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사거리 100만-106화 (106/301)

# 106

한수지의 죽음 -1

잃어버린 것만 있고 성과는 없다. 언론과 다른 클랜의 입이야 어떻게든 틀어막는다지만,  무적성에서 이번 일을 두고 걸고넘어진다면 둘러댈 것도 골치 아프다.

“이비서!”

“예!”

“수지는!”

그의 물음에 이비서가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사라졌습니다.”

“쓸모없는 년.”

이성재의 얼굴이 잠시간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그녀는 이런 식으로 사라져서는 안 될 인물이었다. 죽더라도 모두가 보는 앞에서 죽었어야 하는 인물, 최소한 시체라도 되찾아야 한다. 그 때 천황클랜의 사사키가 이성재에게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성재님”

“말하시오.”

“제안 하나 드릴 것이 있습니다.”

사사키의 말에 이성재는 눈살을 찌푸리며 그를 노려봤다. 사실 이번 일이 실패한 요인 중 하나는 사사키에게 있었다. 사사키가 그 밀실에 설치해 놨던 주술이라는 것이 깨지지 않았다면 이런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애써 입 다물고 있음에 제안을 한다?

당연히 좋은 말이 나올 수 없다.

“신중히 입을 놀리는 게 좋을 겁니다.”

“하하, 화가 많이 나셨군요. 제 제안은 단 하나입니다. 만약 이번 일이 성공적으로 진행된다면 아까 천제황이라는 친구는 저희 천황클랜에서 데려겠다는 겁니다.”

그의 말에 이성재가 눈을 살짝 크게 떴다. 이 사사키라는 인물은 천황클랜에서 지원 온 이들 중 수뇌격의 인물이었다. 파악한 바로는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는 애초에 꺼내지도 않는사람이다. 그가 입을 열었다는 건 아직 뭔가 여지가 남아 있다는 것이다.

“어지간히 마음에 들었나봅니다?”

이성재가 비꼬듯 말했다.

“하하, 마음대로 생각하시죠. 어떻습니까?”

“좋습니다. 대신 수지의 시신은 제가 받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방법이 있습니까?”

이성재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죽던 사라지던 그에게는 매한가지다.

그가 필요한 건 클랜들을 움직일 증거 뿐이다.

이성재의 대답이 마음에 든다는 듯 사사키의 미소가 짙어졌다.

“이미 추적 중에 있습니다. 저희 클랜 최정예암살대가...”

***

제황은 한수지를 안아든 채 달리고 있었다. 궁기가 파티장을 흔드는 사이 혼란을 틈타 빠져나온 것이다. 문제는 수지의 상태는 갈수록 안 좋아진다는 것이다. 붉게 물들던 그녀의 얼굴에는 핏줄이 얼키설키 튀어나와 금세라도 터질 듯 보였고 숨소리도 자꾸 거칠어졌다.

처음 제황은 그녀를 데리고 무적성의 전진기지로 들어가려 했었다. 그리 멀지 않기 때문에 어렵지 않으리라 생각했건만 웬걸 그것은 제황의 오판이었다. 거리의 문제가 아닌 따라붙는 인간들이 있었던 것이다.

수지만 없었다면 은신으로 뚫던 아니면 역습을 가하겠지만 지금은 불가능한 상태다.

게다가 우습게 보기에는 상대의 실력이 만만치 않다. 어쩔 수 없이 그들을 피해 방향을 선회했다.

슈슈슈슉...

“큭”

빛살 같이 날아든 날카로운 뭔가가 제황의 볼을 긋고 지나갔다. 궁기안을 통해 날아오는 다섯 개의 선을 포착하기는 했지만 문제는 수지를 안은 상태에서는 몸이 마음대로 따라 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적당히 하고 오라니까.

-미안! 너무 재미있어서! 오른쪽 조심!

시야를 공유하는 궁기가 위험을 외치자 제황은 재빨리 왼쪽으로 몸을 날렸다.

슈슉... 푹

“큭”

두어 개는 피해냈지만 뒤따라 날아온 것은 피하지 못했다.

허벅지로 날아와 꽂힌 그것은 투척용 비도였다.

제황은 몸을 빙글 돌려 한수지를 등으로 돌려 업은 뒤 무한고에서 스톰레이지를 꺼내 들었다.

파파팡!

“크악!”

공중에서 날아 내리던 검은 그림자 하나가 제황의 화살에 맞고 땅으로 떨어졌다.

그러나 궁기안에 잡히는 숫자는 무려 30명, 문제는 그 중 십여 명이 궁기안의 은신 감지능력을 뛰어 넘는지  잡혔다가 말았다가 한다는 것이었다.

“멈춰라!”

투투투툭...

제황의 주위로 요란한 소리와 함께 수십 개의 비도가 날아와 꽂혔다.

“후우...”

섣불리 움직이면 수지가 위험할 수 있기에 제황이 멈췄고 제황의 앞뒤로 수십 명의 인영이 내려섰다. 온통 검은색으로 된 마치 일본 영화에 나오는 닌자의 복장을 현대적인 시각으로 재해석한 듯한 방어구를 걸친 그들은 모두 짧은 비도를 제황을 향해 겨누고 있었다.

