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사거리 100만-88화 (88/301)

# 88

페이즈원 -2

그때 나길환이 권제에게 말했다.

“어르신 제가 제황님께 묻고 싶은 게 있는데 괜찮겠습니까?”

“허허, 마음대로 하게.”

권제가 허락하자 나길환이 제황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제황님. 이 노집사가 궁금한 게 있습니다.”

“편히 물으셔도 됩니다.”

제황의 대답에 그가 고개를 슬쩍 꾸벅이고는 입을 열었다.

“보고는 받았습니다. 제가 궁금한 것은 오늘 행하신 일이 제황님의 그 동안 고수하던 자세를 바꾸셨다는 것으로 해석해도 되겠습니까?”

그동안 제황은 권제와 일정한 거리를 뒀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권제가 가진 권력과 거리를 뒀었다.

“네.”

제황은 그 물음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그러자 방안에 있던 모두의 눈이 조금 커졌다. 지금 제황의 저 말을 그들이 생각하는 것이 맞다면 이 [무적성]의 커다란 변화를 예고하는 것과 같다.

“제황아. 그럼 제대로 결정을 내린 것이냐.”

권제의 미소가 진해졌다.

“예.”

제황의 대답에 권제가 무릎을 탁 치며 말했다.

“후후, 아주 재미있어 지는군. 좋아. 좋아. 진하야. 이제 너 좀 긴장해야겠구나.”

권제가 왼쪽에 앉은 외팔이 노인에게 농을 던지듯 툭 말했다. 그러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을 받았다.

“예. 형님. 아무래도 오늘부터 밑에 아이들을 좀 더 굴려야겠습니다.”

아마 무상이 지목하는 이들이 지금 그의 말을 들었다면 자다가도 경기를 일으켰을 것이다. 무상 최진하의 훈련은 사람을 딱 죽기 직전까지 예술적으로 몰아붙이는 것으로 유명했으니까. 물론 그 훈련의 강도는  힐러를 참가시킨 경우를 말한다.

“그래. 이번 권패지쟁은 좀 재미있어 지겠어.”

권패지쟁, 1년에 한 번씩 열리는 무적성의 축제다. 물론 축제라 해서 먹고 놀고 마시는 건 아니다. 그것은 무한성의 모두가 참가하는 무한 쟁투였다. 비록 상대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제한되었지만 우승자에게 수여되는 명예와 우승상품들이 만만치 않은 것들이기에 치열한 경쟁 속에 치러지는 무술대회였다. 5성의 힐러들이 동원되기에 죽기 직전이라도 살려낼 수 있다. 그런 고로 팔다리가 예사로 날아다닌다.

[강해져라. 그리고 나를 이겨라. 그가 바로 무한성의 주인이다.]

제 1회 권패지쟁을 개최하며 권제의 개회식 축사는 이 한마디였다.

이 권패지쟁은 단순한 쟁투만의 의미가 아니었다. 무적성은 철저히 힘의 고하에 따라 움직이기에 강한 이에게는 그에 걸 맞는 지위가 주어진다. 특히 권제가 나이를 먹음에 따라 차후 이 무적성의 주인을 가르는 하나의 기준점이 될 수도 있다고 세인들은 조심스럽게 추측하고는 했다.

조금 전 나길환이 제황에게 물었던 것은 그것이었다.

본격적으로 무적성의 힘을 추구하기 위해 자신의 힘을 드러내겠냐는 뜻... 그리고 제황은 그에 긍정했다.

그건 무적성에서의 영향력을 높이겠다는 뜻이고 그것을 조금만 더 과대해석하면 무적성의 주인에 도전하겠다는 뜻과도 같게 들렸다.

“어이, 용기야. 넌 어떠냐?”

오른편에 앉은 문상 조용기는 권제의 물음에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저야 돈놀이 하는 놈인데 딱히 방법이 있겠습니까. 그래도 제황군이 형님의 패가 될 것 같으니 좀 더 준비해야겠군요.”

