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사거리 100만-103화 (103/301)

# 103

그녀X그녀-1

“수지야.”

잠시 넋을 놓고 전진기지를 바라보던 한수지의 어깨에 이성재가 손을 올렸다.

“아, 오빠.”

“정신 놓지 마라. 여긴 무적성의 권역이야.”

“네. 그건 그렇고 그냥... 신기하게 지어서요.”

“흠, 클랜마스터 입장에서는 부러운 힘이지. 아무튼 난 가볼게. 클랜마스터가 처리할 게 많구나.”

“알겠어요.”

“전에 말했듯이 긴장 놓지 말고...”

“걱정 마세요.”

“그래. 믿는다.”

이성재가 한수지를 슬쩍 안아주고는 몸을 돌렸다.

이성재가 떠나자 그녀는 다시금 전진기지 쪽을 바라봤다. 아니 사실 그녀는 전진기지를 바라보고 있는 게 아니었다. 그냥 넋을 놓고 있을 뿐이다.

요즘 그녀는 거의 이 상태였다.

‘살아있는 걸까.’

저스틴포인트가 함락될 당시 그녀 또한 그곳에 있었다.

들판을 가득 메우며 달려들던 오크의 파도는 공포 그 자체였다.

손가락이 수 번 터지도록 미친 듯이 화살을 날렸다. 그녀의 주력스킬인 [초월연사]는 다른 활을 쓰는 헌터보다 3배 이상 빠른 연사와 함께 명중률을 보정해 주는 스킬이었다. 별것 아닌 듯 보이지만 초월연사의 진가는 마나소모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초월연사를 쓰다가 마나가 바닥이 나도록 시위를 당기고 또 당겼지만 그녀의 공격은 오크의 파도에 말 그대로 집어삼켜져 버렸다. 다른 이들은 그녀의 엄청난 공격에 모두 찬사를 보냈지만 그녀에게는 절망 자체였다.

평소에 가볍게 사냥하던 오크들이 아니었다. 무장을 갖춘 문명의 힘을 받아들인 오크들은 강했다.

제황에게서 배운 궁술을 바탕으로 한 [초월연사]는 그녀의 든든한 버팀목이자 자존심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공격해도 통하지가 않았다.

그렇게 그녀가 무너지려 할 때 그녀는 뜻하지 않은 곳에서 한 차원 높은 활의 경지를 목도할 수 있었다.

‘그 밖에 없어.’

난간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는 그 공격의 주인이 제황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한 때 사랑했던 남자. 아니 활에 관해서는 한없이 존경하는 마음을 가졌던 그다.

그를 한없이 닮으려 했던 그녀이기에 알 수 있었다.

한 때 마음속 우상이었던 그는 그녀의

마음속에 자리 잡던 패배감이 씻은 듯 사라지게 만들었다.

그녀는 활의 경지에 이른 헌터가 어떤 이적을 보일 수 있는지를 똑똑히 목도했다. 자신의 공격을 집어삼키던 오크의 파도는 그의 공격에 속절없이 밀려나갔다.

자신이 추구하던 완성형이 그녀의 눈앞에서 구현되고 있었다.

단순히 빠른 것이 아니었다. 강력하고 정확하다. 단순히 눈앞의 적을 죽이는 것이 아닌 가장 치명적인 약점만을 골라 단 한발의 실수도 없이 끊임없이 저격을 성공시킨다.

헌터의 강화된 신체 능력이 그대로 활에 녹아 있었다. 극한에 이르는 사정거리와 전혀 흔들리지 않는 조준 능력, 단순히 화살을 날리는 것이 아닌 전장 전체를 지배하고 적의 생사를 관장한다.

그 순간 그녀는 제황이 다시금 그녀의 마음속에 들어오는 걸 느꼈다. 아니 들어온 게 아니다. 애써 잊으려 기억 속에 묻어놨던 그와의 추억의 무덤을 헤치고 일어나 그녀를 가득 채워버렸다.

단 한명이 일으킨 기적 속에 모두 희망의 씨앗을 키워갈 때 느닷없이 저스틴포인트에 파견된 대현클랜원들의 공용통신에  대피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이유는 설명하지 않았지만 물러서라는 명령이 있었기에 모두 분분히 자리를 이탈했지만 그녀는 망설였다.

그리고 그 엄청난 폭발에 휘말렸다.

그녀가 정신을 잃기 바로 전까지 그녀의 망막에 맺혀 있던 건 그가 서 있던 곳을 덮치던 거대한 불꽃의 폭풍이었다.

지구로 옮겨진 그녀는 한동안 병원침상 신세를 질 수 밖에 없었다. 힐러의 도움을 받기는 했지만 치명적이었던 건 폭발에 휩쓸리는 바람에 마나엔진이 깨질 뻔 했다는 것이었다.

침상에 누워 있는 내내 그녀는 많은 이들의 방문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에게 차마 제황의 생사를 물을 수는 없었다.

그는 아무도 환영하지 않는 이였으니까.