“우리에게서 도망을 불가하다. 순순히 잡혀라.”

번역기능이 달린 기계를 쓰는지 상대에게서 딱딱한 기계음이 들려왔다.

제황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은 채 주위를 둘러봤다. 주위를 둘러싼 가느다란 살기들이 온몸을 찔러왔다.

“도움이 있을 거라는 희망은 버려라.”

남자는 여유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그 말이 씨가 되었는지 궁기의 다급한 음성이 들려온다.

-윽!

공유된 시야를 보니 십여 명의 사람들이 그녀를 포위하고 있었다. 그들은 현란하게 움직이며 궁기를 견제하고 있었다. 명백히 둘의 만나는 걸 방해하겠다는 것이다.

-귀찮은 놈들이 붙었어! 조금만 버텨봐.

궁기의 목소리가 다급함이 서려있다.

“우리 대장님의 거미줄은 한 치의 빈틈도 없지.”

느물느물 말하는 것을 보니 궁기쪽도 이들의 소행 같다.

이쪽도 그렇고 저쪽도 그렇고 그다지 상황이 좋아 보이지 않는다.

“항복한다면 위해를 가하지는 않는다.”

남자가 손에서 무기를 놓으며 말했지만 제황은 그 말에 코웃음 쳤다. 무기를 놓기는 했지만 제황이 보기에 남자의 진짜 힘은 무기가 아니었다. 양손에 마나가 줄기줄기 뭉치는 게 보인다. 허점을 보이는 순간 자신을 공격할 것이다.

‘이러고 싶지는 않았지만...’

계속되는 위기가 제황에게 선택을 강요하고 있었다.

제황은 한수지를 뒤에 조심스럽게 내려놨다.

그녀를 포기하는 것은 아니다.

그냥 끝장을 보려고 마음먹었을 뿐이다.

지금 그가 하려는 것은 일종의 도박이다.

가장 지양해야 할 행동이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다.

-한 번에 쓸어버리겠어. 궁기 혹시 실패할 수 있으니 뒤를 부탁해.

-설마 그걸 쓰려는 거야?

-응.

제황의 말을 이해한 궁기가 대경실색했다. 그녀가 없으면 화신체도 사용하지 못한다. 화신체가 보조하는 상태에서 써도 성공 확률이 낮은 방법을 홀로 쓰겠다고 하니 불안해하는 것이다.

-알았어.

궁기의 대답을 들은 제황은 가볍게 숨을 고른 뒤 무한고에서 테러버드 화살을 한 발 꺼내 시위에 재빨리 걸었다. 그러자 남자가 당황하여 외쳤다.

“칙쇼! 소코게끼!”

일이 틀어진 것을 알아차린 수십 명의 검은 그림자가 잔상이 일어날 정도로 엄청난 속도로 제황을 향해 일제히 돌격해 들어왔다.

“무련궁술 최종오의...”

차가운 밤공기 속 제황의 목소리가 고요하게 울린다. 착 가라앉은 그의 목소리에는 가늘게 정제된 살기가 흘러내렸다.

위이이...

제황의 전신으로부터 붉은 오오라가 폭발적으로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모든 오오라가 스톰레이지로 뭉클뭉클 모여들기 시작했다.

“죽어라.”

제황의 몸을 중심으로 대기의 흐름이 달라졌다. 거칠게 불던 바람마저도 숨죽인 채 제황을 바라보고 있다.

“비상하며...”

수십 개의 비도가 제황을 향해 날아온다.

파팍...파파팍!

제황의 전신에 다섯 개의 비도가 단숨에 꽂혀 들었다. 그러나 제황은 일체의 미동도 하지 않았다. 고통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일점으로 집중된 제황의 초인적인 집중력을 깨지는 못했다.

“춤추며... 폭발해라...”

츠츳...츠츠츳...

시위를 당기는 스톰레이지가 가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아니 제황의 온 몸이 미친 듯이 진동하고 있다. 입고 있던 옷들이 쩍쩍 갈라지기 시작했다. 제어되지 않은 강기들이 제멋대로 뻗어나가며 제황의 몸에 상처를 입히고 있었다. 비도가 꽂힌 부분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강기의 화살!”

뿌드득...뿌득...

테러버드의 깃털을 그대로 깎아 만든 화살이 몰려드는 마나를 감당하기 힘든지 연신 비명을 지른다. 연습으로 시도하는 것도 무리였던 네 개의  인첸트를 화살 하나에 모조리 담았다.

파아아아아아앙!!!

제황이 시위를 놓는 순간 스톰레이지로부터 붉은 섬광이 폭발했다.

쾅!쾅쾅쾅쾅!!!

화살이 아닌 붉은 강기의 다발이 사방을 향해 폭발하듯 터져 나갔다.

“니게!!!”

“으아아악!”

비명과 고함이 터져 나왔다.

날아들던 이들 중 절반이 붉은 강기에 적중됨과 동시에 온 몸이 폭발하듯 비산해 버렸다.

