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5
천주의 마물-1
“잔영의 거울! 심연의 암막!”
암살대의 선두에 선 부대장이 외치자 후위에서 달리던 암살대원들의 손이 빠르게 교차되었다. 동시에 그들의 손에서 뿜어진 푸른 기운이 암살대를 감싸고 잠시 후 20여명 전원이 하나하나 분화하기 시작했다.
슉...슈슉...
20여명의 암살대원이 졸지에 80여명으로 늘어났다. 스페셜 등급의 광역환영계 마법이다. 동시에 그들의 몸 주위를 검은 안개가 감싸더니 자욱한 먼지구름으로 화했다.
[암운살진!]
휘이잉
수십 개의 형체를 머금은 검은 안개가 넓게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운무는 넓게 퍼지더니 이내 어둠속에 녹아들어 적막조차도 삼키는 검은 어둠으로 화했다.
“이번에는 절대 놓쳐서는 안 돼.”
“당연하다. 모두 은신을 최대로 펼쳐라.”
사사키대장으로부터 조를 분리한 두 부대장은 이곳에서 승부를 걸기로 마음먹었다.
자신들도 시간이 없지만 그 시간이라는 건 이제부터 추격자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사사키 대장이 암살대를 분리하는 순간 추격자에게도 선택지가 주어진다. 탈출하는 이들을 쫓을 것인가 가로막는 이들을 격퇴할 것인가로 말이다. 게다가 적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그것은 혼자라는 것
지금까지 보인 전투방식을 볼 때 자신들을 돌파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또한 지금 자신들이 펼친 이 [암운살진]의 최대 유지시간은 30분... 최강의 환술계열 살진인 암운살진이라면 공격에 대한 방어에도 효과적일뿐더러 방심하고 발을 디디는 순간 적에게 지옥을 보여줄 자신이 있었다.
그들은 자신 있었다.
자신들은 천황클랜이기는 하지만 천황클랜 내에서도 소수에게만 허락된 그 힘을 다루는 선택받은 존재들이다.
또한 정예들에게만 허락된 그 힘을 오랜 시간에 걸쳐 개량하여 다수의 조직적인 움직임으로 수배의 시너지를 발생시키는 비전들을 개발해냈다. 그 비전들 중 이 암운살진은 몇 배의 적이라도 막아낼 수 있도록 특화된 환술진이었다.
-잘도 도망치네.
그러나 그들이 모르고 있던 것 중 하나가 있었다. 그것은 제황이 가진 궁기안은 모든 현혹계열을 무시한다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거기에 야행시와 추적시를 비롯해 자동으로 락온이 되며 최고의 서포터인 궁기가 보조까지 해준다. 그들이 자랑하는 환술 계열에 대해서 극상성의 스킬을 지닌 이가 바로 제황이었다.
-쟤들 뭐하는 거지?
제황의 눈에는 약 20여명의 사람들이 열심히 마나를 뿜어내며 전후좌우로 뒤뚱거리고 있을 뿐이다.
-글쎄, 그냥 발악...인가.
궁기가 냉정한 한줄평을 내놓았다.
-흠
저들의 생각대로 조금 전까지의 제황은 두 가지의 선택지를 두고 고민했었다.
아무래도 제황이 원하는 놈은 도주하는 쪽에 있을 것 같긴 한데 그를 향해 달려오는 놈들도 어차피 죽일 놈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저들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그 선택지가 사라졌다.
저렇게 먹기 좋은 요리를 만들었는데 수저는 꽂아야 하지 않겠는가.
-궁기
굳이 방법을 설명할 필요 없는 궁기와의 호흡이다.
-알았어.
붉은 빛무리 속에 한 마리 야생동물 같은 미녀가 뛰쳐나와 쏜살같이 달리기 시작한다.
그러자 적들의 포메이션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마치 암습을 준비하는 듯 나누어진 십여 명이 공격을 준비하는 시늉을 한다. 물론 그것은 제황의 궁기안에 낱낱이 포착되었지만 제황은 그것을 친절하게 말로 지적해 주는 사람이 아니다.
달려 나가는 궁기에게 모든 시선이 집중되었을 때 모든 은신의 왕인 호랑이사냥을 머금은 제황의 발은 이미 그들의 머리 위 나뭇가지를 날아오르고 있었다.
