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3
추격자-2
“으어...”
하얀 백의를 입은 간호사들과 환자들이 어둠에 휩싸인 복도를 비칠비칠 걷고 있다.
마치 몽유병에 걸린 사람마냥 그 발걸음에는 힘이 없다. 그 때...
딩동...철컹..철컹
복도 끝에 있는 엘리베이터가 열리며 링겔대를 질질 끌며 남자환자 하나가 내려섰다. 한 손으로는 링겔대를 끌고 있고 한 손에는 긴 장검을 든 그는 천천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크르르.”
그가 작게 으르렁거렸다. 그리고 그 소리를 들었는지 고개를 푹 숙인 채 걷던 이들이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들더니 엘리베이터에서 나타난 환자를 향해 미친 듯이 달려갔다.
“크으...”
남자환자를 당장에라도 덮칠 듯 달려가던 그들은 갑자기 코를 킁킁대며 공중에 냄새를 맡더니 이내 자신들이 찾던 것이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으며 다시금 비척비척 걷기 시작한다.
그런 이들이 10층으로 되어 있는 병원 전체를 가득 채워져 있다.
그리고 지금 이곳은 병원의 원장실이다.
이미 정시퇴근해버린 원장의 의자에는 조금 전 박 중위의 병실에 있던 캐롤라인이 섹시하게 다리를 꼰 채 앉아 있다.
“찾았나요?”
“아직입니다.”
“흐음, 은신 능력이 있다는 소리는 못 들었는데...”
“곧 잡힐 겁니다.”
“글쎄요.”
의자를 빙글 돌린 그녀가 책상 위를 살폈다. 책상 위에는 붉은 마나 석이 엉겨 붙은 넓적한 판이 놓여 있었고 중심으로부터 뻗어 나온 음험한 검은 기운이 마나석 위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렇게 손쉽게 깨질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는데”
“애초에 첫 번째 계획은 너무 긍정적이었습니다.”
“인정해요. 나이가 어리다기에 정신 방벽이 상대적으로 낮을 거라고 예상한 교단이 멍청한 거죠. 7성 헌터를 재료로 생각하다니... 뭐 첫 번째 계획이 실패했으니 이제 우리 마음대로 해도 되겠죠.”
“역시 두 번째 계획으로 가시겠습니까?”
“네. 그것들을 전부 제 주위에 배치하세요. 놈은 분명 저를 찾아올 겁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전부 말입니까?”
“네. 전부...”
“넵. 알겠습니다.”
부하는 조금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공작에 끌고 온 그것들은 사용하기에 따라 다수의 7성 헌터도 상대할 수 없는 교단 비장의 무기였다. 그런 것들을 한기도 아닌 전부 쓰겠다니 만약 그것들의 통제에 실패한다면 자신의 상관 하나의 목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러나 명령을 거부할 수는 없다. 자신의 상관은 보이는 것 이상으로 잔인한 여 자니까.
부하가 밖으로 나가자 자리에서 일어난 캐롤라인은 칼을 꺼내 손을 슥 베었다. 이내 그녀의 손으로부터 붉은 피가 뭉클거리며 솟아오르고 그녀는 그 피를 붉은마나석 위에 뿌렸다.
“차라리 처음 의도대로 병원사람들을 몰살시킨 채 우리를 따라왔으면 참 좋았을 텐데.”
슈우우
피로 얼룩진 붉은마나석에서 검은 기운이 더욱 세차게 뭉클뭉클 피어오른다.
“그 자신감, 끝까지 가지고 있었으면 좋겠군요.”
드드득...
붉은마나석은 마치 피를 먹고 자라는 듯 책상 위를 순식간에 뒤덮었다.
“미쳐 날뛰는 사람들 속에서도 어디 가능할까?”
우우우웅
복도를 암혼보로 사뿐사뿐 걷던 제황은 갑자기 시야가 붉게 물들며 흔들리기 시작하자 자리에서 멈췄다.
좀비 마냥 복도를 걷고 있던 이들도 갑자기 자리에 주저앉아 머리를 붙잡는다.
-이건 무슨 일이지?
