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사거리 100만-126화 (126/301)

# 126

한 남자의 죽음-1

‘힘들다.’

제황 또한 힘들지 않은 건 아니었다.

헌터의 초인적인 회복력이 있기는 하지만 힘든 건 힘든 거다.

현재 제황의 체력수치는 8이었다. 기본 체력수치를 8배 강화시켜 준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기본 체력이 높으면 높을수록 체력수치가 효과를 발휘하고 그런 이유로 훈련을 개을리 할 수 없는 것이다.

의무레이드에서 돌아온 제황은 훈련에 돌입했다. 의무레이드에서 딱히 능력이 부족한 부분은 느끼지 않았다. 4티어든 5티어든 혹 7티어 몬스터든 레이드에는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제황을 조바심 나게 만들었다.

‘이 정도로는 강해질 수 없어.’

마음 한 구석에 자만이 싹텄다는 걸 알았다. 어쩌면 자연각성자 디바우저라는 이름이 가져다 준 자만일 수도 있으리라.

다른 헌터들처럼 느긋하게 실력에 맞춰 레이드를 하고 돈을 벌 수도 있지만 제황의 목표는 더 먼 곳에 있었다. 8티어 9티어를 뛰어 넘어 과거 단 한번 출현했던 10티어 몬스터?... 아니다...바로 그놈!

‘저스틴 포인트에서 내 화살을 한손으로 잡아냈던 그 오크 놈’

당시의 제황과 지금의 제황이 틀리기는 하지만 당시에는 분명 전력을 다한 공격이었다. 그런데 놈은 그것을 그다지 힘들지 않게 한 손으로 잡아냈다. 그것은 충격이었다. 최소한 팔 하나는 날릴 수 있을 것이라 자신했던 공격이 꺾인 것이다.

그런 무시무시한 괴물들이 엘어스에 있는 이상 한시도 쉴 수 없는 제황이었다.

샤워를 마친 제황이 가벼운 트레이닝복을 입고 개인수련실로 향할 때였다.

“제황님”

개인수련실 앞에서 한 여자가 제황을 기다리고 있었다.

제황을 발견한 그녀가 정중히 고개를 숙인다.

“어쩐 일이십니까?”

제황을 기다린 건 무영의 대장인 이루미였다. 이전에는 제황의 경호를 담당했지만 최근 들어 그녀를 본래 자리로 복귀시켰다. 경호가 그다지 필요 없으니 돌려보낸다 이야기 했지만 사실 무적성 내에 있을 때 그녀가 붙어 있으면 궁기가 현신하기 쉽지 않아 취한 조치였다.

“총관님이 찾으십니다.”

변함없이 딱딱한 그녀다.

“총관님이요?”

무적성에서 총관이라고 하면 나길환을 말한다.

흔히 총관이라고 하면 잡무나 보는 이들을 관리하는 직책으로 착각할 수 있지만  무적성에서의 총관이라는 단어는 어떤 면에서는 권제보다 두려운 존재였다. 무적성의 그림자라고 할 수 있는 밀령대의 수장으로써 무적성 안팎의 모든 정보를 틀어쥔 것도 모자라 모든 대소사를 관장한다.

흔한 우스갯소리로 나길환의 총관이라는 직책 덕에 그 밑에 있는 수많은 이들의 직책이 부총관이라던가 총관서기였는데 이런 서기가 한 번 속세에 뜨면 웬만한 중소클랜의 클랜마스터는 머리 먼저 박고 이야기를 시작한다고 한다.

“알겠습니다.”

제황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그에게 물어볼 것도 있다.

이루미를 따라 나선 제황은 얼마 후 총관의 집무실이 있는 건물에 들어섰다.

“어서 오시죠. 제황님”

총관 나길환의 집무실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삭막하다고 할 정도로 정갈함을 자랑한다. 아니 이건 매우 긍정적인 표현이다. 평범한 표현으로 하자면 대 무적성의 안주인 역할을 하는이의 집무실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궁색한 풍경이다.

