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2
엑스트라죽이기-3
털썩
최악의 경우가 나타났다.
부공대장의 무릎이 자동으로 꿇어졌다.
그와 함께 그의 쩌렁쩌렁한 고함이 장내를 진동했다.
“무적선봉! 무상 최진하님을 뵈어 영광입니다!”
마치 모두가 들으라는 듯 외친 그가 머리를 땅에 박았다. 그는 제발 자신의 뜻을 공격대가 똑바로 알아 처먹기를 진심으로 바랬다. 눈앞의 이 젊은 남자는 검증되지 않은 이이지만 지금 나타난 이는 역사책에 그 업적이 수록되어 있는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검증이고 자시고 살아있는 역사가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제발’
그는 제발 공격대원들이 현대사에 무지하지 않기를 바랐다. 현대사 책에는 저 노인의 전설적인 성질머리가 낱낱이 적혀 있으니까.
선봉은 강함은 둘째 치고 용맹해야 한다. 용맹하다는 것은 그 성격이 더럽다는 말을 좋게 표현한 것일 뿐
평범해 보이지만 그가 왜 굳이 무적선봉이라 불리는지 그리고 성질머리가 인간에게 향했을 때 어떤 재앙이 도래하는지 익히 알고 있는 그는 제발 이번 재앙이 무사히 지나가기를 신에게 바랄 뿐이었다.
“무, 무적선봉?!”
“허억!”
“최, 최진하! 무적성의 최강...”
털썩...털썩...
다행히 그의 뜻을 알아들은 공격대가 들고 있던 무기를 땅에 떨어뜨리고 그와 같이 고개를 땅에 박았다.
알아서 머리를 박아대는 우레공격대를 감정 없는 눈으로 바라보던 최진하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어떤 새끼가 반말했어.”
“허어억!”
최진하의 말을 들은 한 헌터가 갑자기 심장부위를 움켜쥐고 모로 쓰러졌다. 그러자 뒤에 얌전히 찌그러져 있던 힐러 셋이 서둘러 기어와 힐을 퍼붓고 심장마사지를 해댄다.
“요즘 놈들은 간덩이가 작군.”
“무상님의 전설 같은 업적에 눌린 거겠죠.”
권제도 한국사의 전설 오브 전설이지만 그 오른팔인 무상도 전설이었다.
“흠, 이런 간덩이 작은 놈들 데리고 향후 10티어 몬스터에 도전해야 한다니...”
그 말과 함께 최진하의 눈빛이 좌중을 훑었다. 그의 눈에 고개를 처박고 있는 놈들이 영 탐탁지 않아 보인다.
“간덩이야 경험이 키워주는 것 아닙니까.”
“이런 놈들은 살아봤자 장차 게이트 개척에 방해만 될 뿐이야. 치워 버리는 게 답일 수도 있지.”
싹이 글렀다면 일찌감치 뽑아버리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물론 그가 그것을 결정할 권한이 있냐 누군가 묻는다면 최진하는 웃는 낯으로 그 사람을 베어버리며 이렇게 말할 것이다.
[강한 놈이 법이다.]
최진하의 모토이기도 한 이 말은 권제의 것과 일맥상통했다. 아니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권제는 그걸 장려할 뿐이지만 최진하는 그것을 주저 없이 실천에 옮길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건 그렇고 어떻게 오셨습니까. 무적공격대와 함께 하시는 게 아니었습니까?”
“무적성의 사냥터에 발을 디딘 용기 넘치는 공격대가 있다기에 격려차 왔지.”
말은 그렇게 하지만 제황을 꾸준히 모니터링 하고 있던 게 분명하다.
그것은 아마 권제의 명령이었을 것이다.
“근데 와서 보니 상황이 재미있군. 우리 때는 말이야 스틸하는 놈들은 전부 다리 하나를 잘라 버렸어.”
“허어억...”
장내에 숨 막히는 살기가 쫘악 내려앉았다. 아무리 몬스터와 뒹굴며 칼밥을 먹고 사는 헌터들이고 힐러가 있으면 다시 붙일 수 있다지만 다리를 자른다는 건 두려운 것이다. 게다가 힐러들의 마나양을 생각할 때 전부 자른다면 절반은 다시 붙이지 못한다.
“흐흑...”
담이 작아 보이는 여자헌터 하나가 훌쩍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 모습을 보며 눈살을 찌푸린 무상 최진하가 한 마디를 덧붙인다.
“뭐 그렇지만 시대가 변했으니 나도 좀 유해져야겠지. 어쨌건 공격대의 잘못은 곧 공격대를 잘못 이끈 공대장의 책임이니 공대장의 양 다리를 자르는 것으로 용서해 주마.”
그 말과 함께 최진하가 허리춤에 끼워진 외날도를 꺼내들더니 아무렇게나 한 번 쫘악 그었다. 그러나 그 아무렇게 그은 일검은 장내의 모든 이에게 결코 잊을 수 없는 추억을 안겨 주었다.
쫘아아아악!
