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4
학살자-3
몇몇 곳이 흉물스럽게 망가진 채 올라오는 것도 있지만 상당한 숫자가 온전히 남아 있었다. 그리고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무기들도 그 모습을 드러났다.
20문가량의 미사일 포트들이 땅에서 올라오고 그것을 본 제황이 저도 모르게 휘파람을 불었다.
-작정했네.
-무슨 말이야?
궁기가 되묻는다.
-예전에는 저스틴포인트에서 저걸 안 꺼냈었어.
-그랬지. 내 기억에도 없어.
-그 이유는 저걸 꺼내면 몬스터의 사체를 포기해야 되니까야. 그래서 본래는 사용하는데 승인절차가 까다로운 물건이지. 그런데 삼천교 녀석들은 부담없이 꺼내 쓰는군.
-오, 그렇게 강한 건가?
-그래. 그렇지만 함부로 쓰지는 못하겠지. 탄약에 비례해서 미사일이라는 건 정말 한정적이니까.
지금 상황에는 어울리지 않지만, 9티어 몬스터까지 방어가 가능하다는 저스틴포인트의 진가를 본다는 생각에 한편으로 두근거리기까지 하다.
모드구스들이 오크들의 군진을 벗어나 저스틴포인트를 향해 직선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수백 마리가 미친 듯이 달려오는 박력이 장난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유효사거리 내에 들어오자 드디어 저스틴포인트에서도 사격이 시작되었다.
투투투퉁! 투투투퉁! 쾅쾅쾅!
저스틴포인트 곳곳에서부터 뿜어지는 빛의 선이 모드구스들을 향해 맹렬히 쏟아진다.
아무리 모드구스들이 3티어 몬스터라고 해도 방어막을 쓰지 못하는 이상 화기류의 밥이다.
더군다나 지금 뿜어지고 있는 30밀리기관포는 대몬스터용으로 개량된 것으로 20센티 두께의 철판도 우습게 관통한다.
약 2km에서 시작된 저스틴포인트의 공격은 일견 모드구스들을 막아내는 듯했다. 그러나 모드구스들 또한 만만치 않았다. 동료의 시체를 우회함으로 자연스럽게 넓게 퍼지면서 외성벽을 향해 돌진했다.
헬칸이 꽤 고심해서 짠 전략이지만...
“저스틴포인트를 얕보는군.”
위이이이...
외성벽의 일부가 올라감과 동시에 수십 개의 포구가 나타났다.
콰아아아아아악!!!
그리고 마치 거대한 짐승이 울부짖는 듯한 소음과 함께 푸른빛의 불꽃이 모든 것을 집어삼킨다.
전방 100여미터 만을 집중적으로 휩쓴 푸른 불꽃이지만 그 능력은 모드구스를 한순간에 숯덩이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궁기가 탄성을 내질렀다.
-와.
-오크들이 몰랐나. 아니 삼천교에서 일부러 말해주지 않은 건가. 외성벽에 가까이 붙으면 초고온의 화염방사기가 기다린다는 걸.
그렇다. 오크들과 삼천교의 침공 당시 삼천교는 정말 절묘한 시기에 외성을 파괴했다. 저스틴포인트 수뇌의 경우는 이런 강력한 무기들을 말 그대로 아끼다가 똥이 된 경우고 말이다.
수백 마리의 모드구스들은 외성벽에 도달하지도 못하고 모조리 통구이가 되어 버렸다.
-역시, 미사일은 쓸 필요도 없다는 거군. 그렇지만 삼천교는 지금 오크들의 역량을 제대로 모르는 것 같네.
-음? 삼천교가 오크들을 제대로 몰라.
-응. 저 오크로드 녀석 장난치고 있는 것 같아.
초인의 시력을 지닌 제황의 눈에 옥좌에 앉은 오크로드가 보인다. 오크로드 방만하게 기대 앉아 저스틴포인트를 바라보며 웃고 있을 뿐이다. 마치 지금의 공격은 장난이라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제황 또한 그것을 인정하고 있었다. 제황이 알고 있는 오크의 힘은 아직 뚜ᄁᅠᆼ도 열지 않았다.
-그래도 저 오크놈 마음에 안 들어.
-동감.
궁기와 제황의 생각이 일치했다. 최소한 저 무거운 엉덩이 정도는 의자에서 떼도록 하고 싶어졌다.
“녀석을 좀 더 진지하게 만들어 줘야겠지.”
찌이이익...
