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6
방어전-2
#1
소피아는 이번 공격으로 헬칸을 끝장낼 수 있다고 자신했다. 이때를 위해 사용치 않고 숨긴 비장의 무기다. 헬칸은 절대 꿈에도 생각지 못할 인간이 발명한 최고이자 최악의 발명품이 그녀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다. 이것이 그녀가 수십만의 오크를 앞에 두고서도 자신했던 이유이기도 했다.
그때 관제사가 숨 가쁜 목소리로 외쳤다.
“오크 진영 우측 2개 군단 출진이 관측되었습니다. 중갑 방패군단 하나! 하나는 정예특수군단인 검은이빨투사단으로 보입니다!”
관제사의 외침에 소피아는 헬칸이 승부를 걸려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검은이빨투사단은 엔드릴오크들의 정예 궁사부대다. 저번 저스틴포인트공략때 괴멸에 가까운 공격을 당했다고 알려졌는데 그 짧은 시간 그것을 복구해낸 것이다.
그들도 어찌 보면 아투르칸만큼 위협적이다. 투사무기가 그다지 발전하지 않은 오크들 답지 않게 마나를 이용한 원거리 공격을 할 수 있는 정예들이기에 외성벽에 직접적인 타격이 가능했다.
“음, 빠르게 승부를 보려는 건가요.”
소피아는 생각했다. 헬칸이 이 지루한 줄다리기를 끝낼 승부수를 꺼내 든 것이라고... 그렇지만 그녀는 명령을 바꾸지 않았다.
“모든 미사일은 헬칸을 조준합니다!”
저들의 공격으로 이 힘의 줄다리기가 오크 쪽으로 기운다고 해도 헬칸 하나를 잡아낼 수 있다면 자신들의 이득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2
“음, 저 녀석 나왔네.”
기계처럼 화살을 날리던 제황이 전장 한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굳이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느껴질 압도적인 존재감에 저절로 고개가 돌아갔다.
“장관이네. 멋있네.”
궁기가 난간에 턱을 괴고 엎드려 그다지 감흥 없다는 듯 고저 없는 감탄사를 남발한다.
“심심해?”
제황이 물었다. 그러자 궁기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어, 미치겠어. 화신체라도 써줄까?”
“아니, 그건 좀 나중에...”
제황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화신체를 쓰면 지금 경험치 올라가는 속도가 좀 더 빨라지겠지만 나중을 위해 아끼는 중이다. 수만의 오크들과 대치하고 있는 일반인이 보면 오금이 저려 움직이지도 못할 이곳에서 무슨 아끼고 자시고 하겠지만 제황은 아직 두 단계 정도의 여력을 남긴 채 전투 중이었다.
“우으, 몇 시간째야.”
“이제 고작 두 시간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잖아. 드라마라도 보던가.”
“그건 좀 아니지.”
제황의 말에 그녀의 귀가 쫑끗 섰지만 이내 풀죽은 듯 추욱 쳐졌다.
아무리 속이 없어도 제황은 열심히 일(?)하는 중인데 자신이 놀면 되겠는가.
“괜찮으니까. 보.. 음?”
궁기에게 부드럽게 말하던 제황이 문득 시선을 돌려 헬칸이 출현한 반대편으로 시선을 돌렸다. 헬칸 만큼은 아니지만 무시무시한 군기를 뿜어내는 오크군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두 개의 무리인데 한쪽은 상당히 낯이 익은 놈들이다.
“그때 그 활을 쓰던 놈들이군.”
제황은 어렵지 않게 그들이 누군지 떠올렸다. 예전에 자신의 공격에 괴멸되다시피 했던 기억의 놈들이다. 오크들답지 않게 명중률도 엄청나고 강궁에 마나까지 실을 줄 알던 놈들이다.
제황은 헬칸보다 그들 쪽에 좀 더 집중했다. 어차피 제황은 헬칸을 건드릴 생각이 없었다.
오크들의 특성상 그 주장인 헬칸이 죽으면 사기가 심각하게 떨어진다. 제황이 원하는 건 삼천교와 오크들의 양패구상인데 헬칸이 죽으면 축이 너무 기울어 버린다.
게다가 활을 쏘는 놈들을 호위하며 나타난 오크들 또한 장난 아닌 무장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나 그들은 2인 1조로 짊어지고 있는 거대한 방패가 눈에 띄는데 돌격일변도의 오크들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런 장비다.
“궁기?”
“으응?!”
슬그머니 무한고에서 테블릿을 꺼내 화면을 조작하던 궁기가 사탕을 훔쳐먹다가 걸린 것마냥 화들짝 놀라 제황을 돌아본다.
“준비해. 아무래도 나한테 볼일이 있는 것 같아.”
제황의 말에 궁기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싸움이야?!”
“아니, 그건 아니고...”
“히잉...”
제황의 대답에 궁기가 김빠진다는 듯 우는소리를 한다.
지금 궁기는 9티어 마나석을 흡수한 후로 힘자랑을 하지 못해 안달이 난 상태다.
그러자 그 모습을 바라보며 피식 웃은 제황이 말했다.
“이따가 실컷 뛰어놀게 해줄 테니까. 좀 참아.”