공격대를 반으로 나누는 거대한 고랑이 생겨나 버렸다. 제황을 제외한 모두가 진땀을 삐질삐질 흘릴 때 검을 허리춤에 끼워 넣은 최진하의 차가운 한마디가 울렸다.
“민주주의 국가니까 선택의 기회를 주마. 오른쪽은 공대장 다리만 자르자는 쪽, 왼쪽은 다함께 책임을 통감해 다리 하나씩만 내놓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겠다.”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공격대 전원이 오른쪽으로 우르르 기어갔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다. 행여 망설이면 꼬투리라도 잡힐까 신속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리고 남은 것은 공대장과 그의 곁을 지키고 있는 부공대장이었다. 공포와 배신감이 점철되어 부들부들 떨고 있던 공대장은 그나마 하나 남은 부공대장을 바라보며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그렇게 깔보고 무시했건만 끝에 남은 것은 이 부공대장 뿐이다.
후회가 밀려왔다.
자신에게 그렇게 모질게 대했지만 항상 바른말만 하는 부공대장이었다.
그러나 고개를 들어 부공대장의 눈을 본 순간 그는 온몸이 빳빳하게 굳는 걸 느꼈다.
“우뢰공격대를 위한 길입니다. 다리 주십시오.”
부공대장이 뒤춤에서 도끼를 꺼내들었다.
***
고통으로 인해 혼절한 우레 공격대 공대장과 공대원들은 사체수거트럭에 태워졌다. 저들은 이번 일에 대하여 철저한 진상 조사를 받은 후 입이 봉해지던 입이 달린 목이 봉해지던 둘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올 때처럼 수거트럭 위에 걸터앉은 최진하가 홀로 남은 제황에게 말했다.
표정이 그리 좋지 못하다.
“난 마음에 들지 않는다.”
무상은 제황의 계획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제황의 방법은 무적성의 방법이 아니었다. 무적성은 설계 따위는 하지 않는다. 과연 무적성의 무상이자 선봉다운 말이다.
“그리고 난 아직 널 인정하지는 않았다.”
“확인시켜 드리겠습니다. 제 사냥법이 어떤지...”
“그래. 이번 일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지켜보마.”
그 말과 함께 최진하는 눈을 감았다. 떠나가는 그를 바라보며 제황이 조용히 한마디를 뱉었다.
“지금처럼 싱겁게 끝나지는 않을 겁니다.”
***
그날 밤 늦게 제황은 조용히 전진기지로 돌아왔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움직이는 건설요원들에 의해 하루가 다르게 모습을 찾아가는 전진기지다.
전진기지 건설에는 일반적으로 쓰이는 조립식 패널이나 시멘트나 골제를 사용하는 것이 아닌 마치 대형 크레인처럼 생긴 중장비가 동원되었는데 긴 기계팔이 붙어 있는 이 기계는 그 끝에 달린 커다란 사각노즐에서는 회백색의 물질이 끊임없이 뿜어 나오고 있었다.
저것의 이름은 대형 3D 프린터 크레인이었다. 한마디로 말하면 건물을 말 그대로 프린트하는 장비였는데 타 클랜에서 사용하는 조립식 구조물이 아닌 3D 프린터 크레인으로 만든 건물은 말 그대로 건물을 찍어내기에 상당한 방어력을 자랑했다.
성벽도 두 대의 3D 프린터 크레인이 달라붙으니 뚝딱 만들어진다. 외국에서도 아직 상용화가 되지 않은 이 최첨단 장비는 무적성이 단순히 무력만을 우선시하는 단체가 아님을 보여준다.
‘클랜들도 하나 둘 들어서는군.’
전진기지의 성벽 주변으로는 발 빠른 대형클랜이 자리 잡고 조립식의 클랜전진기지를 설치하는 중이다. 물론 지금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다. 워낙 수복할 면적이 크기에 총 3개의 전진기지를 설치하고 그 사이사이로 각 클랜들의 베이스캠프가 설치된다.
그들을 둘러보던 제황은 이내 눈에 띄는 한 남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상당한 덩치에 붉은빛의 중갑을 머리까지 뒤집어 쓴 남자였는데 지금 한참 클랜 관계자로 보이는 이들과 이야기를 하는 중이었다.
클랜 관계자는 뭔가 한마디라도 더 붙이려고 노력하지만 붉은 중갑의 사내는 귀찮다는 듯 손을 저을 뿐이다. 그러더니 제황을 발견하고는 성큼성큼 걸어왔다.
“인기 좋은데?”
“젠장, 귀찮은 놈들, 언제 봤다고 친한 척들이야.”
붉은 중갑의 사내는 동철이었다. 제황이 외곽에서 비밀스럽게 솔로 활동하는 것과 다르게 동철은 무상 최진하의 밑에 있는 무적공격대와 함께 움직였다. 최진하는 그가 거느린 공격대들을 일제히 움직여 전선을 밀어붙이는 중이었는데 그들 사이에 끼어 손발을 맞추기 시작하는 동철은 사람들의 주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굳이 동철을 거기에 집어넣은 이유는 동철의 무적권의 숙련도 때문이었다. 무적권은 배우기는 쉽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숙련도를 올리기 힘들었다. 대몬스터에 특화된 스킬이기에 몬스터를 상대해야만 숙련도가 빠르게 오르는 것이다.
