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사거리 100만-117화 (117/301)

# 117

2성헌터 천제황-1

타탁...탁

그의 머리 근처로 뭔가가 내려앉았다. 저것은 포식자의 발소리다. 자신의 작품을 감상하는 놈의 눈길이 느껴지는 것 같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차가운 소름이 훑고 지나간다.

‘나를 관찰하고 있다.’

저 신중한 포식자는 아직도 그를 지켜보고만 있었다. 이 정도까지 망가뜨렸으면 거드름을 피우거나 강자의 여유를 부릴 만도 하건만 그의 몸을 꼼꼼히 훑으며 남아있는 여력을 가늠하고 있었다.

쉭...푹

“윽...”

그리고 마치 간을 보는 듯 한발의 화살이 날아와 그의 팔뚝에 꽂혔다. 전신의 모든 마나를 회복으로 돌렸기에 화살은 저항 없이 살 속을 파고들었다.

쉭...쉭쉭...

푸푹...푹...

“큭...크윽”

머리를 제외한 모든 곳에 화살이 날아와 꽂히기 시작한다. 마치 고슴도치를 만들고 싶은지 무작위로 내리꽂힌 화살이 근육과 관절 곳곳에 파고들어 그의 움직임을 방해한다. 그는 지렁이처럼 꿈틀대며 그 화살들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마치 더 이상 때리지 말아달라는 듯 애처롭기까지 하다.

그 모습에 자비심이 솟아 손속에 사정이라도 둘 만 하건만 마치 기계라도 되는 것처럼 화살은 계속해서 적혈마인의 몸을 파고들었다. 물론 적혈마인 또한 노림수는 있었다. 최대한 몸을 뒤집어 보호한 덕에 박살난 척추가 조금씩 붙고 있다.

적혈마인이 가진 재생력은 무시무시했다. 박살나 날아간 척추와 신경, 그리고 근육들은 기적적으로 재생되고 있었다. 두 발 끝에 감각이 돌아오며 무시무시한 고통이 뒤따랐지만 그는 오히려 기뻤다.

조금만 더 참아내면 다시 한 번 도망칠 기회가 생긴다.

수십 대의 화살이 몸에 박혔지만 움직임에 장애가 있을지언정 치명적인 피해는 아니었다.

“이까시데 구다사이! (살려주세요.)”

적혈마인 아니 사사키는 적에게 자비를 구걸했다. 비록 그것이 회복되는 몸을 감추기 위한 연기일 뿐이지만 그는 난생 처음으로 상대에게 목숨을 구걸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말에 화답하듯 처음으로 사냥꾼이 입을 열었다. 젊은 남자의 목소리... 그가 분명했다. 들려오는 말이 한국말이라 번역이 가능한 헤드셋을 차지 않았기에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일단 사냥꾼이 대화를 시도했다는 것에 그는 안도했다.

“일단은...”

그러나 그의 입에서 나온 선고는 굴복한 적을 대하는 승리자가 아닌 도살자의 그것이었다.

“등이 거의 붙었군. 다시 찢어버려.”

뒤쪽에서 누군가의 인기척이 느껴짐과 동시에 아물어가던 척추 쪽에서 숨 막히는 통증이 느껴졌다.

콰콰콱!

“아아악!”

사사키는 다시금 등에서 느껴지는 절망적인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애써 회복되던 척추가 다시 박살나 버렸다.

“야이! 으아아악! 칙쇼메! 히끼요! 나야쯔!”

사사키는 비명과 함께 욕을 내지르며 꿈틀거렸다. 그리고 그런 사사키를 향해 다시금 화살이 하나하나 내리꽂힌다. 사사키는 이제 더 이상 저항조차 하지 못했다.

아니 사사키는 이순간 모든 삶에 대한 의지를 놓아버렸다. 그토록 자신하던 자신의 술법에 대한 자신감이 한낱 헌터 하나에게 조롱거리 같은 실력밖에 되지 않는다는 자괴감이 되어 그의 내부로부터의 붕괴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마나 다 떨어졌나보네.

바닥에 누워있는 거대한 몸체로부터 천둥을 거둔 제황은 화살로 인해 난 상처에서 재생의 속도가 느려지기 시작하자 그제야 공격을 멈췄다.

-강한 거 한방 더?

-아니

궁기의 말에 제황은 고개를 저었다. 더 이상 공격을 가하면 이제는 진짜 죽을 것 같다. 지금도 온몸에 근 200여개의 화살을 맞은 채 꿈틀거리고 있는데 저기에 강기의 화살 같은 것을 박아 넣으면 재생이고 뭐고 과다출혈로 그대로 죽어버릴 것이다. 그것은 제황이 원하는 죽음의 형태가 아니다.

