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사거리 100만-135화 (135/301)

# 135

돈지랄의왕-4

“할 말 있냐?”

“크윽, 아... 아닙니다.”

양복남자가 넙쭉 하고 고개를 숙였다. 사실 6성헌터 쯤 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이 정도만 하고 살려주는 것에 고마워해야 할 판이다  오체투지라도 해야 할 것 같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그리 할 수 없었다. 두 팔이 흉하게 꺾여 있었으니까. 물론 억울하지는 않을 것이다. 모두 공평하게 두 팔을 부러뜨렸으니까. 억울하면? 뭐 덤비던가.

마을 사람들을 돌려보낸 제황은 마을주민들을 괴롭힌 일과 송씨 할아버지의 아들을 병원에 입원시켰다는 소리에 그들의 양팔을 부러뜨려  버렸다. 단순히 부러뜨린 게 아닌 비틀어 부러뜨리며 복합골절을 선물로 줘 보냈으니 다시는 깡패짓하기는 힘들 것이다.

송씨 할아버지댁으로 간 제황은 그간의 일들을 모두 들은 뒤 송할아버지에게 물었다.

“왜 제게 말씀 안하신 거에요?”

제황이 짐짓 서운하다는 듯 송노인에게 말했다.

그 동안 많이는 아니지만 간간히 연락은 했었다. 그 대신 산장을 관리해 주시니 돈을 조금 보내드리려 했지만 그때마다 송노인은 역정을 부리셨다. 그런데 막상 찾아오니 이런 일이 있었을 줄이야.

“어른들 일에... 후우. 아니다. 내가 너를 너무 어리게 봤구나.”

성년이 지난 지 한참이 지났지만 송노인에게 제황은 아직도 귀여운 아이에 불과했다

그렇지만 오늘 일을 해결한 제황은 더 이상 아이가 아니었다. 아니 6성 헌터라는 거물이 되어 돌아왔으니 예전의 그 산대장의 아들이 아니었다.

“아저씨는 정확히 얼마나 다치신 거예요?”

“머리를 잘못 맞아서 삼일 만에 깨어났단다. 아직은 경과를 지켜봐야 한다는구나.”

“후, 그래도 다행이네요.”

그 동안 밀린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니 밥상이 들어오고 식사를 마친 제황은 산장으로 올라가는 것을 잠시 보류하기로 했다. 이대로 올라가기에는 불안하다. 산책을 나온다고 말한  제황은 스마트폰으로 무적성에 소속된 자산운용사에 내부전화를 연결했다.

무적성에 소속된 헌터들의 자산을 관리하는 이 회사는 오로지 무적성에 소속된 헌터들의 자산만을 관리함에도 운용하는 자금크기가 우리나라 예산의 20프로가 넘는다고 알려진 거대한 자산운용사였다.

-예. 천제황님. 무적성 자산관리1팀 팀장 유한성입니다.

통화연결음이 두 번이나 갔을까 깍듯한 남자의 목소리가 스마트폰에서 울린다.제황이 굳이 자신을 밝힐 필요도 없다. 제황의 번호는 즉각 자산운용팀 최상부로 연결된다.

특별관리 대상의 VVIP니까.

-안녕하셨습니까. 유한성님

-예. 천제황 고객님 덕분에 항상 감사하며 살고 있습니다.

유한성 팀장은 과도하다고 할 정도로 제황을 깍듯이 대했다. 무적성의 자산관리팀장 정도면 넘치는 자부심으로 무장해도 될 터지만 그가 운용하는 자산의 30프로 이상이 제황의 자산이었으니 이렇게 저자세로 나올 만도 했다.

-궁금한 게 있는데 지금 제가 즉시 운용할 수 있는 자금이 얼마나 됩니까?

제황의 물음에 전화를 받는 유한성 팀장의 목소리가 살짝 경직되었다.

그가 상대하는 고객들 중 가장 특이한 고객을 지목하라 한다면 그는 망설이지 않고 천제황 을 꼽을 것이다. 그는 평소에는 소비가 거의 없는 고객에 속한다. 물론 전투소모품이나 자잘한 것으로 이삼억씩 쓰기는 하지만 헌터가 전투소모품을 사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 외에는 정말 쓰는 돈이 없다.