나머지 절반은 동료들의 시체로 인해 운좋게 그것을 피해냈지만 강기의 추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피했다고 생각한 강기들이 마치 호밍 미사일처럼 회피한 이들을 번개같이 따라붙었다.

“으아악!”

[바람의장막]

퍼퍼펑!

천황클랜 최정예 암살대의 부대장 시게오는 붉은강기와 부딪히는 순간 박살이 나버리는 자신의 방어스킬에 대경실색하며 몸을 틀었다.

다 잡았다고 생각하고서 잠시나마 마음을 놓은 게 실수였다.

세 개의 강기다발이 자신을 집요하게 쫓아 날아온다.

“부단장!”

그때 그의 앞을 천황대의 돌격대장 카츠가 막아섰다.

그의 몸에서 웅혼한 푸른 기운이 뿜어져 나와 전면을 가로 막는다.

[철진벽]

쾅쾅쾅!

세 개의 강기가 카츠의 방어스킬에 충돌하며 요란한 폭음이 울렸지만 카츠는 그것을 견뎌 냈다.

“고맙다. 카츠”

“별말을... 큭”

붉은 강기를 막아선 카츠가 과장스럽게 웃으며 박살나버린 자신의 팔뚝을 붙잡았다. 그 모습에 시게오의 표정이 굳었다. 강하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그것은 은신능력을 두고 말한 것이지 이런 미친 공격력은 계산 밖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대부분 전투불능이다. 그나마 암살대의 가장 실력이 뛰어난 십걸만이 살아있을 뿐 나머지 대원들은 다 전투불능 상태다.

“수치다. 칙쇼”

잇새로 욕을 하며 그가 전면을 노려봤다. 그곳에는  뒤로 주르륵 밀려난 제황이 한쪽 무릎을 꿇고 있었다. 온몸이 피투성이에 입가에도 피가 흥건하다. 그의 무기인 듯 보이는 활은 두 동강이 나서 널브러져 있다. 툭 건드려도 죽을 것 같은데 문제는 눈빛이 아직 살아있다는 것이다.

“대장의 계획이 어긋났다.”

시게오는 혀를 차며 제황을 노려봤다. 피해가 너무 크다. 이대로는 돌아가도 문책으로 끝나지 않는다.

“빌어먹을...”

본래 계획인 포획은 물 건너갔다.

-칙... 무적성에서 몰려들고 있습니다.

-이 여자 너무 강하다! 곧 뚫린다!

시간 또한 그들의 편이 되어 주지 않았다. 그가 망설이는 사이 이 모든 것을 지휘하는 암살대의 대장 사사키의 명령이 들려왔다.

-죽여라. 증거는 모두 지우도록...

-넵!

대장의 명이 떨어졌다.

“구천을 떠돌더라도 나를 원망하지는 마라.”

그 말과 함께 그가 아공간에서 칙칙한 검은색의 구체를 꺼냈다.

-아직 이야?

-무슨 놈들이 이렇게 질겨! 거의 다 도착했어.

-나 죽겠는데?

-엄살은!

농담 같지만 미안하게도 사실이었다. 무리한 마나운용은 용혈신공이 어느 정도 받아내기는 했지만  몸에 부상이 너무 심하다. 긴급재생을 통해 치명적인 상처를 치유하고는 있지만 피해가 너무 컸다.

아직 정신을 붙잡고 있는 것도 용하다고 할 수 있는 수준이다. 문제는 상대 쪽에서 뭔가 불길한 물건을 꺼내 들었다는 것...

“잘 가라.”

남자가 제황을 노리고 검은 구체를 던졌다.

티팅...

수류탄과 같은 원리인지 안전장치가 떨어지며 제황을 향해 쏜살같이 날아왔다.

“제기랄!”

피할 수 없다.

그때...

피슛...

제황의 뒤쪽으로부터 한발의 화살이 날았다. 그리고 그 화살은 그 검은 구체를 정확히 맞춘 뒤 그대로 날아가 남자의 어깨에 꽂혀 들었다. 화살이 날아올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남자는 그 화살에 그대로 어깨를 내줬다. 그리고 덤으로 검은 구체가 일으킨 엄청난 폭발에도 휩쓸려 버렸다.

콰콰쾅!

전방에서 발생한 강력한 후폭풍이 제황과 수지를 덮쳤다.

투투툭...

돌가루들이 떨어지는 속에서 제황은 서둘러 한수지의 상태를 확인했다.

“우우욱!”

한수지의 눈,코,입에서는 연신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활이 바닥에 떨어진다.  그녀 또한 헌터이기에 아공간에 주무기는 가지고 다녔다. 그것을 이용해 공격한 것, 그러나 그 대가는 컸다.

“헉헉... 제황아.”

“말하지 마. 곧 있으면 힐러들이 올 거야.”

제황은 한수지에게 긴급재생을 사용했다. 그러나 그녀는 억지로 끌어올린 마나로 인해 마나엔진이 망가졌고 그로 인해 마나로 억누르고 있던 지독한 최음제가 그녀의 몸을 부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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