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사거리 100만-77화 (77/301)

# 77

필살의제황

“흠... 안타깝기는 하지만 정부에 신고된 건 전부 묶이기 때문에 별 수 없습니다. 그러지 말고 장교들이랑...어? 그러고 보니... 혹시 저번에 그 훈련장 활 시합에서 대현클랜이랑 붙어서 이긴 그 사람 아니오? 역대 최단시간 498점 괴물?!”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흔들던 그는 제황의 얼굴을 유심히 보더니 놀라 외친다.

“예. 맞습니다.”

아마 이전에 훈련장에서 한수지와 벌인 시합을 말하는 것 같다.

“음, 당신 덕분에 한동안 헌터들이 활을 잡아본다고 난리가 났었지. 며칠 안 되어 전부 반품하는 바람에 돈만 쏠쏠하게 벌었지만... 그 시합에 대해서는 내가 동영상으로도 가지고 있어. 아주 대단했지. 하하”

“네.네.”

제황은 건성으로 대답하며 다른 루트로 화살 구할 곳을 궁리했다. 저스틴포인트 상가들 중 무기류를 취급하는 곳은 세 곳이었는데 이곳이 묶였다면 다른 곳도 마찬가지리라. 세 군데 중 가장 질 좋은 화살을 판매하기에 이곳을 일차로 들른 건데 초장부터 막혔다.

“오크들 사냥에 쓸 거요?”

“당연하죠.”

아마 제황을 화살 사재기 하는 사람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물론 그 오해가 지나친 건 아니다. 이번 오크들의 침공 수준에 대해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 이라면 탄약이나 화살 같은 소모품이 비싸질 거라고 생각할 이는 많을 테니까.

“음, 당신 같은 사람이 화살을 허투루 쓸 일은 없어 보이고... 그럼 이렇게 하는 건 어떻소?”

“예?”

상점주인의 말에 제황은 생각에서 깨어나 그에게 반문했다. 그러자 그가 조금 비밀스러운 이야기인지 제황 쪽으로 얼굴을 가까이 하며 말했다.

“재고에 잡히지 않은 화살이 좀 있소.”

그의 말에 제황의 얼굴이 환해졌다. 물론 후드로 가려서 보이지는 않았지만 제황이 관심을 보이자 상점 주인이 고개를 끄덕인다.

“얼마나 됩니까?”

“정확한 양은 나도 모르지. 내가 화살 만드는 취미가 있어서 혼자 커스텀으로 만들던 건데... 그거라도 사시겠소? 기대는 하지 말고...”

“좋습니다.”

제황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상점문에 달린 시건장치를 잠근 채 제황에게 손짓했다.

“이리로...”

***

“여기 있습니다.”

제황은 4티어 마나석 10개를 주머니에 담아 건넸다.  시가로 2억 가량이다. 고작 화살 값으로 2억이나 주는 게 미친 짓 같지만 받은 것들이 워낙 많아 이 정도는 줘야 했다. 그러나 상점주인은 주머니에서 마나석 한 개만 꺼내들었다.

“어차피 재고에도 없는 물건 처분한 거요. 골치 아프게 자리만 한가득 차지하고 있던 것 가져가주는 건데 제값을 받을 수는 없죠. 이거면 충분하오.”

“말도 안 됩니다. 그런 좋은 화살들이 재고라니요.”

제황은 나머지 마나석을 도로 내밀었다. 제황이 받은 화살 양을 생각하면 4티어 마나석 하나로는 받은 것의 재료값도 되지 않는다. 상점주인이 만든 커스텀 화살들의 수준은 양산 형으로 나오는 화살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좋은 품질을 가지고 있었다.

화살이 다 똑같지 않느냐고 할 수 있지만 화살은 재질과 제작환경에 따라 많은 영향을 받는다. 게다가 양산품 화살은 몇 백 개 중에 하나지만 불량품도 섞여 있으며 불량이 아니더라도 한계 이상의 장력이 주어지면 화살대가 박살나기도 부지기수다.

아예 제대로 날아가지 않거나 말이다. 그래서 제황이 쓰는 화살은 상당히 고가였다. 400파운드의 장력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싸구려 화살은 못쓴다. 그게 시중가로 한 발당 2만원 하는 양산형 화살이 그나마 마지노선이다.

그런데 상점주인이 애물단지라며 넘긴 화살들은 그런 것들과 비교할 수 없는 품질이었다.

예비 활시위도 50개가량 받았는데 척 봐도 미스릴 합금사를 직접 꼬아 만든 고급품이었다. 이것만 해도 몇 천은 훌쩍 넘긴다.

“저는 공짜로 받을 생각 없습니다.”

제황은 주머니를 내밀었다. 장인의 노력은 정당한 가치로 인정받아야 한다. 그러자 주인이 머리를 벅벅 긁으며 말했다.