제황의 말에 그제야 조금 기분이 풀리는지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궁기다.
제황과 궁기가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도 중갑방패군단과 검은이빨투사단은 저스틴포인트를 향해 빠르게 접근해 약 3킬로미터 지점에 진형을 갖추기 시작했다.
검은이빨투사단의 숫자는 정확히 오천, 중갑방패군단은 일만이다. 궁사 하나에 거대한 방패가 하나씩 붙은 형국. 진형을 갖춘 검은이빨투사단은 그들의 몸만한 거대한 태궁을 손에 들고 또 그에 걸 맞는 화살을 등에 있는 화살통에서 뽑아 시위에 걸었다.
“뿌우우우! 뿌우!”
뿔피리가 울리자 화살들이 일제히 45도 각도의 발사각을 세운 채 저스틴포인트를 겨누어졌다.
과거 저스틴포인트 공성전에서 단장을 잃었던 검은이빨투사단은 새로이 나투라는 오크를 단장으로 삼고 헬칸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 절치부심하여 훈련했다.
나투는 지금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지금 그가 상대해야 하는 건 활에 있어 진정한 경지에 올랐다고 할 만한 초인이었다.
비록 그것이 인간일 뿐이지만 그 인간으로 인해 과거 검은이빨투사단은 단장을 잃었었다.
그리고 오늘 검은이빨투사단은 또다시 그를 만났다.
설욕의 순간이다.
“카녹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 일제 사격!”
파파파파파팡!
오천이 하나가 되어 일제히 쏘아 올린 거대한 화살은 하늘을 찌를 듯 날아올랐다가 이내 기세 좋게 내리꽂히기 시작했다.
무려 3km의 거리를 격하여 쏘아낸 것도 대단하지만 지금 그 모두의 목표는 단 하나였다.
파파파팍! 파팍! 파파파파팍! 팍팍!
3km를 쏘는데 모든 마나를 쏟아부었는지 화살에 마나를 머금고 있지는 않지만 길이 1.5미터가량에 지름 5센티는 되어 보이는 거대한 화살은 그 순수한 중량만으로도 레이더 탑을 뒤흔들었다. 그리고 단 한 번의 단체 공격으로 레이더 탑은 말 그대로 거대한 화살 꽂게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검은이빨투사단의 공격은 이제 시작이었다.
“제압사격!”
나투의 외침에 따라 오천의 궁사들이 오백씩 짝을 지어 순차적으로 화살을 발사해대기 시작했다. 고작 십분 에일만으로 공격하는 것이지만 그 숫자가 500발이나 되니 그것도 장난 아니다.
“좋아.”
아투르칸들의 선두를 달리던 헬칸이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검은이빨투사단의 제압사격으로 인해 놈이 움직이지 못하자 당장 저스틴포인트를 향해 돌격하는 오크들이 힘을 받기 시작했다. 고작 한 명에 대한 견제를 통해 얻어낸 성과라는 것이 못내 속이 쓰리기는 하지만 이런 전장에서 단 하나의 초인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지 알기에 헬칸은 제황을 쿨하게 인정했다.
그 자신 또한 마찬가지니까.
헬칸이 그의 늑대 ‘칼바람’의 박차를 가해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이쪽에서 한 방 먹었으니 이제 한 방 돌려줄 차례. 헬칸이 달리기 시작하자 저스틴포인트에서도 헬칸과 아투르칸들을 향해 공격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팅! 티티팅! 팅팅! 티티팅!
수 개의 기관포 포신이 헬칸을 향해 겨누어졌지만, 그것들은 헬칸의 바로 앞 보이지 않는 막에 휩쓸린 듯 모두 사방으로 튕겨 나가 버렸다.
헬칸은 검은 기운이 뿜어지는 손바닥을 앞으로 뻗는 것 만으로 그것들을 모조리 상쇄시켜 버리고 있었다.
기관포의 저지력에 의해 속도라도 느려질 만하지만 헬칸의 칼바람은 더욱 빠르게 달렸다.
“크륵, 인사가 성대하군. 그러나 이 정도로 될까?”
헬칸은 우습지도 않다는 듯 말했다.
쾅! 콰쾅! 쾅쾅!
몇 발의 포탄이 날아왔지만 헬칸은 그것마저 엔드릴로 쳐내 버렸다.
포탄을 무려 무기로 쳐내는 미친 짓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헬칸이었다.
저스틴포인트에서는 중화기가 헬칸에게 통하지 않자 과감하게 그것을 일반오크들에게 배정했다. 물론 그렇다고 헬칸을 그냥 두려는 것은 아니었다.
헬칸을 위해 저스틴포인트에서도 특대선물을 준비했기 때문이다.
“목표물 포착되었습니다! 추적준비 완료!”
“일제히 발사!”
슈슈슈슛!
미사일 포트에서 대몬스터A형 클라스터탄두가 부착된 지대지미사일이 날아올랐다. 한 발이 아니다. 단숨에 삼십여 발이 하늘로 날아오르더니 이내 까마득한 상공으로 치솟았다가 선회하여 내리꽂히기 시작했다.