제황은 겉에 걸치고 있던 치렁치렁한 삼천교의 옷을 부욱하고 찢어 버렸다.
그리고 드러난 것은 유려한 광택의 검은색 경갑.
경갑이기는 하지만 목에서부터 발끝까지 촘촘하게 감싸는 그런 갑옷이다.
갑옷의 이름은 ‘악몽의 군주’
원래 주인은 바로 밀령의 수장인 나길환이었다. 그 또한 한창 전성기 때는 몬스터의 피를 마시며 위명을 날리던 초고위 헌터다.
그는 이것을 제황에게 주며 말했다.
“이놈이 이번에는 제발 주인을 제대로 만났으면 좋겠군요.”
그 말 그대로 이 ‘악몽의군주’ 라는 갑주는 세계적으로 봐도 최상위권에 마크하는 아티펙트였다.
악몽의 군주 –슈페리어등급 세트 아티펙트 (4/5)
계승자:천제황
제질:미스릴
경갑이지만 놀랍도록 가벼운 이 갑옷은 입는 것만으로도 제황의 모든 능력치를 5상승시켰다. 그렇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다.
“이걸 끼면 억제하기가 힘들지.”
제황은 무한고에서 투구를 꺼내 머리에 눌러썼다. 갑옷과 한세트인 얼굴 전체를 가리는 풀페이스 헬름이다. 마치 늑대를 형상화한 것 처럼 주둥이가 길죽하고 머리에 외뿔이 달렸다.
악몽의군주-슈페리어등급 세트 아티펙트 (5/5) 완성
세트효과
마나활성화: 100프로 상승
마나공격력: 200프로 상승
마나방어무시:50프로 무시
은신스킬 사용 불가
과거 나길환이 전투에 나설 때 애용했던 아티펙트다.
은신스킬을 아예 사용할 수 없게 만드는 치명적인 패널티를 가짐에도 무시무시한 능력을 보이는 이 아티펙트를 나길환은 제황에게 계승했다.
다섯 개의 세트를 모두 완성시키자 제황의 몸에서 검은 기운이 뭉게뭉게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은신스킬을 사용할 수 없는 이유는 이것 때문이었다. 흘러넘치는 그 에너지파동이 주위의 이목을 자연스럽게 끌어모은다.
여의용혈신공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자신의 마나를 이질적인 뭔가가 마구잡이로 흡수하기 시작했으니까.
“흐으읍!”
악몽의 군주 세트는 제황의 마나를 계속해서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무려 5000 가량의 마나를 흡수하고 나서야 멈춘 악몽의 군주 세트는 이제 본격적으로 그 능력을 발휘하겠다는 듯 검은 기운을 폭발적으로 뿜어내기 시작했다.
“준비완료”
제황은 비천궁과 비천격을 꺼내 양손에 들었다.
소모되었던 마나가 여의용혈신공의 힘으로 빠르게 차오르기 시작했다.
우드드드득...
비천궁을 만궁(彎弓)한 제황이 저멀리 오크로드를 지그시 노려봤다.
다른 건 필요 없다. 지금 필요한 건 오크로드를 확실히 자극할만한 것이다.
“간소한 환영인사다.”
츠츳...츠츠츳....
시위를 당긴 활에 붉은 마나가 어리기 시작하더니 잠시 후 그것이 하나로 뭉쳐 회전하기 시작했다. 강기를 머금은 붉은 창이 제황이 끊임없이 주입하는 마나를 머금어 점차 그 크기를 키워나가기 시작했다.
마침내 만들어진 것은 2미터가량의 붉은 빛의 창이었다.
제황은 가볍게 시위를 놓으며 말했다.
“비상하며 춤추는 강기의 소나기!”
파아아아앙! 콰콰콰쾅!!
그 단 한 번의 발궁(發弓)에서 일어난 후폭풍이 제황의 등 뒤로 폭사 되며 낡디낡은 레이더탑의 철골을 덮쳤다.
끼이이잉!
철골이 우그러들며 레이더탑이 뒤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지금 이 현장에 있는 이들은 아무도 그것을 인지하지 못했다.
처음 그것을 목격한 사람들은 미사일이 날아간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아니면 지금 그들의 눈앞에 나타난 이것은 설명이 되지 않는다.
씨아아아앙!
날아간 그것은 정확히 오크들 무리 한가운데 화려한 옥좌가 있는 곳 상공에서 화려하게 폭발했다. 아니 폭발한 것이 아니다. 자탄을 흩뿌리는 클러스터 미사일처럼 수십 개로 나뉘어진 그 섬광들이 말 그대로 그 주변을 마구잡이로 폭격해 버렸다.
