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0
쓸어버리자-1
아직 남은 과정이 있기는 하지만 저들의 장단에 다르고 싶은 기분이 싹 사라졌다. 무적성의 헌터들에게서는 볼 수 없는 모습이다. 무적성이라는 소속과 자부심은 있을지언정 그 이름 뒤에 숨지는 않는다.
강자의 변덕? 개미들을 두고 힘자랑 하는 꼴이라고 욕할 수도 있다.
저들의 말이 옳을 수도 있다. 불안전한 스쿼드를 이루면 자신들의 손해니까. 손해에 민감한 것은 인간의 본성 아닌가. 그것을 욕할 생각은 제황도 없다.
그러나 제황이 지금 분노하는 건 타인의 불행을 두고 자신들을 우월하게 포장하려는 군상들이 역겨울 뿐이었다. 헌터가 되기 전 고등학생 생활을 할 때도 가끔 봤던 모습들이다. 몸이 약하거나 자신들과 조금이라도 다른 이들은 따돌리고 자존감을 짓밟아 버리고 그 위에 올라가 우월감을 느끼는 부류들 말이다.
학교 다닐 때 철없는 추억이라며 애써 미화하지만 사회에 나와서도 하는 짓은 똑같은 인간들... 그들에게 받은 상처로 평생 아파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음에도 그들은 그것을 미화한다.
남들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사고로 크게 다쳐 몸이 불편했을 때 제황도 당했던 짓이니까.
저런 이들은 자신보다 훨씬 우월한 강자가 나타나면 친근한 척 달라붙는다.
그 강자와의 친분을 가지고 우월함에 편승해 자신의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 말이다.
“저기...”
그 때 제황의 뒤를 절뚝이며 따르던 소년이 말했다.
“아...”
기분에 휩싸여 걷던 제황은 자신이 너무 빨리 걸었다는 것을 자각하고는 주위를 둘러봤다. 마침 작은 벤치가 있는 쉼터가 보인다.
“일단 저쪽으로 가지.”
작은 쉼터로 다가간 제황이 먼저 자리에 앉자 소년도 따라서 벤치에 앉았다.
“일단 스쿼드 결성을 내 마음대로 결정한 건 사과할게.”
제황이 고개를 숙였다.
“아니요. 저도 힘들게 시간 내서 왔는데 자칫 헛걸음질 칠 뻔 했는데요. 감사합니다.”
별 것 아니라는 듯 소년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강하네.
-그래.
궁기의 말에 제황 또한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그녀가 말하는 강함은 무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냉정하게 자신의 상황을 인정하는 것을 두고 강하다고 하는 것이다. 어려보이지만 이런 경험이 많아 보인다.
“내 소개 먼저 할게. 2성 딜러 천제황이다.”
무적성이니 뭐니 그런 건 말하지 않았다. 이전에 보여준 것들이 있으니까.
“3성 서포터 서홍빈이라고 합니다.”
“3성?”
서홍빈의 대답에 제황의 눈이 커졌다. 3성이라는 것은 단순한 능력이 아닌 3성에 어울리는 실적이 없으면 딸 수 없는 라이센스다.
“나이가?”
“17살입니다.”
“대단하네.”
제황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17살에 3성 헌터라는 것은 훨씬 이전에 강제시술을 받았다는 소리가 된다. 그러나 더욱 놀란 것은 뒤이은 홍빈의 말이었다.
“13살에 디바우저로 각성했으니까요.”
별것 아닌 듯 말하지만 그토록 어린 나이에 디바우저로 각성했다면 상당히 대단한 일이었다. 제황은 쉼터 한편에 놓인 자판기에서 음료수 두개를 사서 하나를 홍빈에게 건냈다.
“다리가 이렇게 되고서는 익숙해요. 그보다 굳이 저 때문에 손해 보시는 건 아닌가 모르겠네요.”
그 말에 제황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건 네가 걱정할 필요 없어.”