공중을 뛰어 올라 공중제비를 한 바퀴 돈 제황은 시위가 만월이 되도록 잡아당겼다.
츠츠츳...
일순간 용혈신공이 최고조로 가동하기 시작했고 동시에 제황의 활에서 붉은 강기가 폭발적으로 뿜어진다.
[폭발하는 강기의 화살]
파캉!
붉은 섬광이 터져나가고 그 반동으로 제황의 신형이 공중으로 치솟았다.
얼핏 보면 마치 제황의 앞에서 폭발이 일어난 듯 보이지만 실상을 보면 쏘아지던 강기의 화살이 수십 가닥으로 펼쳐지며 마치 폭발하는 산탄마냥 사방을 향해 무자비하게 내리꽂히기 시작했다.
퍼퍼퍼펑! 펑펑! 파파팍!
“으아아악!”
암운살진으로 달려드는 추격자의 어리석음을 비웃으며 살진의 사문(死門)을 연 채 조용히 마나를 끌어올리던 암살대에 난데없는 강기의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공격은 치명적이었다. 최고의 공격만을 준비했기에 상대적으로 방어는 소홀히 했고 그것은 사방에서 쪼개지고 터진 팔다리가 날아오르고 박살난 병장기들이 비산하는 것으로 그 어리석음의 참상을 가르쳐 주고 있었다.
“좋아.”
손바닥을 울리는 약간의 아릿한 기운만 빼고는 별다른 이상이 보이지 않는다.
과거 생사가 오가는 순간 네 개의 속성을 모두 담아 화살을 날린 경험은 제황에게 많은 깨달음을 주었다. 이제 이정도는 가뿐하다.
“습격이다!”
“아아악!”
호랑이사냥을 유지한 채 바닥에 내려선 제황은 적들의 비명소리를 뒤로 한 채 박살난 암운살진의 후위로 소리 없이 이동했다.
“암운살진 개진!”
아비규환 속에서도 정신줄을 잡고 있던 부대장 하나가 외치자 정신을 차린 몇몇이 전방에서 달려오고 있는 검은 인영을 향해 무기를 곧추 세웠다. 비록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단 한 번의 공격이면 이 상황은 끝난다는 착각에 빠진 그들이었다.
“감히 내 앞에서 이런 재롱을 떨다니...”
궁기는 실소를 터뜨렸다.
완벽한 혼란에 빠져 버린 반쪽짜리 살진 따위는 수천 년의 경험을 가진 궁기에게는 조롱거리조차 되지 않았다.
퍼퍽! 퍼퍼퍼퍼퍽! 퍽! 퍽!
“아악!”
“으아악!”
그들의 공격을 유령처럼 피해내며 요소요소 가볍게 치고 지나가는 궁기의 주먹질 속에 완벽하게 몸을 숨기고 있다고 생각하던 암살대원들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암운살진의 환술만을 굳게 믿고 있던 그들에게는 날벼락과 같았다. 차라리 개개인의 무력을 믿고 대항했다면 지금 보다는 상황이 나았으리라.
“죽이겠다!”
“지옥으로 가자!”
그나마 가장 실력이 뛰어난 두 명의 부대장이 궁기에게 맞대응해 나갔다. 그들의 양손에 든 두꺼운 외날도 두 자루가 섬뜩하게 빛난다. 일본도의 형태이기는 하지만 몬스터와의 전투를 고려한 약 20킬로가량의 초합금강의 검신 위로 줄기줄기 검강이 뿜어져 나왔다. 그러나 그들을 발견한 궁기는 오히려 눈을 반짝이며 더욱 빠르게 돌진했다.
“네놈이구나.”
궁기의 입가에 살벌한 미소가 맺혔다.
하나가 낯이 익다. 이전에 그녀를 막아서던 10인 중 중심에 서 있던 하나였는데 당시에는 제황의 위기에 처했던 것과 극방어 성향의 합격진, 그리고 파티장에서 급격히 마나를 소모한 여파로 인해 상당히 고전했었다. 그 일로 인해 그동안 제황에게 얼마나 낯이 깎였던가.
촤아아악!
두 줄기의 강기가 그녀의 상하를 완벽하게 나누어 쑤시고 들어온다. 6성 헌터 둘의 몸을 사리지 않는 합격술이다.
