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사거리 100만-104화 (104/301)

# 104

그녀X그녀-2

그날 밤 제황은 초대장에 써진 곳으로 향했다.

파티는 대현클랜이 급조한 베이스캠프에서 열렸다. 캠프라고 하지만 그 규모가 상당하다. 고작 하루 만에 만든 곳이지만 500평에 이르는 대지에 이층으로  이루어진 격자형의 구조물과 천막으로 블록 건물이 올라 있었다.

디리링...

전장에 어울리지 않는 감미로운 음악이 울려 퍼진다. 초대된 것은 30여명이지만 파티장에는 그들을 제하고서도 수십 명의 젊은 미남미녀들이 가득했다.

“어머, 스타더스트 클랜의 김영웅님 영광이에요.”

“위험한 스쿼드라는 영화 감명 깊게 봤습니다. 효진씨.”

그들은 대부분 한창 티브이에 얼굴을 비추고 있는 연예인 들이거나 혹은 명문가의 자재들이다.

제황은 초대장에 써진 시간보다 조금 늦게 도착했다.

무적성을 나타내는 하얀 전통 무복 위에 입을 가리는 하얀 후드, 발치에 닿는 긴 망토를 두른  제황이 입구를 지키고 있는 대현클랜원에게 초대장을 내미니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제황을 안으로 안내했다.

“무적성의 천제황님입니다.”

파티장 한쪽에 마련된 높은 단 위의 사회자가 제황을 가리키며 외치자 장내의 사람들이 모두 대화를 중단하고 파티장으로 들어서는 제황을 주시한다. 무적성의 이름값이다. 대한민국을 아우르는 그들을 대표하는 유망주의 자격으로 초대되었으니 모두가 주목하는 건 당연하다.

많은 이들이 제황의 주위로 몰려들었지만 제황은 그들을 무시한 채 플로어 한쪽으로 걸어갔다. 자신들이 무시당했다고 생각한 몇몇이 저들끼리 수근 거렸지만 그 뿐이다.

“오셨군요.”

많은 이들에 둘러싸여 있던 이성재가 제황을 향해 반갑다는 듯 손을 들었다.

그러고는 주위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제황에게 다가왔다.

“초대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대현의 초대니까요.”

제황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하하, 이거야. 원 황송합니다.”

“초대장이 인상적이더군요.”

“마음에 드셨습니까? 하하.”

“아주 재미있었습니다.”

“그래요? 이거 잘하면 우린 좋은 친구가 될 수도 있을 것 같군요.”

이성재의 말에 제황의 후드 속 입가에 작은 미소가 그려졌다. 그런 게 선물이라면 자신 또한 이성재만큼 악취미의 선물을 보낼 자신은 있다.

“생각하기 나름이죠.”

“그런가요? 하하 그럼 우리 친구로 하죠.”

“오빠”

그 때 한 여성이 성재의 곁으로 다가왔다. 전장에 어울리지 않게 적당한 노출과 여성스러움을 강조한 그녀는 바로 영상을 통해 결박되어 있던 한수지였다. 한껏 웃으며 다가온 그녀가 이성재의 팔짱을 끼며 제황을 바라본다.

“아, 여긴 제 약혼녀입니다.”

“한수지에요.”

조신하게 앞섶을 손으로 가린 한수지가 고개를 숙이자 제황의 눈이 가늘어졌다. 다른 이들은 모르겠지만 제황이 보기에는 그녀의 눈동자가 어색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정신 금제를 당했어. 느껴지는 파장으로는 기절한 상태야.

-풀 수 있어?

-모르겠어. 이건 분명 꽤 고대의 술법인데... 이런 걸 사용하는 이들이 있다니

궁기는 당황했다. 이 시대에서 술법을 본 건 그녀에게 처음이었다.

게다가 그 술법에서 풍겨오는 느낌이 꽤 꺼림칙하다. 마치 오래전에 알고 있던 것 같은 느낌...

-조심해.

-알았어.

제황이 궁기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성재가 입가에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조용한 곳으로 옮길까요? 우리 셋은 할 말이 많지 않습니까?”

“그러죠.”

성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제황이 이성재의 안내에 따라 걸음을 옮겼다.

몇몇이 셋을 주시했지만 이내  다시금 자신들의 앞에 있는 매력적인 낯선 이성에게 관심을 쏟기 바쁘다.

파티장을 나서서 몇 개의 블록으로 된 복도를 거치자 상당히 넓은 방 하나가 나타났다.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한수지가 실 끊어진 인형처럼 바닥에 쓰러졌다. 그러나 이성재는 별로 놀랍지 않다는 듯 그녀를 내려다보며 제황에게 말했다.

“대단한 자신감이군요. 여기까지 따라오다니... 아니 수지가 그렇게 소중한가?”

“그냥 궁금했을 뿐이야. 그건 그렇고 인테리어가 악취미군.”

