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7
한 남자의 죽음-2
“그럼 이제 이유를 듣고 싶습니다.”
그 말과 함께 제황이 찻잔을 내밀자 나길환이 다기를 들어 제황의 찻잔을 채웠다.
제황이 시험이라고 말 한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바로 나길환의 살기가 거짓이었기 때문이다. 살기에도 진짜와 거짓이 있냐고 묻겠지만 분명 그 사이의 미세한 간극은 존재했다.
그리고 제황은 그 간극을 알 수 있는 사냥꾼이다.
“죄송합니다. 사실 권제님과 내기를 했습니다.”
“내기요?”
“네. 저는 제황님이 명에 따를 것이라는데 걸었습니다. 권제님은 물론 반대편에 걸었고요.”
“차이가 있습니까?”
“네. 크죠.”
후룩...
차를 한 모금 들이킨 나길환이 말했다.
“만약 제가 이기면 저는 제황님을 제 후계자로 삼을 생각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역시나 권제님이 옳으셨군요.”
“...”
나길환은 제황의 눈을 보며 소탈한 미소를 지었다.
“여전히 욕심이 나는군요.”
“그렇습니까?”
무적성의 총관이라는 자리는 결코 우습게 볼 자리가 아니다. 무적성 내에서 아니 대한민국 헌터계로 나가도 일인지상만인지하의 위치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자리의 후계자라 말하지만 제황의 대답과 표정에는 일말의 놀람이나 고민도 없었다.
“제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다지 대단치 않다는 듯 제황이 말했다. 그러나 나길환은 오히려 그 모습에 더 놀랐다.
“역시 제 것을 담기에는 너무 큰 그릇이군요.”
“과찬이십니다.”
“그런데 권제님이 뭘 거셨는지는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나길환이 제황을 자신의 후계자로 생각했다면 권제는? 그렇지만 제황의 대답은 한결 같았다.
“그 또한 제 길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후...”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모를 리 없다. 지금 저 말이 무슨 뜻인지...
무적성의 주인이 될 수도 있는 가능성을 일말의 고민도 없이 외면하는 제황이다.
무적성이 어디인가. 무적성은 단순한 무력단체가 아니다. 대한민국 헌터계의 상징이며 세계헌터사에도 거목과 같은 존재다.
게다가 그 지배자의 권력은? 무시무시하다. 제황이 권제와 같은 독점적 권력체계를 유지할 것이냐는 미지수지만 그 배후에 권제가 우호적인 입장을 취해주기만 한다면 정말 마음만 먹으면 대한민국 전체를 쥐고 흔들 수 있는 자리다.
그런 자리를 외면한다.
그러나 그 또한 한편으로는 이해했다. 이미 그런 이를 한 번 겪어봤었고 아직 겪고 있기 때문이다.
“권제님이 왜 제황님을 좋아하는지 알 것 같군요. 허허 그건 그렇고 이거 권제님도 큰일이군요. 제황님께 무적성을 훌쩍 던지고 도망치시려는 계획을 가지고 계신 것 같았는데...”
“절대 사양입니다.”
제황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고 나길환 또한 빙그레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권제도 그렇지만 제황 또한 강함에 미친 인간들이다. 무적성 따위는 기회만 되면 던져버릴 권제와 그런 자리에 한낱 미련 없어 보이는 제황은 결국 동류의 인간이었다.
“그렇군요. 아무튼 그건 차치하고 사실 제가 제황님을 모신 건 다른 이유 때문입니다.”
“예? 어떤...”
제황의 물음에 나길환이 의미모를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가면서 이야기 드리죠.”
***
삐-삐-삐
나길환을 따라 이동한 곳은 제황이 처음 가보는 곳이었다. 무적성 자체가 워낙 넓기에 아는 곳보다 모르는 곳이 더 많기는 하지만 특이하게도 의료센터 지하에 엘리베이터로는 갈 수 없는 비밀스러운 곳이 있다는 것은 처음 알았다.
그곳은 3중의 철창으로 철저히 가로막힌 1인 병실이었는데 그 안에는 지금 한 사람이 침대에 누워 있었다. 온갖 의료장비를 몸에 덕지덕지 붙인 그는 상당히 젊은 남자였는데 특이한 건 두 다리 부분이 허벅지 아래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제황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곳 무적성의 설비와 의료힐러들의 실력이라면 두 다리의 재생은 몰라도 그 외의 것들은 모두 완치시킬 수 있다. 그런데도 굳이 저런 처치를 한 건 의문이다. 병실 안으로 들어선 제황은 남자에게 조금 더 다가갔다.
낯이 익기는 하지만 얼굴 또한 상당히 망가져 있어 잘 구분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윽고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제황의 눈이 커졌다.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되는 이가 누워 있다.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병상의 남자는 바로 이성재였다. 대현클랜의 클랜마스터 이성재가 왜 무적성에 있다는 말인가.
“미리 말씀드리자면 이건 무적성의 의도한 바는 아니라고 말해야 겠군요.”