그러자 달려들던 궁기가 갑자기 몸을 움츠리며 겁먹은 듯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조금 더 자신감을 얻은 둘은 젖먹던 힘까지 강기를 끌어올리며 궁기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게 실수였다.
쉬이이익! 퍼어엉!
“커어억!”
부대장 하나의 왼팔이 어깨 째로 뜯기며 공중을 날았다. 후위에서 날아온 고작 화살 한 발이 남긴 상흔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거대한 충격파가 둘을 덮치고 충격의 여파에서 벗어나지 못한 둘의 앞에는 어느새 양손을 길게 뻗은 궁기의 두 주먹에서 뿜어져 나온 여섯 줄기의 붉은 강기가 장전을 마친 채 대기하고 있었다.
쫘자자자작! 찌이이익! 퍼펑!
“아아아악!”
마치 피보라의 폭풍우가 몰아치듯 그녀가 휩쓸고 지나간 곳에는 붉은 피안개만이 자욱하다.
“너무 억울해 하지는 마. 너희 부하들은 빠짐 없이 보내 줄 테니까.”
.
그들의 경지로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암살자에게 후위를 내준 대가는 그들의 목숨이다.
***
지이이잉
“큭!”
암살대의 선두에 서서 달리던 사사키는 순간 머릿속을 헤집는 고통에 신음을 흘리며 신형을 멈춰 섰다. 버프를 건다는 것은 상대의 신체를 흐르는 마나에 그의 마나를 간섭시켜 일종의 상승작용을 일으키는 것이다. 사사키는 거기에 한 발 더 나아가 술법을 통해 버프를 받는 이의 마나를 자신의 마나와 묶어 반대로 끌어 모을 수도 있도록 했다.
그렇기에 그는 지휘하는 이들이 많은 수록 강하다. 문제는 조금 전 그에게 묶여 있던 부하들의 마나가 순간적으로 수십 개가 풀려버렸는데 이것이 말하는 것은 하나였다.
‘전멸’
“계속 달립니다.”
“옛!”
부하들에게 지시를 내린 사사키가 속으로 생각했다.
‘오판인가.’
천황클랜의 최정예 암살대원 20명이면 권제조차도 잠재울 수 있다고 그는 생각했었다.
비록 그 의미는 미끼였지만 마음 한 편으로 승률은 반반이라고 생각했다. 설혹 상대가 강기를 마구 뿜어내는 괴물 같은 원거리 딜러라도 그들이라면 충분히 제압 가능해야 옳았다. 자신들은 천황클랜 최정예의 암살대니까. 그들의 손에 유명을 달리한 숫한 6성 헌터들이 그것을 대변해 준다.
그런데 지금 그 자부심이 박살나려 하고 있었다. 그것도 단 1인의 헌터에 의해서 말이다.
‘이 치욕을...’
그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돌아가기만 하면 암살단을 재정비한 뒤 다시 돌아올 것이다. 그리고 이번 일에 관계된 모든 것들에 대해 그의 분노를 새겨줄 것이다. 천황클랜이 가진 진정한 힘을 사용할 권한만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은 단순한 희망사항이 아니다.
“전력으로 달립니다.”
“옛”
이제 거의 벗어났다. 암살대를 둘로 나누고 20여분이 지났음에도 적의 공격은 없다. 거리상으로도 거의 30여 킬로미터를 쉬지 않고 달렸다. 어느 정도 떨어뜨리기는 한 것이다. 그러나 사사키는 방심하지 않고 암살대를 독려해 속도를 더욱 높였다. 포위망이 완성되기 전에 이곳을 탈출해야 한다.
그 때였다. 그의 머릿속을 위험이라는 신호가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한 것은...
타탁!
위험을 포착한 순간 사사키 대장은 서슴없이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그와 함께 그의 두 손에서 푸른 막이 터져 나왔고 그 막은 공중으로부터 내리꽂힌 섬광과 충돌했다.
콰콰쾅!!!
“컥!”
내리꽂힌 섬광의 폭발과 충격량을 이기지 못한 사사키가 그대로 땅에 처박혔다.
“큭, 지독하군.”
