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사거리 100만-76화 (76/301)

# 76

필살의 제황

"몬스터 웨이브 경보 4등급이다!"

게이트출입대기소를 지키던 모든 군인들이 난데없는 경보음에 출입대기소 한 편에 비치된 초대형 멀티비전에 선명하게 써져 있는 경보 방송을 황망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외쳤다.

"4...4등급? 어째서!"

"빨리 움직여! 4등급이면 역대급이야!"

"게이트를 이용하시는 분들은 질서를 지켜 주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장내에 헌터들은 국가동원령에 의거 모두 소집령이 떨어졌습니다. 외부에 이동수단이 마련될 테니 모두 이동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와앗! 밀지 마!“

질서를 지키라는 군인의 말에도 사람들은 서로 먼저 빠져 나가려고 게이트에 몰렸다. 제황은 일단 대기열에서 빠져 나와 근처에서 사람들을 통제하고 있는 군인에게 물었다.

제황의 생각에 군인들은 아무래도 좀 더 세부적인 정보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된 겁니까."

제황의 복장을 본 그가 진땀을 흘리며 대답했다.

"저스틴포인트 북동쪽 40킬로미터 지점으로부터 미확인된 오크의 군세가 나타났습니다."

“오크요? 정찰소대들은?”

“거기까지는 저도 아직...”

-치익... 추정숫자 5만! 5만이다! 경보 단계를 5단계로 상승시켜!

군인의 헤드셋으로부터 통신이 흘러 나왔다. 제황과 함께 그 통신을 들은 군인의 표정이 핼쑥해졌다.

"5등급... 제...젠장!"

군인은 5등급이라는 말에 패닉에 빠진 듯싶다. 제황도 당황했다.

5등급이라는 건 지구에서는 거의 국가재난상황을 말한다.

더 이상 물을 상황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제황이 빠른 걸음으로 걸으며 스마트폰을 꺼내 들고 박중위에게 전화를 걸었다.

뚜루루룩... 찰칵...

전화기가 꺼져 있다. 몇몇에게 더 전화를 해 본 제황은 모두 전화기가 꺼져 있자 빠른 걸음으로 뛰기 시작했다.

-어쩌려고?

-확인해야지.

짧은 기간이기는 하지만 함께 정을 쌓은 이들이다. 비록 홀로 소집해제가 되어 버렸지만 그들의 생사를 확인하기 전에는 이곳을 떠날 수 없었다.

제황은 게이트출입소를 벗어나 거리로 나섰다. 엘어스 이주민들은 훈련된 대피매뉴얼에 따라 빠르게 소집되어 출입소로 이동을 준비 중이고 한쪽에서는 헌터로 보이는 이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아마 국가동원령에 따라 모인 헌터들 같다.

얼굴에는 짜증과 긴장이 한 가득이다. 장교로 보이는 이가 모인 이들의 헌터라이센스를 보며 신분확인을하고 카드단말기를 가지고 참가자에 등록하기 시작했다.

-삐삑 2성 하이브리드 헌터 천제황...소집 대상자가 아닙니다.

제황의 라이센스를 카드단말기에 넣고 찍은 장교가 놀란 표정으로 제황을 바라봤다. 2성 하이브리드라는 것도 그렇지만 소집대상자가 아니라고 하니 이해가 안 된 것이다.

"사정이 있습니다. 버스만 좀 빌려 타겠습니다."

"아...알겠습니다."

제황의 말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저스틴포인트에는 한 명의 헌터라도 더 필요한 상황이다.

잠시 후 무장버스들이 줄줄이 와서 모인 헌터들을 태우기 시작했고 제황도 그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가 저스틴포인트로 향하는 와중에 장교로 보이는 이가 앞으로 나와 말했다.

-약 5만 가량의 오크군세가 북동쪽 35킬로미터 지점에서 기지를 향해 빠르게 진군 중입니다. 이 무장버스에 타신 헌터분들은 잠시 후 저스틴포인트에 도착하는 즉시 독립소대로 구분되어 개별적으로 작전이 하달될 것입니다.