“예.”
제황은 차갑게 굳은 눈으로 이성재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그제 대현그룹의 회장과 권제님의 독대가 있었습니다.”
“독대요?”
“예. 대현그룹의 회장이 권제님께 독대를 요청했었습니다. 나중에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성재가 회장에게 중재를 요청했더군요. 거기서 사고가 터졌습니다.”
“어떤?”
“이성재가 꽤 발칙한 계획을 꾸몄더군요.”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이성재를 한심하다는 듯 쳐다본 나길환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아마 권제님을 무너뜨리면 무적성에 치명타를 가할 수 있으리라 판단한 것 같습니다. 멍청한 짓을 한 거죠.”
나길환은 단순히 멍청한 짓이라고 폄하했지만 이성재 딴에는 준비한 게 꽤 많았다. 엘어스에서만 구할 수 있는 특수한 독을 준비하고 그것도 모자라 갖가지 폭약과 대현클랜의 최정예 공격대들을 외부에 비밀리에 대기시켰다. 두 조직의 거인이 모이는 장소이기에 경비가 삼엄했지만 이성재의 계획은 철저했다.
이성재는 권제를 호위하는 밀령대를 상대하기 위해 그 동안 비밀리에 키운 암살조직을 조커로 꺼내들었다. 무려 50인의 원거리저격특화 헌터들이다. 물론 그 조커는 적중했고 이성재가 음모를 실행하는 동안 밀령대는 그들의 공격으로 인해 고전해야 했다.
만약 제황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목숨을 잃었을 수도 있을 정도로 그가 꾸민 계획은 철저했다. 그러나 그 계획에는 아주 치명적인 약점이 존재했다. 그것이 이성재가 저지른 가장 큰 실수고 그의 계획의 실패한 요인이다.
“권제님이 진심으로 분노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권제의 가진 바 무력을 정확히 판단하지 못한 것이다.
“현재 매스컴에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대현클랜 쪽에서 동원했던 헌터 전원은 현장에서 사망했습니다. 아, 하나는 남기셨군요.”
나길환이 이성재 쪽으로 턱짓을 하며 말했다.
“저것도 아마 제황님이 아니었으면 그 자리에서 피떡을 만드셨을 겁니다. 그러고 보면 저 친구 제황님 덕분에 목숨을 구했군요. 허허허”
나길환의 말에 제황이 허탈한 표정으로 누워있는 이성재를 바라봤다.
건드릴 사람이 없어서 권제를 건드리다니 자기 딴에는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는 모험이라고 계산했겠지만 권제의 진정한 힘에 대해 조금은 감지하고 있는 제황이 그의 곁에서 조언하는 입장이었다면 발벗고 나서서 그를 말렸을 것이다. 제황 자신도 정면에서 권제와 붙는다면 십중팔구는 필패라고 생각하는 중이니까.
암살 쪽으로 생각한다면 어느 정도 가능성은 보이지만 그 또한 확신할 수 없는 게 권제였다.
“정말 멍청한 짓을 했군요.”
권제를 단순한 7성헌터로 생각한다면 그건 오산중에 오산이다.
왜 사람들은 권제를 아직까지 7성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말끝마다 7성 7성 불러서?
따지고보면 정말 우스운 이야기다.
권제는 수십 년 전에도 7성 헌터였다. 무려 수십 년 전이다. 그 수십 년 동안 권제가 마냥 제자리에 있었을까?
흔히 사람들은 상태창의 만렙을 찍으면 헌터의 성장이 멈춘다고 생각한다. 물론 여기서 만렙이라는 것은 강제각성자 즉 비욘더를 말하는 것이 아닌 자연각성자인 디바우저의 경우를 두고 말하는 것이다. 강제각성자에게는 만렙따위가 없다. 그들은 정식으로 인가된 사용자들이 아닌 우회해서 접속한 불법사용자들이니까. 시스템 찌끄레기를 끌어모아 사용하는 것과 같다.
만렙이라는 건 선택받은 인종인 디바우저들 중에서도 오랜 기간 강력한 몬스터들과 사투를 벌이며 살아남은 진정한 강자들을 말한다.
현재 디바우저로써 만렙을 찍은 이들은 대부분 7성 헌터의 위를 준다. 전세계적으로 봤을 때 대략 600명 정도가 7성 헌터였는데 왜 그렇게 숫자가 적냐고 묻는다면 그만큼 위로 갈수록 성장이 힘들고 사망확률이 비약적으로 높아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권제가 그들과 같은 7성이라고 하여 전투력이 비슷할까? 이건 정말 우스운 비교다. 그건 마치 바퀴 네 개 달린 건 모두 자동차라고 말하는 것과 똑같은 비교라는 뜻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무서운 건 제황이 판단하기로 권제는 7성 헌터가 아니었다.
‘8성 헌터지.’
공식적으로 전 세계 단 두 명만 존재한다고 알려진 8성 헌터..
