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사거리 100만-84화 (84/301)

# 84

친구 동철 (수정)

“끄응...”

제황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조금 정신이 멍하다. 그다지 아픈 곳은 없지만 온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이불이 흘러내리자 깨끗한 모시 잠옷이 그의 몸에 걸쳐져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주위를 둘러보던 제황의 눈이 커졌다. 이곳은 권제의 저택 내에 있는 그의 방이었다.

창밖을 바라보니 하얀 눈발이 휘날리고 있다. 엘어스의 그 지겹도록 이글거리던 태양은 보이지 않았다.

"돌아왔군."

의식이 끊기기 전까지 저스틴포인트의 레이더탑 위에서 성벽을 향해 달려오던 오크의 물결을 상대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지구로 와 있는 것이다.

“그 폭발 때문인가.”

제황은 화신체의 반작용에 붙잡혀 있을 때 거대한 폭발이 그를 덮쳤다. 워낙 강력해서 뭔가 해볼 틈도 없었다. 궁기가 뭐라고 외치기는 했지만 제황은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깨어나 보니 이곳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아까부터 조용하다.

-궁기?

자신이 이렇게 깨어났으면 수다스러운 궁기가 이미 몇 마디라도 했을 텐데 아직까지 조용한 것이다. 궁기의 힘으로 지속되는 궁기안도 켜지지 않는다.

불안함이 엄습한다.

“궁기!”

놀란 제황이 그녀를 불렀다.

몇 년간 한시도 떨어져 본 적이 없는 그녀였다. 처음 그녀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들어왔을 때는 거부감으로 온통 가시를 세웠었다.

싸우기는 또 얼마나 싸웠던가. 그렇지만 그녀와 함께 할수록 조금씩 그녀는 제황을 이루는 삶의 한 조각이 되어 버렸다. 남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내면의 자신도 그녀에게는 마음 놓고 털어놓을 수 있다. 그렇기에 그녀가 없는 지금은 오히려 신체의 일부가 떨어져 나간 듯한 착각이 들 지경이었다.

-아... 시끄러. 자는 중이니까 말 걸지 마.

궁기의 흐릿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후우...”

그녀의 목소리에 제황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동안이라도 그녀가 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안절부절 했던 제황이다.

-어떻게 된 거야.

-나중에... 지금은 대화 나누는 것도 힘들어.

-알았어.

그녀의 말에 제황은 더 이상 말을 걸지 않았다.

-마나석이라도 줄까?

-이미 가져다 쓰는 중이야.

-으응. 잘했어.

-잔다. 깨우면 죽여 버릴거야.

궁기의 협박에 제황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이 좀 안정되니 머리가 돌아간다. 굳이 그녀에게 물어볼 것도 없는 것이다. 오크군세에 대한 수성은 실패했다. 만약 수성에 성공했다면 자신이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으니까.

자신이 오크들을 너무 얕잡아 봤던 게 아닌가 하고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문이 열렸다.

"루미님."

들어온 것은 권제의 친위대 중 하나인 무영의 대주를 맡고 있는 이루미였다. 먼지 터럭 하나 없는 하얀 무복의 그녀는 화장 한 점 없는 깨끗한 얼굴에 머리카락을 곱게 뒤로 묶었다.

깬 것을 이미 알고 있었는지 고개를 꾸벅 숙이며 말했다.

"몸은 괜찮으세요?"

"네. 괜찮습니다."

"다행이네요. 발견 당시 즉각 회복시키기는 했지만 상태가 워낙 좋지 못하셔서 보고를 받으신 권제님께서 많이 노여워 하셨습니다."

"그런가요. 죄송합니다.“

제황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이루미의 역할을 아는 제황으로서는 그 노여움의 대상이 이루미일 거라고 짐작했고 그것은 어느 정도 맞았다. 만약 그녀가 제황을 성공적으로 탈출시키지 못했다면 단순한 노여움으로 끝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 임무였을 뿐입니다."

창밖 풍경과 비슷한 그녀의 냉냉한 표정에 제황이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보다 어떻게 된 건지 알 수 있을까요? 제가 정신을 잃은 후의 일까지요."

제황의 물음에 이루미가 고개를 끄덕인 후 방안에 비치된 테이블로 제황을 이끌었다.

한참의 이야기가 오갔다. 잠시라 생각했지만 제황이 누워있었던 기간은 무려 3일이었다. 그녀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제황이 고개를 끄덕였다.

“난리가 났겠군요.”

“네. 삼천교와 오크가 손을 잡은 건 둘째 치고 저스틴포인트와 그 일대를 적에게 빼앗기고 디멘션게이트를 폐쇄했으니까요. 저스틴포인트를 기준으로 북쪽의 영토는 모두 오크들과 삼천교의 손에 들어갔습니다.”

“삼천교...”

이번 일의 전모가 어느 정도 드러났다. 제황을 기절에 이르게 만든 폭발의 범인은 바로 삼천교였다. 대체 어떤 폭약을 사용했는지 모르지만 무장버스와 부딪힌 성벽이 박살 난 게 치명적이었다.