그러나 한 번 쓸 때는 정말 후덜덜하게 쓴다. 자잘하게 일이십억(?)씩 쓰는 게 아닌 몇 백억 단위로 써댄다. 그리고 또한 그 누구보다 훨씬 많은 돈을 빠르게 벌어들인다.

-지금 당장 필요하신 겁니까? 아니면 이삼일 가량의 말미가 있으신지요.

-차이가 있습니까?

-예. 지금 당장 현금화하실 수 있는 금액은 대략 200억 가량 되십니다. 그렇지만 삼일 가량의 시간만 주신다면 천억 정도는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그렇군요. 한 달이면 어떻습니까?

-자산에 최대한 영향을 끼치지 않는 상품 순으로 정리하시면 대략 이천억 가량 마련이 가능하십니다.

-그렇군요.

제황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황은 돈을 쓰지 않을 뿐이지 돈 쓰는 법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궁기의 말처럼 사치를 부리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단지 제황의 성격일 뿐 돈을 안 쓰는 건 아니다.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아낌없이 써버린다.

-그럼 일단 이천억 준비 부탁드리겠습니다.

-아, 알겠습니다.

-그런데 혹시 어디에 쓰실지 말씀해 주실 수 없는지요. 만약 예전처럼 아이템 구매를 위해서 필요하신 거라면  구매협상팀을 보내드리겠습니다.

-아, 그건 괜찮습니다. 그건 따로 요청할 곳이 있으니까요.“

-아. 그렇습니까? 알겠습니다.

통화를 끝낸 제황은 다시금 번호를 눌렀다. 지금 제황이 누르는 번호는 어떤 사람과 직통으로 연결된 핫라인이다.

-문상님. 안녕하셨습니까.

-오. 제황군! 자네가 웬일인가?

반색하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목소리에 여유가 넘친다. 무적성에서 함경남도 수복 성공을 통해 가장 큰 혜택을 본 건 문상 이용기였다. 무적성의 경제부분을 맡고 있는 그이기에 북한으로부터 쏟아져 들어오는 몬스터 사체의 유통을 독점하는 그는 요즘 입에 함박웃음을 달고 다닌다.

몬스터의 사체는 돈이 된다. 특히 북한 쪽에서 들어오는 다크어스의 몬스터들은 그 희귀성으로 고가에 팔린다.

이번 함경남도 수복계획 기간 동안 레이드로 개인수익의 정점을 찍은 제황이 예쁘지 않을 리 없지 않은가. 제황 홀로 잡은 몬스터가 대형 클랜 하나와 거의 맞먹는 수준이었다.

게다가 제황이 잡은 몬스터는 깨끗하기로 유명했다. 수십 명이 달라붙어 레이드를 하는 것이 아닌 급소만을 노리고 공격하기 때문에 일반적인 공격대가 레이드하는 몬스터보다 20프로에서 30프로 정도 더 비싸다.

-긴히 부탁드릴 게 있어서 전화 드렸습니다.

-음? 자네가 나한테? 부탁이 뭔가?

제황의 말에 급관심을 보이는 이용기다. 정재계 쪽으로 움직이는 이답게 주고받는 거래를 즐기는 이용기다. 준다는 것은 받을 수 있다는 뜻이니까. 물론 제황과 그런 끈적끈적한 거래를 할 생각은 눈곱만치도 없었다.

-다름이 아니라...

제황은 사람들에게 들은 것들을 이용기에게 소상히 설명했다. 그리고 제황의 말이 끝나자 조금 날선 느낌의 이용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애써 밥상을 차려놨더니 파리 떼가 들끓는군. 이거 미안하게 됐네. 어떻게 보면 이번 일은 헌터들의 대외업무를 책임지는 내 소관에서 벌어진 일인데 이런 일 하나 미리 막아주지 못하다니... 면목이 없어.

-괜찮습니다.

이용기가 관리하는 것들이 한두 가지던가. 굴지의 자산운용사도 이용기가 관리하는 것들의 아주 작은 일부분일 뿐이다.

