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사거리 100만-147화 (147/301)

# 147

광신도vs광신도-2

돌산의 계단은 오크의 보폭에 맞춰 닦여 있었다. 그건 꽤나 큼지막하다는 뜻이다. 그런 계단이 까마득히 위를 가리키고 있었다. 구불구불 이어진 계단과 안개는 평범한 사람이라면 감히 오를 엄두도 못나게 할 지경이었다.

-얘들 하는 짓을 보면 중국애들이랑 비슷해.

-왜?

-쓸데없이 규모가 커.

-호호, 그건 맞는 것 같아.

-아무튼, 길 좀 잘 봐줘.

-알았어.

궁기의 말이 끝나자마자 제황의 궁기안으로 구불구불한 선이 나타났다.

자욱한 안개 사이로 하얀 선이 위를 향해 까마득히 그려진다.

-정말 대단하군. 궁기안을 가리는 안개라니...

지금까지 궁기안이 가로막히는 일은 없었기에 제황은 꽤 난감해진 상태였다. 이건 절대 평범한 안개가 아니다.

-응. 정말 독창적이면서도 대단한 술법이야. 이게 진짜 그 카녹이라는 신이나 오크의 힘이라면 이 힘을 본격적으로 사용하는 그 제사장이라는 놈들은 정말 조심해야 해.

-알아.

위를 향해 끝없이 뻗은 돌계단을 밟으며 제황이 대꾸했다.

저스틴포인트에서 이미 경험한 바 있다. 수십 수백 수천의 오크들을 주술로 감싸던 모습 속에서 제황은 마나의 공명이라는 깨달음을 얻은 바 있었다.

철컥..철컥..철컥

그 때 두터운 갑주를 걸친 네 명의 오크가 위에서부터 내려온다.

길을 살짝 비켜서 있자 그들은 제황을 지나쳐 밑으로 내려갔다.

그나마 다행이라는 건 암혼보는 그대로 작동하는 중이다.

돌산의 초입에 있던 오크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덩치가 좋고 무장이 출중하다.

암혼보가 없다면 이곳까지 오는 게 꽤나 고됐으리라. 지금까지 마주친 오크의 숫자는 거의 오십에 육박했으니까.

-얼마나 남았지?

-조금만 더 올라가면 이 돌산을 감싸고 있는 주술의 중심부에 도달할 거야.

-알았어.

궁기의 말에 답한 제황이 다시금 위로 오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마치 벽과도 같은 거대한 바위 앞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곳에는 이곳에 오며 몇 번 만났던 덩치 큰 오크 넷이 서서 주위를 경계하고 있다.

그들의 뒤로는 인위적으로 판 듯한 큼지막한 통로가 있었는데, 이 떡대 좋은 놈들은 그 문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경비를 교대하는 시간은 대략 20분에 한 번이고 순찰은 10분 간격인가? 무시무시하군.

-그만큼 오크들에게 중요한 곳이니까.

-음

궁기의 대답을 들으며 제황은 나길환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오크들은 그 규모에 따라 그들이 모시는 신 카녹에게 제물을 바치는 제단의 크기가 커집니다. 오크들의 행태를 보면 서로 갈등 관계에 있는 오크들의 경우 서로가 더 큰 제단이 될만한 곳을 차지하기 위해 전 부족이 동원되기도 하지요. 저스틴포인트를 차지하고 있는 오크 부족의 이름은 엔드릴입니다. 규모는 대형급에 속하고 그들 정도가 가질만한 제단의 위치는...’

나길환의 예상은 아주 정확히 들어 맞았다. 그가 예상한 이곳은 오크로드 헬칸의 부족인 엔드릴오크가 카녹을 모시는 제단이었다.

챙...

제황은 무한고에서 한자루의 날카로운 단도를 꺼내 들었다.

이제 슬슬 쇼를 시작할 때다. 제황은 암혼보를 사용한 채 그들에게 접근했다.

오크들은 사신이 코앞에 당도했는지도 모른 채 전면만을 바라보고 있다.

뒤로 가볍게 돌아간 제황은...

츠컥...츠컥

전면을 주시하고 있던 두 오크의 멱줄을 단숨에 따버렸다.

피분수가 피어오르기도 전에 이미 제황의 단검은 다른 오크의 목을 찌르고 있다.

“크허억!”

츠컥...

이번 공격은 조금 얕았다. 베기는 했지만, 치명상을 입히지는 못한 것.

“크륵! 침입! 컥!”

그러나 입을 열려던 그 오크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뻗어오는 단검에게 관자놀이를 내준 채 허무하게 쓰러졌다.

졸지에 하나 남은 오크전사가 목에 건 거대한 뿔피리에 입을 가져다 댔다. 지원을 부르려는 것이다. 그러나 제황의 행동이 더 빨랐다.

츠츠츳...푹

손목, 팔꿈치, 겨드랑이를 베어낸 뒤 마지막으로 쇄골이 깊이 쑤셔 넣는다.

두두둑

“꺼어억!”

