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사거리 100만-140화 (140/301)

# 140

삼천교와 오크-1

제황은 엉망이 된 활을 옆으로 던져 버렸다. 그곳에는 망가진 연습용 활들이 널려 있었는데 오늘로 벌써 세 개의 연습용 활을 망가뜨렸다. 아무리 한계까지 강화한 연습용 활이라도 제황이 힘을 잘못 주면 이렇게 망가져 버린다.

“아, 정말!”

한소리 늘어놓으려던 제황은 궁기가 태블릿 안 드라마에 완전히 빠진 것을 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드라마중독말기의 궁기가 그녀의 완소아이템인 태블릿들을 늘어놓으며 그동안 빠져나간 막장력을 충전한다고 했을 때 허락했던 건 자신이었다.

‘할 말이 없군.’

포기해버린 제황이 새로운 연습용활을 들고 정신을 집중했다.

이것을 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것은 바로 활을 쏘는 근육의 연마다. 물론 이것은 단순한 근육연마가 아니다. 보통의 궁사들은 당기는 근육을 연마한다. 가장 이상적인 근육의 형태로 만들어 놓아야 어떤 상황에서 시위를 당기건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화살을 발사할 수 있다.

제황이 한 번에 수십 개의 화살을 쏘면서도 탄착점이 일정한 것은 그 모든 일련의 행위를 근육에 새겨 놓았기 때문이다. 목표를 보고 조준을 하면 늦는다. 눈으로 보는 순간 이미 시위를 놓고 있어야 한다. 이건 마치 프로야구 선수들이 100마일의 강속구를 쳐내기 위해 수천수만 번 배트를 반복적으로 휘두르는 것과 같은 원리다.

그리고 무련천가에서는 이렇게 당기는 것뿐만이 아니라 다시금 놓는 동작으로도 쓰지 않는 다른 잔근육을 연마한다. 양궁과는 다르게 실전에서는 정말 모든 자세에서 사격할 수 있어야 하니까.

‘기본이 되어 있지 않으면 모든 게 모래성...’

“비번 좀 눌러봐.”

제황의 눈앞으로 테블릿이 불쑥 내밀어졌다.

“뭐?”

“충전”

“어제 해주지 않았나?”

“다 썼지.”

태블릿 화면을 보니 결제창이 반짝거리고 있다. 분명 어제 50만 원을 결제해 준 기억이 있는 제황이다.

“후, 그래.”

작게 한숨을 내쉰 제황이 비번을 눌러주자 100만원 결제가 완료되었다는 메시지가 떴다.

“뭐가 이렇게 많아?”

“미리보기 신작은 두배더라고...”

뭐 마나석이나 간식값등 엄청나게 많이 먹어대기는 해도 전투에 있어 궁기의 몫도 무시못하니까.

“고마워.”

“아냐.”

흩어진 집중력을 끌어올리며 다시금 집중하는 제황이다.

‘기본이 되어 있지 않으면 모든 게 모래성...’

“이것도!”

궁기가 다른 테블릿 하나를 더 내민다.

끌어올리던 집중이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이건 뭐야?”

“성인인증 필요해.”

“...”

“빨리! 급해!”

“후”

토톡..톡

“히힛! 고마워.”

성인인증을 해주자 태블릿화면을 보는 궁기의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제목을 슬쩍 보니 온통 붉은 화면에 헐벗은 남녀가 가득한 19금 드라마다.

뭐 궁기의 취향까지 터치할 생각이 없기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제황이 다시금 훈련용 활에 정신을 집중했지만 궁기는 아직 볼일이 끝나지 않았는지 제황의 몸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

“왜. 또 무슨 볼일 있어?”

제황이 물었지만 궁기는 아무 대답 없이 제황의 땀이 맺힌 팔뚝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손바닥에 침을 발라 제황의 팔에 슥하고 묻혀 버렸다.

“아 더럽게···.”

“흐흥흥”

볼일이 끝났다는 듯 룰루랄라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는 궁기.

“킁킁”

제황은 궁기가 문지르고 간 팔을 들어 냄새를 맡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조금 쿰쿰한 신내다.

이것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궁기는 가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고는 하는데 어떤 때는 무척이나 깐깐하고 도도하게 굴다가도 또 어떤 때는 배시시 웃으며 유혹하듯 행동하기도 한다. 드라마를 보다가 나온 아슬아슬한 옷을 직접 만들어 입고 방을 활보하기도 부지기수. 잘 때 갑자기 침대 속에 제황에게 과도하게 밀착하기도 한다.

그리고 또 지금처럼 제황의 몸에 침을 발라 놓거나 아무 이유 없이 다가서서 몸을 문지르고 가버린다.

물어봐도 성의 있는 답변은 기대하기 힘들기에 제황은 그에 대해 따로 검색을 해봤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궁기가 간간이 보이는 행동이 고양잇과의 습성과 닮았다는 것이다. 뭐 궁기의 본신이 호랑이의 정령이니 그 친척뻘인 고양이의 본능을 보이는 거야 어쩔 수 없다지만 요즘 들어 그게 유독 심해졌다는 게 문제다. 마음 같아서는 ‘발정기냐.’ 라고 묻고 싶은 심정이다.