부모님들이 극진하게 그녀를 보살폈지만 예전처럼 말 잘 듣는 착한 딸이 될 수 없었다.

그들의 욕심에 의해 비극이 시작되었으니까.

그래도 애써 무시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그 반대급부로 오히려 그에 대한 간절함이 덧씌워졌다.

한 동안 갈팡질팡 하다가 마나엔진은 회복되었고 다시금 실전에 투입되었다.

그 때 그녀의 곁에 한 남자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제황에 대한 상념에 빠져 있던 한수지는 성재가 다시 돌아온 줄 알고 다른 남자를 생각했다는 것에 대한 미안함에 한껏 미소 지으며 몸을 돌리며 고개를 들다가 돌처럼 굳어버렸다.

“어어...”

“오랜만이네.”

조금 전까지 마음속에 담아 그리워하고 떠올리던 그가 마치 마법처럼 그녀의 앞에 서 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제황의 볼을 매만지려 했다.

‘내가 무슨 짓이야.’

수지는 자신의 행동에 깜짝 놀라 손을 거뒀다.

그리워하던 사람은 맞지만 자신은 이미 이성재의 약혼녀다.

대현그룹 장남의 약혼녀, 부모님의 기대가 크다.

“지금 간 사람이 약혼자?”

“으응.”

“잘해주네.”

“그, 그래.”

제황이 이성재를 일깨워주자 수지는 조금 더 차분한 마음으로 제황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잘 지냈어?”

“뭐 그럭저럭...”

“여긴 어쩐 일이야?”

“나? 난 무적성 소속이야.”

“무적성?”

제황의 말에 수지가 반문했다. 대현클랜보다 들어가기 힘든 무적성 소속이라는 것에 놀라는 게 아니다.

이곳에 오기 전 이성재에게 들었던 말 때문이다.

“무적성이 뭔가 흉계를 꾸미고 있어. 조심해.”

“알았어요. 오빠.”

“혹시 무적성에 친한 사람이 있는 건 아니지?”

“그런 사람 없어요.”

“다행이다. 아무튼 무적성 인물이면 누구라도 조심해. 그들이 나쁜 마음을 먹는다면 대현클랜은 전멸이야.”

“알겠어요.”

이유는 말해주지 않았지만 무적성을 조심하라 했는데 제황이 무적성 소속이라고 하니  경계심이 솟아난 것이다. 그 때 차가운 바람이 그녀를 치나간다.

그녀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전에도 추위에 약했는데 각성하여 헌터가 되고서도 추위에는 어쩔 수 없다.

"여전히 추위에 약하네."

“으응.”

"기다려봐."

그 말과 함께 제황이 무한고에서 발열팩 묶음을 하나 꺼내서 그녀에게 건넨다.

“활 다루는 사람이 손이 얼면 안 돼. 많으니까 가져다 써.”

“고, 고마워.”

제황에게서 발열팩을 받아든 수지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하나를 뜯어 손에 쥐었다.

제황의 친절함에 경계심이 누그러들려 한다. 그녀는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잡으려 제황에게 물었다.

“그런데 이런 거 다른 여자에게 주면 네 여자친구가 오해하지 않아?”

“무슨 여자친구?”

수지의 말에 제황이 고개를 갸웃했다.

“전에, 저스틴포인트에서 봤던 그 여자 말이야.”

수지의 말에 제황은 이전에 궁기가 마나석의 부작용으로 한 동안 육신을 가진 채 현신해 함께 생활 했던 악몽을 떠올렸다.  제황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입을 연다.

“그 누나. 여자친구 아냐.”

“누나? 그때는 영혼의동반자라고”

수지는 조금 억울한 기분이 되어 되물었다. 당시 궁기의 말에 얼마나 충격을 받았던가.

물론 더 이상 가까이 해서는 안 되는 전남자친구지만 제황이 다른 여자와 다정스레 대화 나누는 모습은 꽤 충격이었다.

당시 제황이 차갑게 군것도 있었지만 그건 그녀가 지은 죄가 있기에 이해하고 넘어갔던 부분이다. 어쨌건 자신은 그를 버렸으니까.

“누나가 장난이 좀 심해.”

“그렇구나. 그럼 ?”

“그냥 알고 지내는 사람이지.”

“...”

“아무튼 난 이만 가볼게.”

“그래. 잘가.”

"너도 몸 조심하고..."

그 말을 끝으로 제황이 뒤돌아 걷기 시작했고 수지는 제황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내 몸을 돌렸다.

***

그리고...

수지와 제황을 어둠속에 숨어 진득하게 지켜보던 눈이 하나 더 있었다.

그림자 속에 서 있는 그 눈동자의 주인은  제황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이윽고 자리에서 유령처럼 흩어졌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그가 다시 나타난 곳은 대현클랜에서 임시로 설치한 대형 막사 앞이었다. 임시라고는 하지만 단시간에 만든 것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시설이 훌륭하다.