마지막으로 단검을 비틀자 입에서 울컥하고 피를 쏟은 뒤 풀썩 쓰러졌다.

“삼위일신의 신벌이다. 오크새끼들아.”

제황은 오크의 귓가에 속삭이듯 말했다.

“크르륵, 인...간!”

풀썩

제황을 바라보는 오크의 증오에 찬 눈빛이 서서히 탁해져 갔다.

제황은 단검에 묻은 피를 혐오스럽다는 듯 오크의 몸에 슥슥 문지르고는 바위에 난  통로로 들어갔다.

구불구불한 통로를 지나 한참을 들어가자 이윽고 거대한 공동이 나타났다. 대략 축구경기장 하나는 훌쩍 넘을 정도로 커다란 공간이었는데 그곳을 바라본 제황은 대뜸 눈살을 찌푸렸다.

“저런 걸 재물로 받는 신이라면 그다지 착하지는 않을 것 같군.”

공동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해골의 무덤이었다. 크고 작은 두개골들이 까마득히 쌓여 있었는데 그중에는 아주 작은 고블린의 것부터 마치 이야기 속에 나오는 드래곤을 연상시키는 거대한 두개골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 제황을 분노케 하는 것은 그 사이사이 섞인 숫자를 헤아릴 수 없는 인간들의 두개골이었다.

드드득...드득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발에 밟힌 두개골들이 마찰 되며 느껴진다.

“이종족의 사회체제와 전통을 인정해야 한다는 사회학자들을 전부 데려오고 싶네.”

제황은 아카데미에서 입에 거품을 물고 말하던 사회학자들을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만약 이곳에 자신이 사랑하는 이의 머리가 있다면 그들은 과연 똑같은 말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감상에 젖을 때가 아니야. 시간 없어.

-그래.

궁기가 상황을 환기시키자 정신을 차린 제황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워낙 중요한 곳이기에 어떤 방어장치가 있을지 알 수 없다. 그렇게 계속해서 해골들의 산을 뚫고 앞으로 나아가자 이윽고 공동의 중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것이군.”

제황은 고개를 들어 바닥에서부터 천장까지 닿는 거대한 해골의 탑을 올려다봤다. 해골들 사이사이에는 갖가지 크기의 뼈들을 뭔가로 붙인 듯 촘촘하고 튼튼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그 뼈들의 탑 꼭대기에는 큼지막한 뼈 세 개가 삼각형을 이루는 형태로 고정되어 있었고 그 가운데에는 푸른빛을 일렁이는 제황의 머리만한 보석이 둥둥 떠 있었다.

“무슨 크리스마스트리 같네.”

인간들 중 헬칸이라는 오크로드의 부족 정도 되는 규모의 오크들이 모시는 카녹의 제단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본 것은 제황이 처음이었다. 특히 크리스마스 트리의 끝을 장식하는 별 대신 떠 있는 보석은 정말 처음 봤다.

보석의 정체가 궁금하기는 하지만 일단은 작전이 우선이기에 제황은 무한고에서 가로세로 20센티가량의 상자를 세 개를 꺼낸 뒤 그것을 탑의 주위에 내려놨다.

이 상자는 무적성의 무기연구소에서 가져온 것으로 화약을 사용하지 않는 폭탄이었다. 폭발한 후 흔적을 남기지 않는 특징을 지녔다.

-그 헬칸이라는 오크놈 열 좀 받겠지?

-열만 받을까? 호호호

꾹...

쾅!쾅!쾅!

뇌관이 연결된 리모컨을 쿡 누르자 세 개의 상자가 일제히 폭발하고 동시에 해골의 탑이 우르르 무너져 내렸다. 아마 부족의 오크들이 이 장면을 봤다면 분노로 인해 심장이 터져버렸을지도 모른다.

부족이 모시는 카녹의 제단이 무너졌다는 것은 곧 부족을 돌보는 오크의 신 카녹의 가호가 사라졌다는 것과 같다. 비유하자면 이슬람들의 메카가 박살난 것과 똑같은 것이다. 물론 제황의 입장에서는 그들의 그런 사정 따위는 알바 아니었다. 아니 그보다 더 대단한 것이 지금 뜻하지 않게 손에 들어왔다.

“와...”

힘을 잃고 떨어지는 거대한 보석을 솜씨 좋게 낚아 챈 제황이 바닥에 내려앉았다.

“평범한 건 아니네.”

제황은 손에 들린 녹색의 보석 겉면을 슥 닦아낸 뒤 경탄을 터뜨렸다.

그 보석은 처음부터 녹색이 아니었다. 뭔가 특이한 염료를 칠해서 녹색빛을 띄었을 뿐이다. 그것을 닦아내자 내부의 투명한 면이 드러났고 그렇게 드러난 것은 보석의 정체는 바로 9티어 마나석이었다.

마치 외부와 내부가 구분된 듯한 이중구조에 하얀 마나가 대류하듯 꿈틀거리는 9티어 마나석 말이다.

-오, 오빠, 나 그거 가지고 싶어.

-오빠?

-아이잉

궁기가 코맹맹이 소리를 내며 생전 해본 적 없는 헛소리를 지껄였다.