단순히 마음에 짐을 덜어주려 하는 말이 아니다. 저 안에서 말한 것들은 모두 진실이니까. 다른 이들과 스쿼드를 짜는 건 솔직히 제황에게 손해다. 그것은 황새가 굳이 뱁새의 걸음을 따라가야 하는 것과 같으니까. 굳이 함께 스쿼드를 이룰만한 능력이 되는 이를 꼽자면 동철이나 권제 정도일까?
제황의 말에 홍빈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짐작은 했어요. 형이 강하다는 거... 그것도 눈치 못 채면 헌터수저 놔야죠. 형정도 되는 사람은 ... 음 그러니까. 대략 예전에 만났던 고구려클랜의 클랜마스터 정도였을까? 아, 형이라고 불러도 되죠?”
“으응. 그래.”
2성 헌터라고 소개했지만 홍빈은 제황의 수준을 꽤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다. 고구려클랜이라고 하면 현재 클랜서열 10위 안에 랭크되는 거대클랜 중 하나였는데 그 클랜의 클랜마스터와 비교를 한다는 건 제황을 최대 6성급으로 보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놀라운 건 고구려클랜의 클랜마스터를 직접 만났다는 말이다.
“눈썰미도 좋네..”
겸양할 생각은 없다. 그것은 무적성 내에서도 제황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니까. 물론 그 평가에는 제황의 진짜 능력이 포함되지 않았다. 진짜 능력에 대해 실제 눈으로 본 이들 중 지금까지 세상에 숨 쉬고 있는 사람은 없다.
“어떻게 된 건지 좀 들을 수 있을까?”
제황이 턱짓을 하며 묻자 홍빈이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들고 있던 음료를 한 모금 마시고는 잠시 후 입을 열었다.
이야기는 평범하다면 평범한 이야기다.
13살에 자연각성을 이룬 서홍빈은 당시 꽤 많은 클랜들의 러브콜을 받았다.
그리고 그곳 중 그다지 크지 않은 중소클랜 하나를 선택했는데 그 이유는 그 클랜의 클랜원이 홍빈의 아버지와 친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클랜 또한 홍빈의 가족들에게 홍빈이를 최선을 다해 키워주겠다고 호언장담을 했었다. 실제로 사고가 있기 2년 전까지는 그 말도 맞았고 말이다.
사건은 클랜에서 7티어 몬스터를 레이드 하면서 발생했다. 여느 다른 실패한 클랜들과 마찬가지로 준비가 부족했다. 아니 그들은 최선을 다해 준비했다지만 애초에 레이드 준비라는 것은 최선이라는 게 없다.
레이드라는 건 마치 배를 운용하는 것과 같다. 일정 이상의 능력과 규모가 되면 별 피해 없이 고위 몬스터를 꾸준히 레이드 할 수 있다. 말 그대로 캐시카우가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가급적 레이드라는 건 공격대의 능력이 받쳐주는 내에서 운용하는 게 정석이었다.
그런데 그런 게 있다. 클랜의 이름값은 그 클랜이 레이드 할 수 있는 몬스터의 난이도에 따라 결정된다. 아무리 규모가 크고 자본이 많아도 레이드 실적에 따라 클랜의 등급이 결정되고 그것은 보고 능력 있는 헌터들이 모여든다. 그렇기에 기를 쓰고 높은 티어의 몬스터를 레이드 하려고 한다.
“공격대의 절반이 죽었죠. 결론은 레이드도 실패했고 제 다리는 몬스터의 브레스에 휩쓸려 녹아버렸고요. 당시 클랜에는 제 다리를 재생시킬 만한 힐러도 없었어요. 불구가 되고 그 때부터 클랜 내에서 제 위치가 확 떨어지더라고요. 솔직히 그 전에는 저도 저들과 비슷했어요. 안하무인이었죠. 변명하자면 너무 어렸달까요. 뒤바뀐 위치를 깨닫지 못하고 배신감에 정신을 못 차렸어요.
