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사거리 100만-91화 (91/301)

# 91

페이즈투-2

제황은 남자의  관자놀이를 발끝으로 찍어 버렸다.

"끄어...읍"

급소를 직접 공격했지만 역시 각성자답게 쉽게 죽지는 않는다.

퍽퍽퍽!

제황은 사내의 급소를 사정없이 두들기기 시작했다.

"크헉...컥.."

"뭐 이리 단단해? 시간도 없어 죽겠는데"

머리를 집중적으로 두들겼는데 원하던 반응이 일어나지 않았다.

고통에 비명을 지르는 놈을 내려다보며 제황이 혀를 찼다.

소음 문제는 그다지 걱정할 필요 없게 느껴지지만

시간이 지체되는 게 더 큰 문제다.

"자체회복능력인가."

애써 상처를 만들었는데 천천히 회복되는 게 눈에 보인다.

물론 두들겨 패서 죽일 생각은 애초에 없다. 그러나 판단능력이 흐려지게 만들어야 한다.

제황은 남자의 품을 뒤져 헌터라이센스를 찾았다.

"5성 육체계열이군. 성가시게 됐네."

일반적인 타격으로는 상처를 주기 힘들다. 그렇다고 그냥 스킬을 쓰자니 죽어버릴 것 같다. 제황이 고민에 빠져 있을 때 궁기가 물어왔다.

-뭐하려고?

-지배를 해서 미끼로 쓰려는데 5성은 잘 안 걸리잖아.

제황이 우려하는 것은 저 3B라는 문 안쪽에 뭐가 있을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바깥을 지키는 게 5성이니 안쪽에도 최소 5성이 있을 수 있다. 진다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 이 복도에 설치된 장치들을 생각할 때 경보가 울리는 걸 막을 자신은 없었다.

밀령대주의 말로는 비밀이 탄로 날 것을 대비해 소거장치가 있을 것이라 했으니 최악의 경우 안에 갇혀있는 이들이 위험할 수 있었다.

제황의 대답에 궁기가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그럼 뭘 그렇게 힘들게 해. 지배스킬을 무효화시키는 마나의 근원을 박살내 버리면 되지.

-근원이라니?

-이능의 근본은 마나고 마나의 집은 단전이야. 그걸 부셔버리라고...

-난 어떻게 부수는지 몰라.

제황은 어깨를 으쓱했다. 무슨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단전을 무작정 두들긴다고 마나엔진이 망가지는 건 아니었다. 그냥 내장 파열이 일어나 죽을 뿐이지. 마나엔진은 물질로 이루어진 장기 따위가 아니었다. 모든 마나의 기운이 모이는 중심지일 뿐이다. 자신의 능력부족을 이야기하는 제황에게 궁기가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아이고...이 화상을... 강기를 쓸 줄 아는 놈이 이런 기본적인 수법도 모른다니...

-강기?

-그래. 너 화살에 강기를 만들어냈지? 무기에 씌우는 수법보다 고등한 방법을 쓰는 주제에 손에 강기 하나 못만들어?

-스킬이 각인시켜 주는 거잖아. 응용은 다른 문제야.

-세이브가 인간의 몸에 어떻게 스킬을 새겨 넣는 것 같아?

-그건 아직 인류가 밝혀내지 못한 부분이야.

사실 세이브가 사용자에게 스킬을 각인하는 것 자체가 가장 엄청난 이능이다. 본래 사람이 어떤 능력을 얻는 데는 여러 가지 단계를 필요로 한다. 그런데 스킬의 각인은 이 단계 중 학습이라는 단계를 없애버리는 것이다. 이게 기적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 그런 고정관념 따위는 버려! 배움이든 각인이든 네 것이잖아! 네 것도 제대로 못 써? 강기가 대단한 건 줄 알아? 집중과 회전과 공명의 묘를 쓸 줄 알면 개나 소나 다 쓸 수 있는 거야. 해 봐!"

-공명?

궁기의 말에 머릿속을 스치는 영감이 있다. 뭔가 뿌옇던 강기에 대한 개념에 한가닥이 손에 잡힐 듯싶다.  제황은 강기의화살을 썼을 때의 용혈신공의 유동을 떠올리며 손에 마나를 끌어 모았다. 아직 서툴지만 오히려 서툴기에 집중과 회전 공명을 떠올리며 좀 더 그 움직임을 세세하게 느끼려 노력했다.

