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3
점령당하다
[경험치를 갱신하셨습니다.]
이름:천제황 C급 10/9레벨 800,000/800,500exp [레벨업]
-드디어 랭크업인가?
-축하해.
제황은 시야 한편에 뜬 글귀를 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한 계단 더 오를 준비가 끝난 것이다. 레벨업 시 헌터가 무방비 상태가 되는 것을 고려한 방식인지는 모르지만 세이브가 제공하는 레벨업시스템은 필요경험치를 갱신하면 사용자가 원할 때 레벨업 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다.
-고마워.
-드디어 B급인가?
-그래.
이제 레벨업을 하면 레벨 10을 채움으로써 드디어 C급의 상위 등급인 B급에 오를 수 있게 된다.
이건 평범한 레벨업보다 좀 의미가 틀리다. 9에서 10으로 가는 것은 마치 각 급의 벽이라고 할 정도로 필요 경험치가 엄청나게 높아지는 것이다. 중간에 다른 일 하느라 레이드를 하지는 못했지만 경험치 800,000만을 채우는데 근 1년 반이 걸렸다.
물론 그 또한 다른 각성자들에 비하면 그리 느린 편은 아니었다.
-많이 강해지겠구나.
-모르지.
F급에서부터 C급에 오르기까지 벽을 깰 때마다 얼마나 강해지는지 알고 있는 궁기가 말했다.
-그래도 이제 권제 할아버지한테 제대로 한 방 먹일 수는 있을 거야.
-호호호...응원할게
대한민국에 단 셋 밖에 없는 7성헌터 권제에게 한방을 먹인다. 아마 제황을 모르는 이들이라면 그의 정신 상태를 먼저 의심할 것이다. 권제... 무려 60년간 절대자로 군림한 분이다. 추정레벨은 만렙....
사람들이 헌터들을 보고 5성 6성 따위로 부르지만 사실 헌터의 강함을 나눌 기준은 상태창에 존재했다.
그것은 바로 레벨이었다. 몬스터를 사냥하고 경험치를 얻음으로써 세이브에게 합당한 공적을 정산 받아 좀 더 강한 힘을 부여 받는 척도인 레벨, 그러나 헌터들이 자신의 레벨을 외부에 노출시키지 않는 이유는 자신의 레벨이 적에게 들어갔을 경우 목숨의 위험해 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대융합 초기에는 헌터들이 자신의 레벨을 타인에게 거리낌없이 자랑스레 말하고 다녔다. 상대보다 강함을 증명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당연한 욕구니까.
그렇지만 그로 인해 많은 헌터들이 적들에게 죽임을 당하고 어느 순간 헌터들은 자신들의 레벨을 숨기게 되었다.
그러나 표준을 나누는 측정의 수단은 필요했기에 각국의 합의를 통해 만들어진 바로 별의 숫자로 구분하는 것이었다. 어찌보면 순수한 레벨보다 좀 더 헌터의 전투력을 객관적으로 나타낼 수 있기에 별 구분 체계를 받아들였다.
각설하고 심호흡을 한 제황의 귓가로 궁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강한 놈이 걸렸다.
-응? 무슨 말이야?
-아마 저게 오크들의 우두머리 같군.
그 말과 함께 제황의 시야로 긴 선이 그어졌다. 상당한 거리다. 그 끝에 붉은 원이 그려졌다. 붉은 원 안에는 화려하게 꾸며진 거대한 가마가 자리해 있었고 가마 위에는 온갖 뼈와 해골로 만들어진 옥좌가 있었다.
-평범하게 생겼군.
앉아있는 오크의 덩치는 그리 크지 않다. 요란한 중갑을 착용한 것이 아닌 가슴이 훤히 드러난 가죽갑옷을 걸치고 있다. 특이한 것은 오른팔이 온통 검은 색이라는 것 뿐...
-오크들의 대장이라... 그럼 저 녀석만 잡으면 된다는 거지?
-아마? 그렇지만 쉽지 않아 보여. 너무 멀어서 가늠할 수는 없지만 엄청나게 강한 놈이다.
조금 긴장한 듯한 궁기의 말에 제황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우습게 볼 생각은 없다. 그렇지만 강하다고 해서 피할 생각도 없다.
-화신체는 얼마나 남았지?
-이제 거의 한계야.
-그래? 그럼 이번 한 번에 모두 쏟아부어보자.
심호흡을 한 제황이 스톰레이지에 비천격과 테라버드애기살을 꼈다. 상대는 오크들의 대장... 지금 제황이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공격을 준비했다. 가급적이면 무련궁술의 최종단계를 시험해 보고 싶지만 그건 아직 무리다. 지금의 제황은 세 개가 최대다.
“무음시...”
[비천격의 엑티브 스킬 무음시가 적용됩니다.]
스톰레이지와 비천격의 조합이면 음속을 돌파하기에 소리가 따르지는 못하기에 필요 없어 보이지만 무음시를 사용하면 화살 발사시에 터지는 소음을 없앨 수 있기에 적의 이목을 피할 수 있다.
