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사거리 100만-105화 (105/301)

# 105

그녀X그녀-3

이성재는 클랜원들의 삼엄한 경호 속에 힐러에게 치료를 받고 있다.

“다행히 큰 상처는 없으십니다.”

“고생했어.”

치료가 끝나자 이성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차피 자해를 한 것이기에 겉으로 보이는 상처가 중해보일 뿐이지 겉만 벤 것에 불과했다.

“전 클랜원 전투경계태세 완료했습니다. 개미새끼 한 마리 빠져 나갈 수 없습니다.”

산적수염의 대현클랜 제1공격대장이 씩씩하게 외쳤다.

“좋아. 그러나 방심하지 마라. 상대는 무적성의 인물이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산적수염은 호언장담을 하며 뒤돌아 빠져 나간다. 그리고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성재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멍청한 놈들...’

개미새끼 한 마리 빠져나갈 수 없다고 호언장담하지만 이성재는 제황이 도망칠 거라고 생각했다. 무려 대현클랜비밀연구소를 안마당마냥 뛰어놀 수준의 은신을 지녔다고 예상되는 그였다. 물론 그에 대한 대비도 해 놨다.

답은 바로 한수지에게 먹인 최음제였다.  다크링이라는 애벌레 모양의 1성 몬스터에게서 추출한 페로몬이 최음제의 원료였는데 수컷의 몸에서 추출하는 그 페로몬은 남녀 구분 없이 극도의 성욕을 일으키는 효과를 일으킨다.

이 사실이 처음 세상에 알려졌을 때 많은 이들이 이 다크링의 페로몬을 상업적으로 이용하려고 했지만 곧 지독한 부작용으로 인해 그것을 하나 둘 포기했다. 그것은 바로 일정량 이상을 사용하면 높은 확률로 심장마비를 일으킨다는 것이다.

그나마 헌터들은 신체능력이 뛰어나 심장마비까지는 일으키지 않지만 많은 일반인들이 부작용으로 죽어나가자 페로몬의 사용은 완전히 금지되었다.

그러나 워낙 그 효과가 좋아 음지에서 아직 활발하게 거래되는 물건이기도 하다. 이번에 사용된 것은 거의 원액이기에 이성재는 한수지가 정신 나간 짐승이 될 것이라는 걸 의심치 않았다.

콰쾅쾅!!!

“으아악!”

“아악!”

그 때 사람들이 뛰어 들어간 통로 쪽에서 요란한 폭발음과 함께 사람들의 비명이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들으며 이성재는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천제황이 다른 클랜 사람들과 충돌을 일으킨 것이다.

‘계획보다 더 잘되었군. 원액을 사용했으니 수지는 십중팔구 죽는다. 그리고 그녀의 몸에서 난 체액이 한 방울이라도 묻으면...’

이 다크링의 페로몬에는 또 다른 기능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바로 다크링의 암컷이 이 페로몬에 엄청나게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것이었는데 아무리 은신이 뛰어난 이라도 냄새까지 지워버릴 수는 없기 때문에 이 페로몬이 묻었던 이는 그 어디로 도망가던 추적이 가능했다.

아무리 씻어도 이 냄새는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수지의 몸에서 나온 체액이 조금이라도 몸에 묻는다면 그때부터는 독안에 든 쥐다.

앞으로의 계획을 생각하며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제황을 잡으러 투입되었던 대현클랜원 하나가 이성재에게 헐레벌떡 뛰어왔다.

이성재는 짐짓 모른 채 그에게 물었다.

“어떻게 되었지?”

그러자 이성재의 앞에 선 그가 우물쭈물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갑니다.”

“뭐? 무슨 말이야.”

클랜원의 말에 이성재가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상황이 이상하다니... 자신이 구상한 계획에 이상하게 보일 부분이 있었던가?

“정확히 말해.”

“그게 한수지님을 구속하고 있는 헌터 하나를 발견하기는 했는데...”

“했는데?”

“그게...저기...여자...였습니다.”

“여자?”

클랜원의 보고에 이성재는 순간 벙찐 표정이 되어 버렸다. 여자라니? 자신이 밀실에 데리고 들어간 제황은 어디를 봐도 남자였다. 남자치고는 곱상한 눈매를 지니고는 있었지만 넓은 어깨에 큰 키를 지니고 있기에 어디를 봐도 여자 같지는 않았다.

“게다가...”

“게다가?”

뭔가 더 할 말이 있는지 우물쭈물 거린다.

“게다가 뭐!”

이성재가 다그치자 잠시 망설이던 그가 입을 떼었다.

“자기를 마스터의 본부인이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뭐? 무슨 그런 미친...”

전혀 뜬금없는 그 말에 이성재는 허탈하다 못해 이제 분노가 슬슬 치밀어 오르는 걸 느꼈다.