“거참... 그럼 그냥 프로모션이라고 합시다. 나중에 유명해지면 내 상점 광고나 좀 해주는 걸로... 더 고집 부릴 거면 다시 내놓던가. 그런 활을 쓰는 사람이 보통 사람일 리가 없잖아.”

화살을 걸어보기 위해 제황이 꺼내든 스톰레이지를 본 상점주인은 대번에 스톰레이지가 이름 있는 장인의 손에서 탄생한 명품 중에 명품이라는 걸 알아봤다. 특히나 활대에 작게 써진 제작자의 이름을 보고는 대경했는데 에드 마르카넨이라는 장인은 무기를 만들 때 그 사용자를 까다롭게 고르기로 유명한 괴팍한 이였다.

에드 마르카넨이 만든 무기를 가진 사람은 두 종류다. 정말 실력이 엄청난 사람이거나 돈이 썩어서 땔감으로 써도 일 년 삼백육십오일 군불을 땔 수 있는 사람이다.

주인이 전혀 받을 생각이 없어 보이자 제황은 한숨을 내쉬며 마나석을 무한고에 넣었다.

“솔직히 말해서 난 돈 벌만큼 벌었소. 그러니 내 작품들이 좋은 주인 만나 쓰였으면 하는 생각에 주는 거요. 내 감으로는 당신 절대 평범한 헌터가 아니야. 하긴 그런 활의 주인이라면 이미 평범하지 않지. 허허허”

그의 말에 제황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했다. 상인이기 이전에 장인이다. 자신의 작품을 제값 주고 파는 것도 보람차지만 진짜 잘 써줄 사람에게 넘기는 것도 장인의 보람이라고 들었다.

“다시 오겠습니다.”

“기다리지.”

너털웃음을 뒤로 하고 상점에서 나온 제황은 서둘러 걸음을 재촉했다. 밑천이 될 화살을 샀으니 8소대로 돌아가려는 것이다. 비록 제황이 소대원은 아니지만 제황이 동승한다면 거절하지는 않으리라. 그 때 누군가가 제황을 불러 세웠다.

“이봐요! 거기  후드 쓴 양반!”

돌아보니 그 중년의 BJ사내다.

“뭡니까?”

“거... 무지 급하네. 너무 급하게 갈 필요 없어요. 조금 전에 오크들이 진군을 멈췄다더군.”

“진군을 멈춰요?”

“그렇소. 뭐 안심할 상황은 아니지만 일단 멈췄다는 게 중요하지. 그보다 내가 긴히 제안하고 싶은 게 있는데...”

“뭡니까.”

“그 뭐냐. 내가 종군BJ인데 아무래도 이번 전쟁이 꽤 격렬할 것 같단 말이지. 뭐 원래는 함께 다니던 헌터가 있는데 그 헌터가 하필이면 지금 지구로 간 상태인데 이번 전투에는 끼지 않겠다고 해서 말이야. 그래서 그런데 나랑 잠시 동업 어떻소? 내가 당신을 SNS스타로 만들어주지. 수익 잘 쳐줄게.”

“일 없습니다.”

제황은 그를 지나쳐 걸어갔다. 가뜩이나 관심 받는 것도 질색인데 BJ에 SNS스타라니 가당치도 않다.

“어... 이봐요. 거 수익에 5:5 줄게. 아니... 6:4!”

제황은 그의 말을 무시한 채 걸어갔다.

“이거 나만 좋은 게 아니야. 보아하니 정보가 어두운 것 같은데... 저스틴포인트에서만 10년간 BJ해서 내가 이 근방 정보는 완전히 꿰고 있다고...”

그의 말에 제황은 가던 길을 멈추고 그를 돌아보더니 성큼성큼 걸어왔다.

“뭔가 새로운 정보가 있습니까?”

제황의 관심을 가져오는데 성공한 그가 히죽 웃다가 이내 흠칫 놀라 뒤로 후다닥 물러났다.

“스톱! 스톱! 거기서요!”

아까 전 제황의 살기에 노출된 충격이 심했나보다. 그의 말대로 제황이 멈춰 서자 그는 잠시 심호흡을 한 뒤 말했다.

“확 눈에 띠는 정보는 없는데 자잘하게 모이는 정보에서 자꾸  촉이... 뭔가 이상하다고 계속 외치고 있단 말이지. 저스틴포인트에서는 일단 수성으로 가닥을 잡은 것 같기는 한데 뭔가 적극적인 대응이 없어. 그래서 내가 직접 오크 군세를 좀 확인하고 사람들에게 제대로 된 대처 방법을 알리려고 하는데 아무래도 실력자랑 같이 다니는 게 좋으니까...”

그의 말에 제황은 생각에 잠겼다. 그의 말을 무시하고 그냥 8소대에 합류하는 것도 괜찮아 보이지만 자꾸 저 BJ의 말이 마음에 걸린다. 게다가 전투에 있어서 정보라는 것은 절대 무시할 수 없다.