“비상하며 폭발하는...”
츠츠츠츳... 파파팟...
제황의 몸을 중심으로 회오리가 생성되었다. 그리고 그 회오리는 제황의 몸을 타고 올라 애기살의 끝에 뭉치기 시작했다.
용혈신공과 궁기의 힘이 모두 응축된 그것은 하나의 붉은 섬광을 뿌리는 빛의 막대로 변했다.
“힘의 화살! 가라!”
슈슉...
소음은 없었지만 무지막지한 소닉붐이 돌풍을 일으켰다.
-화신체...끝... 후우, 난 쉴게.
힘없는 궁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의 목소리와 함께 화신체로 보정되었던 모든 능력이 사라지며 마나양이 1까지 떨어졌다. 말 그대로 모든 걸 쏟아 부은 것이다.
“큭...”
제황 또한 정상은 아니었다. 화신체의 반작용이 오면서 온몸에 격렬한 통증이 느껴졌다. 화신체는 한계 이상의 힘을 끌어 쓰는 것이다. 고통 속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제황의 눈은 날아가고 있는 화살에 고정되었다.
“음?”
옥좌위에 앉아 저스틴포인트를 씹어 먹을 듯 노려보던 오크로드 헬칸은 저스틴포인트로부터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벼락을 발견했다.
“로드시여!”
그의 곁을 지키던 거대한 체구의 오크도 그것을 발견했는지 빠르게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목숨을 걸고 주군을 지키겠다는 듯 거대한 배틀엑스를 꾸욱 쥐었지만 뒤에 앉은 로드의 대답은 그가 예상했던 말과는 조금 틀렸다.
“방해된다. 비켜.”
퍽!
가벼운 발놀림이지만 그 한방에 육중한 오크가 옆으로 날아가버렸다. 눈앞에 걸리적 거리는 것을 치워버린 오크로드 헬칸이 날아오는 화살을 보며 송곳니를 드러냈다.
“재미있군.”
우우웅...
빛의 화살이 머리 앞까지 날아왔건만 헬칸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터억!!! 파파팍!
믿을 수 없게도 날아온 화살이 헬칸의 오른손 손아귀에 그대로 붙잡혔다. 맹렬히 회전하며 헬칸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 몸부림을 치지만 그의 손에 어린 검은 기운은 화살의 기운을 그대로 짓뭉개버리고 있었다.
펑! 치이이...
"앙탈이 심하구나. 크크큭"
헬칸은 몸부림을 멈춘 화살을 눈앞으로 가져왔다.
“짧군.”
화살은 무척 짧았다. 자신들이 사용하는 화살에 비해 반에 반도 되지 않는 길이건만 품고 있던 힘은 엄청났다.
“검은이빨투사단이 진 이유가 있었구나.”
심혈을 들여 키운 검은이빨투사단이 이 화살공격에 전멸하는 것을 묵묵히 지켜본 그였다. 화나지는 않았다. 아깝기는 하지만 이정도 화살을 쏘는 강자에게 죽었으니 그들은 카녹의 품으로 갔을 것이다.
“뭐, 우리도 준비한 게 있으니...”
콰콰쾅!
“시작이군.”
헬칸의 송곳니가 사납게 빛났다.
***
“어이구! 이게...뭐야!”
바닥을 진동시키는 굉음에 달천이 깜짝 놀라 주저앉았다. 저스틴포인트 곳곳에서 화염과 연기가 피어 올랐다. 광대한 면적에 비하면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문제는 그 위치였다.
“저곳은?”
한창 화염이 솟구치고 있는 곳들을 본 달천의 눈이 커졌다. 폭발이 일어난 곳은 저스틴포인트 곳곳에 있는 발전소였다. 저스틴포인트에는 총 6개의 발전기가 존재했다. 지상에 노출된 발전소는 총 5개 지하에는 비상발전기가 존재한다. 그런데 지상에 노출된 5개 발전기 전부가 화염에 휩싸여 있었다.
저스틴포인트 곳곳에서 불을 끄기 위한 소방전력이 곧바로 출동했지만 잠시 후 더 큰 문제가 발생했다. 저스틴포인트에서 화기 80프로 이상이 순간적으로 가동을 멈춘 것이다. 문제는 그 뿐만이 아니었다.
-아악! 이놈들 뭐야!
-삼천교가 나타났다! 비상비상!
-빌런 놈들!
어디를 통해 들어왔는지 알 수 없는 삼천교의 빌런들이 군인들을 무자비하게 도륙하기 시작한 것이다. 굳이 무전기가 아니라도 곳곳에서 소요사태가 벌어지는 걸 눈으로 볼 수 있었다.
“어...어떻게...”