궁기에게 있어 9티어 마나석은 그만큼 중요한 물건이었다. 예전에 흡수했던 화신체 주술을 사용한 뒤 남은 반쪽짜리 9티어 마나석 만으로도 궁기는 제황을 감싸며 입었던 치명적인 상처를 완전히 회복하고 과거 최전성기의 그녀가 가진 힘의 10프로를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때와 똑같은 9티어 마나석이 다시 나타난 것이다.

아마 지금 궁기가 현신해 있는 상태라면 9티어 마나석을 바라보며 침을 줄줄 흘리고 있었을 것이다.

이것만 있으면...

-가져.

-응. 고맙...어? 저...정말?

제황의 망설임 없는 대답에 오히려 궁기가 당황했다.

이전에는 잘 알지 못했지만 이제 그녀도 안다. 이 9티어 마나석이라는 것이 귀물인지 말이다. 그녀의 계산으로 치면 최고급수제초콜릿장인을 대략 10,000명 정도 평생 고용해서 자신만의 왕국을 세운 뒤 그들이 모두 늙어 죽을 때까지 초콜렛만 만들게 한 뒤 받아먹어도 다 못 쓸 가치를 지닌 물건이 이것이었다.

물론 그녀가 제황에게서 뜯어먹은 마나석도 천문학적인 금액이기는 하지만 그것들을 모두 합치고 또 그 열 곱절 정도의 양을 쌓아도 이것 하나에 미치지 못한다.

그런데 그런 물건을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궁기에게 준 것이다.

-너한테 주는 건데 아까울 게 있겠냐. 대신 나중에 먹어. 지금은 이게 더 중요하니까.

-아, 알았어.

많이 당황한 듯 얼결에 대답하는 궁기의 반응에 피식 웃은

제황은 9티어마나석을 무한고에 집어넣은 뒤 탑이 무너져버린 곳을 응시했다.

“자고로 상처 난 곳에는 소금을 뿌려야 제격이지.”

흐뭇하게 웃은 제황은 손을 앞으로 뻗었다. 무한고에 넣어 가지고 온 아주 커어어다란 것을 꺼내야 하기 때문이다.

-궁기! 그거 부탁해! 가장 크고 묵직한 그거.

-쪼아!

신나게 대답하는 궁기다.

이윽고 제황의 손에 검은 구멍이 생기더니 길죽하고 거대한 쇳덩어리가 슬금슬금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긴 직사각형 머리를 지닌 그것은 계속해서 튀어나왔다. 양옆으로 난 날개 부분이 빠져나오고 이윽고 그 거대한 것이 완전히 빠져나오자 제황은 입가에 개구쟁이 같은 미소를 지었다.

“후후, 삼위일신의 영광이 있기를...”

무한고에서 나온 그것은 바로 삼천교를 상징하는 삼천의 십자가라는 물건이었다. 세 개의 십자가가 겹쳐진 모양의 거대한 십자가. 이래 봬도 짝퉁이 아닌 오리지널이다. 과거 삼천교의 초대교주 이명복이 온갖 반인륜적이고 반사회적인 짓을 저지르며 끝내 삼천교의 신도 500명을 자살테러로 이용한 뒤 엘어스로 도망쳤을 때  삼천교 교회의 본당에 있던 십자가가 이것이었다. 압류되어 있던 것을 제황이 용케 가져온 것이다.

“후우우웁!”

상당한 무게다. 통짜 금속으로 되어 있기에 간신히 밀어 올려세우니 거의 5미터 가량의 크기다.

“더럽게! 무겁네!”

다시금 힘을 준 제황은 이윽고 그것을 해골의탑이 있던 곳에 세웠다.

바닥에 깔린 뼈들에서 흘러나오는 은은하고도 으스스한 빛으로 인해 그 십자가는 마치 해골로 장식된 지옥의 이정표 마냥 보였다.

“자 마무리를 해볼까.”

제황은 무한고에서 준비해 온 뮤직플레이어를 꺼냈다. 재생버튼을 누른 뒤 볼륨을 최대로 하고선 십자가의 뒤쪽에 만들어진 홈에 깊숙이 찔러 넣고 홈을 막아버렸다. 내장된 배터리도 빵빵하니 십자가를 박살 내지 않는 한 이 뮤직플레이어는 건들지 못하리라.

“삼위일신 우리구주~ 그 고결한 말씀 듣고~”

삼천교의 찬미가가 공동 안을 쩌렁쩌렁 울리기 시작하자 제황은 씨익 하고 썩소를 날렸다.

마지막으로 무한고에서 준비해 온 몇 가지 물건들을 주위에 보물찾기하듯 숨긴 제황이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삼천의십자가를 바라봤다.

이제 진짜 시작이다.

어디 한 번 옆집에 세들어 사는 꼴 보기 싫은 놈들이 안방까지 쳐들어온것도 모자라 집주인이 가장 아끼는 물건에 똥칠을 한 것을 알게 되면 그 집주인이 어떻게 반응할지 자못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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