“후후...좋아. 이거 그다지 좋지 않은 일로 모였는데 좋은 소식도 생겼군.”

제황을 무적성의 품에 오롯이 넣고 싶어 하던 권제로서는 환영할 입장이다. 제황의 의도 같은 것은 상관없다. 만약 제황이 후일 자신이 무적성에서 이룩한 권력을 가지고 사리사욕을 채운다 해도 상관없다. 인간의 발전에 위배되는 짓만 아니라면 그것은 강자가 누려야 하는 당연한 권리니까.

“그럼 이제 본격적인 회의를 해보지. 집사”

“예. 어르신”

“어떻게 된 거지?”

권제의 분위기가 180도 싹 달라졌다. 훈훈하다가 순식간에 싸늘한 삭풍이 불기 시작했다.

“일단 이번 일에 대해서는 제황님의 지인을 통한 증언 밖에 없기 때문에 섣부른 판단을 내리기 힘든 상황입니다. 정보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일단 지금은 점검할 필요가 없다?”

“아닙니다. 이미 대현그룹에는 지급 밀령대 2개 단을 투입했습니다. 또한 무적성 내에 대현그룹과 조금의 연관이라도 있는 인물들에 대해서는 4개 단을 투입했습니다. 아시다시피 이번 일에 대해서는 문상님께도 연관될 수 있기에 천급밀령대 전원이 투입되어 현재까지 드러난 모든 자료들을 샅샅이 뒤지는 중입니다.”

나길환이 문상 조용기를 직접 지목하며 말하자 조용기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금력 쪽을 관장하다보니 대현그룹과 어쩔 수 없이 얽히게 되는 게 그의 입장이다.

“아니길 바라지만 만약 그 일이 사실이고 만약 저와 연관된 이가 관련되어 있다면 제가 가진 모든 것을 내려놓겠습니다.”

권제가 가진 금력은 전 세계에 거미줄같이 펼쳐져 있고 그 자금의 크기는 한국가의 예산과 맞먹는다는 말이 있다. 그리고 조용기는 그것을 모두 관장한다. 엄청난 권력의 집중이다. 그리고 그것을 모두 포기하겠다는 것이다.

“아니 그럴 필요는 없지. 기계가 조금 삐걱거린다고 기계를 통째로 바꾸거나 기계 관리자를 교체한다는 게 말이 되나. 단지 문제를 일으킨 부품 몇 개를 교체해주면 될 뿐이야.”

“감사합니다. 권제시여.”

“그러나 문상, 안심하지 말거라. 그 부품을 고르는 건 나집사가 직접 할 거다. 그리고 난 나집사를 믿을 생각이니 이 결정에 대해서는 무조건 따라라. 설혹 네 친혈육을 베더라도 말이다.”

“명심하겠습니다. 권제시여.”

조용기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권제의 저 말은 이 일에 그의 혈족이 연관되어 있다고 해도 사정의 칼을 멈추지 않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대현그룹과 삼천교의 연결점은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허나 의심할 수 있는 정황 몇 가지가 나왔습니다.”

가운데 있는 테이블에서 홀로그램이 나타났다.

홀로그램에는 CCTV 영상 하나가 재생되었는데 그 영상 안에서 수십 명의 헌터들에 호위를 받아 움직이는 군장성들이 비췄다.

“저스틴포인트  한미연합사령부 병참사령부의 최영환 중령입니다. 저스틴포인트 함락 직후 대현클랜 공격대의 호위를 받아 게이트를 빠져나왔습니다.”

“흠, 그가 탈출한 게 이상한가?”

“아닙니다. 문제는 게이트에서 벗어난 후 행적을 찾을 수 없습니다. 또한 그와 가족들도 사건 이틀 전 종적을 감췄습니다.”

“재미있군.”