그러나 권제 또한 8성 헌터였다. 단지 그것을 공식적으로 밝히지 않는 것은 굳이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귀찮으니까.
자신 또한 진정한 한수를 타인에게 공개하지 않는 것처럼 권제 또한 진정한 그 힘은 외부에 드러내지 않는다. 권제의 충복인 나길환은 권제의 진정한 힘을 분노했다는 표현으로 말한 것이고 말이다.
“대현그룹의 회장은 어제부로 대현클랜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했으며 차후 대현클랜은 이성재의 사람들이 깨끗이 정리된 후 저희 무적성에 인계될 겁니다.”
“후우”
나길환의 설명을 들으며 제황은 아까 전 나길환이 왜 그런 무리한 시험을 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대현클랜의 종말은 제황이 무적성과 손을 잡고 있던 이유 중 하나가 사라지는 것과 같다. 본디 제황은 대현클랜의 일이 마무리되면 곧장 무련천가의 흔적을 찾아 떠나려 했었다.
그곳에서 무엇을 얻을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그 이후의 길은 무적성과 그다지 인연이 없으리라. 오롯이 무련천가의 후계자로서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 운명을 느끼고 있었으니까.
이들은 그것을 알고 제황을 붙잡으려 한 것이다. 이성재의 바보 같은 선택으로 일이 우습게 풀려버리는 바람에 그게 더 빨라진 것이고 말이다.
“권제님께서 이성재의 생사는 제황님께 맡긴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과 함께 나길환이 등을 돌려 나갔다. 심전도 음만이 울리는 그 공간에 남은 것은 제황과 이성재 뿐이다. 제황은 이성재의 병상으로 조금 더 다가갔다.
-딱 목숨만 붙여 놓았군. 그 노괴물... 역시 괴물이야.
-응.
궁기의 말에 제황이 긍정을 표했다.
이성재의 꼴은 처참했다. 조금 떨어져서 봤을 때는 절단된 두 다리만 보였는데 가까이서 보니 얼굴을 제외한 전신이 거의 걸레 수준으로 망가져 있었다. 몸에 남은 상흔으로 짐작하건데 강기가 아닌 타격만으로 조금씩 자근자근 부셔 놓았다. 하긴 강기에 당했으면 이렇게 숨 쉬고 있을 수도 없었으리라.
그런데 기막히게도 딱 생명에는 지장이 없을 정도로만 손을 썼다.
마나엔진은 물론 온몸의 근골을 자근자근 박살내 놓고는 한 가닥 명줄만 붙여 놨다.
이성재의 머리 쪽으로 손을 가져가던 제황이 갈등하듯 손을 가늘게 떨었다.
긴급재생을 사용하면 완치는 아니지만 명줄은 붙여줄 수 있다. 물론 이성재를 살리려는 목적은 아니었다. 제황은 이성재에게 듣고 싶은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당시 그 일에 연루된 모든 이들의 대한 신상이다.
바로 제황의 비극이 시작된 부모님의 죽음과 관계된 이들 말이다.
그렇지만 못내 망설이는 건 나길환 때문이었다. 복수에 집착하지 말라는 나길환의 말이 제황의 손을 망설이게 만든다. 쫓다보면 어디까지 갈 것인가. 어쩌면 대현그룹가와의 전면전이 될 수도 있었다. 두려운 것은 아니었다. 설령 그들에 의해 자신이 죽더라도 미련은 없다. 그 또한 자신이 자초한 일일 테니까. 그렇지만...
“후우...”
그것은 부모님의 뜻에 어긋나는 짓이다. 부모님은 제황에게 행복하라고 말했다. 자신의 삶을 살라고 말했다. 부모님이 원하시던 게 복수의 끝을 향해 달리는 것은 아닐 것이다.
크게 한숨을 내쉰 제황은 이내 마저 손을 내밀어 이성재의 입과 코로 연결된 관을 부여잡았다.
“너로 끝내겠다.”
주우우욱... 뿌드드득...
더러운 체액이 묻은 관이 딸려 나온다. 그리고 그와 함께 이성재의 심전도가 미친 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환자가 위급에 빠졌지만 병실에는 아무도 들어오는 사람이 없었다.
성재의 몸에서 뽑아낸 관을 내려놓은 제황이 이성재의 머리에 손을 올리고 긴급재생을 사용했다.
“커어억!”
제황의 스킬효과로 이성재가 정신을 차렸는지 눈을 번쩍 뜨고는 옆에 서 있는 제황을 바라봤다.
“너! 너는! 헉헉!”
“잘 가라. 가서 수지한테 미안하다고 꼭 빌고...”
“나..난..커어...”
마치 못 볼 것을 본 듯 공포에 질린 그 눈은 잠시 후 조금씩 그 빛을 잃기 시작했다.
삐이이-
환자의 심장이 완전히 멈췄다는 걸 알리는 심전도가 울리고 제황은 조용히 그 병실을 나왔다. 참으로 허무하디 허무한 복수의 끝이라고 생각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