제황은 몰랐지만 폭발이 있기 전 저스틴포인트 내부로 침투한 삼천교의 빌런이 기지 내의 발전시설을 공격했다. 보조발전시설이 있었지만  터울이 존재했고 그 사이를 절묘하게 공략 당했다. 계략 따위를 혐오하는 오크가 짜냈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절묘한 수다.

아니 저스틴포인트 내부 정보를 손바닥 보듯 할 수 있는 이가 아니라면 할 수 없다.

문득 예전 거인의 발자국에서 있었던 삼천교 빌런들의 준동이 떠올랐다. 그때도 박중위가 내부의 간자를 이야기 했었다.

“탈출한 사람들에 대해 알 수 있을까요? 특히 군인들이요.”

“제황님과 같은 군 생활을 하신 분들 말씀이라면 현재 실종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그 말과 함께 이루미의 입이 꾹 다물어졌다. 사실 희생자보다 실종자가 대부분이다. 시체 수습도 힘들었으니까.

“알겠습니다.”

굳이 더 물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 제황이 고개를 흔들었다.

“군의 신속한 대응과 희생으로 헌터들과 기지 내의 군사기밀들이 안전하게 지구로 올 수 있었습니다.”

“헌터들의 희생은 적었던 모양이군요.”

“네. 비상탈출프로세서가 제대로 작동했죠.”

“아, 그렇다면 혹시 저와 함께 있는 사람은 어떻게 된 줄 아십니까? 달천이라는 분인데...”

제황의 말에 이루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황님을 대피시키던 분 말이군요. 그 분은 상태 좋으셨어요. 회복이 끝나시자마자 이번 일을 취재 한다며 현장을 떠나셨습니다.”

“그 분이 저를 대피시켰다고요?”

“네. 발견되었을 때 제황님을 대피시키고 계셨죠.”

그가 제황의 은인이다. 만약 그가 아니었으면 지금 제황은 조상님들의 곁에 서 있었으리라.

“연락처를 알 수 있을까요?”

이루미의 얼굴에 당황이 어렸다가 이내 사라졌다.

"내일까지 알려드리겠습니다."

"네. 부탁드립니다."

궁금한 것이 대충 풀리자 제황은 이번 사태를 생각하며 생각에 잠겼다.

저스틴포인트가 삼천교와 오크에 의해 점령 당했다.

이건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작게는 대한민국 헌터계에 새로운 레이드 패러다임을 제시해야 하는 계기이기도 했고 세계적으로는 몬스터에 대한 대응 지침이 송두리째 바뀌어야 하는 문제이기도 했다.

인간과 이종족이 손을 잡았다. 또한 삼천교 빌런들에 대한 모든 정보를 처음부터 다시 수집해야 한다. 고작이라고 생각했던 빌런의 무리가 한 짓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러나 뒤이은 이루미의 말에 제황은 생각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저...그리고 며칠 전 친구분이 깨어났습니다.”

“아...”

동철이 깨어났다는 말에 제황의 눈이 커졌다.

“상태는 어떤가요.”

“처음 오셨을 때에 비하면 많이 좋아지셨습니다. 단지...”

“단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아직 입을 열고 계시지 않습니다.”

“그런가요. 지금 봐야 겠군요. 아... 할아버지는...”

“권제님께서는 이번 사태와 관련된 회의로 인해 사무국에 계신 상태입니다.”

“알겠습니다.”

응당 할아버지를 먼저 뵈야 했지만 자리를 비우셨으니 동철을 먼저 만나기로 마음먹은 제황이었다. 그와 이루미는 잠시 후 동철이 입원하고 있는 저택 내에 있는 의료센터에 도착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한 남자가 멍하니 앉아 창밖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문을 열고 들어오는 둘을 발견하고는 눈을 크게 떴다.

두툼한 근육으로 뭉친 체구였는데 오랫동안 햇빛을 보지 못했는지 창백했고 얼굴에는 수염이 가득했다.

“누...누구?”

“벙어리는 아니군.”

터벅터벅 걸어간 제황이 동철의 앞에 섰다. 이루미는 고개를 꾸벅 하고는 밖으로 나갔고 잠시 후 방안에는 둘만 남았다. 그가 기억하고 있는 제황과 너무나 틀리다. 동철의 눈이 혼란스럽다.

“너 고친 거냐?”

“그래.”

“어떻게?”

“이야기가 좀 길어. 그리고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그...그렇지.”

“몸은 어떠냐.”

“...”

제황의 물음에 동철이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떨궜다.

“어떻게 된 건지 기억은 나냐?”

그의 고개가 작게 움직인다. 그리고 그 순간 제황이 움직였다.

와장창!

제황의 주먹이 동철의 얼굴을 강타했다.

“큭...”

각성자의 주먹이다. 침대 위를 한 바퀴 구른 동철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무슨 짓이야! 새끼야.”

“벙어리는 아니고...반응도 정상적이네.”

후욱!

공중을 날아 뻗어오른 제황의 다리가 동철의 머리 위로 곧장 떨어졌다.

와작!

“큭...”