“네. 또한 현재 저스틴 포인트의 미스릴광산을 운용하는 대현광업이 이번 사태로 큰 피해를 본 것으로 외부에 알려져 있지만 신속한 대응과 자금지원으로 그다지 피해가 없는 것으로 파악되었습니다. 오히려 이번 사태를 통해 더욱 지배구조가 더욱 견고하게 될 것이라는 의견이 큽니다.”

“철저히 가렸지만 구린 곳이 많다는 거군.”

“예. 결정적으로 제황님의 친구분이 말한 것에 신빙성을 높이 산 건 이것 때문입니다.”

찰칵...찰칵

하나의 리스트가 주르륵 하고 화면에 떴다.

“제황님의 친구분에 대한 정보를 조사하던 중 나왔던 겁니다. 최근 3년간 국가에서 대현 클랜으로 지원되었던 군각성자와 헌터유망주들의 리스트입니다. 총원598명 중 443명이 임무중 사망으로 파악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친구분의 자료가 끊겼습니다. 실종자들 또한 행적이 철저히 가려져 있습니다."

나길환의 말에 제황의 주먹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홀로그램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던 권제가 입을 열었다.

“일단 대현 놈들의 속이 시커멓다는 건 확인했군. 그럼 이제... 제황아.”

“예. 할아버지.”

“어찌 보면 넌 그곳에 있던 당사자다. 일이 어떻게 된 건지 듣고 네 입으로 싶구나.”

권제의 물음에 제황은 그날 당일 아침부터의 일을 소상히 이야기했다. 이야기가 끝나자 권제가 한숨을 내쉰다.

“아무래도 우리가 삼천교를 너무 과소평가한 모양이구나. 오크들과 손을 잡다니...”

“이번 일에 대현 그룹이 연계된 게 분명합니다.”

“그 말이 옳습니다. 또한 우리가 대현그룹을 너무 몰랐던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을 원점에서 제검토 해야 하고 아울러 대현그룹에 대한 응당한 처단이 필요합니다.”

“어설프게 대현그룹을 건드리면 땅 위에 드러난 줄기만 뜯는 꼴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에 대해 잘 아는 대현그룹입니다. 역정보에 휘둘릴 수도 있습니다.”

“대현 그룹이 가진 금력과 무력도 문제겠지. 치우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공백이 상당할 거야. 국가 경제가 휘청 이겠군.”

“썩은 부분만 도려낼 수는 없습니다.”

“압니다. 그렇지만 대현그룹이 대한민국에 끼치는 영향력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게다가 그들이 오랜 기간 각계각층에 심어둔 인물들이 일어설 겁니다.”

마지막 말은 조용기였다.

“권제께서 명만 내리시면 그들 중 절반은 내일의 태양을 볼 수 없을 겁니다. 아니... 저희 쪽에서 심어둔 인적 자원을 이용한다면 그들은 숨도 제대로 못 쉴 겁니다.

집사의 조용한 한마디의 문상, 무상의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지금까지 그것은 절대적인 진실이었으니까.

그러나 권제가 고개를 저으며 그 말에 반박했다.

“자만은 금물일세. 집사. 놈들은 양의 탈을 쓴 늑대 놈들이야. 그래서 이번에는 조금 다른 방법으로 풀었으면 좋겠군.”

권제의 말에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제황아.”

“예.”

“넌 어찌 생각하느냐.”

권제의 물음에 제황이 잠시 침묵을 지켰다.

“네가 본격적으로 뛰어들기로 마음먹었다면 뭔가 생각하는 바가 있을 것 아니냐.”

“이번 일은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고 싶습니다.”

대답은 간단했다.

“흠, 부모님 일 때문에 그러느냐?”

권제의 물음에 제황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황은 모든 것을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관련된 모든 인물을 죽여버릴 것이다. 그런 짓을 타인의 말만을 듣고 결정할 수는 없는 법

“예.”