옷매무새를 정리한 그가 안으로 들어서자 한창 서류를 검토하고 있는 이성재가 보인다.

“마스터 보고드릴 일이 있습니다.”

“벌써? 빠르군.”

이비서의 말에 이성재가 보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았다. 한수지의 감시를 맡긴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보고가 들어왔다.

“예. 마스터와 헤어진 직후...”

그는 그가 본 것을 이성재에게 빠짐없이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모두 들은 이성재가 낮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렇더란 말이지. 재미있군. 왜 수지를...”

“마음이 남아 있기에 접근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이비서가 조심스럽게 자신의 추론을 내놓았다.

“그런가? 자네가 보기에는 어땠나? 수지는?”

“별다른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단지 마음은 남아있는 것 같았습니다.”

“마음이 남았다?”

“예. 제가 평소에 보던 한수지양은 아니었습니다.”

“재미있군.”

태어나서 평생 겪어보지 않은 생소한 감정에 이성재가 쓴웃음을 지었다. 언제 그가 여자로 인해 이런 적이 있었던가. 빼앗았으면 빼앗았지 도로 빼앗긴 적은 없었다.

특히나 씨받이 정도의 비중으로 밖에 생각지 않았던 한수지가 막상 제황에게 흔들리는 것처럼 보이자 묘한 흥분까지 느꼈지만 그는 곧 흥분을 가라앉혔다. 이비서의 말대로 마음이 남았다면 좀 더 쓸만한 '미끼' 가 된다. 계획에는 긍정적인 부분... 그의 입가에 미소가 떠오른다.

“좋아. 플랜대로 간다. 치졸하고 더러운 방법이지만 무적성을 진흙탕에 밀어 넣으려면 우리도 진흙을 손에 묻혀야겠지.”

그러자 그 계획에 대해 알고 있는 이비서의 얼굴이 조금 경직되었다.

그 계획에는 한수지도 포함된다. 물론 한수지가 죽거나 다쳐도 그는 그다지 상관이 없지만 그녀는 그룹 전략 차원에서 관리된다. 또한 그 관리의 주체는 바로 대현그룹의 현 회장이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회장님께서...”

이성재의 말에 이비서가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누가 너에게 생각 따위를 하라고 했지?”

“죄, 죄송합니다.”

“대현클랜이 이곳에 온 이유를 잊지 마라. 이번 평안남도 공략을 망가뜨리는 게 주요 목적이다.”

“예.”

“그럼 이제 천황클랜의 손을 좀 빌려볼까. 그를 불러라.”

“알겠습니다.”

이비서가 나가자 이성재의 입가에 조소에 찬 비틀린 미소를 지으며 스마트폰을 들었다.

-수지야.

-네. 오빠

-잠깐 지휘캠프로 와볼래?

-예.

스마트폰을 닫은 이성재의 얼굴에 빙그레 미소가 그려졌다.

***

다음 날 제황은 대현클랜으로부터 파티의 초대장을 받았다. 무적성을 통해 들어온 그 초대장의 내용은 간단했다. 각 클랜의 젊은 유망주들이 모여 친목을 다지자는 것. 시간은 당일 밤 9시다. 마냥 놀고먹자는 것이 아닌 본격적인 레이드에 들어가기 전 모임을 가지자는 것이니 무적성도 수락했다.

돌발적이기는  하지만 주최자가 국내 굴지의 대현클랜의 최연소 클랜 마스터 이성재다.

또한 단순한 술자리 모임 따위가 아니다. 국내 클랜 랭킹을 따져 1위부터 30위 클랜의 기대주 1인씩 초청한다는 것이니 일종의 미래 한국의 헌터계를 이끌어갈 동량들이 모이는 것이다.

그리고 제황의 앞으로도 초대장이 왔다.

그런데 초대장의 내용이 다른 평범한 초대장과는 틀리다.

-노골적이네.

-그래.

초대장에는 하나의 메모리카드가 들어 있었다.

메모리카드 안에는 짤막한 동영상 하나가 들어있었는데 동영상의 내용을 본 제황의 눈이 커졌다.

어두운 방안 한가운데는 한수지가 결박되어 있었다. 정신을 잃었는지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는데 놀라운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차가운 남자의 목소리 하나가 영상 끝에 울려 퍼진다.

[초대하지.]

그 짤막한 한마디와 함께 영상은 끝났다.

-대단한 놈이네.

-그러게

이번에는 제황도 놀랐다.

-너 실수한 것 같은데? 평범한 놈인 줄 알았는데 상당히 머리가 뛰어난 놈이야.

궁기의 말에 제황 또한 긍정했다. 상대를 얕봤다. 이성재는 예상했던 모든 경우의 수를 넘어섰다.

-놈도 사냥꾼이야.

보통 놈이 아니다. 이성재는 상대하기 힘든 유형의 인간이다.

-그러게. 그런데 어쩔 거야? 덫일 게 뻔한데?

-가야지.

제황은 초대장을 구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렇게 성대하게 인사해 주는데 안갈 수는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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