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
음모의대한민국-1
식당에 도착하니 사람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시계를 보니 점심시간이 다 끝난 시기다.
제황은 위에 무리가 가지 않을 간단한 죽을 주문했고 잠시 후 따끈한 닭죽 한 그릇을 받아 테이블에 앉은 뒤 조심스럽게 떠먹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까끌까끌하여 차마 목으로 넘기기도 힘들었는데 두 세 스푼 넘어가니 내장이 마구 요동치며 더 많은 것을 넣도록 종용했다.
탕!
그 때 누군가가 식당문을 거칠게 열어젖히며 안으로 들어섰다.
“이 새끼 어디 있어!”
고개를 돌리던 그는 제황을 발견하고는 식당이 떠나가라 외쳤다.
“야이! 새끼야!”
기차 화통 두 개를 삶아먹은 듯한 고함에 제황이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려 동철을 확인했다.
식당 문이 좁아터져 보일 정도로 거대한 체구의 동철은 한눈에 봐도 안쓰럽다고 느껴질 정도로 흙먼지와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의 눈에서 푸른 한기가 줄기줄기 뿜어지고 있었다.
“아, 오랜만이다.”
제황이 손을 들어 휘휘 저은 후 다시금 식사에 열중하자 동철은 기도 차지 않는 다는 듯 말했다.
“아? 오.랜.만? 이런 XX 호로 XXX 으아아! 죽여 버린다!”
그 말과 함께 동철이 제황을 향해 날아올랐다. 식당문에서 제황의 앉아있는 곳까지 한순간이다.
“주둥아리를 돌려주마!”
뒤로 쭉 뻗은 동철의 주먹에 검은 기운이 넘실거렸다. 마치 지금 제황이 먹고 있는 닭죽을 명년 제사상 마다 올려주려는 듯 그 주먹에는 친구에 대한 한 치의 배려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러나 제황은 이미 동철의 이런 움직임을 알고 있었다. 아니 저렇게 흥분한 주먹은 맞아주고 싶어도 맞아줄 수 없는 게 지금 제황의 경지였다.
타탁...
숙련도가 올라간 궁기안은 굳이 눈으로 보지 않아도 같은 공간 안에 있는 모든 움직임의 동선을 알아채는 수준까지 발전했다.
하물며 암습도 아니고 이렇게 무작정 휘두르는 주먹에 맞아 줄 제황도 아니었다.
그는 싱거울 정도로 가볍게 의자를 박차고 날아올랐다.
콰쾅!
한 손에 닭죽을 든 상태에서 공중을 유유히 날아오른 제황이 다른쪽 테이블에 내려앉았다.
“무슨 짓이냐. 밥 먹는데...”
그가 앉아 있던 테이블이 가루가 되었지만 제황은 담담히 물었다. 오른손에는 아직 숟가락이 들려 있다.
“무슨 짓? 네놈이 권제님에게 무슨 소리를 했기에! 내가 이렇게 피똥 싸면서 매일 죽도록 쳐 맞아야 하는데!”
“아, 수련?”
“수련? 그게 수련이냐! 단 한 동작 보여주고 마음에 들 때까지 두들겨 패는 게 수련이냐고!”
동철의 처절한 외침에 제황이 피식 웃었다.
“아직 살아있는 것 보니 잘 배웠나 보네.”
“뭐?”
제황의 말에 동철의 눈이 순간 휘까닥 넘어갔다.
“내가 죽여 버릴 생각으로 밀어붙여도 살 거라고 말씀드렸거든.”
“어억! 야 이 조팡매야!”
제황의 담담한 말에 동철은 두들겨 맞는 것보다 혈압이 올라 죽을 것 같은 표정으로 뒷목을 부여잡았다. 권제가 자신을 두들기면서 ‘정말 안 죽네.’하며 중얼거리던 이유를 깨달은 것이다.
“닥치고 앉아라. 나 지금 열흘 굶었다.”
“끄윽...끅끅!”
끊어지려는 이성을 애써 부여잡는 동철이다.
그런 동철에게 제황이 차갑게 말했다.
“그래서 싫었냐? 강해지는데?”
“킁...”
제황의 말에 할 말이 없어진 동철은 길게 한숨을 내쉰 뒤 제황의 옆으로 와서 털썩 주저앉았다. 덩치가 커져서인지 의자 두 개를 붙여야 앉을 수 있다. 씨끈덕 거리던 동철이 이내 호흡을 정리하더니 제황에게 물었다.
“수련이라는 건 끝난 거냐?”
“응.”
“밥은 왜 안 먹었냐?”
“먹을 틈이 없었다.”
“다녀왔으면 좀 얼굴이나 보고 들어가던가.”
“너 권제님이랑 수련중이라기에 방해하기 싫었다.”
“...”
따박따박 단답형으로 대답하며 기계적으로 수저를 움직이는 제황이다.
“끅...”
한 그릇을 뚝딱 해치운 제황이 트름을 하고는 빈그릇을 들고 배식구로 걸어갔다.
“한 그릇 더 주시겠어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귀여운 얼굴의 여성이 제황이 내민 그릇을 받아 들었다.