우웅

이윽고 손바닥 한가운데에 붉은 기운이 어리기 시작한다.

"이건가?"

익숙하지 않고 처음 해보는 것이기에 마나를 우겨넣는 초보적인 수준이지만 분명 손에 붉은 강기가 맺혔다. 그리고 동시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새로운 스킬을 창조하셨습니다.]

스페셜 스킬

제황식 강기 방출 –0랭크 0.01프로

-적의 강기나 마나를 전문적으로 파훼한다.

"아..."

어쩌다보니 새로운 스킬을 얻었다.

제황은 손바닥을 뒤집으며 붉은 기운을 바라봤다. 피부가 따끔거리며 찌르르 울리는 느낌인데 마치 깊은 물속에 손을 담근 듯 둔하게도 느껴졌다.

-초보적이기는 하지만 제대로 구현했네.

-마나 소모가 커.

잠시지만 소모되는 마나가 적잖다. 효율로 따지면 극악이라고 말해야 했다.

-초보적이라고 했잖아. 그렇지만 쓸 곳은 많을 거야. 이제 그걸로 근원을 쳐봐.

궁기의 말에 제황은 남자의 단전이 있을 하복부를 매섭게 후려 갈겼다.

부우욱...펑

가죽북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사내의 가랑이 사이로 피가 줄줄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핏물 사이로 오줌이 질질 흘러나오는 걸 보면 고통이 엄청난 것 같다. 조금 기다리니 시간이 흘러도 회복능력은 발현되지 않았다. 강기가 사내의 마나엔진을 박살낸 것이다.

"됐군."

와르르

마나공급이 끊이자 남자의 전용 아공간이 해제되며 아공간 속의 물건들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어차피 일반 헌터들이 사용하는 아공간은 그리 크지 않다. 그래서 쏟아져 나오는 건 거의 귀중품이다. 투명한 수정 같은 4티어 마나석 몇 개와 손바닥 만한 투척용 비수 몇 개가 쏟아졌다.

-마나석!

-아아, 드세요.

-수업료다! 에헴!

아공간에 들어있던 마나석은 온전히 궁기의 차지가 되었다. 궁기의 콧노래를 들으며 제황은 무한고에서 지배스킬이 있는 티아라를 꺼내 머리에 썼다. 조만간 이 티아라를 좀 개조해야겠다고 마음먹는 제황이다.

[지배]

제황이 지배를 사용하자 고통에 물들어 있던 남자의 눈에 촛점이 사라졌다.

그 이후로는 제황이 원하는 것을 술술 불기 시작했다. 이능이 크게 상해 거의 일반인의 수준으로 떨어진데다가 심한 부상으로 정신이 오락가락하니 지배가 더 잘 먹힌다.

이곳의 정체에 대해 궁금해 하던 걸 전부 알아낸 제황이 남자에게 물었다.

"경보 장치는 어디 있지?"

"책상에 하나, 제 상의에 하나 있습니다."

"교대는 언제냐?"

"1시간 남았습니다."

"화장실에 가고 싶을 때는?"

"'우리' 에 있는 동료에게 요청합니다. 끄으으."

"안에 동료는 얼마나 있지?"

"한 명 입니다."

"능력은?"

"4성 헌터... 회복스킬을 지니고 있고 비상시 저와 페어를 이뤄 지원이 도착할 때까지 '우리'에 침입하는 적을 상대합니다."

남자는 제황이 향하는 목적지를 '우리'라고 표현했다. 동물을 가두는 우리... 잘린 팔다리가 고통스러운지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제황은 점점 남자의 상태가 안 좋아진다는 걸 알고 빠른재생으로 잘린 팔다리로 회복시킨 후 사내를 의자에 앉혔다. 대충 주변 정리를 끝낸 제황이 냉냉한 목소리로 말했다.

"화장실 갈 시간이야. 동료를 불러."

"예."

제황의 말에 남자는 책상 위에 버튼을 누르고는 말했다.

-나 화장실 좀 가야겠다. 잠시 자리 좀 지켜줘.

-아. 한참 재미있는 것 보고 있는데... 알았어.