“왜 납니까?”

제황이 물었다. 그러자 그가 히죽 웃으며 주머니에서 4티어 마나석을 꺼내어 흔들었다.

“이런 걸 정보 값으로 던지는 사람이 보통 사람일 리가 없잖소.”

그의 대답에 제황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난 당신을 보호하기 보다는 적극적으로 오크들을 공격할 겁니다.”

제황의 말에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보아하니 원거리딜러 같은데 접전에 들어가면 어차피 신나게 쏴는 것도 시청자들이 좋아하지. 어때요. 할 꺼요? 말 꺼요.”

“SNS 따위는 관심 없습니다.”

“거참 세상 재미없게 사네. SNS스타가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그쪽처럼 분위기 있으면 그냥 여자들이 환장하고...”

“관심 없.습.니.다.”

“오케이... 뭐 그런 헌터들도 있지. 그럼 분배 6:4로 같이 하는 겁니다?”

제황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BJ 달천이오.”

“천제황입니다.”

제황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BJ달천이 손에 들린 카메라를 조작하다가 뭔가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들어 제황에게 물었다.

“SNS가 싫다니 본명이 나가면 안 되겠지? 혹시 닉네임이나 가명 없소?”

그의 말에 제황이 인상을 찌푸렸다.

“거참 까칠하기는 얼굴 안 나가게 할 테니 좀 피쇼. 나도 먹고는 살아야지.”

“킁...”

함께 움직이기로 했으니 어느 정도 따라주는 게 옳다.

갑자기 가명을 정하려니 머릿속에 딱히 떠오르는 게 없다.

궁기가 물었다.

-가명이 왜 필요한데?

-방송에 나갈 때 내 본명 대신 부를 게 필요한 것 같아.

-흠... 그럼 사람들이 그 이름을 너로 보고서 부른다는 건가?

-응.

-그럼 별호 같은 건가. 사람들이 그 별호를 들으면 너를 떠올리는?

-그래.

-그렇군.

한참 머리를 굴리던 제황이 말했다.

“그냥 궁수로 하죠.”

딱히 떠오르는 게 없자 제황은 가장 평이한 이름을 말했다. 그러자 달천이 인상을 찌푸렸다.

“거참, 궁수가 뭐요. 이래서 헌터들은 안 된다니까. 뭔가 팍 임팩트 있는 이름이어야 시청자들이 좋아하지.  흠... 아! 필살! 필살 어떻소. 딱 이미지랑 어울리네. 보아하니 활도 기가 막히게 잘 쓸 것 같은데”

“그냥 평범하게 가면 안 됩니까?”

“이건 양보 못해요. 내가 그래도 고정 구독자가 얼만데  평범한 이름이라니!”

“후우, 알겠습니다.”

상당히 낯간지러운 이름이지만 제황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스쳐 지나가는 이름이다. 중요한 건 닉네임 따위가 아니니까.

“그럼 필살! 잘 부탁합니다. 하하하.”

후회가 밀려오는 제황이었다. 그리고 제황은 앞으로 이 ‘필살’ 이라는 닉네임이 그를 얼마나 따라붙을지 이때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

“후우... 내가 살을 빼던가 해야지. 헉헉...”

제황이 달천과 도착한 곳은 상당히 오래된 콘크리트 고층건물의 철탑부였다.

“여긴 어딥니까.”

“구 레이더 기지요. 폐쇄된 지 10년 즈음 되었는데 이 근방에서 여기만큼 명당이 없지. 튼튼하고 위치도 주전장이 될 북쪽과 가장 가깝고...걸리면 좀 귀찮기는 하지만...”

그의 설명을 들으며 제황이 사방을 살폈다. 확실히 그의 말대로 튼튼하긴 했다. 바람이 좀 불기는 하지만 방벽까지의 거리는 대략 400미터 가량 되어 보인다. 뒤로 우뚝 솟은 철탑을 올려다보고는 가벼운 걸음으로 뛰어 올랐다.

휘이이...

끝이 뾰족한 철탑 위에 서서 밑을 바라보니  저스틴포인트가 한눈에 들어왔다. 아직 거리가 있기에 오크의 군세는 보이지 않았지만 발밑으로 무장버스들이 일렬로 서서 차벽을 설치하는 게 보인다. 차벽이라는 건 간단히 말해 버스들에 장갑을 이용해 벽을 쌓는 것이었는데 무장버스의 기본 장갑 위로 다시금 긴장갑을 덧대는 것이다. 장갑판  사이사이로 30mm 기관포들이 삐죽삐쭉 솟아나 있다.

-제황?

그때 궁기가 제황에게 말을 걸어왔다.

-왜?

-그 필살이라는 웃기는 별호 말이야.

-아. 그래.

뭔가 놀릴 거리를 찾은 것 같은 궁기의 들뜬 목소리에 제황이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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