전장이 한순간 조용해졌다.
노도와 같이 들끓던 오크들의 군기마저도 잠재워버렸다.
“후우...”
가벼운 날숨으로 몸 안에 남은 여운을 떨어낸 제황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제대로 해보라고...”
#2
우르르르...
“크허억...”
“우욱...”
제황의 공격이 날아든 곳은 말그대로 대참사가 일어났다.
이곳은 오크군 지휘의 중심이었기에 오크히어로들과 제사장들 그리고 부관들이 한곳에 자리해 있었다.
공격이 날아온 곳과의 거리는 무려 5km. 과거에 한 번 공격당한 경험이 있기에 조금 더로 군영을 꾸렸는데도 원거리 공격을 당한 것이다.
오크히어로들 중 살아남은 이는 고작해야 다섯이었다. 그리고 오크히어로 외에 방어력이 부족한 나머지는 모조리 폭사해 버렸다. 다행이라면 이곳에 있는 지휘관급 오크히어로들은 그나마 일부라는 것이다. 만약 전부가 모여 있었다면 오크들은 오늘 후퇴해야 했을 것이다.
지름 30미터가 한순간 붉은 핏물이 줄줄 흐르는 생지옥으로 변해 버렸고 그 중심에 있는 옥좌의 주인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린다.
“크으...”
오크로드 헬칸이 옥좌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름 머리를 써서 모드구스를 이용해 성벽에 타격을 준다는 계획을 짰고 그것이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리 크게 실망하지는 않았다.
모드구스의 뒤로는 바위와 흙을 한가득 짊어진 오크 1만이 대기하고 있었으니까.
헬칸의 계획은 간단했다.
모드구스와 오크의 시체로 벽을 쌓아 저곳을 넘겠다는 것.
뭐 그것 또한 실패하면 그냥 전통오크 방식으로 싸울 생각이었다.
무너질 때까지 돌격이다. 무식해 보일지 모르겠지만 병력은 넘치고 넘쳤다.
그렇게 마음먹고 있었는데 그런 그의 안이한 생각에 찬물을 끼얹는 듯 저스틴포인트에서 날아온 공격이 그에게 그의 뒤통수를 맹렬히 후려갈겼다. 정신 차리라고...
“흐흐, 생각을 잘못했군..”
헬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곳에 군영을 지은 건 그의 오만한 때문이었다.
그는 지금까지 대회전에서 얌전히 후위를 지키고 있었던 적이 없었다.
인간들에게 미사일이라는 무기가 있다는 걸 알지만 그는 그것도 별로 겁나지 않았다. 폭발하기 전에 요격할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지금 날아온 건 인간들이 자랑하는 그 미사일이 아니었다.
“크르륵, 놈이군.”
헬칸은 방금 전 그것을 기억하고 있다.
아니 그가 기억하기보다는 그의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손바닥이 아릿한 게 그 때의 그 느낌과 비슷했다.
놈이 저 삼천교 놈들 사이에 있었다.
“간교한 인간 놈들 역시 소로 손을 잡았구나.”
헬칸은 그렇게 단정 지었다.
그럴 수밖에 없다. 백린이 가르쳐 준 것 중에 인간들 사이에는 이런 격언이 있다.
‘어제의 친구가 오늘의 적’
그 말과 아주 딱 들어맞는 상황 아닌가.
“빌어먹을 놈들!”
한편 저스틴포인트 수뇌부에서도 환호성을 나왔다.
“적 본진 수뇌부 괴멸적 피해 확인! 생존추정 오크로드 외 8개체!”
관제실에서 들려오는 관제사의 외침에 수뇌부들은 기함했다.
“어마어마하군!”
“소피아님! 적들의 군영이 괴멸되었습니다”
지평선을 가득 채운 오크들을 바라보는 건 누구에게나 가슴 서늘한 공포였다. 그것은 이곳에 있는 수뇌부들도 마찬가지. 특히 이곳에 있는 이들은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누군가의 부관 누군가의 참모였던 이들이었다. 그리고 그 누군가가 지금 대광장에서 활활 타오르고 있기에 이번 전투에 대한 부담감이 백배한 상황이다.
만약 이 전투에서 패배한다면 자신들도 저 형틀에 매달릴 것이기에...
그런 상황에서 터진 반가운 사건이니 그들은 그 범인이 누군지 보다는 먼저 환호를 올리기 바빴다.