그 짧은 사이에 벌써 5킬로미터를 좁힌 오크의 군세다.

10여분이 지난 후 무장버스가 저스틴포인트에 도착하자 제황은 그대로 8소대의 주기장으로 뛰었다.

"엇..."

한참 소대원들과 장비들을 점검하던 박중위가 제황이 나타난 것을 보고는 놀라서 입을 벌렸다. 몇 시간 전 송별식까지 한 사람이 다시 돌아와 있는 것이다.

"어쩐 일이야?”

“제황씨 다시 왔네.”

"웨이브 소식 듣고 왔습니다. 그건 그렇고 왜 전화는 안 받으신 겁니까?"

제황의 말에 박중위와 소대원들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가끔 이런 면을 보면 제황이 이제 고작 라이센스에 때 벗긴 새내기라는 걸 깨닫고는 한다.

"경계상황에 들어가는 모든 군인들은 핸드폰을 끈다. 이 녀석아...“

"아아..."

박중위의 말에 제황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 들을 것 같긴 하다.

"상황은 어떻습니까."

제황의 물음에 박중위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안 좋아. 일단 전혀 대비가 안 되어 있는 뜬금없이 나타난 군세야. 북동쪽에서 나타났다는데 그쪽으로는 원래 큰 오크무리가 없었으니까. 추정치가 5만이라는데 그보다 많아질 수도 있어. 오크들은 주변에 있는 크고 작은 오크 무리들을 규합하면서 내려오니까.”

박중위의 설명이 길어질수록 제황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갔다.

"뭘 놀라고 그래. 후후... 그래도 다 막아낼 거다. 예전에 이보다 더 심한 것도 많이 겪었어. 그러고 보니 동원령에 걸려서 다시 돌아온 거겠군. 얼른 가라. 독립소대는 상시로 인원파악을 해서 중간에 없으면 불이익 본다. 어이구 짜식... 운도 지지리 없어. 하루만 일찍 나갔어도 이런 꼴 안 보는데...”

제황이 국가동원령 면제라는 걸 모르는 박중위가 제황의 불운을 안타까워하는 건지 놀리는 건지 피식거리지만 제황은 박중위에 얼굴에 보이는 미세한 불안을 파악했다.

“정말 괜찮은 겁니까?”

“그렇다니까. 자자. 모두 움직여.  얼른 나가서 차벽 설치해야 된다.”

박중위가 소대원들에게 외치자 모두가 우르르 흩어졌다.

제황은 소대원들에 얼굴에 실린 불안감도 읽었다. 더 안 좋은 상황에서도 막아냈다는 말은 맞을 것이다. 그렇지만 얼마나 많은 희생이 뒤따랐는지는 말 안했다.

"소대배치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위에서 전달사항이 있습니까?"

"일단 수성으로 가닥을 잡은 것 같더라. 들어보니 오크들이 사용하는 공성용 목재는 안 보인다고 하더군. 이 부근에서는 큰 나무 찾기 힘들 테니까. 그래도 워낙 군세가 크니 무장버스들의 기관포들이 활용될 거다. 기지 외부를 무장버스로 둘러싸고 1차 방어막을 형성하는 거지. 뚫리면 후퇴해서 본격적으로 수성에 들어가는 거고 저스틴포인트의 화력이면 오크들 껌이야. 탄은 무한대로 공급받을 테니 아주 그냥 이참에 오크 시체로 산을 쌓는 거야."

"그렇군요."

저스틴포인트를 둘러싼 방벽과 곳곳에 자리한 화기들을 떠올린 제황이 고개를 끄덕였다. 각 요충지에는 대공대지 방어에 탁월한 30mm개틀링 기관포들이 최소 두 문씩 자리해 있었는데 어느 방향으로 오든 십자포화가 가능하도록 되어 있었다. 무장버스에서 사용하는 탄을 혼용하는 이 개틀링 기관포는 분량 3천발을 전장에 쏟아 부을 수 있었다.