그러다가 클랜에서 쫓겨나고 부모님은 제 다리 낫게 한다고 전 재산을 털어 고위 힐러한테 치료를 의뢰했다가 치료도 실패하고 쏟아 부은 돈의 절반도 날아가고 그러다가 교통사고가 나서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충격에 어머니는 쓰러지시고...뭐...그런 거죠. 뒤늦게 정신 차리고 다시 헌터일 시작했는데 이 꼴이네요. 후후”
세상사 새옹지마라 했던가. 촉망받던 유망주 하나가 몰락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쩝...”
제황은 입맛을 다시며 음료를 들이켰다.
조금 미안해진다.
사실 제황이 홍빈과 스쿼드를 짠 건 그리 순수하지 못한 이유에서였다.
의무레이드에서 사냥해야 하는 몬스터 숫자는 한 명당 총 20마리다. 5인 스쿼드 기준으로 100마리... 그런데 무슨 몬스터가 게임에서처럼 필드에 멍하니 서서 날 잡아 잡숴 하던가. 그 100마리를 모두 탐색하고 사냥하려면 보통 일주일이 걸린다.
물론 제황 혼자라면 20마리? 반나절 안에 때려잡을 자신이 있었다. 궁기가 공중에서 정찰 해주는 곳으로 화살만 날려도 끝이니까. 그렇다고 무턱대고 스쿼드를 거부하고 혼자 움직일 수는 없는 법이다. 이 동네도 좁다면 무척 좁아서 사람에 대한 안 좋은 평가는 바람보다 빠르게 퍼져 나간다. 그래서 들러붙는 날파리들에 슬슬 짜증이 솟구치고 있을 때 스쿼드에서 쫓겨난 홍빈을 발견한 것이고 적당한 탈퇴 명분을 삼으려 홍빈을 스쿼드에 포함시킨 것이었다.
-나쁜 놈!
양심이 살짝 찔리는 제황을 궁기가 찔러온다.
-시끄러.
-음료수 혼자 마시고!
-...
-포도맛 1500원 짜리 아니면 안마셔.
식탐마녀 궁기 덕분에 확 깬 제황이 자판기에서 같은 음료 하나를 더 뽑아 무한고에 집어넣은 후 홍빈에게 말했다.
“서포트 스킬이 어떻게 되지?”
레이드를 시작하려면 서포터의 버프 종류에 아는 것은 필수다.
제황의 물음에 홍빈은 입을 열었다.
“힘민체버프 삼종에 1인지정 데미지 상승 버프 그리고...”
“그리고?”
왠지 말하기 꺼려하는 뉘앙스다.
“이속상승 버프요. 20퍼센트짜리인데... 다리가 이 모양이라서 별로 쓸모가 없어요. 제가 가진 버프 특징이 주변 50미터 안에 있어야 효과가 들어가는데 제가 빠르게 움직일 수가 없어서... 솔직히 10킬로미터 이상 걸으면 통증이 심해서 더 움직일 수 없어요.”
“흠.”
홍빈이 말한 서포트 스킬들은 상당히 괜찮았다. 다리 하나가 불편하다는 것을 빼고는 굉장히 좋은 편이다. 보통 서포터들은 저것들 중 힘민체 버프 정도만 가지고 있어도 상당히 대접 받는다. 물론 안 좋은 점도 있다.
대상 지정 형태의 데미지 상승 버프를 제외하면 모든 버프가 범위형이라 홍빈의 곁에 있지 않으면 버프효과를 받을 수 없다는 단점이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속상승이라는 건 단순히 걸음의 속도가 빨라지는 게 아닌 반대급부로 그만큼의 몸에 부담을 준다. 그런데 저런 다리로는 이속 증가에 따른 부담을 이겨내지 못한다. 게다가 10킬로미터라니 누군가가 업고 다니지 않는 이상 레이드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는 게 맞다.