제황의 물음에 궁기가 답했다.
-술법을 강화되고 있어. 심상치 않네.
-어떤 술법?
-토대는 간단한 환영암시진인데 그 위에 사이한 기운이 섞였어. 천주백가는 기존의 술법들을 계속 연구하고 업그레이드 하는 것 같아. 시작한다!
궁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머리를 움켜쥐고 있던 이들이 일제히 동작을 멈췄다.
그리고...
“캬아아!”
서로를 향해 마구잡이로 달려들기 시작했다.
이전까지는 마치 한 군집처럼 움직이더니 이제는 아니다.
원수라도 되는 듯 서로 싸우기 시작하는데 단숨에 복도와 병실은 난장판이 되었다.
콰쾅! 쾅!
죽일 듯 뒤엉키지만 일반인들은 그나마 낫다. 문제는 입원 중인 각성자들이다.
“으아아아!”
깁스한 팔을 휘두르는 남자로 인해 바닥에 처박힌 여자가 비명을 지르며 두 손을 내밀자 그녀의 손에서 뿜어져 나온 전격이 남자를 불태웠다. 한 소녀가 링겔대를 무기삼아 휘두르는데 거기에 맞은 일반인들이 마구 날아다닌다.
-더럽게 가는군. 좋은 생각 있어?
-어렵지만 빠른 거? 쉽지만 느린 거?
-어렵지만 빠른 거.
-아까 그 년을 죽이면 돼.
-쯧
궁기의 말에 제황이 혀를 찼다. 목적과 수단이 뒤바뀌었다.
-장난치지 말고 다른 방법은?
-내가 지정해 주는 곳들을 박살 내.
-몇 군데나?
-그건 박살 내 봐야 알아. 적어도 여섯 곳, 많으면 열두 곳
-많군.
-추천 메뉴는 물러선 후 추적하기입니다.
-그건 맞지만...
지금 이곳은 적들의 함정이었다. 적이 원하는 지형에서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형태로 붙는 것은 병법에서 가장 금기시하는 행위이며 제황도 가장 싫어하는 전투 형태다. 지금 붙기보다는 물러선 후 장기인 추적으로 적을 야금야금 갉아 먹는 게 정공법이다.
그렇지만 그렇게 되면 이 병원에 있는 이들의 목숨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
-그냥 내 방법으로 가지 뭐. 화신체와 탐색 부탁해.
-뭐, 알았어.
화아악!
[화신체]
파아아앙!
제황의 어깨 위로 붉은 날개가 불꽃처럼 솟아올랐다. 궁기의 힘을 받아 마나 관련 능력을 급격히 강화하는 궁기의 비술. 화신체를 일으키자 암혼보의 은신효과가 깨졌고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제황을 향해 일제히 달려들었다. 일측촉발의 상황! 그러나 제황의 몸으로부터 뿜어져 나온 거센 바람이 그들 모두를 뒤로 날려 버렸다.
여의용혈신공이 기지개를 켰다.
“흐으읍!”
쓰러진 이들이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레전드스킬인 여의용혈신공을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자 사방으로 뿜어졌던 마나가 이내 다시금 제황을 향해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때 궁기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탐색 끝!
-고마워!
궁기안 가득 붉은 점들만이 가득하다.
아무렇게나 성의없이 찍어놓은 듯한 점이지만 제황의 뇌는 그 모든 경로를 추적하고 있다.
붉은 점을 향해 비천궁을 겨눈 제황의 눈이 빛났다.
드드드득
제황이 아무것도 없는 비천궁의 시위를 당겼다.
“가볍게 두들겨주지.”
붉은 기운을 흩뿌리는 빛의 화살 한 대가 생성되었다.
이것이 진정한 무련궁술의 정체다.
[춤추는 소나기 무한!]
촤아아아아악!!!
비천궁으로부터 시작된 폭포수 같은 빛줄기의 향연이 시작되었다.
빛줄기의 소나기는 단발로 끝나지 않았다. 마치 분수가 뿜어지듯 사방을 향해 날아간다.