본래 지구에서 미사일이라고 하면 최소 수십 킬로미터의 사정거리를 가지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렇지만 그 공격 대상이 몬스터가 됨에 따라 열추적과 같은 자동추적이 힘들고 레이더를 통한 목표물지정도 힘들기에 대몬스터용 지대지미사일은 그 운용요원들이 일일이 목표물을 추적해줘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다.
그러나 그런 단점을 모두 떠나서 미사일은 태생적으로 강하다.
퓨퓨퓨퓻...
미사일들의 탄두가 갈라지며 한 개의 미사일당 총 8개의 자탄이 분리되어 땅을 향해 내리꽂혔다. 그 숫자만 약 240발 그 모든 게 단 한 개체의 오크를 목표 삼아 쏟아져 내린다. 예상 폭격 범위는 무려 300미터, 아무리 헬칸이 빠르더라도 이것을 피하지는 못한다. 아니 헬칸 뿐만 아니라 헬칸의 뒤를 따르는 아투르칸들 또한 그 유효폭격범위에 들어있다.
콰콰콰콱! 콰콰쾅! 쾅쾅! 쾅쾅쾅!
헬칸과 아투르칸 뿐만 아니라 그 근방에 있던 오크들까지 폭격에 휘말렸다. 수백의 자탄들이 땅을 쉼 없이 두들겼고 굉음이 대기를 찢어발겼다. 단순한 후폭풍으로 인해 죽어 나간 오크들도 수백에 이르고 그 진동으로 인해 땅에 넘어진 오크는 수천에 이른다.
저스틴포인트도 오크들도 이때만큼은 눈앞의 적보다는 쑥대밭이 되어버린 전장의 한쪽을 침묵하며 바라보고 있을 정도였다.
“명중입니다!”
“와아아아!”
미사일운용요원과 관제사의 외침에 지휘부에서는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이보다 완벽할 수는 없다. 단 한 번의 미사일 공격으로 가장 강력한적을 격살한 것이다.
보라.
쓰나미처럼 밀려오던 오크들도 이 순간 자리에 못 박힌 듯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
이것이 오크들의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그 우두머리가 죽으면 사기가 급격히 떨어진다. 인간은 수장이 죽어도 지휘체계를 금세 수복할 수 있지만, 야만적인 오크들은 머리만 자르면 끝이다. 물론 어수룩한 머리를 잘라서는 안 된다.
지금처럼 오크로드 정도 되는 거물을 죽여야 한다.
“이겼습니다.”
소피아가 주먹을 불끈 쥐며 외쳤다.
헬칸을 죽였으니 엔드릴오크들은 그야말로 머리를 잘린 꼴이다.
새로운 오크로드를 선출한다? 그것도 힘들다. 헬칸이 죽었으니 고만고만한 놈들이 서로 힘을 겨룰 것이고 그 사이 삼천교국은 엔드릴오크들을 모조리 쓸어버릴 수 있으리라.
그러나 수뇌부의 그런 기쁨의 외침은 잠시 후 관제사의 비명과도 같은 외침에 찬물을 끼얹듯 사라졌다.
“움직입니다!”
“뭐라고?!”
소피아는 평소의 포커페이스조차 깨진 채 스크린을 주시했다.
먼지구름이 가시자 거대한 늑대를 올라탄 한 오크가 쏜살같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그 오크가 공중을 향해 치켜든 글레이브에서는 초록의 광망이 쉴새 없이 뿜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엔드릴오크의 오크로드 헬칸이었다.
“이럴 수가···.”
소피아는 주먹을 움켜쥐고 부들부들 떨었다.
무려 30발의 미사일을 쏟아부었다. 이 정도 숫자면 어지간한 9티어의 대형 몬스터도 침묵시킬 수 있는 양이다. 그런데 그 압도적인 파괴력을 오크 하나가 모두 받아낸 것이다.
수뇌부에 감도는 침묵 그리고 망설임, 대체 저런 괴물을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가에 대한 막막함이 침묵의 정체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침묵으로 인해 그들은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헬칸은 아직 충분한 여력이 남았던 것.
파아앙!
헬칸이 탄 칼바람이 잔상을 일으키며 달리기 시작했다. 침묵해버린 전장에 오직 헬칸만이 달리고 있다. 헬칸은 순식간에 저스틴포인트의 외성벽으로 접근했다. 그리고 터져 나오는 천둥 같은 외침!
“터져라!”
꽈우우우웅!
헬칸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온 흑색의 에너지가 그의 무기 엔드릴의 첨단에 맺히자 헬칸은 그대로 엔드릴을 외성벽을 향해 벼락같이 내던졌다.
콰콰콰쾅!!!
헬칸의 엔드릴이 검은 빛줄기가 되어 저스틴포인트의 외성벽에 작렬함과 동시에 거대한 폭발이 터져 나왔다.
우르르르릉...콰콰쾅!! 쾅쾅!!!
소리에 비해 폭발의 규모는 그리 커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 거대하고 단단한 성벽이 움찔거리기 시작한다.
그러더니 천천히 먼지를 일으키며 주저앉기 시작했다.
“으아악! 무너진다!”
“피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