탁...

제황은 화살로 고슴도치가 된 그것을 향해 걸어갔다.

이윽고 사사키에게 접근하던 제황은 생각지도 못한 난관에 머리를 긁적였다.

“아, 골치 아프네.”

이제부터는 사냥감과 사냥꾼의 위치가 아닌 심문자와 심문대상의 위치에서 대화를 나눠야 하는데 상대는 번역기가 달린 헤드셋을 착용하지 않았다. 말을 알아듣는지 알 수 없으니 답답하다.

-헌터용 헤드셋 여분 있지?

-응. 내꺼

-좀 쓸게.

-에이...더럽게... 새 거 사줘.

제황은 예전에 궁기의 장난감으로 하나 더 받아뒀던 기억을 떠올리며 그것을 무한고에서 꺼내 전원을 켠 뒤 설정을 조절하여 고슴도치의 머리 부분(?)이 있는 곳에 던졌다.

툭...

“들리나?”

“...”

대답이 없자 제황은 고개를 갸웃하고는 좀 더 접근했다.

툭툭...

발끝으로 툭툭 건드리며 자극을 가해도 반응이 없다.

인상을 팍 찡그린 제황이 고슴도치를 뒤집어 상세를 살폈다. 죽었다고 하기에는 아직 가슴의 기복도 있고 느리지만 회복도 되고 있었다.

퍼억!

제황이 사사키의 머리를 사커킥으로 후려갈기며 경멸을 담아 말했다.

“허튼 수작 부리지 마라.”

스르릉

제황은 허리춤에서 날카롭게 벼려진 텍티컬 나이프 한 자루를 꺼내 들었다. 주로 몬스터를 해체할 때 사용하는 이 나이프로 지금부터 이 고슴도치를 해체해 버릴 것이다.

이유? 차고도 넘친다. 이놈은 이성재의 협력자니까.

울부짖으며 후회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머릿속에 든 것을 모조리 토해내게 만들 것이다.

“깨어나게 해주지.”

귀라고 생각되는 부분을 슥 하고 도려낸 제황이 서늘한 눈으로 그것을 툭 던져 버렸다.

일단 온몸의 돌출된 부분은 모조리 깎아버릴 생각이다. 잔인하다고?

이 정도를 잔인하다고 하면 애초에 헌터가 될 자격도 없는 사람이다. 헌터는 목숨을 걸고 생명체의 목숨을 취하며 산다. 그것이 몬스터든 빌런이든 혹 이종족이든 헌터는 백정이다. 그런 헌터에게 잔인함을 논한다는 건 언어도단과 마찬가지

게다가 이놈은 한수지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 정당한 핏값을 받아내야 한다. 억울해 할 것은 없다. 이성재 또한 더하면 더했지 곱게 죽일 생각은 없으니까.

“음?”

그러나 제황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뭔가 이상하다. 이정도 했으면 어느 정도 반응이 일어나야 하는데 전혀 소식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제황의 의문은 궁기가 풀어주었다.

-시체에 대고 뭐해?

-시체?

-그래. 방금 죽었잖아.

궁기의 말에 깜짝 놀란 제황이 다시금 상세를 살폈다.

이렇게 신체가 재생되는데 죽었다? 황당한 궁기의 말에 제황이 다시 한번 물었다.

-죽었어? 이렇게 움직이는데?

-그건 잔여 마나가 남아있는 거지. 적혈마인은 방어와 재생 특화니까. 네가 마지막에 야무지게 차니까 그냥 죽었네. 살살 좀 때리지.

궁기의 힐책에 제황은 말문이 막힘을 느꼈다.

한수지에 대한 복수를 떠나서 물어볼 것도 많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천주백가에 대한 실마리였는데 어이없는 실수로 그것을 날려버린 것이다.

“하...”

허탈한 한숨을 내쉰 제황이 자리에 주저앉았다. 털썩 저 멀리 동녘이 밝아오고 제황의 몸에서 긴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일본에서부터 조금씩 쌓였던 피로가 한 번에 몰려오는 느낌이다.

오도독...도독...

인간으로 현신한 궁기가 제황의 곁에 쭈그리고 앉아 초콜렛맛 알사탕을 깨물어 먹고 있다. 조용히 제황을 곁눈질하던 궁기가 손에 들고 있던 초콜렛을 삐죽 내밀며 말한다.

“기분 전환에는 단 게 최고래. 좀 줄까?”

“...”

왠지 놀리는 기분이다.