제황의 대답에 권제가 눈을 감았다. 그리고 이내 눈을 뜬 그가 옆을 바라봤다.

“집사.”

“예.”

“자네가 말일세. 만약에 말이야. 자네가 직접 움직인다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하겠는가.”

권제의 물음에 나길환은 놀란 눈으로 제황을 바라봤다. 그러더니 이내 뭔가를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제가 직접 뛰어든다면... 대현 그룹에 밀령을 투입하지 않을 겁니다.”

“그래?”

“예. 대현클랜의  클랜하우스 지하에는 저희 밀령대가 유일하게 확인하지 못한 공간이 존재합니다. 철저한 폐쇄망으로 독립된 시스템을 갖추고 있고 최고의 보안관제솔루션을 운영 중입니다. 제가 직접 움직인다는 가정 하에 그곳에 침투하여 그들이 가진 모든 정보를 쓸어온 뒤 정보를 토대로 살생부만 만들 겁니다. 혹은 그곳을 직접 공격하겠죠.”

나길환의 말에 권제가 전면의 제황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떠냐.”

“알겠습니다.”

권제의 말에 제황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러자 조용기와 최진하의 눈이 더욱 커졌다. 그들은 지금 두 노소가 나눈 대화에 담긴 뜻을 해석하느라 정신이 없다.

나길환급 각성자라는 것은 곧 7성급에 육박하는 암살자라는 말과 같다. 제황이 비록 오러를 사용하는 수준에 올랐다고 하지만 제황은 원거리딜러다. 그런데 암살자라니... 그런데 제황은 권제의 말에 긍정했다.

모든 걸 종합하면 제황이 암살하고자 하면 7성의 헌터도 무사하지 못하다는 뜻이 된다.

“청이 있습니다.”

“음. 그래. 말해 보거라.”

“할아버지께서 제 친구 동철이를 수련시켜 주십시오.”

제황의 말에 권제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건 들어줄 수 없구나.”

서운하게 느낄 수 있지만 권제는 그렇게 한가한 사람이 아니다. 특히 이번 저스틴포인트 사건으로 인해 대한민국헌터사무국은 난리가 났다. 수석원로로써 자리를 비울 수 없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이건 핑계와도 같다.

제황의 말이 이어졌다.

“크게 바라지 않습니다. 기간은 이주... 죽인다는 심정으로 몰아붙이셔도 됩니다. 아니 죽이셔도 됩니다.”

“호오, 그래? 네 친구가 그리 강단이 좋더냐?”

수련 중 죽여도 된다는 말이 권제의 흥미를 자극했다.

“이전에 제가 붙었을 때 생명을 위협할 수십 번의 공격을 가했지만 모두 회복되었습니다.”

“후후, 재미있군. 설마 네 친구를 진짜 죽이고 싶은 건 아닐 테고... 그래. 그럼 너는 내게 뭘 줄 수 있느냐.”

권제가 물었다.

“더 바라십니까?”

“흐흠...”

“호오...”

어찌 보면 건방지다고도 할 수 있지만 오히려 권제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나길환에게 말했다.

“집사”

“예.”

“대현그룹으로 투입한 밀령대를 철수시켜라.”

“예? 하오면...”

“크게 한 방 먹이는 걸로 시작해도 좋겠지. 모든 경계를 통상적인 수준으로 유지하도록 ... ”

“알겠습니다.”

“제황아.”

“예. 할아버지.”

“이번 일은 모두 네게 맡기마. 자세한 정보는 나집사와 상의하거라.”

권제는 제황에게 숙제를 던졌다. 쉽지 않은 숙제다.

“예.”

“오늘부터 네가 무적성의 칼이다.”

“알겠습니다.”

권제의 말 속에 함축된 뜻을 이해한 제황이다.

“그리고 네 동철이라는 네 친구녀석을 내게 보내거라. 어디 얼마나 몸이 여물었는지 확인해 봐야겠구나. 끌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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