“누가 그런 말도 안되는 소리를 듣는 거야! 일단 제압하란 말이야!”

이성재의 외침에 클랜원이 침통한 표정으로 입을 연다.

“그게 무지막지하게 강합니다. 투입되었던 이들 중 절반이 지금...”

우지지직! 콰콰쾅!!!

요란한 굉음과 함께 베이스캠프 전체가 뒤흔들리더니 벽과 기둥을 이루고 있던 금속 블록들이 마치 종잇장처럼 찢어져 나가며 박살이 났다.

“꺄아아아아악!!!”

파티장 안에 웅성거리던 사람들이 갑작스러운 천재지변에 비명을 지르며 밖으로 뛰쳐나간다.

“마! 막아!”

“으아악! 도망쳐!”

아비규환이 따로 없다. 천제황을 잡으러 들어갔던 사람들이 휩쓸리듯 밀려 나왔다.

통로에서는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한 여성이 뚜벅뚜벅 걸어 나오고 있었다. 한 손에는 저보다 두 뺨은 더 큰 거한을 질질 끌고 나오고 있었는데 그는 안으로 투입된 이들 중 가장 강한 남자였다.  거한을 귀찮다는 듯 파티장 가운데로 획 던져버리고는 주위를 오만하게 둘러보던 그녀의 붉은 입술이 조그맣게 움직였다.

“어머 너무 약해. 여긴 허약한 새끼들 밖에 없는 거야?”

그녀가 깔보는 듯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본다.

그러다가 이성재와 눈이 딱 마주치더니 그를 향해 사뿐사뿐 걸어왔다.

“어머! 신랑! 여기서 뭐해? 고작 도망친 게 여기야?”

“너...넌 누구야!”

이성재가 발악하듯 소리쳤다.

“흐응, 약혼녀라는 년을 조졌더니 이리로 도망쳐 놓고 이제는 날 모른다고 발뺌을 해?”

그녀는 실망이라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뭐 뭐야 어떻게 된 상황이야 이게...”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분명 이성재는 무적성의 남자가 자신의 약혼녀를 희롱하던걸 막다가 도망쳐 왔다고 했는데 지금 걸어 나온 건 여성이었다. 게다가 자신을 이성재의 마누라라고 이야기 하고 있었다.

“멍청하기는! 일루젼이다! 모두 공격해!”

이성재가 여자를 손가락질하며 외쳤다. 그러자 내부의 소요사태에 안으로 진입 중이던 대현클랜원들이 일제히 여자를 향해 무기를 뽑아들고 달려들었다. 이성재의 말대로 일루전이라면 이 모든 게 설명이 된다. 실내이고 민간인이 있기에 원거리 마법이나 화기는 사용하지 못하지만 이십 여명의 헌터들이 일제히 엄청난 속도로 돌격하자 사람들은 저 아름다운 여인이 곧 제압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어머, 허상 따위와 비교하다니 나 슬퍼.”

궁기가 눈물이 난다는 듯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 모습은 마스터의 명령에 돌진하던 이들 마저도 걸음을 멈출 정도로 처연했다.

“그럼 내가...”

어깨를 들썩이던 그녀는 이내 손가락 사이로 눈을 빛내며 작게 중얼거렸다.

“상처 입은 여자가 얼마나 무서운지 보여주지.”

그 말과 함께 그녀의 양손에서 붉은 강기가 쭈욱 튀어 나왔다. 거의 20센티미가량 튀어나온 여섯 줄기의 강기는 마치 짐승의 발톱과 같다.

파아앙!

궁기가 전면으로 튀어 나가자 그녀의 뒤로 소닉붐이 생성되며 돌가루들이 튀어 올랐다.

퍼버버버벅! 퍽퍽퍽! 쫘자자작! 지직!

“커억!”

“으아악!”

“내 내팔!”

강기가 장전된 그녀의 두 주먹이 대현클랜원들을 휩쓸고 지나갔고 그들과 궁기가 교차되는 순간 이성재에게는 꿈에 나타날까 두려운 지옥이 파티장 안에 펼쳐졌다.

쫘자자자자자작!!

“으아아아악!”

달려들던 수십 명의 대현클랜원들은 말 그대로 추풍낙엽에 되어 공중을 날았다.

4성 이상의 헌터 20명이 정리되는 건 단 한순간이었다. 두 번의 공격도 필요 없다.

“죽어라!”

대현클랜 제1공격대장은 자신의 애병인 대검에 강기를 덧씌워 궁기에게 마주 쳐 갔다.

그는 자신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무리 각성자라고 해도 피지컬을 무시할 수는 없다. 능력치라는 것은 기본 능력치를 곱절로 만들어주는 것이기 때문에 한계에 다다른 자신의 피지컬과 높은 능력치는 이 가녀린 여성을 압도하리라 생각했다.