나길환의 집무실에는 도자기나 그림, 혹 그 흔한 화분하나 보이지 않는다. 있는 것은 딱 책상과 테이블 그리고 의자뿐이다.

방 중앙 테이블 한편에 앉아 있던 나길환은 제황이 안으로 들어서자 자리에서 일어나 제황을 맞이하며 의자를 권했다.

“오셨습니까.”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네. 혹 훈련을 방해한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전혀 아닙니다.”

“하하, 차 한 잔 하시지요.”

나길환이 손수 다린 차를 찻잔에 따라 제황에게 내밀었다.

다른 것은 모르지만 차를 꽤 즐기는 나길환이다.

“엘어스에서만 구할 수 있는 아주 진귀한 차죠. 수인족들과의 소소한 물물거래에서만 얻을 수 있는 찻잎이라고 하더군요”

“예.”

한 모금 들이킨 제황의 눈이 커졌다. 첫 느낌은 단순한 풀잎의 맛이었는데 곧바로 상쾌한 바람이 불어오는 듯 입속이 시원해졌다.

“좋군요.”

차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제황도 이런 차라면 한 번 취미를 붙여보고 싶다고 여겨질 정도로 좋은 맛이었다.

“차의 원재료는 찾았지만 뭔가 특별한 비전이 있는지 맛을 구현할 수 없는 게 안타까울 지경입니다. 흰소리가 길었군요. 다름이 아니라 이것 때문에 제황님을 찾았습니다.”

그 말과 함께 나길환이 제황의 앞으로 한 장의 서류를 내밀었다.

그 서류를 받아들고 천천히 읽던 제황이 다 읽은 서류를 탁자에  내려놓으며 나길환에게 말했다.

“미국이 수인족과 관련해서 왜 저를 찾습니까?”

서류의 출처는 미국의 헌터사무국이었다. 내용은 간단했다. 수인족들과 관련하여 무적성에 인력지원을 요청한다는 내용이다. 문제는 그 요청 중 제황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 물론 제황의 이름이 써져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지원을 요청하는 내용 중 제황을 뜻하는 내용이 있었다.

특히 걸리는 건 인물에 대한 묘사 중 대현클랜비밀연구소 내에서 보인 제황의 모습이 써져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알고 있는 이들은 전부 죽었다. 아니 살아있는 이들도 있긴 하다. 실험체로써 구출된 이들 말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모두 무적성에서 데려갔다.

“아마 제 추측으로는 예전 제황님이 대현클랜의 비밀연구소에서 구해온 수인족 소녀가 문제가 된 것 같습니다.”

나길환의 말에 제황은 이전에 구했던 수인족 소녀를 떠올리며 말했다.

“음, 그 소녀가 미국으로 넘어갔습니까?”

“예. 현재 엘어스의 수인족들과 원시적으로나마 접촉하고 있는 건 미국뿐이기에 인도적인 차원에서 그녀의 신변을 미국으로 넘겼었습니다. 어차피 저희와는 언어가 통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렇군요.”

과거 인간은 엘어스의 모든 생명체들을 적으로 규정했었다.

당시에야 다크어스던 엘어스던 게이트에서 몬스터들이 쏟아져 나오니 일단 죽이고 봤다.

그러다가 최근 들어 엘어스에 상당히 고도화된 문명을 지닌 충분히 대화 가능한 종족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세계 각국이 조금씩 그들에게 접근하는 중이었다.

그렇지만 그 내용은 그리 희망적이지 않았다.

오크는 너무나 잔인하고 호전적이며 힘의 논리를 따진다. 게다가 유일신 카녹은 오크 외의 생명체에 상당히 배타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기에 인간을 보기만 하면 공격하려 들어 그냥 몬스터로 지정했다.

드라코들은 좀 미묘한 입장이다.