지금도 그렇다.

태블릿을 거치대에 세워놓고 마치 고양이가 빵을 굽는 자세로 시청을 하고 있는데 엉덩이를 살랑살랑 흔드는 걸 보면 묘하게 색기가 넘치고 자꾸 마음이 설레어 버린다. 제황도 끓어 넘치는 에너지를 지닌 혈기 왕성한 남자다. 차라리 호랑이나 고양이 따위의 모습이면 모를까.

아름다운 여인이 저런 짓을 하면...

“흠흠”

마음을 가다듬은 제황은 신경을 돌릴 겸 상태창을 열고 스킬 중 하나를 활성화시켰다.

-신위 (유니크 등급)

지정된 신위:천제황

효과

능력활성화-모든 능력치 20프로 상승

사상력:

1단계:1,000명

2단계:10,000명

3단계:100,000명-적용 중

(마나석이 부족하여 다음 단계를 개방할 수 없습니다.)

4단계: 개방조건: 5티어마나석: 500개-370개 부족

신위가 3단계에 들어선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약 이틀 전 훈련을 하던 중 세이브 시스템이 신위가 3단계를 돌파했다는 걸 알려왔다. 사상력이라는 게 쌓이는 조건에 대해서는 아직 정확히 알 수 없지만 10만명이라는 숫자에 적용 중이라는 글씨가 나타나는 순간 무려 20프로의 모든 능력치 상승이 일어났다.

처음에는 기뻤다. 방법이야 어쨌건 강해졌으니까. 그렇지만 제황은 큰 문제에 직면했다.

분명 홍빈과 같은 서포터의 버프도 일시적으로 능력을 상향시키는 것은 맞다. 그렇지만 그것들은 고작해야 한 부분에서의 작은 상승일 뿐이다. 그런데 ‘신위’ 는 전 부분에 있어서 20프로가 상승했다.

이름:천제황  B급 10/4레벨 2,500,000/1,023,500exp

근력:15 (+20프로) -> 18

민첩력:18 (+20프로) ->21.6

체력:14 (+20프로) ->16.8

감각:13 (+20프로) ->15.6

정신:15 (+20프로) ->18

능력치라는 것이 단순히 근력, 민첩력, 체력, 감각, 정신등으로 확연히 구분되어있는 것일까?

정답은 서로가 상호 보완관계라는 것이다. 체력은 앞의 근력과 민첩력이라는 능력을 떠받치는 형식이고 감각은 근력과 민첩의 보정을 통해 수치화되지 않는 강함이 또 발생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정신을 통해 강해진 마나를 ‘여의용혈신공’ 이 가볍게 커버해 주고 있는 것이랄까?

‘큰일이야.’

현실은 단순화된 수치로 적에게 가하는 공격력을 계산하는 게임 따위가 아니다.

모든 능력치가 20프로 상승함에 따라 그 시너지 효과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고

가장 큰 문제는 사격폼 자체를 수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급격한 능력의 상승으로 모든 스킬의 근간이 되는 사격의 조준점이 틀어져 버렸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제황은 그날부터 기본이 되는 사격폼 수정에 들어갔다. 평소 그다지 많이 하지 않던 무식한 근육훈련을 들어간 것도 이 때문이다. 근육 한올 한올에 가해지는 힘 자체까지 재조율해야 했다.

‘조급해서는 안 돼.’

새로운 연습용활을 손에 든 제황이 다시금 정신을 집중했다. 어서 빨리 사격폼을 몸에 적응시키지 않으면 신위라는 스킬이 없으니만 못하다. 활 사격은 제황이 가진 모든 스킬의 기본이다. 아무리 무련궁술에서 ‘비상하는’이라는 스킬이 조준을 보완해 준다지만 그 외의 스킬들은 거의 본연의 실력을 기반으로 사용하는 것이었다. 제황은 자꾸만 조급해지는 마음을 애써서 달래며 두 팔에 힘을 줬다.

“후우...”

우드드드득...

***

훈련을 모두 마친 제황이 수건으로 몸을 닦으며 스마트폰을 켰다.

제황의 스마트폰은 정말 단출했다. 누구나 기본 앱으로 사용하는 ‘채팅 앱’ 도 없다. 있는 거라고는 ‘헌터사전’ 과 ‘국가헌터앱’ 그리고 ‘검색엔진’ 뿐이다.

자신이 세간에 화젯거리인 것은 제황도 잘 안다.

그렇지만 제황은 그것들을 철저히 무시했다. 이전에 조금 인연이 있었던 이들도 자신들이 가진 가느다란 연줄을 가지고 제황에게 접근하려는 눈치였기에 제황은 그런 일체의 것들을 무적성에 맡겼다.

몇 개의 문자 메시지가 뜬다.

“귀찮군.”

무적성에서 필터링해서 보내준 문자는 한결같다.