찌이이익...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킨 사사키는 폭발로 인해 넝마가 된 상의를 거칠게 찢어냈다. 그리고 그의 왼팔에 꽂혀 있는 짤막한 화살을 노려봤다. 고작 두 뺨이나 될까? 작달막한 그 화살은 그의 방어막을 꿰뚫어 버렸다.
“고작 사냥 당하는 건가. 크크”
사사키는 실소를 터뜨렸다. 그의 인생에 이런 경우가 있었던가. 사냥꾼이었던 자신이 사냥감으로 전락하다니 말이다. 무려 그분의 주술을 계승한 자신이 말이다.
일본의 한 이름 없는 음양가의 장손이었던 그는 자연각성하는 순간 선조들의 기억을 전승 받았다. 다른 헌터들과는 차별화되는 새로운 종류의 힘이었지만 그가 가진 주술은 그리 강하지 못했다. 잘해야 새로운 형태의 서포터 정도? 주류헌터 사회에서 아웃사이더로 밀려나던 그의 능력을 알아준 곳이 바로 천황 클랜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는 기연을 맞이했다. 고대 일본주술의 시작이자 시조라고 할 수 있는 ‘그것’과의 만남으로써 말이다. ‘그것’이 재정립 해준 주술을 통해 그는 한 차원 높은 주술을 쓸 수 있게 되었고 그 때부터는 아무도 그의 앞길을 막지 못했다.
“그럴 수는 없지.”
사사키는 이를 악물었다.
더 이상 도망은 없다. 아니 방금의 공격에서 확인했다. 도망칠 곳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나를 용서해라!”
사사키가 양손을 공중으로 번쩍 들었다. 순간 그의 주위에 서 있던 암살대원들의 눈이 일제히 커졌다. 그리고 그 눈이 더 이상 커질 수 없는 한계에 다다랐을 때 그들의 입가에 일제히 피분수가 터져 나왔다.
쑤우우욱
뿜어진 그 피는 땅에 떨어지지 않고 곧장 사사키의 치켜든 두 손 안으로 빨려 들어가듯 모여들었다.
[피의 제물]
전신의 모든 피가 사라진 듯 바짝 마른 스무 구의 미이라가 일제히 쓰러지자 사사키는 두 손 안에 모인 붉은 구체를 노려보며 외쳤다.
“천주 소환!”
퍼엉!
붉은 구체가 허공중에서 폭발하듯 비산하더니 흉흉한 기운을 흘리는 네 개의 붉은 진을 생성해냈다. 그와 함께 붉은 진으로부터 거대한 무언가가 떨어져 내린다.
쿵! 쿵! 쿵! 쿵!
원뿔 형태의 거대한 돌기둥들이 사사키를 감싸듯 동서남북을 점하고 땅바닥에 박혀 들었다.
돌기둥에는 수백 개의 글씨가 음각되어 있었는데 그것 하나하나에서 사이한 기운이 뿜어져 나온다. 이것의 이름은 천주! 그가 ‘그것’ 으로부터 얻어낸 최강의 힘이다.
천주라 불린 그것들이 땅에 박히는 순간 사사키를 중심으로 검은 기운이 뿜어져 나온다.
“소환!”
손을 모아 복잡한 수인을 짚던 사사키는 양 손톱으로 자신의 얼굴을 주욱 그어 나갔다. 본디 그의 얼굴에 그려져 있던 문양 그대로 손톱으로 그어가자 붉은 피가 뭉클뭉클 일어나더니 곧이어 그 피가 전신을 덮기 시작했다.
“끼아아아아!”
소름끼치는 비명소리와 함께 완전히 붉게 물들어버린 그 몸이 차츰 그 덩치를 키워나가기 시작했다.
“크하하하...이 ... 힘 좋구나!”
그는 자신을 향해 맹렬히 모여드는 마나의 폭풍우 속에 광소를 터뜨렸다. 지금 기분 같아서는 그 강력하다는 권제마저도 묵사발 낼 수 있을 것 같다.
“조금 더! 조금 더!”
마나의 집중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계속해서 모여드는 마나는 그의 몸 곳곳에 새로운 힘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런 그가 한창 마약과도 강함에 취해 있을 때였다. 한줄기 긴 호선을 그리며 그를 향해 소리 없이 내리 꽂히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