 목이 떨어지는 것을 본 남자가 서둘러 스크린에 폭파시스템을 띄우고 빠른 속도로 걸려있던 락을 풀기 시작했다.
저스틴포인트는 엘어스에 위치하기에 폐쇄 전산망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렇기에 몬스터들에게 함락이 되는 최악의 상황을 고려해 지구에서와 같은 외부승인절차가 없이 단독으로 폭파를 실행할 수 있었다.
폭파는 총 세 개로 구분되어 있었는데, 외성벽, 내성벽, 그리고 저스틴포인트 자체를 폭파시키는 것이었다. 지금 그들이 하려는 짓은 외성벽 폭파였는데 문제는 이제 막 밀려 들어오는 오크와 삼천교도들이 난전을 벌이고 있기 때문이었다.
“락 해제! 폭파 절차 진행 들어갑니다!”
모든 스크린이 붉게 변하고 [접근금지] 와 [위험] 이라는 글씨가 빠르게 오가는 속에 하나의 창이 떴다.
꿀꺽...
침을 삼킨 그는 수석운용팀장이 목에 걸고 있던 열쇠 두 개를 피바다 속에서 간신이 주워들어 패널 밑에 숨겨진 열쇠 구멍에 끼워 넣었다. 부들거리는 손으로 간신히 끼워 넣는다. 이걸 돌리기만 하면 외성벽 곳곳에 설치된 폭발물의 시한장치가 할 수 있는 창이 뜬다.
“시간은 1분! 가동 즉시 외성벽지휘부를 버리고 중앙지휘실로 이동합니다.”
수석이단심문관의 단호한 음성에 그는 침을 꿀꺽 삼켰다.
1분이란다. 말 그대로 지금 이 외성벽 안에서 싸우고 있는 이들을 모두 매몰시키겠다는 뜻이다. 1분이면 자신도 도망치지 못할 수 있다. 그렇지만 잠시라고 고민하면 곧바로 자신의 목이 떨어지리라.
그는 이를 질끈 깨물고 열쇠를 돌리고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키보드에 1분을 입력했다.
“탈출!”
“탈출합니다!
외성벽지휘부에 있던 이들 중 대부분이 이미 밖으로 뛰쳐나가고 있다. 조금이라도 늦으면 자폭에 휘말려 뼈조차도 남기지 못한다.
”크라락! 인간이다!“
어느새 복도는 오크들이 점령하고 있었다.
콰쾅!
십이사도 중 하나가 전력을 다해 한쪽 벽을 후려갈겼고 그곳에는 곧 거대한 구멍이 생성되었다.
타탁! 탁!
달려오는 오크들을 무시하고 그들은 빠르게 구멍을 통해 빠져나갔다. 몰려오던 오크들이 구멍 앞까지 쫓아와서는 구멍에서 지상까지의 높이가 상당한 것을 보고는 분한 듯 발을 쿵쿵 굴렀다.
그러나 그들은 더이상 저들을 머릿속에 담아둘 필요가 없어졌다.
잠시 후 외성벽 지하에 매설되어 있던 수 톤의 폭발물이 일시에 터졌고 삽시간에 외성벽을 수직으로 박살 내며 하늘 높이 뻗어 올라갔기 때문이다.
#2
”윽!“
제황은 외성벽 전체를 박살 내는 것도 모자라 수직으로 뻗어 올라가는 거대한 불의 벽에 얼굴을 돌렸다. ‘악몽의군주’ 세트가 열기를 막아주고 있기는 하지만 그걸 제외하고서라도 엄청난 빛이다. 아니 너무 강렬하기에 그 후에 들려오는 맹렬한 폭발음과 후폭풍이 덮치자 서둘러 몸을 날렸다.
콰콰콰콰콰쾅!!!
외성벽이 일제히 폭발해 버렸다. 오렌지빛으로 모든 것을 녹이며 솟아오르는 불꽃은 쳐다보는 것만으로 눈이 뜨거워진다. 아니 실제 외성벽 근처에 있던 오크들은 그대로 구워져 버렸다. 내성벽 쪽은 조금의 손상도 주지 않은 채 외성벽과 외부로만 뻗어 나간 그 폭발은 순식간에 수천의 오크들을 감각적으로 떼몰살 시켜 버렸다.