탄의 비축분과 내부에 비치된 물자도 많아 외부 지원이 없어도 최소 10년간은 거뜬한 게 저스틴포인트다. 특히나 사방에 퍼진 헌터들이 모두 집결하면 그 숫자는 가뿐히 5천을 넘긴다.

생각을 마친 제황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8소대 주기장을 나섰다. 안심하라고 했지만 얌전히 있을 생각은 없다. 어차피 몬스터는 레벨업을 위해서라도 한 마리라도 더 사냥해야 한다. 방어가 튼튼한 곳에서 원거리 공격을 벌인다면 전리품은 없더라도 경험치는 넉넉히 챙기리라.

제황은 상점가로 향했다. 모자란 소모품을 보충해야 한다. 군인의 신분이었다면 전용보급상점에서 저렴하게 구입했겠지만 이제 민간인이기에 상점가를 이용해야 한다.

“상황이 아주 안 좋아. 가급적이면 모두 철수 시켜!”

그 때 어디선가 들려온 남자의 칼칼한 목소리에 제황은 걸음을 멈췄다.

“그래. 깃발이 최소 20개야. 정보가 사실이면 20개 이상의 부족이 뭉쳤다는 건데 20개 이상이면 오크대족장이 아니라 오크군주가 통솔한다고 봐야 해. 숫자도 훨씬 많을 테고... 최근 10년 내 최대 규모야. 장기전이 되면...”

다가가니 야구 모자를 눌러쓴 40대 초반의 허름한 방어구를 걸친 남자가 연신 스마트폰에 소리치고 있다. 어깨에는 큼직한 액션캠을 장비한 그 남자는 오른손에 큼지막한 카메라를 들고 있었다.

“그래. 나는 어차피 저스틴포인트니까 상관없지만 너희는 너무 멀잖아. 그대로 게이트를 빠져 나가. 그래. 그래. 하 거참... 내가 헛소리 하는 것 같아? 지금 여기도 초긴장 상태야. 오죽하면 차벽 깔고 순찰소대를 거기 배치했겠냐. 오크군주면 오크히어로들이랑 오크투사단이 있을 텐데 그것들 뜨면 차벽은 종이벽이야.”

통화 중인 남자에게 제황이 다가갔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어? 어? 뉘슈? 뭐야!”

제황의 복장을 확인한 그가 조금 경계어린 눈초리로 제황에게 되물었다.

“차벽이 종이벽이라는거 말입니다.”

제황의 물음에 그가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전화기에 몇 마디 더 하고는 끊었다.

“그걸 내가 왜 말해줘야 하오?”

그는 사나운 눈빛으로 제황을 올려다봤다. 뭐 틀린 말은 아니다. 그는 제황에게 설명할 이유가 없으니까. 그러나 지금 제황은 매우 급한 상황이다. 그리고 그 이유를 굳이 설명하기 보다는 설명하고 싶게끔 만드는 게 더 쉽다.

후우욱...

제황은 아무 말 없이 그를 노려봤다. 그의 입이 고분고분해 질만큼의 살기만을 집중시켜서...

“허어억!”

살기에 노출된 그는 손을 들어 자신의 심장 부위를 움켜쥐었다. 그러나 노려보는 제황의 눈을 피하지는 못한다. 손끝에서부터 부들부들 떨려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포식자에 노출당한 초식동물의 심정이리라. 그는 이내 목소리를 쥐어 짜내며 말했다.

“마...말하겠습니다. 이...이것 좀...”

그의 말에 제황이 살기를 거뒀다.

“허억허억...”

한참 심장부위를 주무르던 그가 입을 열었다.

“궁금한 게 뭐요.”

“당신이 예상하는 오크들의 정확한 전력”

제황의 물음에 그는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 듯 인상을 찌푸리다가 입을 열었다.

“후우... 젠장 내가 이래서 헌터들이랑 상종을 안...아...알겠소. 그러니까 내가 저스틴포인트에서 BJ질만 10년 넘게 했는데 내가 알아낸 정보로는 이번 오크들의 군세가 심상치 않다고 합니다.”

“심상치 않다는 건?”