성재의 말에 대답하며 제황은 자연스럽게 걸음을 옮겨 방안을 걸었다.

그러고는 궁기의 말에 따라 방안에 놓인 물건들의 위치를 하나하나 바꾸기 시작했다.

지그시 웃음 짓던 이성재는 제황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얼굴에서 조금씩 웃음이 사라졌다.

“그걸 알고 있나?”

제황이 하는 행동의 의미를 깨달은 이성재의 눈이 커졌다. 방금 제황의 행동으로 그가 천황클랜의 ‘그’ 에게 부탁하여 애써 준비한 수단 하나가 사라졌다.

“잘은 몰라. 그렇지만 궁금하군. 이걸 누가 설치했는지 말이야.”

마지막으로 방 중앙에 있는 탁자 위에 놓인 네모난 꽃병을 거꾸로 들어 물과 꽃을 빼버린 제황이 꽃병을 이성재에게 툭 던졌다. 그러자 흠칫 놀란 이성재가 그 꽃병을 붙잡았다.

츠츳...

검은 스파크가 튀더니 꽃병 안쪽에 달린 마나석이 터져 버린다.

“손님이 함부로 이러면 쓰나.”

이성재가 손에 남은 유리가루를 털어내며 말했다.

“주인이 준비한 게 워낙 재미있어서 말이야.”

“그래? 그럼 좀 더 즐겨보시죠.”

그 말과 함께 사면의 벽들이 번개같이 열리며 검은 석궁화살들이 소리 없이 발사되었다.. 제황에게는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지만 문제는 그 석궁화살 들이 한수지를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제황이 그것들을 쳐내니 이성재는 이미 사라져있었다.

-함정이다.

-알아.

서둘러 달려간 문은 이미 닫혀 있다. 아니 보통 문이 아니다. 마치 거대한 벽으로 느껴진다.

-이건 술법이 아냐.

-응.

주위를 경계하며 제황이 무한고에서 스톰레이지를 꺼내들었다. 여차하면 벽을 뚫어버릴 생각이다. 그때 바닥에 쓰러져 있던 한수지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으윽, 으으으”

그녀는 고통스러운지 머리를 부여잡더니 이내 입고 있던 옷을 손으로 붙잡고 찢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허벅지에 숨겨놓은 듯한 단검을 뽑아들더니 자신의 가슴을 겨눴다.

“수지야!”

깜짝 놀란 제황이 수지에게 달려들었다.

탁!

제황은 수지의 손에서 단검을 쳐낸 후 그녀를 붙잡았다.

“꺄아아아!”

한수지가 고통스러운지 비명을 지른다.

“정신 차려!”

그녀의 어깨를 잡고 흔들자 머리를 부여잡고 비명을 지르던 한수지는 갑자기 눈앞에 제황을 바라보고는 눈에 눈물이 고였다.

“제, 제황아. 흑... 보고...보고 싶었어.”

갑자기 덥썩 안겨오는 그녀의 몸에 당황하던 제황은 이내 콧속으로 야릇한 향기가 느껴지자마자 시야가 뿌옇게 변함을 느꼈다.

***

“크윽...”

“꺅!”

가슴과 오른팔이 피투성이가 되어 나타난 이성재의 모습에 장내의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분분히 물러섰다.

“마스터!”

파티장 안에 있던 대현클랜원들이 빠르게 몰려든다.

“파티장을 포위해! 어서! 클랜원들을 전부 소집시켜!”

“예? 예! 알겠습니다.”

이성재의 외침에 대현클랜원들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초대받아 온 한 남자가 굳은 표정으로 이성재에게 물었다.

“무적성의 그가...제 약혼녀를 희롱하는 바람에... 막으려 했지만 도리어 당했습니다.”

“예?!”

이성재의 말에 장내에 있던 이들이 모두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무적성의 인물이 그런 짓을 저질렀다는 것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저었지만 마치 기다렸다는 듯 몇몇이 호들갑을 떨며 외치기 시작했다.

“이런 짓을 저지르다니... 정말 무적성의 인물입니까?!”

“저도 아니라고 믿고 싶습니다. 크윽... 일단 보안블럭 안에 잡아뒀으니 어서 제 약혼녀의 구출을...”

“어서 갑시다! 확인해야 합니다!”

이성재의 말을 들은 남자 몇몇이 이성재가 손가락질 하는 곳으로 뛰기 시작했고 다른 이들도 그들을 따라 뛰기 시작했다.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이성재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그려졌다.

더럽고 치졸한 방법임은 인정하지만 높은 곳에 고고히 서 있는 무적성을 진흙밭에 빠뜨리기는 이보다 좋은 방법은 없으리라.

‘제길 그것이 제대로 발동했다면 좀 더 편했겠지만 어쩔 수 없지.’