말이 끝나자 잠시 후 꺾어지는 복도 끝 육중한 철문이 열리며 한 여자가 걸어 나왔다. 나이를 가늠하기 힘든 요란한 화장을 하고 섹시한 라텍스 재질의 검은바지와 자켓을 걸쳤다. 귀에 이어폰을 끼고 있었는데 손에 든 테블릿에 눈을 집중한 채 이쪽으로 걸어왔다.

"빨리 다녀와야...응?"

테블릿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던 그녀는 동료의 상태가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닫고는 안색을 굳혔다. 고요히 앉아 있던 사내가 갑자기 그 거대한 덩치로 여자를 덮친다. 여자는 덮쳐오는 남자의 한 팔과 한쪽 다리가 없는 것을 발견하고는 대경실색하며 뒤로 물러났지만 그로인해 그나마 저항할 수 있는 골든타임을 그녀는 놓였다. 왜냐하면 그녀의 뒤는 이미 제황이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콰콱!

여자의 뒤통수를 움켜쥔 제황은 그녀가 반항을 생각할 새도 없이 그대로 여자의 머리를 아크릴 테이블 모서리에 내리 찍어버렸다.

꽈직! 으지직...으직

테이블 모서리가 박살날 정도로 강력한 타격이다.

"끄르륵..."

테이블 모서리에 머리를 찍힌 여성은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옆으로 쓰러졌다. 모서리 모양으로 움푹 들어간 이마에서 붉은 피가 왈칵 스며 나왔다.

-지배라는 스킬 생각보다 쓸 만하네.

동철의 경우를 생각하며 의념으로 행동을 지시하자  사내가 그대로 따랐다. 덕분에 수월하게 여자를 제압했다.

-어머 여자를 이렇게 잔인하게.

-어머니가 남녀는 평등해야 한다고 했어.

-이런데 쓰라고 말한 남녀평등이 아닐... 어머! 저 테블릿 좀 줘봐!

-응? 이거?

궁기의 말에 제황은 여자가 떨어뜨린 태블릿을 집어 들다가 멈칫 했다.

-얼른 넣어 줘.

테블릿 화면에는 요즘 한창 인기몰이 중인 드라마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마 이 여자헌터는 자리를 지키는 무료함을 이것으로 달래고 있었던 듯싶은데 하필 이것을 드라마중독 말기인 궁기의 눈이 발견해 버린 것이다.

-가져. 제발 귀찮게만 하지마.

슬슬 자신이 드라마에 익숙해진다는 것에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하는 제황이었다.

***

부우욱...퍼엉

"꺄악!"

고통스러운지 여자가 비명과 함께 몸을 바르르 떨며 기절해 버렸다.

제황은 이곳에 들어오기 전 얻어온 케이블타이로 여자의 손발을 구속한 뒤 입에 재갈을 물리고 이제는 죽어버린 남자의 시체 옆에 던져 놨다.

-넌 너무 남녀를 평등하게 대하는 것 같아.

-칭찬이지?

-칭찬이겠냐.

위이잉

3B라고 큼지막하게 써진 문이 여자의 보안카드에 철컹하는 소리와 함께 열렸다.

호랑이사냥을 활성화한 채 안으로 들어선 제황은 이내 스킬을 해제했다. 지배를 통해 알아낸 바로는 이 안쪽에 감시장치들은 모두 꺼져 있었다.

본래는 상시로 켜야 하지만 이곳을 지키는 헌터들이 자신들이 감시되는 게 싫어 들어올 때마다 꺼버린다고 한다. 위에서 높은 사람이 내려올 때만 켠다고 하는데 덕분에 성가신 일을 피하게 됐다.

그러나 시간은 부족하다. 이곳에 침투하면서 카메라는 철저히 피했지만 몇몇을 저승행 편도열차티켓 끊어 보내버렸기 때문에 교대자들이 오면 들키는 건 한순간이다.

안으로 들어선 제황은 대번에 눈살을 찌푸렸다. 여자가 밖에서 싸우는 소리를 못들은 이유가 있었다.

텅! 텅!

"살려...주세요."

"나가고 싶어. 흐흑"

"다스케떼..."

3B 안쪽은 우리라는 말이 딱 걸맞았다. 양쪽으로 다닥다닥 붙어있는 철문은 마치 교도소의 독방을 보는 것 같다. 끊임 없이 흘러나오는 울음과 신음소리, 살려달라는 애원의 절규, 시큼하고 퀴퀴한 냄새가 콧속을 자극했다.