동철은 그 내려찍기를 간신히 피해냈고 대신 그 충격을 대신 받아낸 병실 바닥은 그대로 산산이 조각나며 움푹 파였다. 일반인이 당했다면 즉사나 불구 확정이다.

“신체 반응 속도 이상 없고...”

“그만해! 자식아!”

“그만하려고 했다.”

제황은 알아볼 것 다 알아봤다는 듯 손을 툭툭 털었다.

한차례 태풍이 몰아친 듯 난장판이 되어 버렸다.

“하... 또라이 새끼”

얼굴을 일그러뜨린 동철이 침대 위로 기어 올라간다.

“몸도 정신도 멀쩡한 새끼가 왜 환자질이냐.”

“꼽냐?”

“그래. 새끼야.”

“크큭...”

제황의 대답에 동철이 큭 하고 웃었고 제황도 마저 따라 웃었다. 병실에서 들린 요란한 소리에 황급히 안으로 들어선 이루미는 둘의 모습에 어안이 벙벙해서 쳐다보고 있다. 난리를 친 건 둘째 치고 제황의 저런 모습은 또 처음이었던 것이다.

“괜찮습니다.”

제황이 손사레를 치자 그녀는 한숨을 내쉰 뒤 다시금 병실을 나갔다. 제황은 침대 옆 의자에 앉았다.

“말해봐. 처음부터 끝까지...”

두루뭉술한 물음이다. 동철의 입이 꾹 다물어졌다.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던 동철의 입이 열렸다.

“너, 강하냐?”

“?”

뜬금없는 물음이다. 강함이라는 건 수많은 경우의 수와 종류를 동반한다. 제황의 눈빛이 시리게 피어오르자 그게 무슨 뜻인지 아는 동철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계속 이런 식으로 딴 소리하면 맞는다.

과거처럼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지는 않겠지만 이렇게 망설이는 것도 그나 제황의 취향은 아니다. 게다가 제황에게 서운하지도 않았다. 저것은 남에게는 보이지 않는 제황의 진짜 모습이니까.

"생각 좀 하자."

“대가리 굴리지 말고 생각나는 거 다 말해.”

제황의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친구던 뭐던 일단 그 삼천교와 관련된 일이다.

친구이기에 죽이지는 않았지만 감춰 줄 생각도 없다.

“알았다. 알았어. 제길... 나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내가 강제각성했을 때부터 이야기해야 겠구나.”

동철의 말이 시작되었다.

강제각성 했을 때 동철은 평범한 등급을 받았다고 했다. 각성시술 후 그의 성장 한계는 1성헌터로 나왔다. 문제는 그가 세이브에게 부여받은 스킬들이었다.[괴력-스페셜 스킬] [거대화-스페셜스킬][초회복-레어스킬] 말 그대로 로또를 맞은 격이었다.

비록 워낙 스킬의 격이 높아 단발성 조루였지만 거대화나 괴력이라는 스킬은 매우 상위권에 랭크된 좋은 패시브 스킬이었다.

그렇지만 동철은 그 사실을 숨겼다. 이유는 간단했다. 본디 그는 군에 몸담을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굳이 두각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 후 순조롭게 군에 배속되었다. 평범하다면 평범한 일상이 흘렀다.

문제는 그 성질머리였다. 그를 쥐 잡듯이 괴롭히던 선임이 있었다. 처음에는 참았지만 스킬의 영향으로 유난히 덩치가 커진 그를 심심하면 가지고 장난쳤다. 같은 소대의 소대장도 그걸 말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 괴롭힘에 동참했다.

얼마간은 그냥 참았지만 괴롭힘에 열받아 무심결에 내지른 주먹에 그 선임과 소대장의 면상이 회복불가판정이 될 정도로 망가졌고 동철은 군법에 회부되어 몬스터와의 전투가 가장 험한 전방으로 배속되었다.

하루에도 수 명이 죽어 나가는 그런 곳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는 자신의 가진 바 스킬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동료들이 죽어가니 마냥 숨길 수는 없었던 것. 그렇게 그는 천천히 공적을 쌓으며 주위의 인정을 받고 강해져 갔다. 보유 스킬이 알려져 화제가 되었고  1년 후 무려 1성 헌터임에도 소대의 전위를 책임지는 메인탱커가 되었다. 그리고 상부에서 그에게 하나의 기회를 제안했다.

“대현 그룹?”

“그래. 대현에서 스카웃 제의를 받았지.”

“군 소속으로 그게 가능 했냐?”

“응. 당시 책임자에게 들어보니 경비인력 명목으로 지원받는 군각성자라고 하더군.”

실제로 투입된 곳에서의 임무도 경비였다.  상당한 북쪽에 있는 미스릴 광산에는 한국의 여러 업체들이 참여하는데 그 중 대현 쪽의 경비로 들어간 것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난 정말 우연찮은 기회에 내가 절대 알아서는 안 될 사실을 알게 되었고 대현그룹의 특수감찰단에 의해 발각당해 잡혀서 끌려갔다.”

“...”

잡혔다 라는 말과 함께 동철이 컵에 물을 받아 벌컥벌컥 들이켰다.

쇠로 된 컵이 동철의 손안에서 으직 하고 찌그러진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