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
페이즈원 -1
드라마시청을 마친 제황은 귀찮다는 듯 리모콘을 동철에게 다가왔다.
“못해먹기는 뭘 못해. 아주 빠져 있더만,,,”
“그런 게 아니다.”
궁기에 대해 설명할 생각이 없는 제황은 손을 휘휘 저은 후 지금 한창 머릿속에서 떠들고 있는 궁기에게 말했다.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이야?
-당연하지! 도준이나 신여사 아들이 아니라니! 그럼 누가 진짜 엄마일까? 설마 그 가정부? 아니면 천룡그룹 회장 죽은 후처?
제황의 입장에야 저 드라마에 출현하는 도준이라는 남자 주인공의 엄마가 누군지 추측해고 싶은 마음이 단 한 가닥도 없었다. 신여사면 어떻고 후처면 어떠랴. 드라마 작가 멱살을 잡고 물어보는 게 더 좋지 않을까 생각하는 제황이었다.
그는 단지 저 드라마가 티브이에서 나오는 순간 잔다고 하던 궁기가 갑자기 튀어나와 고집을 부려 어쩔 수 없이 같이 시청해 줬을 뿐이다.
다 죽어가는 듯 보이더니 목소리에 생기가 도니 마음이 편안한 제황이었다.
-수목 드라마지?
-알게 뭐야.
그러나 튀어나오는 대답은 퉁명스럽다.
-내가 현신만 할 수 있으면 검색을 해볼 텐데...
궁기가 아깝다는 듯 말한다. 현신이 힘들다는 말에 제황이 조금 놀라 물었다.
-현신에 문제가 있어?
-그래. 아주 조각조각 났지.
-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제황이 물었다. 자신은 폭발에 휘말려 기절했지만 궁기가 왜 현신에 문제가 생겼는지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흥. 내가 널 구한다고 이 연약한 몸으로 너를 보호했다는 거 아니냐. 폭발에 휘말려 현신에 쓰는 술식이 완전히 망가졌어.
-그렇구나... 미안해.
말만이 아닌 정말 미안했다. 과정상으로는 문제가 없었지만 결론을 따지면 자신의 오판으로 궁기가 위험해 졌던 것이다. 아무리 오크들이 강하다고 해도 저스틴포인트가 넘어갈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물론 삼천교 빌런들이 끼어든 탓이 컸지만 최후의 최후까지 한 수를 남겨야 한다는 격언을 깼고 한순간이지만 방심했다.
-괜찮아. 네가 죽으면 나도 맹약이 깨지니까 그랬을 뿐이야. 흥흥
제황이 닮아 가는지 쌀쌀맞게 대답하는 궁기다.
그러나 그 모습이 제황을 더욱 착잡하게 만들었다.
생각해보면 자신은 항상 궁기의 도움만 받았고 딱히 궁기에게 뭔가를 해 준적이 없다. 어쩌면 이제는 그녀의 도움을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번 일이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냐.
-그건 무슨 소리야?
-글쎄, 나도 기연을 좀 얻었다고나 할까? 자 이제 가져가.
그 말과 함께 제황의 손에 하나의 물건이 나타났다. 그것은 바로 궁기가 가지고 있던 아티펙트 티아라였다.
블러드메리의 티아라-슈페리어 아티펙트
계승자:천제황
재질:백금, 다이아몬드
특수능력
지배
정화
이지를 상실한 동철을 조종하는데 사용되었던 이 물건은 정화라는 옵션이 궁기에게 도움이 되기에 줬었다.
-이걸 왜?
-이제 필요 없으니까.
궁기가 순수한 마나를 쌓는데 요긴하다며 가져간 물건이었다. 물론 이것은 제황에게도 도움이 되기는 하지만 궁기를 위해 양보했었다. 그런데 그걸 다시 내놓은 것이다.
-무슨 뜻이야?
좀 더 설명을 바라는 제황이었다.
-힘을 워낙 한계까지 써버려서 네가 자고 있는 동안에 나도 살려고 발버둥 좀 쳤지. 덕분에 그 티아라에 걸린 술법의 원리를 좀 파악했다고나 할까.
-원리?
-그래. 원리... 깊게 물어보지 마. 그건 갓난아기한테 성인드라마를 이해하라고 하는 것과 같으니까. 아무튼 그 정화의 원리를 좀 알게 되었어. 그리고 개량을 했지. 덕분에 지금 네 무한고에 있는 마나석은 거의 동이났고... 호호호~ 정신없이 쓰다 보니까.
그러니까 미안한 마음 가질 필요 없어.
-하...아?
무한고에 있는 마나석이 모두 동이 났다는 말에 제황은 헛웃음만 나왔다. 굳이 돈에 연연하지는 않지만 무한고에 있던 마나석의 양이 얼마어치라는 경제관념은 가진 제황이었다.
시가로 따지면 120억에서 150억 가량 되는 금액이다.
일반인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귀물들인 것이다.
"쯧..."
혀를 찬 제황은 피식 웃었다.