그녀는 식당이 난장판이 된 건 별로 신경도 쓰지 않는 듯 보인다.
그녀가 이렇게 담담하게 받을 수 있는 이유는 이곳이 무적성이기 때문이다.
그녀 또한 무적성의 일원으로써 이런 광경에 꽤 익숙했다.
잠시 후 따끈한 닭죽이 한 그릇 나오자 제황이 고개를 꾸벅 하고는 자리로 돌아왔다.
그 꼴을 노려보던 동철이 제황에게 말했다.
"너 좀 강해진 것 같다?"
아마 그의 공격을 피하던 제황의 여유 있는 동작을 보고 한 말이리라.
그 물음에 제황이 다시금 수저를 들며 말했다.
“좀 배웠냐?”
“훗, 놀라지 마라. 권제님의 절기인 무적권이라는 걸 배웠지.”
동철의 의기양양한 대답에 제황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권제의 무적권은 동철과 잘 어울렸다. 그래서 권제가 무적권을 가르칠 거라고 대충 예상도 했다. 그게 가장 쉽고 몸으로 익히기 좋으니까.
먹으면서 '그 무식한 거' 하고 웅얼거렸지만 동철은 못들은 것 같다.
“스킬로도 새긴 거야?”
“어, 그제...”
“축하한다.”
“끙, 고맙다.”
동철은 지금 눈앞에서 무덤덤하게 숟가락을 놀리는 제황에게 더 이상 화낼 수 없었다. 사실 화낼 것도 없다. 무려 권제의 개인지도를 받게 해준 친구다.
만약 누군가가 개인수업 한 시간에 수억을 준다고 하면 권제가 눈 하나 깜짝할까? 아니 그 사람은 오히려 권제를 모욕한 죄로 목숨을 걱정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런 천금 같은 기회를 제황이 만들어 준 것이다. 동철에게 있어서는 돈으로도 환산할 수 없는 기연이나 마찬가지였다.
“뭘...”
제황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닭죽을 입에 집어넣었다. 뭔가 들어가니 뱃속이 드디어 일을 시작하기 시작했다. 각성자의 신체능력은 일반인을 초월한다. 일반인이라면 일주일을 굶었을 때 당장 병원에 가서 링겔을 꽂아야 할 수도 있지만 각성자는 회복속도가 빨라 금방 원상태를 회복할 수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뱃속에 집어넣은 닭죽에 힘을 발휘하기 시작하는지 내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탁
제황이 숟가락을 거칠게 내려놨다.
“왜...왜 그래.”
놀란 동철이 물었다.
“화장실 간다.”
벌떡 일어난 제황이 식당 밖으로 바람과 같이 사라졌다.
***
“후... 대단하구나.”
“자그마한 성취가 있었을 뿐입니다.”
“지나친 겸양은 좋은 게 아니다.”
권제는 제황이 집무실로 들어서자 단번에 제황의 경지를 알아봤다. 한순간이지만 놀람과 경악이 있었지만 이내 그것을 다스린 권제가 제황을 테이블로 손짓했다.
"괄목상대니 어쩌니 하는 말이 있지만 네 발전속도와는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구나. 열흘 전만 해도 강기를 얻은 것만 확인했는데 이제 그것을 꽤 능숙하게 운용하다니..."
권제의 말은 단순한 칭찬이 아니었다. 사실 그는 진짜 궁금했다. 체면이 있어서 그렇지 비슷한 나이였다면 '이 사기꾼 같은놈!' 이라고 했을 것이다.
"가르쳐 드릴까요?"
제황의 대답에 권제가 피식 웃었다. 그런 류의 것은 가르침으로 전수가 가능한 게 아니었다. 제황의 표정을 보니 그것을 알면서 던진 말이다. 한 마디로 지금 둘이 나누는 농담은 경지를 아는 이만이 나눌 수 있는 류의 것이었다.
덜컥
그 때 집무실의 문이 열리며 나길환이 들어왔다. 표정이 조금 경직되이 있는 그가 권제에게 말했다.
“어르신”
“음?”
“급히 회의를 소집해야 할 것 같습니다.”
나길환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는 걸 느꼈는지 권제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무슨 일이지?”
“이번 사태의 배후를 잡았습니다.”
나길환의 대답에 권제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정보의 출처는? 정보의 보안은 확실하겠지.”
“내실에서 모두 대기하고 계십니다.”
나길환의 대답에 권제가 제황을 돌아보며 말했다.
“따라 오거라.”
“예.”
잠시 후 나길환을 따라 권제와 제황이 내실로 들어섰다. 내실 안에는 이전에 봤던 문상 조용기와 무상 최진하가 있었는데 그들 외에도 네 명의 남녀가 더 동석해 있었다.
“시작하지.”
“예.”
들어선 권제가 자리에 앉으며 나직이 말하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황님이 가져오신 자료들을 모두 검토한 결과 저희들은 이번 일이 상당히 오래 전부터 진행되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그 정도의 기간 동안 저희들의 눈과 귀에 걸리지 않았다는 것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거두절미... 요점만...”