이들 또한 인간을 그리 반기지는 않지만 그것이 오크처럼 무조건 적인 공격성으로 표출되지는 않는다. 단지 그들의 땅을 침범하면 오크들이 얌전해 보일 정도로 공격해댄다. 일단 들이밀고 내 땅이라고 우기는 초기 원정대와 하도 오랫동안 피터지게 싸워서 꽤나 사이가 안 좋다.  드라코들은 뿔을 제외하고는 매우 아름다운 용모를 지니고 있어서 상대에 대한 판단을 할 때 외형에 많이 영향을 받는 인간들에게는 일단은 친해지고 싶은 종족이다.

마지막으로 수인족들이 있다.

인간들 입장에서는 뭉뚱그려 수인족이라 칭하지만 저들의 언어로 따지면 거의 수십 종족들의 군집체가 바로 수인족이다. 그래서 그들은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는데 개방적이고 믿는 신들도 수십 가지라 오크처럼 유일신들이 흔히 가지는 배타적인 광신을 지니지 않는다.

아무튼 미국에서 날아왔다는 그 협조 공문에 제황이 고개를 갸웃 하며 말했다.

“제가 가야 합니까?”

“물론 따를 필요 없습니다.”

나길환이 빙그레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고 제황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무적성은 그리 약하지 않다.

“그렇지만 이번 일로 제황님이 더 이상 매스컴이나 다른 세력들의 이목에서 몸을 숨긴 채 있을 수는 없게 되었다는 게 핵심이지요.”

“그렇군요.”

사실 이미 제황에 대해서는 세간에 꽤 알려진 상태였다. 낭중지추라고 이미 함경남도에서 있었던 영토수복작전에서 제황은 여러 각성자들에게 그 능력을 보였다. 단지 당시 제황이 귀찮은 언론들과의 만남을 꺼렸고 무적성 또한 헌터들의 개인정보보호를 빌미로 그런 접근들을 차단했기에 딱히 기사화 되지 않았을 뿐이었다.

문제는 이제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미국을 비롯한 각국이 제황을 주목하기 시작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이번 미국의 협조요청에 응하시는 게 좋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예?”

나길환의 말에 제황이 고개를 갸웃 했다. 잘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다.

“이번에 미국이 수인족들과 관련해서 제황님을 왜 찾는지 알아보던 중 재미있는 걸 발견했습니다. 제황님이 구하신 그 소녀는 공교롭게도 수인족들 중 꽤 커다란 부족의 부족장 딸이이더군요. 미국은 지금 그 소녀를 고향까지 안전하게 보내주고 싶어 합니다.”

“이유가 뭡니까?”

“당연히 세계 최초로 이종족과 정식 수교를 이룬 국가가 되고 싶은 욕심 때문이겠지요. 문제는...”

“문제는요?”

말끝을 흐린 나길환이 조금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제황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그 소녀가 제황님에게 반한 것 같습니다.”

“네?”

뚱딴지같은 나길환의 말에 제황이 인상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말 그대로입니다. 그녀의 바램에 따라 제황님을 엘어스행에 동참시키려는 게 저들의 목적입니다.”

“싫습니다.”

제황은 대번에 고개를 저었다.

지금 걸린 일들이 몇 개인데 그런 곳에 따라간단 말인가.

가장 시급한 것은 대현클랜의 이성재다.

이성재는 이대로 끝날 인물이 아니다. 무적성이 아무리 이성재의 목줄을 잡았다고 해도 어떻게든 빠져나갈 궁리를 할 것이다. 그 전에 이성재의 목을 따버려야 한다. 대충 이용가치는 끝나가니 곧 허락이 떨어질 것이다.

게다가 성산에 있다는 본가의 흔적도 찾아가야 한다. 생존자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곳에서 진정한 가문의 후계자임을 인정받고 가문의 힘도 이어받을 생각이다. 그런데 뜬금없이 엘어스로의 여행이라니... 말도 안 된다.

제황의 대답에 나길환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이건 간단히 결정할 이야기가 아닙니다. 미국은 오랜 시간을 거쳐 이런 기회를 대비했습니다. 상대적으로 우리나라는 아무런 기반이 없기에 만약 미국이 가장 먼저 엘어스와 본격적인 수교를 하게 된다면 우리나라는 미국에게서 떨어지는 콩고물만을 기다려야 합니다. 비록 우리 무적성이 그녀를 구해냈다고 해도 우리를 위해 준비된 자리는 없을 겁니다.”