저스틴포인트의 경비는 철저하다. 비록 많은 헌터들이 드나들기는 하지만 저스틴포인트 내 슈퍼컴퓨터의 AI와 수많은 경비인력이 CCTV와 검색을 통해 철저히 확인한다.
달천의 머리에 불길한 생각이 스친다. 그리고 빠르게 고개를 돌린 그의 눈에 이제는 오크 무리를 완전히 돌파한 채 저스틴포인트의 성벽을 향해 달려오는 20여대의 무장버스를 바라봤다. 전혀 속도를 줄이지 않은 채 오히려 더욱 빠른 속도로 달려오고 있다. 그것도 일렬로 달려오는 것이 아닌 넓게 산개하여 돌진해오고 있다.
저스틴포인트의 비상발전기가 돌아가고 모든 화력이 원상복귀 되는데 필요한 시간은 정확히 5분이고 그 5분 사이에 돌진해 오는 무장버스 ...
“위..위험하다.”
달천은 구레이더탑 밑으로 뚫린 계단으로 황급히 뛰었다.
예감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틀릴 것 같지 않다. 서둘러 뛰어 내려가던 그가 제황을 힐끔 바라봤다.
“저런!”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제황은 주변을 둘러볼 경황이 없어 보인다.
“빨리 피해! 젠장”
달천은 제황에게 뛰어가 그를 붙잡았다. 일단 살려야 하지 않겠는가.
그때 엄청난 폭음이 천지를 진동했다.
쿠쿠쿠쿠쿠쿵!!!
화아악...
눈이 멀어버릴 것 같은 섬광이 그와 제황을 덮쳤다.
피부가 불타오르는 것 같다. 아니 그 전에 온 몸을 두들기는 바람과 파편이 문제다.
“으아아악!”
파편에 팔을 두들겨 맞은 달천이 비명을 질렀다. 팔이 기형적으로 꺾여 버렸다.
이대로 죽는가 싶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눈물이 줄줄 흐르고 그 흐린 시야 사이로 거대한 폭염의 산이 공중으로 치솟았다. 저스틴포인트의 성벽이고 격벽이고 화염이 휩싸여 있다. 그 때 다시금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상당한 근거리... 이번에는 정말 죽었다고 생각했을 때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 그와 제황을 둘러쌌다.
그것은 한 마리의 매였다. 마치 제황과 자신을 보호하듯이 날개를 활짝 펴 둘을 감싸고 있다.
퍼퍼퍼퍽...
“끼이익!”
고통스러운 듯 비명을 지르지만 매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를 데리고 어서 피해!
“어엇!”
머릿속을 울리는 여성의 급박한 외침에 달천이 깜짝 놀라 제황을 내려다봤다. 제황은 자신보다 상태가 더 안 좋다. 상반신의 절반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는데 빛에 노출되어 익어버린 것 같다. 정신을 잃은 듯 고개가 모로 떨어졌다.
-어서!
달천은 제황을 질질 끌며 계단으로 기어갔다. 달천과 제황이 계단에 거의 도착할 즈음 다시금 거대한 폭발이 그들을 덮쳤다.
쫘쫘좍!
단숨에 수십 번의 검광이 번뜩이고 수 마리의 오크가 양단되어 바닥에 쓰러졌다.
“마지막 탐지 위치는?”
“구 군사지역내의 레이더탑입니다!”
“찾아야 한다! 이곳은 내가 막겠다”
“존명!”
뾰족한 여성의 외침에 따라 수십 개의 그림자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양손에 쌍검을 나눠진 여성은 밀려오는 오크들을 가벼운 손놀림으로 가르며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두 세 개의 오크 수급이 공중을 날았다.
우어어억!
다른 오크보다 한배 반은 더 거대한 오크 한 마리가 공중에서 떨어져 내리며 수십 킬로그램은 되어 보이는 거대한 도끼를 내려 찍어온다. 그러나 여성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공중을 힐끔 올려다본 그녀가 잔상을 일으키며 자리에서 사라졌다.
쫘자자작...
마치 사진을 손으로 찢어발기는 듯한 공간의 폭발과 함께 오크가 오체분시되며 산산이 흩어졌다.
토톡...
방금 전 참상을 일으켰다고는 상상할 수 없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땅에 내려선 그녀가 물밀 듯이 밀려들어오는 오크들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많아도 너무 많다. 사방에서 비명소리가 들린다. 아무리 저스틴포인트 내에 헌터들이 많다고는 하지만 물량에는 장사가 없다. 멀리 완전히 박살나버린 성벽을 통해 검은 물결이 쏟아져 들어왔다.
“환영검...”
그녀의 작은 읊조림과 함께 쌍검으로부터 뭉클거리는 빛의 산란이 일어났다. 그와 함께 그녀의 몸 주위로 수십 개의 빛으로 이루어진 검들이 만들어진다.
“크르륵...”
그녀의 주위로 쌓인 오크의 산을 보자 돌격하던 오크들도 주춤하며 물러섰다.
“아무도 이곳을 지나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