”휴우“
몸을 날려 근처의 건물 옥상에 착륙한 제황은 아직도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약 20여미터의 이글거리는 불꽃의 벽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제황도 알지 못했다. 어렴풋이 그런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했지만, 길이만 약 700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외성벽이 일시에 터져 나갈 줄은 상상치 못했다.
”아차!“
그러다가 문득 잊고 있던 걸 깨닫고 서둘러 태블릿을 꺼내 들었다.
채팅방에 들어가 보니 몇 개의 글이 올라와 있다. 그것을 다 읽어 내려간 제황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곳에는 안전하게 탈출에 성공해 근처에 대기하고 있던 무적성의 구조대와 조우했다는 메시지가 들어 있었다. 만약 그들이 제때 도망치지 못했다면 아마 저 불꽃에 가로막혀 옴짝달싹하지 못했으리라.
”그건 그렇고 질기군.“
제황은 궁기안에 포착되는 그것을 바라보고는 눈을 빛냈다. 아무것도 살아남지 못할 그 불꽃 속에서도 ‘그것’ 은 여전히 생생한 생명력을 내뿜고 있었다.
후욱
불꽃이 둘로 나뉘며 글레이브를 손에 쥔 오크로드가 어슬렁어슬렁 빠져나왔다.
마치 온몸을 보호하는 듯한 검은 막을 두른 오크로드는 타버린 장갑들을 탁탁 털어버렸다.
”크르르, 타라크 루쉼“
성한 것이 별로 없어 대번에 팬티만 간신히 건진 게 마음에 안 드는지 인상을 쓰던 오크로드는 문득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제황을 올려다보더니 인상을 확 찡그렸다.
”크라악! 케라타스 타케!“
”뭐라는 거야. 병신“
욕 비슷한 것을 하는 것 같은데 그다지 볼일이 없는 제황은 그대로 몸을 날려 그 오크로드에게서 멀어졌다. 그러나 그는 제황을 놓칠 생각이 없는지 그대로 몸을 날려 제황을 쫓기 시작했다. 돌진도 무식하기 짝이 없다. 건물벽을 박살 내며 일직선으로 솟구쳐 오른다.
쩌적! 퍼어엉!
건물벽을 수직으로 박살내며 올라오는 그 오크의 행동에 제황은 혀를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계획대로라면 아직 녀석과는 만나서는 안 된다. 뭐 계획이라는 게 언제나 생각대로만 흘러갈 수 있겠는가만은 하필 재수 없이 놈과 만나버린 것이다. 그렇지만 그다지 두렵지는 않다.
녀석이야 예전에 공격을 막아낸 경험이 있기에 잡기만 하면 죽일 수 있을 거로 생각하는 것 같지만 당시에는 단지 순수한 공격력에서 밀렸을 뿐이다. 싸움은 공격력만으로 하는 게 아니다. 사냥꾼이 언제 자신의 무기를 믿고 싸우던가. 머리로 싸우지.
”네 적은 내가 아니잖아.“
”카녹 타그스 파우!“
”알아듣지도 못한다. 그건 그렇고 힘은 정말 좋군.
제황이 사뿐사뿐 뛰어 건물 옥상들을 뛰어다니는 것과 다르게 오크로드는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박살 내며 날아다니고 있다.
“성가시네.”
“움 더 우르크아!”
돌진만 피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오크로드가 들고 있는 거대한 글레이브가 한 번 휘둘러 질 때마다 소름끼치도록 날카로운 강기가 날아온다. 궁기안으로 모두 포착되기에 그것들을 피해 날고 있지만 이렇게 술래잡기를 하고 있으면 ‘효율’ 이 떨어진다.
“아, 그러면 되겠군.”
오 분여 가량 오크로드와 술래잡기를 하던 제황은 테블릿을 꺼내 들었다. 공중제비를 돌며 도망치는 와중에도 제황의 두 손은 테블릿을 가볍게 쥐고 있다.
-5호님? 어디 신가요?
잠시 후 채팅창에 메시지가 떠오른다.
-수석이단심문관과 중앙지휘실로 이동 중입니다.
-지금 제가 오크로드를 단독으로 유인 중인데 그쪽에 말해주시죠. 함정을 파자고...