아마 무적공격대의 전위를 맡는 강력한 뉴페이스의 출현에 각 클랜들이 정보도 얻고 친분도 다질 겸 접근하는 것이리라.
“유명해져서 돈 많이 벌고 싶다더니?”
“난 돈만 필요해. 아, 그리고 고맙다.”
“뭐가?”
“나 없는 동안 고아원 챙겨준 거 말이야. 신세가 이래서 찾아뵙지는 못했지만 원장엄마 잘 계시는 거 확인하니 마음이 편하다.”
“뭘 그런 걸 고마워하냐. 그냥 돈만 보태드린 건데.”
동철이 실종되어 있는 동안 동철에 대해 알아보면서 제황은 동철이 나온 고아원의 사정이 안 좋다는 걸 알고 그때부터 꾸준히 후원을 해왔다. 자신의 이름이 아닌 동철의 이름으로 후원함으로써 원장수녀님이 동철이 걱정하지 않도록 배려도 했다.
“그냥 고맙다고... 닥치고 들어.”
이런 말을 하는 자신도 쑥스러운지 머리를 벅벅 긁는 동철이다.
단지 돈에 대한 고마움으로 끝내기에는 제황의 세심한 마음씀씀이가 더 울컥한 그였다.
세상 누가 있어 이처럼 그 자신을 생각해 줄까.
타인에게 무관심하고 이기적인 듯 보이지만 그 속은 깊고도 깊다.
위잉 위잉
그때 전진기지의 싸이렌이 울리기 시작하고 잠시 후 검은 밤하늘에 육중한 로터음이 울려오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 가려져 있지만 제황의 야간시는 공중에서 내려오는 것들을 헬기들을 보고 있다.
“대현...”
제황과 함께 하늘 위에 떠 있는 헬기를 바라보던 동철은 헬기 옆에는 큼지막하게 대현의 엠블럼이 새겨져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살기를 피워 올렸다.
총 세대의 대형 헬리콥터가 임시로 만들어진 헬기착륙장에 하나 둘 내려서고 안에서 무장한 대현클랜 공격대원들이 하나 둘 내리기 시작했다.
몬스터 난이도가 상당하기에 경직된 표정으로 다니는 다른 클랜들과는 다르게 저들의 얼굴에는 여유가 흐른다. 물론 저것은 허풍이나 단순한 자신감이 아니다. 대한민국 굴지의 클랜이라는 자부심과 함께 국내와 해외를 바쁘게 오가며 레이드를 벌이는 국제무대에서 노는 공격대만이 가질 수 있는 노련함일 것이다.
그 때 제황의 익숙한 얼굴 하나가 잡혔다. 휘날리는 긴 머리를 손으로 붙잡은 한수지가 헬기에서 내려선다. 그리고 뒤따라 내리는 한 명의 남자...
“쟤가 이성재인가.”
“그래.”
실물로 보기는 처음이었다. 물론 얼굴은 알고 있다. 굳이 알고 싶지 않아도 찾으려 하면 손쉽게 찾을 수 있는 사진이 인터넷에 널린 게 이성재의 프로필과 얼굴이니까.
궁기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분노조절 잘하네?
-같은 실수 두 번 하지는 않아.
-그래그래. 대견해 죽겠다. 혹시 필요하면 말해. 이 누나가 요즘 근질거리니까.
궁기의 말에 제황이 피식 웃었다. 하긴 근질거릴 만도 하다. 그 동안 그녀가 먹은 마나석만 돈으로 따지면 서울 금싸라기 땅에 아파트 단지를 올릴 금액이었으니까. 아니 9티어 마나석을 생각하면 서울시 정도로 봐도 무방하다.
-넌 내 최후의 보루
-오냐.
-삼이다.
-으웩 아재개그 극혐
궁기와 실없는 농담 따먹기를 하며 분노로 살짝 뜨거워진 머리를 달래던 제황은 곁에 서 있는 동철의 어깨를 툭 쳤다.
“어?”
“참아라. 참기 힘들면 숙소로 가고...”
제황의 말에 동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동철 또한 제황 못지않게 대현에 유감을 가지고 있다. 그 증거로 지금 동철의 몸에서는 검은 기운이 서서히 흘러나오고 있었다. 한밤중이라 잘 보이지는 않지만 마나에 민감한 제황은 알아챌 수 있었다.
회복된 후 처음 만난 대현클랜임과 동시에 그 주구인 이성재를 봤으니 다혈질인 동철이 참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 먼저 가야겠다. 여기 있으면 사고 치겠어.”
“잘 생각했다.”
“넌?”
“난...”
동철의 말에 잠시 입을 다물었던 제황이 이윽고 한쪽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인사라도 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