그를 구하다가 그리 되었으니 별로 화가 나지 않는다.
그리고 마나석이야 언제든 구할 수 있지만 궁기는 그렇지 않으니까.
그리 아깝지 않았다.
-그럼 잔다고 한 건?
-아아, 5티어 흡수할 때는 좀 졸립더라고... 헤헷
천연덕스럽게 대답하는 궁기다.
잔다고 하기에 힘이 없나 걱정했는데 알고 보니 마나석을 쳐묵쳐묵 하느라 바빴던 것이다.
-끙...그래. 다행이네. 그래서? 어느 정도 회복된 거야? 그만큼 먹었으면 이전 보다 훨씬 강해진 건가?
-흠흠, 나도 그렇게 대답해주고 싶지만 그건 아니야. 일종의 효율의 문제거든.
대략 간단히 설명하자면 전에는 10의 연료로로 7정도의 효율을 얻을 수 있었다면 지금은 30의 연료로 20 정도의 효율을 내게 만들었어. 그래도 뭐 이전 수준까지는 회복했지.
-그렇군. 그런데 왜 현신을 못한다는 거야?
-후후, 망가져 버렸으니 이번에는 좀 더 오래 쓸 만한 현신을 준비 중이랄까? 마나석 절반이 여기 들어갔지. 기대해. 초극강막장현신을!!!
-그래. 그래. 기대하지.
이전보다 강한 현신이든 약한 현신이든 별로 상관 없는 제황이었다.
굳이 막장이라는 말까지 붙이는 걸 보면 꽤 대단한 것 같지만...
궁기는 궁기니까.
-아 그리고 그 티아라는 이제 네가 써. 머리에 딱 꽂으면 네 미모가...
-동성애 드라마 금지
-아니 왜? 호호호 딱 봐도 네 친구가 공... 네가...수? 왠지 너무 잘 어울리...
제황은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는 궁기를 외면한 뒤 옆에서 자신을 관찰하고 있는 동철에게 말했다.
"왜"
제황의 물음에 동철이 소태씹은 표정으로 말했다.
"혼자서 뭔 표정이 그렇게 다채롭게 변하냐."
"남이사... 내 표정 걱정하지 말고 너나 걱정해라."
"뭔 소리야?"
동철의 물음에 제황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내가 너에게 아주 일생일대의 기연을 주려고 하거든."
동철은 제황의 미소를 보며 등골이 오싹해짐을 느꼈다.
기연? 기연은 보통 절벽 밑에 있지 않던가? 제황의 지금 표정과 말뜻을 유추해보면 절벽에서 밀어버리겠다는 것 같다. 제황이라면 낙하산 따위는 준비하지 않을 것이다.
"야. 그게 무슨 말이야?"
"미리 알면 재미없잖아."
제황이 못 들었다는 듯 귀를 후비며 딴청을 부린다.
"아니 그게 아니고 너 표정 방금 졸라 으스스했거든?"
"걱정마라. 설마 내가 널 사지로 보내겠냐."
"아니 여보세요. 왜 여기서 사지가 나와?"
제황과 동철이 투닥이고 있을 때 병실의 문이 열리며 이루미가 들어왔다.
"제황님 권제님께서 찾으십니다."
"네."
제황이 이루미를 따르려 할 때 이루미가 제황과 함께 움직이려는 동철에게 말했다.
"친구 분은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아..."
그 말에 동철이 움찔하며 멈춰 섰고 제황이 그런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
"다녀올게."
"그래. 알았다."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다시 한 번 깨달은 동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은 대한민국 헌터계의 전설 권제의 성이다.
***
동철을 뒤로 한 제황은 이루미를 따라 걸었다. 몇 개의 건물을 지나자 잠시 후 거대한 연무장이 나타난다. 지름 1킬로미터는 될 듯한 거대한 연무장을 중심으로 하늘을 찌를 듯한 건물들이 솟아 있었다. 건물 사이사이로 이곳 전체 외곽을 두른 거대한 방벽이 보인다. 방벽의 높이는 무려 50미터, 두께는 10미터다.
권제의 저택 아니 정확히 말하면 요새라고 해야 정확 할 것이다. 권제가 이곳을 만들 때 단 한가지만을 고려했었는데 그것은 바로 외적에 대한 효과적인 방비였다. 최대 1만의 거주인이 머물러 효과적으로 요새를 방어할 수 있도록 그 안에 생활에 필요한 모든 시설을 갖춰 놓았다.
더욱 대단한 것은 이 거대한 요새의 지하에는 만약의 때를 대비한 지하도시가 있다는 것이었는데 입구를 봉쇄한 상태에서도 최대 10년은 생활할 물자가 풍족하게 비축되어 있었다.
제황은 고개를 들어 펄럭이고 있는 거대한 붉은 깃발을 바라봤다.
[무적성]
50년 전 인간의 생존만을 외치며 몬스터의 아가리를 향해 달려들던 수백만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손에는 저 깃발이 들려 있었다.