“옛. 꼬리를 감춰줄 인물에 대해 탐색하던 중 꼬리가 의외의 곳에서 잡혔습니다. 최근 주식시장에 주목받고 있는 한 투자자문회사를 주목하게 되었는데 대승이라는 이 회사는 설립된 지 약 5년이 되었는데 최근 들어 폭발적인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그 놈들이 대현 놈들과 무슨 상관이 있지?”
“대승은 약 한달 전부터 비밀리에 각 증권회사로부터 풋옵션 상품들을 야금야금 사 모았습니다. 현재 저희 밀령에서 조사한 결과 저스틴포인트 사태가 장기화 될 시 최소 한 달 안에 저들은 풋옵션을 행사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게 됩니다.”
“우리나라 주식시장의 피해 예상 금액은?”
“그들이 취할 수 있는 금액은 약 34조입니다.”
“흠...”
나길환의 말에 장내의 인물들의 입에서 침음이 흘러나왔다.
“그래서 나집사는 지금 그게 대현 그룹과 연관이 있다 그 말인가?”
“이 투자 자문회사의 자금이 유입된 곳이 RP라는 무역상사이며 이 RP라는 회사의 부사장이...”
잠시 뜸을 들인 나길환이 권제와 눈을 맞추며 말했다.
“현 대통령 이형우의 아들 이정복입니다. 그리고 이형우 정도의 힘이라면 저희의 눈을 속일 정도의 힘이 됩니다.”
나길환의 말에 내실 안 모든 이들의 눈이 커졌다. 동시에 모두의 어깨 위로 싸늘한 냉기가 내려앉았고 모두 그 냉기의 주인을 향해 시선을 맞췄다.
푸스스...
권제의 손에 잡혀 있던 의자 팔걸이가 가루가 되어 바닥에 떨어졌다.
“한 마디로 말해서 현 대통령의 아들놈이 ... 그런 짓에 연루 되었다는 말이지?”
“아직 추정상이지만 묘하게 모든 상황이 일치합니다. 또한 그 아들이 벌인 짓이니 이형우도 무관하지는 않다고 봅니다. 어쩌면 주구일 수도 있습니다.”
“허, 이형우... 이 쥐새끼 같은 놈!”
권제의 입에서 분기에 찬 음성이 흘러나왔다.
본디 이형우는 대통령이 되기에 흠이 많은 이였다. 아니 많다는 말로는 부족한 전형적인 한국의 졸부 근성에 물든 이였다. 사사로이 법을 어긴 것도 수십 개... 한때 별 30개 짜리 대통령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로 평판이 안 좋았다.
그런 이가 당선된 것은 당시 야당이 고만고만한 인물들이 계파를 두고 싸우느라 민생을 외면한 것도 있지만 대한민국 대기업의 CEO 출신으로 경제를 살리겠다는 슬로건이 먹힌 것도 있었다.
교묘히 지역감정을 자극하고 과거 북한이 멸망하며 피난 내려온 옛 북한주민들 중 아직도 사회 밑바닥을 전전하는 이들에게 꿈과 같은 복지를 약속하며 그들의 몰표를 쓸어 담았다. 물론 그 공약들은 대부분 지켜지지 않았지만 말이다.
“대통령이 연루되어 있다면 대현을 치면 역으로 당할 수도 있겠군.”
“그렇습니다. 어찌되었건 현 대한민국의 대통령입니다. 대현과 한배를 탄 이상 저희가 대현을 공격하는 걸 필사적으로 저지할 겁니다.”
“허허, 그렇군. 아주 작당을 했어. 그럼 그 일본 놈들은 어떻게 엮인 거지?”
“대승에 자금 중 상당금액이 일본 천황클랜의 것으로 확인 되었습니다. 그리고 최근 저스틴포인트에서 내부혼란을 획책한 것으로 의심되는 군장성들이 비밀리에 천황클랜으로 이동한 것을 확인했습니다.
아마 대현그룹의 비밀연구소가 공격당한 여파로 국내보다는 해외가 안전하다 판단한 모양인데 그런식으로 도피처를 삼을 정도로 저들은 친밀한 관계 같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나길환이 입을 꾹 다물었다.
“내가 한 방 먹었군.”
권제가 실소를 터뜨렸다. 저스틴포인트에서 벌어지는 심상치 않은 일들에 좀 더 관심을 기울였다면 초장에 이런 일을 방지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적의 주체를 삼천교의 빌런들에 대해서만 국한하여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국내외로 적들이 도처에 깔려 있었다.
그것도 무려 대현그룹과 천황클랜,삼천교, 마지막으로 대한민국 대통령이다.
“문상!”
“예. 권제시여.”
“방법이 있을까?”
권제의 말에 조용기가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일단 시간이 너무 촉박합니다. 가장 빠른 방법은 떨어지는 주가를 무적성에서 받치는 것이지만 저스틴포인트 사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저희가 무한정 받치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받칠 수 있는 기간은?”
“제 계산상으로 볼 때 약 두 달간 방어가 가능합니다. 그렇지만 말 그대로 대한민국 전체를 떠받치는 형국이 되기 때문에 잘못될 경우 저희 쪽의 피해를 환산할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