***

천황클랜 암살대가태백산맥 어느 이름 없는 산골짜기에서 지워진지 이주가 지났다. 무적성의 국토수복계획은 결과만 말하자면 성공했다. 대한민국 내 수많은 클랜들이 참가한 것도 있었지만 평안남도 내의 7티어 이상의 몬스터들은 모조리 무적성에서 처리했다.

그렇게 평안남도를 깨끗이 수복하여 서둘러 개발계획이 발표되자 주가는 급등했고 이형우대통령과 천황클랜 그리고 대현클랜이 모의한 풋옵션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물론 무적성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이번 일은 방어적인 차원에서 벌인 일이었을 뿐 무적성의 진짜 공격은 시작도 하지 않았다.

증시에서 한시름 돌리자 무적성이 가장 먼저 동원한 것은 야당이었다. 거대 세력이 개입된 주가조작 사건에 왜 야당이 끼어 드냐고 하겠지만, 여당의 수뇌인 대통령이 개입되었다는 것을 넌지시 이야기하자 야당의 당대표는 반색을 하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리고 다음날 각언론사에서는 일제히 대현에 대한 속보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대현클랜에 대한 전격 세무조사 착수]

[모기업인 대현그룹으로 이어진 부패의 사슬인가?]

[거액의 비자금? 그들의 실체... 그 몸통은?]

제황이 대현클랜비밀연구소에서 가져온 수많은 증거들 속에서 무적성은 대현클랜 아니 대현그룹과 이형우대통령까지 묶어버릴 단서를 찾아냈다.

“돈은 정직합니다. 그리고 작은 실마리라도 쫓다보면 그 모습을 드러내죠. 불법적인 짓을 저지르고 아무리 감쪽같이 은폐한다고 해도 사람이 움직이면 무조건 돈의 흔적은 남습니다.”

문상 이용기가 한 개의 서류철을 권제의 앞에 내려놓았다.

그러나 권제는 그 서류를 펼쳐볼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시큰둥한 표정으로 이용기를 올려다본다.

그리고 권제가 지금 왜 이런 반응을 일으키는지 뻔히 알고 있는 이용기가 권제를 달래듯 말했다.

“제가 책임지고 이형우대통령만은 시궁창에 처넣을 테니 제발 참으시지요.”

그러자 눈꼬리를 실룩이던 권제가 그 서류철을 받아들었다. 물론 읽으려고 든 것은 아니다. 그 서류는 마치 보이지 않는 불꽃에 타오르듯 조각 조각나서 흩어져 버렸다.

“내가 왜 이럴까?”

“...”

권제의 그 한마디에 이용기가 낮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푹 숙였다.

“난 분명 이번 일 후 나머지 쓰레기들을 모조리 지워버린다 천명했다.”

드드드드...

권제의 앞 책상이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쪽바리 놈들의 움직임을 놓친 것은 상관없다. 그런데 어째서 놈들과 세계헌터사무국 놈들이 붙어먹는 것도 놓친 것이냐! 그리고 그 샌님들의 가당찮은 수작을 내가 수락해야 한다는 건가!”

탕! 우지직

권제가 책상을 내려치자 거대한 원목책상의 기둥이 그대로 내려앉았다.

“죄송합니다.”

이용기가 고개를 조아리며 얼마 전 세계헌터사무국으로 내려온 협조공문을 떠올렸다.

[제20차 베이징 레이드엑스포]

인류발전과 헌터들의 존재의의에 대한 일반대중의 교육과 계몽을 목적으로 하고 인류노력에 의해 대헌터 시대가 달성한 성과를 확인하고 미래를 전망하며 협력하는 엑스포가 베이징에서 개최된다는 공문이었다. 물론 이런 엑스포가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2년에 한 번 개최되는 이 엑스포는 한국에서도 한 번 열린 적이 있는 그런 행사였다.

물론 평소 이런 것을 싫어하는 권제의 성정으로는 뜨신 밥 먹고 참 할 짓 없다며 적당히 사람 보내라고 무시할 만한 것이지만 레이드엑스포를 주최하는 세계헌터사무국이 이번 엑스포와 관련하여 새롭게 추가시킨 조항 중 하나가 권제를 분노하게 만들었다.

[인류가 가진 힘의 화합을 위해 모두가 단결해야 하고 그 일환으로 엑스포기간 동안 모든 물리적 경제적 충돌은 금지됩니다.]

대현클랜과 더 나아가 대현그룹 그리고 일본의 천황클랜에 대한 대대적인 경제적, 물리적 공격을 준비하던 무적성으로써는 말그대로 뒤통수를 야무지게 얻어맞은 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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