***
이루미는 제황의 예상과는 다르게 권제가 평소에 사용하던 대전(大殿)이나 태실(太室)이 아닌 좀 더 깊은 곳으로 안내했다. 위의 두 곳은 권제가 밑에 거느린 사부들을 데리고 회의를 가질 때 사용하는 곳이었는데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많은 이들이 모일 줄 알았다. 그러나 그녀가 안내한 곳은 최상층부에 위치한 내실이었다.
아무래도 제황이 무력시위를 한 의도가 과하게 먹힌 것 같다.
문이 열리고 제황 만이 안으로 들어갔다.
이곳은 이루미도 들어갈 수 없는 곳이다.
바로 권제의 심처니까
안으로 들어가니 네 명의 노인이 제황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장 상석에는 선풍도골의 건장한 노인이 앉아있다.
권제... 황철민... 대한민국 헌터들의 산 역사인 거인 중의 거인이다.
길게 수염을 늘어뜨린 권제가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짓고 있고 그 옆으로는 예전 처음 만났을 때 권제가 집사라 불렸던 노인이 무표정하게 조용히 시립해 있었다.
물론 그 노인은 흔한 집사 따위가 아니었다.
권제의 직속감찰기관 밀령의 수장으로 권제 다음으로 권위를 가진 인물이었다.
그의 이름은 나길환, 외부 활동을 철저히 하지 않는 인물로 능력도 베일에 싸인 인물이다. 역할놀이인지 권제의 앞에서는 충실한 집사의 역할이지만 적에게는 누구보다 잔인한 인물이 그여 ㅆ다.
권제의 오른쪽에 앉아 있는 인물은 문상 조용기다. 넷 중 유일하게 양복을 입은 노신사였는데 권제가 보유한 모든 기업체를 관장하는 인물로 금력과 관련된 것은 모두 이 사람의 손에 있었다. 또한 금력과 권력은 불가분의 것이기에 세계 각계각층에 영향을 끼치는 인물이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왼쪽에 앉아 있는 사람은 무상 최진하다. 권제가 보유한 모든 무력의 정점에 있는 이 노인은 넷 중 체구가 가장 작고 존재감이 적었는데 특이점은 그의 왼팔이 헐렁하다는 것이었다. 한자루 고검을 허리에 끼고 있는 게 아니라면 흔한 옆집 노인네 같은 모습이지만 아마 그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그를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외팔이기는 하지만 대한민국에서 권제 다음으로 많이 알려진 사람이다.
권제가 본격적으로 무력을 동원하면 항상 선두에 서는 이였으니까. 외 선두에 서냐고? 권제를 제외하고 가장 강한 이가 바로 그다. 무적성의 무상 최진하 그의 별호는 '처형검' 이다.
“오랜만이구나.”
“예. 권제 어르신...”
제황이 고개를 꾸벅 숙이며 말했다.
제황은 할아버지라 부르지 않았다. 이들이 모였다는 건 이곳이 절대 사사로운 감정을 나눌 곳이 아니라는 것이니까. 그렇지만 권제는 좀 아닌 것 같다.
“이놈 할아버지라 부르라고 하지 않았느냐.”
권제의 미소가 유난히 따사롭다.
“예. 할아버지.”
“그래. 허허허...”
제황의 대답에 권제가 기분이 좋은지 껄껄 웃었다.
그러나 제황은 이제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을 훑으려 하는 권제의 기운을 말이다. 그러나 제황은 그 기운을 가볍게 튕겨 냈다. 한 차원 높은 에너지를 다루게 된 제황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허허, 이 녀석 보게.”
그러나 권제는 제황의 작은 반항에 노여워하거나 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대와 흥미가 가득하다는 눈빛이다. 마치 과거 처음 만났을 때 보이던 그 눈빛이다.
“설마 했는데 너도 드디어 그것을 가지게 되었구나.”
권제는 이미 수련장에서 있었던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사실 그 정도의 파괴력을 낼 수 있는 기술은 한정되어 있다.
무려 50센티의 합금강 철판을 갈아내듯 뚫어버리는 기술이다.
권제의 말에 내실에 있던 모든 이들의 눈빛에 이채가 어렸다. 그들은 지금껏 제황을 단순히 권제가 총애하고 귀여워하는 유망한 청년 정도로 생각했건만 권제가 공식적인 자리를 통해 제황의 경지를 인정한 것이다.
아무리 이곳에 모인 이들의 권제를 중심으로 모였다고 하지만 이곳에 있는 이들의 기저에 깔린 건 바로 힘에 대한 숭상이었다. 힘을 가진 자는 그만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
제황은 수련장에서의 무력시위로 이들에게 자신의 뜻을 관철시킬 기반을 마련했다.
"앉거라."
"예."
제황은 권제가 권한 자리에 가서 앉았다. 그런데 배치가 매우 묘하다. 권제가 가리킨 곳은 바로 그의 정면이었다. 그 의미를 굳이 확대해석 할 필요는 없지만 따지자면 제황을 어느 정도로 생각하는지에 대해 권제의 의중이 단편적으로 드러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