-아니야. 이게 다 그 미친 대통령 놈 때문이지. 그 쥐새끼의 숨통을 어서 끊어야 하는데 하도 사고 쳐 놓은 게 많아서 한 번에 찍어내려니 내가 너무 미적거린 면이 있어. 이거야. 원 형님한테 또 한소리 된통 먹겠군. 내 이 일은 책임지고 해결해 줌세.

-예. 부탁드리겠습니다.

이용기가 직접 책임지고 해결해 준다고 했으니 이제 이 문제는 완전히 제황의 손에서 벗어났다. 무적성에 연관된 이들의 공통된 점을 꼽자면 일 하나는 정말 확실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래. 그런데 고작 이것뿐인가?

제황의 말을 들으니 오히려 그가 둘러봐야 할 것을 대신 해준 격이다. 만약 모른 채 지나갔으면 권제에게 한소리 들었을 것이다. 이용기의 말에 제황이 입을 뗐다.

-제가 이번에 뭐 하나 구상중인 게 있는데 조언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구상?

이용기의 물음에 제황은 지금 그가 계획 중인 것을 이용기에게 설명했다. 사실 지금 제황이 말하는 것은 예전에 동철에게 말했던 산장 리모델링 계획의 확장판이라고 할 수 있었다. 뭐 들어갈 돈이 수십 배는 커지겠지만 지금의 제황에게는 별 상관없다.

-호오, 자네 친가가 있는 궁기산을 아우르는 대규모 개발계획이라... 그렇다면 자네가 아까 말한 그 최사장라는 놈이 계획하는 걸 자네가 하겠다는 건가?

-아닙니다. 저는 저와 개인적인 친분이 있거나 한 사람들만 모아서 그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는 곳을 만들고 싶습니다.

-예전에 그렇게 하는 친구들도 몇 몇 있었지. 뭐 잘해야 마을 정도의 수준이겠지만 자네가 원하는 건 그것보다는 크겠지?

-예. 그래서 문상님의 도움을 좀 얻을까 합니다. 제가 나서서 할 만한 일은 아니니까요.

-당연하지. 헌터는 몬스터만 잘 잡으면 되는 거야. 내가 데리고 있는 녀석들 중 그런 쪽으로 경험이 많은 팀이 있으니 내가 곧 보내줌세.

-감사합니다.

잠시 뜸을 들이던 이용기가 말을 이었다.

-아참 그리고 내가 그들 편에 작은 선물 하나 보낼 테니 받아.

-선물이요?

-그래. 거절할 생각은 말아. 내가 서운할 거야.

-예. 뭐 감사히 받겠습니다.

이용기가 뜻밖의 선물을 준다는 말에 조금 의아하기는 했지만 제황은 곧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날 새벽 제황은 이른 아침 산을 올랐다. 아침을 먹고 가라고는 하셨지만 부모님의 묘소에 가까워지니 한시도 지체하고 싶지 않은 제황이었다.

산장은 예전 떠나올 때 그대로였다. 간간히 송노인이 들러 청소를 했는지 마당에 수북이 난 잡초를 제외하면 그다지 허물어진 곳도 없다. 부모님 묘소에 들러 벌초를 하고 사당에 들러 조상님들의 위패를 하나하나 정성껏 닦은 뒤 백두산에서 겪은 일들을 그들에게 하나하나 이야기했다. 대답은 없지만 사당 안에 훈훈한 기운이 감도는 것 같다.

인사를 끝마친 제황은 가벼운 옷으로 갈아입은 채 한 손에 빗자루와 걸레를 들었다.

“청소 좀 해볼까.”

“나...낫 왜 부른 거야!”

“너도 같이 해야지.”

시큰둥한 표정으로 현신한 궁기의 손에 걸레들을 한가득 들린 제황이 웃으며 말했다.

“빨아와.”

“으윽”

“나...난 ...소호씨의 자손인...”

“청소하자.”

“내가 이런 일을...”

“오늘부터 양갱만 먹을래?”

“으으 비겁해...알았어. 흥!쳇! 뿡!”

제황이 정색을 하고 말하자 궁기는 투덜거리면서도 걸레를 빨러 갔다.

먹는 것으로 협박하는 치졸한 제황이었다.