천황클랜의 ‘그’ 는 일본 특유의 술법에 능통한 디바우저였다. 그가 방안에 걸어둔 그것이 제대로 발동했다면 자신이 이런 바람잡이들을 이용한 억지 쇼를 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마음에 드는 여자를 취할 때 쓰는 미약과 그것이 동시에 발동했다면 실시간으로 재미있는 장면을 내보냈겠지만 상대는 그 수법을 파해시켜 버렸다.

‘상관없지. 좋아 움직이는군.’

연회에는 방송국 관계자들도 끼어 있었다. 그들은 이 돌발적인 특종에 눈을 반짝이며 자신들의 핸드폰을 들고 열심히 촬영 중이다. 아마 내일 아침이면 이 일은 대서특필 될 것이다. 무적성의 기대주가 대현그룹 장남의 약혼녀에게 불순한 짓을 하려다가 현장에서 발각되는 것이다. 대현그룹 장남의 약혼녀는 비운의 주인공이 되어 죽고 그 범인은 도망친다.

굳이 죽일 생각은 없다. 도망치면 더욱 좋다. 무적성의 인물이니 무적성의 개입을 차단할 수 있고 대현클랜이 도망친 제황을 가지고 시간을 끌면 끌수록 일은 확산되어 많은 이들의 입에 오르내릴 것이다.

한편 제황은 신음성을 내며 달라붙어오는 한수지를 기절시킨 후 주위를 둘러보는 중이었다. 무슨 일인지 더 이상의 공격은 없다. 그러나 공격이 없다고 안심할 상황은 아니다.

-밖에 사람들이 몰려와.

-한 방 먹었군.

제황은 이성재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함정은 정말 더럽게 짝이 없지만 문제는 빈틈이 없다는 것이다. 생각할 틈도 없이 함정이 진행되고 있다. 이대로 문이 열리면 옷이 다 찢어진 한수지와 자신이 모두에게 보일 것이다. 한 마디로 진퇴양난이다.

-궁기!

-음?

-어쩔 수 없네. 도와줘.

-어떻게?

-지금부터...

제황은  자신이 생각하는 계획을 궁기에게 알렸다.

-흐음, 마음에 안 들어. 그냥 다 때려 부수면 안 되나?

-안 돼. 이곳은 무적성의 권역이야. 그런 일이 일어나면 무적성의 권위가 실추된다.

-쳇, 알았어. 지금까지 먹은 값은 해야지. 그런데 난 그런 것 잘 못하는데... 난 때려 부수는 전문이라고...

궁기의 말에 제황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그러다가 이내 이 상황이 어딘가 익숙하게 느껴진다. 생각을 정리한 제황이 말했다.

-[사랑 빌런]의 여주인공 김제나가 되는 거야. 14편 여자사냥꾼 편!

제황의 말에 궁기가 파안대소를 했다.

- 재미있겠는데! 호호호

***

틱틱...띠리릭

문의 걸린 락이 풀리며 일단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왔다.

“멈춰라!”

방안에 들어선 그들은 방 한가운데 있는 두 사람을 발견하고는 각자 손에 마나를 피워 올리기 시작했다. 설마 설마 하며 왔지만 이성재의 말은 진짜였다. 이성재의 약혼녀는 옷이 찢어진 채 축 늘어져 있었고 그녀를 안고 있는 여자는...

가장 선두에 서서 손에 오러를 줄기줄기 풀어내고 있던 한 젊은 헌터가 고개를 갸웃한다.

“여자?”

상황은 이성재가 말하는 것과 비슷하기는 한데 아주 결정적인 부분에서 다르다.

“여자였나? 여자가 왜?”

몰려든 사람들이 모두 이 황당한 상황에 서로의 얼굴을 쳐다본다.

둘 다 여자다. 이러면 이성재의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물론 여자X여자 라는 게 무조건 말이 되지 않는 건 아니지만 이성재와 함께 사라졌던 무적성의 인물은 분명 남자였다.

“이런... 맛있는 간식을 먹으려 하는데 불청객이 있네?”

한수지를 안고 있던 여자가 그녀를 바닥에 내려놓고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대략 180센티 정도 되는 장신에 몸매가 훤히 드러나는 붉은 가죽갑옷을 입은 미모의 여성이다.

입가를 가린 후드로 인해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도발적인 몸매와 더불어 고혹적인 눈매에 남자들의 목울대가 저도 모르게 움직였다.

불타오르는 듯한 긴 머리카락을 쓸어 올린 여자가 오만한 표정으로 장내를 둘러본다.

손에 오러를 일으키던 젊은 남자가 얼굴을 붉힌 채 그녀에게 물었다.

“당신은 누구지?”

“나?”

그 물음에 그녀의 눈매가 아름다운 호선을 그린다.

몇몇 남자들이 그녀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탄성을 지르며 들고 있던 마나를 집중하고 있던 손을 저도 모르게 내렸다.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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