인상을 굳힌 채 첫번째 철문으로 걸어간 제황이 칸막이를 열자 내부의 전경이 보인다.

"제..제발 살려줘."

독방 안쪽은 빛 한점 없이 어두웠지만 궁기안을 가진 제황에게는 장애가 되지 않았다. 그곳에는 한 인영이 죽은 듯이 누워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누워서 있는 게 아닌 결박당한 채였다. 특수고무재질로 보이는 구속구에 온몸을 완전히 결박당한 사람이 침상에 시체처럼 누워 있었다.

제황은 복도 한가운데 있는 책상 위에 놓인 열쇠를 가져다가 철문을 열었다.

“누..누구...으...으으...시...싫어! 나가기 싫어!”

자신을 끌고 나가려는 이로 오해했는지 남자는 애벌레처럼 꿈틀거리며 마구 발버둥을 치기 시작했다. 아마 이곳을 나간 이들이 어떻게 되는지 대략 아는 것 같다.

“구하러 왔습니다.”

“시...싫... 네?”

제황의 말에 남자의 눈이 커졌다. 믿지 못하겠다는 듯 눈을 껌뻑거리고 있을 때 제황이 나이프를 꺼내 남자의 구속복을 전부 뜯어냈다.

“어...어어!”

남자는 자신의 몸이 자유로워 졌다는 게 믿겨지지 않는 듯 보인다. 자신의 손발을 확인하며 때로는 뺨을 쳐보기도 한다. 그러다가 제황을 발견하고는 넙죽 엎드렸다.

“가...감사합니다.  누구신지 모르지만...흐흑”

“저는 무적성에서 나왔습니다. 그건 그렇고, 움직이실 수 있습니까? 부상당한 곳이 있나요?”

“아. 저는 조금만 쉬면 회복할 수 있습니다.”

제황의 말에 남자의 손이 하얗게 변하더니 자신의 몸에 가져다댄다. 그러자 구속복으로 인해 몸에 나 있던 자잘한 상처들이 하나하나 아물어 가는 게 보였다.

“다행이군요. 시간이 없습니다. 이곳에 있는 모든 이들을 구할 겁니다.”

“알겠습니다.”

잠시 후 모든 독방의 문을 열고 안에 결박되어 있는 이들을 구한 제황은 그들에게 서둘러 모일 것을 지시했다. 자유로와 졌다는 것에 기뻐하던 이들이 제황의 부름에 모두 모였다.

“감격은 나중에 하시고 지금은 이곳에서 탈출하는 게 중요합니다.”

기뻐하던 그들의 얼굴에 긴장이 어렸다. 갇혀있던 이들의 숫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총 11명... 남자 7명에 여자 4명이다. 특이한 건 수인족으로 보이는 소녀 하나가 끼어 있다는 것이다. 말이 통하지는 않지만 귀와 꼬리를 잔뜩 움츠린 채 주위를 불안하게 두리번거리는 게 상당히 겁먹은 듯 보였다.

남자들 중 하나가 제황에게 물었다.

“혼자 오신 건가요?”

“일단 침투한 건 저 혼자입니다.”

“하아...”

제황의 대답에 사람들의 얼굴에 불안감이 가득하다. 자신들을 모두 데리고 이곳을 탈출하는 건 제황 혼자서는 무리인 듯 보이리라. 사실 무리가 맞기도 하다. 제황이야 호랑이사냥으로 모든 보안장치를 가볍게 탈출했지만 이들을 데리고는 역부족이다.

게다가 경보장치가 울리면 곧바로 헌터들이 출동한다. 남자에게서 캐낸 정보로는 주의해야 할 게 헌터만 있는 게 아니었다. 복도 곳곳에 격벽이 내려오는 건 당연한 것이고 강력한 수면가스가 뿜어진다고 한다.

다행이랄 것은 그 모든 시스템이 이 폐쇄층 내에서만 이루어진다는 것, 위쪽과는 철저히 고립되어 있어 그 모든 조치는 이곳에서만 가능했다.

제황은 책상에서 입수한 이곳의 전체 구조가 인쇄된 종이를 보며 고민했다. 좀 더 진행하면 연구시설들이 있는 방들이 나타난다. 문제는 탈출로다. 이 종이에 나온 것은 오롯이 엘리베이터 하나 뿐...

그 때 사람들 중 하나가 조용히 손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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