물론 제황에게 그것은 그다지 큰 장애가 되지 않는다. 탱크가 캐터필터 부서졌다고 탱크가 아니던가.
“아주 좋아.”
제황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홍빈은 제황이 난감해 할 줄 알았다. 10킬로미터 이상 걷지 못하는 헌터라니 넌센스 아니던가. 그런데 상대는 만족스러워 하는 눈치다.
“혹시 돈 많이 필요해?”
제황이 뜬금 없는 물음을 던졌다.
“아, 돈이요. 많으면 좋죠.”
“그래? 그럼 나랑 오늘부터 돈 좀 벌어 볼래?”
제황이 물음에 조금 얼떨떨한 홍빈이다. 그때 제황과 홍빈을 향해 군인 하나가 빠른 걸음으로 걸어왔다. 아까 단상 위에 있던 그 중대장이다.
“여기 계셨군요.”
다가온 그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나이가 지긋함에도 제황을 대함에 있어 한치의 흐트러짐도 보이지 않는다. 제황이 마주 고개를 숙이자 그의 입가에 빙그레 미소가 그려지며 한 장의 종이를 내밀었다.
“K조로 편성했습니다. 레이드 구역은 적혀 있는 걸 참고하시면 되고 숙소는 배정 되는대로 따로 유선으로 알려 드리겠습니다. 아참 그리고... 특이사항을 말씀드리면 의무레이드 하실 몬스터는 3티어 몬스터 30마리입니다.”
홍빈의 몫인 20마리를 10마리로 줄인 것 같다.
“굳이 그럴 필요는...”
“아닙니다. 생각 같아서는 20마리 정도로만 해드리고 싶지만 그건 또 위에서 말이 나올 일이라 제 권한으로는 30마리가 한계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제황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아닙니다. 아까 나가시면서 다른 헌터분들을 한번 진하게 눌러주신 덕분에 큰 반발 없이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까 말씀하셨던 헌터의 의무에 대한 말씀은 참 감명 깊었습니다.”
단순한 인사치례 치고는 진심이 느껴진다.
굳이 나쁠 건 없다. 이 사람은 이곳 황해남도 장연군에서 펼쳐지는 의무레이드를 관장하고 책임지는 사람으로 이 사람이 마음만 먹으면 명령에 불응하는 헌터를 퇴소 시켜 버릴 수도 있었다.
“궁금한 게 있습니다.”
“예? 어떤...”
“제가 알기로 의무적으로 레이드할 몬스터 외에 추가로 사냥한 몬스터는 국가에서 일괄적으로 구매해 주나요?”
“그렇습니다. 또 이곳에 있는 몬스터들은 부산물의 값어치가 낮은 대신에 국가에서 지원해주는 보조금이 높습니다. 국가소속 부산물수거 업체가 무상으로 수거해 드리니 수수료도 없습니다. 따지면 너무 외진 곳이라는 것만 빼고는 상당히 수익 좋은 몬스터입니다. ”
“그렇군요.”
이 황해남도 장연군에 주로 서식하는 몬스터는 바로 북한 쪽에서 가장 흔한 몬스터인 헬비틀이었다. 예전 평안남도 수복계획의 전진기지를 세우기 위해 덕천시에서 권제와 함께 신물이 나도록 레이드 해 본 경험이 있는 그 몬스터 말이다.
물론 덕천시에서 만났던 그 헬비틀과 이 장연군에 나타나는 헬비틀은 종류가 조금 틀렸다. 같은 오크라도 종류가 나뉘는 것처럼 헬비틀들도 세부 종류가 있었다.
장연군에 출몰하는 헬비틀들은 덕천시의 헬비틀보다 조금 더 강한 대신 번식력은 떨어지는 편이다.
“그렇다면 이 근방에서 몬스터가 가장 많이 몰리는 곳이 어딥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