-아, 그런가요. 좋아요. 제가 잠시 후 위치 정보 보내 드릴 테니 10분만 더 유인하다가 데려와주세요.
-네. 그리고 함정이 발동되는 즉시 피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수석이단심문관과 함께 있는 5호와의 채팅을 마친 제황은 위치정보까지 확인한 후 서둘러 태블릿을 무한고에 집어 넣었다. 오크로드가 다른 종류의 공격을 시작했는데 꽤 머리를 썼다.
콰아앙!
자신이 제황보다 속도에서 현격히 밀린다는 것을 인지했는지 공격 방법을 바꿨다. 글레이브로 건물을 풀스윙하듯 두들기자 폭발하듯 터져나간 수 백 개의 파편들이 제황을 덮쳐 왔다. 덕분에 제황도 그 파편에 두들겨 맞았다.
“윽!”
파편에 두들겨 맞은 가슴이 얼얼하다.
순수한 용력과 마나가 결합하여 낸 공격력은 정말 무시무시했다. 가슴 부분을 주무르며 다른 건물 위에 내려선 제황은 히죽 웃고 있는 오크로드를 바라보고는 마주 웃어줬다.
“웃기는...때리니까 좋냐?”
“타라 쉬름카락”
여전히 뭐라고 하는지는 알아듣지 못하겠지만 하나는 확실했다.
“넌 좀 더 진지하게 상대해 줘야겠구나.”
말을 마친 제황은 머리에 쓰고 있던 풀페이스 헬멧을 벗어 무한고에 넣었다. 그러자 오크로드가 고개를 갸웃한다. 적을 앞에 둔 상태에서 방어구를 벗는 것이다. 자신의 공격을 맨몸으로 받을 게 아니라면 하나라도 더 껴입어야 정상이 아닌가.
그렇지만 제황이 노린 건 간단했다. 그냥 ‘악몽의군주’ 의 세트효과를 없애버렸다.
‘암혼보’
슈르륵
제황의 몸이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렸다.
“병신아. 술래잡기 난이도를 올려보자.”
#3
“이런 빌어먹을!”
헬칸은 놈이 서 있던 곳을 엔드릴로 두들기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투구를 벗기에 무슨 짓을 하려는가 싶어 잠시 공격을 멈춘 게 실수였다.
“나와라! 비겁한 인간 놈!”
퍼퍼퍼퍼퍽!
엔드릴로 사방을 쓸며 파편을 날렸지만 걸려드는 건 없다.
어이없게 놓쳐버린 것이다. 허탈함에 헛웃음이 날 지경이다.
그렇지만 후회는 언제나 늦다. 헬칸은 놓쳐버린 사냥 감에게서는 신경을 끄고 지금 그가 서 있는 곳이 어딘지 둘러봤다.
인간들의 주거지구인 것 같은데 비슷한 건물이 다닥다닥 붙어 있고 사이사이로 나무들이 보인다.
퓨퓨퓨퓽!
그때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불꽃 소리와 함께 수십 발의 미사일이 날아올랐다.
“크르륵, 저곳에 인간들의 쇳덩어리 무기들이 모여 있는 모양이군.”
자신의 전사들을 학살하는 무기들이 모여 있는지 그곳에서는 쉴새 없이 불꽃의 꼬리를 단 쇳덩어리들이 솟구쳐 오르고 있었다. 저절로 이가 갈린다. 폭발에 휩쓸려 덧없이 죽어간 부하들이 떠오른 것이다.
“너무 많이 죽었어. 제길.”
욕지거리를 내뱉은 헬칸이 몸을 돌렸다.
피해가 너무 컸다. 승리가 기정사실이기는 하지만 이번 피해가 너무 커서 어쩌면 이 부근에서 물러나 부족으로 돌아가야 할 수도 있다. 조금의 피해라도 줄이기 위해 그는 저 인간들의 쇳덩어리를 부수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마음을 먹고 몸을 돌리는 순간 뒤통수가 얼얼할 정도로 강력한 충격이 덮쳐 왔다.
“큭!”
마나로 보호받고 있건만 충격이 커서 헬칸의 몸이 휘청였다.
너무 뜻밖의 공격에 어리둥절하고 있는 그의 눈에 저 멀리서 자신을 바라보며 히죽 하고 웃고 있는 인간 놈이 보인다. 손도 휘휘 젖는데 손가락 모양이 이상하다. 웬지 기분이 더러워진다.