물론 그 착각을 깨닫는데는 단 한 번의 교차로도 충분했다. 그녀의 근접능력은 제황마저도 한 수 접어준다. 아니 한수가 아니라 두 세수 정도 뛰어나다. 굳이 표현하자면 그레플러 그랜드 마스터임과 동시에 피스트 그랜드마스터 정도라고 표현될까?

투팍! 파파팍!

“꾸에에엑!”

돼지 멱따는 소리와 함께 박살난 대검과 함께 공격대장의 거대한 몸이 공중을 팽이처럼 날았다. 깊게 파고든 궁기가 공격대장의 몸 중심에 있는 모든 급소를 일순간 두들겨 버린 뒤 돌격하는 힘을 흘려 공중으로 띄워버린 것이다.

“으어어...”

땡그렁...

그녀의 모습에 홀려 가장 마지막에 남았던 한 젊은 남성 헌터가 신음성을 흘리며 들고 있던 무기를 떨어뜨렸다. 압도적이라는 말로도 부족할 정도의 강력함이다.

“하아...상쾌하네.”

기분 좋다는 듯 머리를 쓸어 올리는데 그 모습까지도 너무 아름답다.

그는 아름다움이 공포와 공존할 수 있다는 걸 난생처음 깨달았다.

“더 없어?”

궁기는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이성재에게 사뿐사뿐 다가갔다.

“하..하하”

이성재는 헛웃음을 흘리며 눈앞에 오만하게 서 있는 여자를 바라봤다.

자신의 부인이라는 황당한 주장을 하는 이 아름다운 여인의 엄청난 무위에 그는 정신이 마비되어 버렸다.

아니 한편으로는 이 여자가 진짜 자신의 부인이었음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런 무력을 지닌 이가 자신의 부인이라면 자신의 클랜은 단숨에 아시아 일 위, 아니 세계 제일이 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음, 좀 더 놀고 싶지만 더 깽판 치면 혼날 것 같네. 난 간다. 감히 본부인을 두고 총각 행세를 하고 약혼녀를 두다니... 위자료는 두둑이 준비하는 게 좋을 거야. 호호호호”

마지막 말은 파티장 안에 사람들이 모두 들으라는 듯 소리친다. 그 모습이 마치 국어책을 읽듯이 부자연스럽지만 이 파티장 안에 그녀의 말에 토를 달이는 단 하나도 없었다.

“에잇, 잔소리 엄청 심하네. 아무튼 나간다!”

궁기는 마치 무언가에 쫓기듯 그녀의 천장을 뚫고 공중으로 날아올라 사라져 버렸다.

“하...하...”

남은 것은 난장판이 된 파티장 뿐이다. 이성재는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그녀가 사라져버린 천장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때 한 남성이 이성재의 곁에 다가와 선다. 대현클랜의 정복을 입고 있기는 한데 얼굴에 붉은 색의 도료를 울긋불긋하게 칠한 하얀 얼굴의 젊은 남자다. 마치 뱀이 연상되듯이 길게 찢어진 눈에 입가에 그린 듯한 미소를 가진 그는 궁기가 사라진 공중을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대한민국의 부부싸움은 정말 엄청나군요.”

그의 말에 이성재가 이를 갈며 대꾸했다.

“부부싸움이 아닙니다. 난 모르는 여자요.”

“오! 그런가요. 하하. 잠시나마  클랜마스터님이 죽이고 싶을 정도로 부러웠습니다.”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그보다 어디 있었습니까? 사사키대장”

“저야 얌전히 숨어 있었습니다. 제게는 저런 무력이 없으니까요. 그리고 제가 의뢰 받은 것에 저런 여자와 싸워달라는 내용은 없었습니다.”

“흥, 의뢰라니 저와 천황클랜이 의뢰 따위로 움직이는 줄을 몰랐습니다?”

이성재의 목소리에 싸늘함이 묻어있다. 천황클랜이 자신을 의뢰 같은 것으로 보고 있다면 그도 똑같이 해줄 수 있다. 그렇게 된다면 손해 보는 것은 천황클랜이 될 것이다.

“하하, 기분이 상하셨나보군요. 죄송합니다. 그건 그렇고 앞으로 어떻게 하실 겁니까?”

그의 물음에 이성재가 이를 악물었다. 일단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상황파악이 우선이지만 일단은 음모는 중단해야 했다. 증거가 이렇게 뒤죽박죽이 된 상태에서 확실하지 않은 것으로 무적성에 덤빌 수는 없었다.

입을 막아야 할 것들이 꽤 되지만 그리 어렵지는 않으리라. 문제는 그로 인해 손실될 그의 위상이었다.

“주둥이들이 참 좋아하겠군. 빌어먹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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