뿜어져 나온 빛줄기들은 마치 생명을 지닌 듯 꿈틀거리더니 일제히 복도에 서 있는 모두를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퍼퍼퍼퍼퍼퍽!!! 퍽퍽퍽!!! 퍽퍼퍼퍼퍼퍽퍽퍽!!!
“으악! 꺄악! 아아악!”
피해도 소용없다. 막아도 소용없다. 사각지대에 있어도 소용없다. 빛줄기들은 병실 안까지 친절히 방문해 엉겨 붙어 싸우고 있는 환자들의 몸을 사이좋게 두들겨버렸다. 유난히 날뛰는 강한 헌터들에게는 마치 몰매를 치러온 것 마냥 수십 개의 빛줄기가 우르르 몰려들어 흠씬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퍼퍼퍼퍼퍼퍼퍽!
“꾸에에엑!”
빛줄기에 얻어맞은 각성자들이 사방에 나가떨어졌다. 신기한 것은 몸에 꽂힌 화살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
“끄으으...”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 조금 전까지 치고받던 소음 대신 고요함 속에 앓는 소리만 가득하다.
-죽겠다.
-지금 안 죽었잖아.
궁기의 우려를 간단히 일축해버린 제황이 이번에는 천장을 향해 활을 세웠다.
“거기였어?”
자랑은 아니지만, 제황의 탐색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 핵심은 궁기안···. 궁기안으로 보이는 선들이 모두 위쪽으로 연결되어 있었고 한점으로 모인다.
우드드득
이번에는 화살을 시위에 걸었다. 조금 전에 마나로 이루어진 화살을 쓴 건 살상력을 줄이려는 방편이었다. 지금은···.
“그냥 맞고 뒈져 버리던가.”
‘춤추며 폭발하는 강기의 화살’
파캉! 콰아앙! 콰아앙! 콰아아앙!
제황이 발사한 화살은 천장을 관통하며 위를 위로 치솟기 시작했다. 닿은 건 모조리 원자단위로 갈아버리는 강기를 입힌 화살이지만 그 와중에 사람들은 교묘하게 피해 거슬러 올라간다.
이윽고
콰가가가각!
병원 최상층에 있는 병원원장실의 바닥이 통째로 터져 나갔다. 그와 함께 원장의 책상 위에 있던 붉은마나석이 박힌 판 또한 박살 났다. 힘이 남았는지 강기의 화살은 끝내 병원의 천장까지 관통해 버렸다.
“와우”
원장실 바닥의 삼분에 일이 박살 났지만, 캐롤라인은 그다지 놀랍지 않다는 듯 감탄을 터뜨리며 병원 옥상에 내려섰다. 그녀의 주위를 촘촘히 가로막아 선 거대한 그림자들은 마치 그녀를 호위하는 듯 돌파편들을 막아냈다.
타탁
구멍을 통해 튀어나온 제황이 가벼운 발소리와 함께 옥상에 내려섰다.
짝짝짝
“역시 극딜러 7성 헌터 그레이트!”
캐롤라인이 정말 놀랍다는 듯 박수를 친다.
“여유가 넘치는군.”
“당연하죠. 저는 아직 준비한 게 많답니다.”
“흠.”
캐롤라인이 자신을 호위하는 이들의 어깨에 손을 올린 채 말했다.
2.5미터가량의 검은 중장갑들이 그녀를 호위하듯 서 있다. 숫자는 모두 열...
“재미있는 것들이군.”
꽤 익숙한 녀석들이다. 바로 엘어스에서 동철을 처음 만났을 때 느꼈던 광폭한 마나가 그들에게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으니까. 만약 당시에 만났던 동철과 비슷한 스펙이었다면 꽤 고전했으리라. 과거의 자신이라면...
“호홋, 고작 재미있어 보인다니 섭섭하네요.”
“그 쇳덩어리들을 어지간히 믿나 보군.”
“당연하죠.”
제황의 말에 캐롤라인이 허리춤에서 두 뺨 정도 되는 짧은 단봉을 꺼내 들었다. 그 끝에는 붉은마나석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는데 마나석 하나하나에 수십 개의 알 수 없는 한자가 음각되어 있었다.