“무려 20개 깃발이라는 말이오. 그게 무슨 뜻인지 몰라요? 세력이 20개라는 뜻인데 오크들의 기본 세력은 깃발 하나당 5000부터 칩니다.”

그의 말에 제황의 머릿속으로 짧은 암산이 돌아갔다.

“그럼 10만이 될 수도 있다는 말입니까?”

“이거야. 원... 아무것도 모르는...아... 알았소.”

눈치는 빠른지 제황의 미간이 일그러지는 걸 본 그가 황급히 입을 열었다.

“당신 말대로 10만이 될 수도 있다는 겁니다. 문제는 지금 연락이 되지 않는 순찰소대와 공격대가 있다는 거요. 그게 꽤 광범위 하다는 건 알려지지 않은 군세가 있을 수 있다는 거지. 지구에서처럼 드론도 띄우지 못하고 레이더에 의존하는 이곳에서는 몬스터들이 정보를 교란하는 건 아주 쉬워요.”

“그렇군요.”

10만이라는 말에 제황은 주먹을 꾸욱 쥐었다. 5만과 10만... 단순히 따져도 무려 2배다. 차벽과 기관포가 아무리 강해도 깨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중년남자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게다가 가장 문제는 북동쪽에서 내려온 오크들이라는 거요. 아시다시피 그쪽으로는 오크무리가 없었어. 그럼 뭐냐. 더 북쪽에서 내려온 원정 형식일 수 있다는 건데 그쪽으로는 드라코들의 땅이라는 말이오. 놈들이 드라코들을 뚫고 내려온 건지 아니면 그 둘이 손을 잡았을지 당최 알 수 없다는 거지. 최악의 경우에는...”

드라코... 엘어스를 다스리는 세 개 종족 중 하나다. 비록 그 세가 약하다고는 하지만 엘어스에 사는 종족들 중 고대문명을 가장 많이 이었다고 전해지는 신비한 종족... 게다가 그들은 폐쇄적이라 인간들과의 교류도 전혀 없는 상태다. 만약 그 둘이 손을 잡았다면 ...

“10만의 오크와 드라코들이라는 새로운 적을 맞을 수 있다는 거군요.”

“그렇지. 그리고 그 많은 숫자가 저스틴포인트로 오면 그나마 다행이게... 만약 게이트를 함께 친다면 저스틴포인트는 완전 고립이오. 저스틴포인트가 아무리 크고 방어가 잘 되어 있다고 해도 고립은 위험하지.”

그의 말이 끝나자 제황은 손에 땀이 흥건하게 고인 걸 깨달았다. 그의 말을 들으니  지금 그는 일촉즉발의 전쟁 상황 앞에 놓인 것이다.

“좋은 정보 고맙습니다.”

제황은 무한고에서 4티어 마나석을 하나 꺼내 그의 손에 쥐어준 뒤 뛰기 시작했다.

“어...어! 이봐!”

얼떨결에 4티어 마나석을 받아든 그는 멀어져 가는 제황을 바라보며 외쳤지만 제황은 그의 말을 무시하고 달렸다. 몇 개의 골목을 지나니 그가 원하던 상점이 나타났다. 상점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니 마침 전화기를 붙잡고 큰 목소리로 통화중이던 중년인이 제황을 발견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어...오늘은 장사를...”

“화살 전부 주세요!”

제황이 카운터 위에 4티어 마나석을 올려놨다. 그러자 상점 주인이 마나석을 잠시 바라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소모품류는 금일부로 군수품으로 묶여 거래금지품목에 들어갑니다.”

“이런...”

그의 대답에 제황이 인상을 찌푸렸다. 대략 2천발 남 짓하는 화살이 있기는 하지만 제황의 예상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제황이 생각에 잠기자 상점주인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대체 소모량이 얼마나 되기에 상점에서 제값주고 사려는 겁니까? 헌터라면 좀 더 싼값에 저스틴포인트내 군용상점에서 구매할 수 있을 텐데... 물론 수량제한이 있을 테지만...”

“좀 많이 씁니다.”

좀이 아니라 엄청나게 많이 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