각종 인터뷰 요청들과 세계 각국의 클랜들에서 보내오는 미팅요청뿐이다. 이것도 무적성의 대외업무팀에서 최대한 거르고 거른 것들이니 자잘한 것들을 다 따지면 아예 하루종일 스마트폰만 보며 살아야 했을 것이다.

“홍빈이는 잘 하는 모양이네.”

그나마 메시지 중 하나가 제황을 흐뭇하게 만들었다.

의무레이드에서 인연을 맺었던 홍빈은 무적성 산하 레이드 전문 컴퍼니에 서포터로 영입되었다. 제황의 도움으로 금전적인 여유가 생긴 홍빈이 집안 대소사를 정리한 후 가장 먼저 한 것은 의족을 업그레이드하는 것이었다. 이전에 사용하던 의족이 단순히 몸의 불편함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지금 그가 사용 중인 것은 군용으로 개발된 것으로 나노스켈레톤이라는 의족이었다.

행여 제황의 수련에 방해가 될까 하루에 하나씩이지만 꼬박꼬박 자신의 신상을 문자로 알리는 홍빈이었다. 또 다른 메시지들을 확인하던 제황의 눈이 멈췄다.

“어?”

[저스틴포인트 박창준중위 귀환완료 메시지 확인 후 연락 요망]

메시지를 확인한 제황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대외업무팀에 연락하여 박창준 중위 그러니까 제황이 저스틴포인트에서 근무했을 시절 소대장을 맡았던 박중위가 군 특수통합병원에 입원 중이라는 것을 전해 듣고는 곧바로 옷을 갈아입은 뒤 무적성을 나섰다.

철컥

병실문을 열고 들어가자 침대에 누워 책을 읽고 있던 박중위가 제황을 발견하고 손을 번쩍 든다.

“여어!”

“박중위님.”

한달음에 달려간 제황이 박중위의 상세를 살폈다.

박중위는 매우 초췌해져 있었다. 링겔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데 이전의 쾌활한 모습과는 다르게 광대뼈가 도드라져 보일 정도다.

“어떻게 되신 겁니까.”

제황이 물었다.

저스틴포인트에서 있었던 오크들의 진군과 폭발사고로 있은 지 반년이 지났다.

솔직히 제황은 그들을 포기하고 있었다. 그만큼 당시에 발생한 폭발은 강렬했으니까.

자신이 기절했을 정도인데 근거리에 있던 1소대는 그냥 녹아버렸을 거로 생각했다.

게다가 오크들은 포로라는 개념이 희박했다. 잡으면 먹이가 될 뿐이다. 솔직히 오크들에게 잡히면 그냥 그 자리에서 자살하는 게 덜 괴롭게 죽는 거라는 게 상식이다.

“폭발이 있었을 때 운 좋게 살아남은 건 나와 현경이 그리고 혜지였지. 무장버스는 뭐 완전히 박살 났지만... 오크들도 폭발에 휘말려서 인간이고 뭐고 따질 정신은 없어 보이더군. 우린 그 틈을 노려서 저스틴포인트의 대피시설로 도망쳤어. 운이 좋았지.”

병실에 침묵이 흘렀다. 셋을 제외한 나머지에 대해서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혜지씨와 현경씨도 같이 귀환한 겁니까?”

현경은 제황 덕분에 전투공황장애를 이긴 힐러고 혜지는 소대에서 맏언니 역할을 하던 근접딜러다. 박중위가 고개를 저었다.

“음, 아니 귀환은 나 혼자야. 그녀들은 다른 이들과 함께 아직 대피시설에 고립되어 있어.”

“예?”

“말 그대로야. 난 외부에 구조요청을 하기 위해 빠져나온 거야. 많이 죽었지. 50명이 자원했는데 나 홀로 살아남았어.”

“...”

“잠시 나갈까?”

“예.”

제황은 박중위와 함께 병실을 나섰다. 그리고 병원 앞 공원에서 그동안 있었던 이야기를 나누었다.

저스틴포인트 지하에는 이런 일에 대비해서 수용인원 약 5천에 달하는 대피소가 준비되어 있다고 한다. 장거리 통신을 위한 무전시설이 오크들을 위시한 삼천교에 의해 점령당했기에 외부에 연락은 불가능했지만, 꽤 많은 숫자의 군인과 헌터들이 살아있다고 했다.

“삼천교...입니까?”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다. 그다지 반갑지는 않은 이름, 그들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건 불타버린 나무에 꽂혀 있던 참혹한 시신들뿐이다.

“음, 그놈들이야.”

“그게 가능한 겁니까?”

“그렇지. 후후”

제황의 물음에 박중위도 웃을 뿐이다.

오크들에게 인간이란 죽여야 할 생물임과 동시에 ‘먹이’ 였다.

물론 오크라는 것들이 동족포식도 마다하지 않는 것들이기는 하지만 인간과 오크는 공존할 수 없다는 게 일반적인 상식이었다.

“나도 이해할 수가 없었어. 그렇지만 탈출하던 중 삼천교 놈 하나를 붙잡아서 그 이유를 알 수 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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