차를 한 모금 들이킨 나길환이 다시금 말했다.

“이런 상황에 수교에 가장 중요한 인물이 제황님을 바라고 있습니다. 제황님이 그녀를 안전하게 데려간다면 우리는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수교의 한 축이 될 수 있습니다.”

“저는 관심 없습니다.”

그러나 제황은 일말의 재고도 없이 고개를 저었다.

“권제님의 명이기도 합니다.”

“그래도 제 대답은 마찬가지입니다.”

“무적성의 사람으로 권제님의 명을 거역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나길환이 느껴졌다. 목소리, 행동, 표정까지 바뀐 게 없지만 제황은 나길환이 지금 밀령대의 수장으로서의 힘을 보이고 있다고 생각했다. 은밀하게 뿜어져 나온 살기가 방안을 가득 채우기 시작한다.

한계까지 정제된 순수한 살기의 정화가 나길환으로부터 뿜어져 나왔다.

마치 한마디라도 더 허튼 소리를 했다가는 가만두지 않겠다는 듯 말이다. 그러나 제황의 대답은 전혀 거침없었다.

“설령 권제님이 직접 말씀하신다고 해도 제 대답은 마찬가지입니다.”

“감히!”

“아직 제 말 안 끝났습니다!”

후우욱!

제황의 몸으로부터 폭발적으로 뿜어진 살기가 방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나길환의 살기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나길환처럼 정제된 살기는 아니지만 그 힘만은 압도적이다.

“저는 지금까지 무적성에서 받은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무적성에 제공했다고 생각합니다.”

“후, 그래서요?”

“그러나 만약 무적성이 제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하고 또 제 뜻을 억지로 막아선다면...”

“...”

“무적성은 제 적입니다.”

“!!”

제황의 말에 나길환의 눈이 가늘어졌다. 지금 이 공간에는 나길환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길환은 밀령의 수장, 당연히 그와 권제의 명만을 받는 특급 밀령 3인이 근거리에 대기 중이다. 나길환의 입이 열렸다. 그 목소리는 무척이나 차갑고 비정하다.

“그 말의 뜻을 아나?”

“물론입니다.”

잠시간의 대치, 벽에 걸린 무채색의 벽시계 소리만이 방안을 울린다. 이윽고 그 대치를 깬 건 나길환이었다.

“대현클랜 때문에 그러나?”

“이유 중 하나는 맞습니다.”

제황은 권제의 계획으로 인해 이성재에 대한 복수를 이미 한 차례 미룬 바 있다. 제황은 가급적 한 번에 끝장내 버리는 것을 선호한다. 자잘하게 뒤끝을 남기거나 협상의 여지 따위를 남기는 것을 싫어한다.

목표물을 찍으면 끝까지 추적하여 마무리를 지어야 직성이 풀리는 제황의 성격 상 정말 많이 참은 것이다.

“내 하나 묻지.”

“말씀하시죠.”

“자네의 복수의 대상이 대현그룹인가?”

“현재로서는 아닙니다.”

만약 대현그룹이 자신을 가로막는다면 이야기는 틀려질 테지만 현재로서는 아니었다. 물론 그들도 이성재와 한패거리인 건 맞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대현그룹가와 이성재가 한패거리다. 그러니 대현그룹과 대현그룹가를 한 선상에 두고 이야기 할 수는 없는 법 아닌가.

“그렇다면 대현클랜은?”

“지금 제가 원하는 건 이성재의 목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로막는 모든 것들은 제 적입니다.”

그의 말에 말없이 제황의 눈을 바라보던 나길환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역시나 나이 먹고는 못할 짓이군요.”

그 말과 함께 장내를 가득 잠식하던 그의 살기가 씻은 듯 사라진다.

“차가 식었군요.”

“시험은 끝나신 겁니까?”

나길환의 살기를 야금야금 집어삼키던 제황의 살기도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져 버렸다. 제황의 말에 나길환이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끝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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