“저 육시랄...”
쥐새끼처럼 도망칠 때는 언제고 비겁하게 공격이라니... 저 정도 힘을 지닌 주제에 긍지도 없고 부끄러움도 모르는 것일까.
퓨퓨퓻!
“흥”
티티팅!
인간 놈이 날린 화살은 강력하기는 하지만 자신을 위협할 수는 없다.
화살을 가볍게 쳐낸 헬칸은 다시금 엔드릴을 움켜쥐었다. 저 짜증 나는 쇳덩이도 거슬리지만, 이 인간을 두고 지나칠 수는 없다.
“네놈의 씹어 삼키고 네 힘을 가지겠다. 영광으로 알도록”
헬칸은 엔드릴을 양손으로 쥔 채 힘을 줬다. 그러자 엔드릴은 마치 처음부터 그랬다는 듯 둘로 나뉘었다. 그가 사용하는 엔드릴은 두 가지의 방식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큰 공격을 쓸 수 있는 글레이브 형태와 빠른 방어와 공격이 가능한 쌍수무기 형태다.
과거 엔드릴 오크의 시조가 오크의 신 카녹에게 하사받은 신이 내린 무기.
슈슈슛
다시금 세 대의 화살이 날아왔지만 헬칸은 그것을 단봉으로 가볍게 쳐낸 뒤 밉살스러운 인간에게 돌진해 들어갔다.
슈르륵
은신을 사용하는지 공기 중에 녹아들지만, 자신에게도 그것을 깰 비장의 무기 정도는 있다.
우우웅!
헬칸은 온 사방에 마나를 퍼뜨렸다. 꽤 많은 마나를 소모하기에 자주 쓰지는 못하지만 이것이라면 놈을 잡을 수 있다.
“거기냐!”
헬칸은 그의 수족과도 같은 마나 속에 포착되는 적의 위치를 향해 엔드릴을 휘둘렀다.
티잉!
처음으로 손에 뭔가가 걸렸다. 동시에 은신이 풀리며 조금 놀란 표정의 인간 놈이 보인다.
“죽어랏!”
헬칸은 재차 엔드릴을 휘둘렀다. 그러나 적은 미꾸라지처럼 그것을 피했다. 그리고는 또다시 도망친다.
“전사의 수치 같은 놈!”
헬칸은 화가 머리끝까지 뻗쳤다.
놈은 전사도 아니다. 물론 그 말을 제황이 들었으면 당연히 ‘응’ 이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제황은 전사가 아닌 사냥꾼이니까.
그렇지만 서로 언어를 통한 커뮤니케이션은 통하지 않기에 그때부터 몸을 이용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물론 그것은 헬칸의 일방적인 돌격과 제황의 은신과 스피드를 이용한 술래잡기일 뿐이지만 둘은 그렇게 저스틴포인트의 건물 사이를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한참을 쫓아다녀 이제 머리에서 김이 피어오를 것 같은 헬칸은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유인이었다. 놈은 도망치는 게 아니었다. 같은 곳을 빙글빙글 돌고 있을 뿐이다.
너무 열 받은 나머지 이제야 그걸 자각한 헬칸이었다. 그렇다. 너무 늦게 자각했다.
그리고 아래쪽에서 치고 올라오는 엄청난 뭔가를 발견하고는 무의식적으로 엔드릴을 들어올려 그것을 막았다.
퍼어어어어엉!
“크아악!”
헬칸의 입에서 처음으로 비명다운 비명이 터져나왔다.
강렬한 충격과 함께 헬칸은 자신의 몸이 떠오르는 걸 느꼈다.
지금껏 느껴보지 못했던 엄청난 충격이다. 그것을 막은 엔드릴을 쥔 팔에 감각이 없다. 헬칸의 몸이 하늘로 끊임없이 솟구쳐 올라갔다.
“명중!”
얼핏 밑을 보니 자신을 향해 겨누어진 요상한 모양의 긴 쇳덩이가 보인다. 스파크가 이글거리는 그 쇳덩이에서 쏘아진 뭔가가 자신을 두들긴 것이다.
“커억!”
헬칸은 입에 피를 토하며 계속해서 공중으로 치솟아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