“누구죠? 분명 각성자의 공격이었는데.”
소피아가 입가에 자그마한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그러자 그녀의 물음에 모두가 입을 다문다. 자신들도 이정도의 실력자가 이곳에 합류해 있는지는 몰랐다.
그때 한 여자가 앞으로 나섰다.
삼천교국의 고귀한 혈통 중 방계의 여자였는데 그 정보처리능력을 인정받아 이곳에 자리를 배정받은 제원이다.
“정보실 참모 임현아입니다. 지금 공격을 한 이는 주교께서 아주 오래전부터 비밀병기로 양성 중이던 헌터입니다. 초원거리 딜러이며 중첩이 가능한 데미지 극대화 스킬의 보유자입니다. 한마디로 걸어 다니는 미사일이죠. 그에 대한 프로필에는 공격력 하나만큼은 7성에 준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녀의 말에 수뇌부 사이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오, 주교께서 준비한 비밀병기!”
“역시, 그 정도로 능력 있던 분이니 교단에서 이 저스틴포인트를 맡겼겠지.”
“정말 대단하군.”
수뇌부들 사이에서 전 주교에 대한 찬사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것을 듣기 거슬린 소피아가 조금 날 선 목소리로 임현아에게 말했다.
“주교님이라”
그러자 수뇌부들 사이에는 삽시간에 찬바람이 휘돌았고 상황을 눈치챈 임현아가 자리에 넙죽 엎드리며 외쳤다.
“주,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용서를...”
임현아가 공포에 질린 목소리로 외치자 그걸 내려다보는 소피아의 얼굴이 조금 풀어졌다.
“괜찮아요. 한번의 실수일 뿐이니...후후, 그건 그렇고 임현아신도님. 그런 사실을 어떻게 당신만 알고 있죠?”
소피아의 말에 수뇌부의 시선이 모두 그녀에게 돌아갔다.
자신들도 주교의 밑에서 수년간 일했지만 그런 비밀병기가 있다는 건 처음 들었다.
그러자 임현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제 저스틴포인트 내의 병참 관련된 사항을 정리하던 중 계산이 맞지 않는 곳이 있어 주교님의 내부기밀파일을 찾다가 발견했습니다. 또한 마침 그가 평신도로 위장해 이곳에 있는 것을 알고 제가 직접 그를 찾아가 신분을 확인한 상태입니다.”
“호오, 그런가요? 그럼 그의 이름이?”
“그에게는 이름이 허락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코드네임은 ‘필살’입니다. 그의 대한사항을 모니터에 띄우겠습니다.”
임현아가 조작패널을 움직이자 측면의 커다란 스크린에 ‘필살’ 에 대한 프로필이 상세하게 나열되어 있었다.
최초로 그의 존재를 포착한 시점부터 지금까지의 행적이 고스란히 적혀 있어서 그걸 읽는 모든 이가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일 정도로 깔끔한 행적이다. 정말로 철저하게 숨겨진 채 키워진 비밀병기였다.
그걸 본 소피아 또한 마음속에 있던 한 점의 의구심까지 접은 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필살이라, 정말 딱 어울리는 이름이군요. 그래. 당신이 보기에 그는 어떻던가요? 따르던 주교가 죽었으니 심적 타격이 컸을 텐데?”
소피아는 오랜만에 좋은 장난감을 발견한 어린이처럼 임현아에게 물었다. 그러자 임현아가 조금 안정된 목소리로 그녀에게 대답했다.
“필살님께서는 삼위일신께 그 영광을 바치는 일이라면 자신을 부리는 이가 누구든 상관없다고 이야기하셨습니다.”
“오, 신실한 믿음의 전사군요.”
“그도 귀가 있으니 소피아님의 위명을 알고 복종하는 것이겠지요.”
소피아의 귀를 즐겁게 하는 수뇌부의 아부에 그녀의 입꼬리가 삐죽 올라갔다.
저 야만스러운 오크들 따위에 삼위일신의 군세가 패배한다고는 생각지 않지만 든든한 무기가 하나 더 추가되었다는 건 즐거운 일이다. 특히 그가 보여준 저격능력은 차후 그녀의 행보에 큰 무기가 될 수도 있으리라.
“좋아요. 그에 대한 사항은 모두 임현아 당신에게 맡깁니다. 단 조금 전과 같은 섣부른 공격은 주의시키세요.”
소피아는 오크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무래도 많이 열 받은 것 같네요. 호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