“당신이야말로 여유가 넘치는군요. 아, 그러고 보니 당신은 천군천사의 프로토타입과 붙은 경험이 있군요.”
캐롤라인이 이제 알았다는 듯 손뼉을 치며 말했다. 그와 함께 그녀가 천군천사라고 말한 그것들이 일제히 허리에서 장검을 뽑아 들었다.
“그렇지만 이것들을 그런 실험체와는 비교할 수 없답니다.”
지이이잉
검으로부터 검은 기운이 뿜어져 나오더니 이윽고 하나의 형체를 만들어냈다.
그것은 분명 검강이었다.
7성 근거리 헌터의 상징인 검강이다.
10기의 천군천사가 전부 검강을 사용할 수 있다.
슥슥슥
“나모삼만다발타남훔발사라훔”
봉을 양손의 약지에 낀 그녀의 손이 빠르게 움직인다.
“사바하!”
촤아!
그녀의 손으로부터 빛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 빛은 제황을 잠시 비추는가 싶더니 이내 제황의 몸 주위를 도는 반딧불과 같은 빛무리로 변했다.
“자아, 당신이 자랑하는 은신도 무용지물이 되었어요.”
그녀의 말에 제황은 몸을 휘감고 도는 반딧불 무리를 손으로 쳐냈다. 그러나 그것들은 실체가 없는지 제황의 손을 그대로 통과해 버렸다. 고개를 갸웃한 제황이 캐롤라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걸로 고작? 할 건 다했나?”
“흐응, 마치 기다려 준 것처럼 말하는군요. 그 여유 곧 후회가 될 겁니다. 후회는 언제나 늦는 법이죠.”
“뭐 재미있는 게 많군. 가진 패는 다 꺼냈지?”
“...”
전혀 동요하지 않은 제황의 음성에 캐롤라인의 얼굴이 처음으로 굳었다. 그리고 동시에 그녀의 단봉이 제황을 향했다.
“되도록 온전히 데려가고 싶었지만, 더 참을 수 없군요. 숨통만 붙여드리죠.”
그녀의 호언에 제황이 피식 웃었다. 숨통만 붙여준다니 참 고마울 따름이다.
“뭐 난 네 숨통도 끊어줄 생각이니 별로 고맙지 않군. 참고 말고는 네 사정이고 아무래도 수적으로 내가 불리한 듯 보이니 나도 지원군을 부르지.”
“뭐라고요? 호호호!”
제황의 말에 캐롤라인이 교소를 터뜨렸다.
지금 눈앞에 있는 이 7성 헌터는 지금껏 자신을 기만하고 있다가 이제 밀리는 것 같으니 지원군을 부른다고 한다. 자신이 그렇게 허술하게 일처리를 할 리 없지 않은가. 이 주변의 모든 통신장치는 이미 전파방해권역 안에 있었다.
“설마 외부로 전화 한 번 안 해본 건가요? 쿡쿡... 애송이들의 자신감이란...”
-쟤 뭐래니?
-몰라. 혼자 소설 쓰고 있네.
애초에 제황은 외부에 지원군을 요청할 할 생각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고맙다. 재밍 중이라는 건 저들도 외부와 통신을 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네가 암혼보를 쓴다는 게 무슨 뜻인지 저년이 모르는 것 같은데? 호호호
-그러게.
제황이 암혼보를 사용했다는 건 간단했다.
암혼보를 보거나 기억할 수 있는 모든 이를 이곳에는 삭제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생각은 아직 전혀 변하지 않았고 딱히 바꿀 생각도 없었다.
제황이 비천격을 꺼내 애기살 한 대를 넣고 비천궁에 건 뒤 하늘을 겨누었다.
퉁!
시이이잉
애기살 한 대가 하늘을 향해 시원하게 날아올랐다.
그것을 함께 바라보던 캐롤라인이 단봉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이제 헛짓거리 끝났으면 시작할까요?”
봐줘도 많이 봐줬다. 이제 끝을 볼 때다.
“아직이야. 무련천궁대 소환”
비천격과 비천궁이 동시에 붉은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동시에...
슈욱...슈욱...슈육...슈슈슈슈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