정오가 되니 얼추 청소가 끝났다. 워낙 넓기는 하지만 청소를 하는 둘이 범상치 않은 이들이니 이 정도야 금방이다. 조금 늦은 점심상을 차리고 있는데 산장 위 상공에서 헬기소리가 들려와 제황이 상차림을 멈추고 밖으로 나섰다.

“웬 헬기가 여기에...”

산장 위 대략 50미터 상공에 한 대의 중형헬기가 선회 중이다.

내려앉을 곳을 찾는지 여기저기 왔다 갔다 하다가 이내 헬기의 문이 열리며 사무복 차림의 남녀 여섯 명이 레펠을 타고 내려오기 시작했다.

“잘 타네.”

가장 먼저 내려선 여자가 익숙한 손길로 장비를 해체한 후 옷매무새를 정리하더니 제황을 향해 다가와 꾸벅 인사를 했다.

“문상님 휘하 특수업무팀 1조장 정하율입니다.”

“아, 어제 문상님께서 보내주신다고 하신 분들이군요.”

“네, 오늘부터 천제황님의 궁기리 개발사업을 전담하게 되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제황이 마주 인사를 하는데 정하율이 한 장의 서류를 공손히 내밀며 말했다.

“최신기종은 아니지만 문상님께서 보유하신 헬기 중 가장 빠른 녀석입니다. 여기 인수서류에 사인을...”

“예?”

뜬금없는 말에 제황이 어안이 벙벙해 있자 그녀는 하늘에 호버링 중인 하얀 동체의 헬기를 가리키며 말했다.

“문상님께서 보내시는 선물입니다.”

“저게 선물이십니까?”

“예. 혹 중고라서 마음에 안 드시는지...”

“아, 아닙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제황이 서류에 사인을 했다.

작은 선물이라기에 정말 작은 걸 생각했는데 문상이 의외로 짓궂은 면이 있다.

물론 자가용헬기라는 게 신기한 건 아니다. 어차피 고위 헌터들 중에는 헬기를 소유한 이들이 많다. 현장 출동이 편하다는 이유였는데 이런 식으로 ‘작은 선물’을 받을 줄은 몰랐던 제황이었기에 놀랐을 뿐이다.

“모든 경비는 무적성에서 처리하니 마음껏 이용하셔도 됩니다. 자잘한 절차도 저희들이 모두 처리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어차피 산장 주변으로는 헬기가 내려앉을 곳이 없기에 ‘작은선물’을 근처에 헬기장으로 보낸 제황은 문상이 보낸 특수팀을 산장으로 안내했다.

***

서울 외곽의 작은 시가지 중심가에 위치한 동산건설이라는 간판이 달린 10층짜리 벽돌건물이 서 있다.  그 앞으로 고급중형차 한 대가 빠르게 멈춰 섰다.

철컹...쿵

사무실문이 벌컥 열리며 한 중년남자가 사무실로 뛰어 들어왔따.

“사...사장님.”

사무실에서 한창 친구와 채팅 삼매경이던 여자는 돈 가져갈 때나 들르던 사장이 아침부터 들이닥치자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남자의 몸에서 온갖 술냄새와 여자의 분냄새가 진동한다.

“미쓰김! 누가 나 찾으면 안 왔다고 해!”

“예? 예!”

여자의 대답을 들을 생각도 없는지 남자는 자신의 집무실로 뛰어 들어갔다.

“빨리...빨리!!”

연신 빨리를 중얼거리며 남자는 벽으로 달려가 벽에 붙은 금고를 열었다.

철컥

금고가 열리자마자 남자는 금고 안의 내용물을 확인할 생각도 없는지 들고 온 가방을 열고 그것들을 쑤셔 넣기 시작했다.

“제길...제길...”

남자의 이름은 박상두.

그리 크지는 않지만 내실있는..그냥 철거전문용역업체의 대표라는 명함을 지닌 동산파 보스다. 그는 어제 최사장과 술을 마신 걸 진심으로 후회하는 중이었다. 부하놈의 전화를 한 시간이라도 일찍 받았다면 아니 최사장이 여자를 마다하고 술자리를 파할 때 알아봤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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