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사거리 100만-75화 (75/301)

# 75

소집해제

휘익..

제황은 머리를 내리쳐오는 수도를 신중이 막아갔다. 지금까지는 제황의 전패였다. 다시금 비슷한 상황이 되자 이번에는 그 수도공격을 우직하게 막아 갔다. 지금까지 이 공격에 대한 대처는 모두 회피였고 결과는 실패였다.

“땡!”

경쾌한 목소리와 함께 수도가 마치 한 마리 뱀처럼 변화하며 제황의 팔을 교묘히 감더니 순식간에 제황의 가슴을 덥석 끌어안고는 하체를 집어넣었다.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매우 에로틱한 자세다. 그러나 당하는 입장에서는 정말 괴롭다. 몸의 균형이 순간적으로 완전히 흐트러지니까.

“호옷!”

파아앙!

“큭...”

짧은 기합성과 함께 제황의 몸이 공중을 휘돌아 땅에 내동댕이쳐졌다.

“넌 아무래도 맨손격투에는 소질이 없나봐?”

“후, 네가 사기인거야.”

몸을 일으킨 제황은 욱씬거리는 팔뚝을 주무르며 말했다. 그녀와 원치 않던 동거를 시작한 지 3일이 흘렀다. 제황은 가급적이면 방을 나서지 않으려 했다. 쓸데없는 소문에 휘말리는 것도 좋아하지 않지만 밖으로 나가면 궁기에게 지속적으로 작업을 걸어대는 놈들도 귀찮다. 지금 궁기는 저스틴포인트 내의 남자들에게 뜨거운 감자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역시 가장 귀찮은 건 같은 8소대다. 자신의 체크카드가 어떤 초미녀와의 데이트에 사용된다는데 광분한 오징어황제 박중위가 광분하는 건 둘째 치고 초미녀와 방에서 무려 3일 동안 두문불출하는 제황을 두고 대체 3일간 미녀와 무슨 짓을 하는지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온갖 야설을 써내려갔다.

“끝났다.”

맨손격투에서 제황이 너무 터무니없게 밀리자 유술대결로 전환한 지 반나절이 흘러 제황과 엉켜  제황에게 용혈무 유술에 대해 배우던 궁기가 그립을 풀며 외쳤다.

“후우...”

그녀의 말에 제황이 자신의 사타구니에 낀 궁기의 발을 풀어내며 물었다.

“끝난 거야?”

“응.”

기분 좋은 미소를 흘리며 궁기가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그녀의 손에 제황의 지갑이 나타났다.

“하아”

궁기에게 지갑을 받아든 제황은 지갑을 열어 내용물을 확인한 뒤 다시금 무한고로 보냈다.

이제 좀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에 안도하는 제황이었다.

제황이 궁기와 함께 이렇게 방안에서 두문불출하며 맨손무술을 연마한 건 바로 궁기가 빠르게 마나를 소모하기 위한 이유가 컸다. 덕분에 일주일 걸릴 게 3일로 단축됐다.

궁기를 돌려보낸 제황은 오랜만에 숙소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박중위에게 빌렸던 카드를 돌려주기 위한 것이다. 인터넷 결제 따위가 되면 좋겠지만 이세계에서 은행업무를 볼 수 있다는 게 대단한 거다. 은행에 들른 제황의 계좌에서 박중위의 계좌로 그동안 썼던 돈을 이체하고 카드를 돌려주려 박중위의 방을 노크하니 방이 열리며 뭔가 불만스러운 표정의 박중위가 서 있었다.

“잘 썼습니다.”

제황이 내민 카드를 받아든 박중위가 말했다.

“재미 좋았어?”

“네.”

구설수도 별로지만 이런 것을 굳이 해명할 필요를 못 느끼는 제황이다. 제황이 가볍게 대답하니 박중위의 얼굴이 팍팍 일그러진다. 지금껏 상상의 나래를 펼쳤던 게 현실이라는 답을 주자 배가 아픈 모양이다.

"쳇... 부러운 놈... 더럽게 부러운놈... 빌어먹을... 그렇게 미녀라며... 한 번 보여주지?"

“갔습니다.”

“하... 쿨하시네요. 그냥 보내냐? 이거 진짜 나쁜 놈이잖아. 쳇 알겠다.  마침 잘 왔네. 들어와.”

“예.”

안으로 들어가 테이블 앞 쇼파에 앉으니 박중위가 손수내린 커피와 한 장의 종이를 가지고 테이블로 왔다.

“이게 뭡니까?”

“개인 포상...”

박중위의 말에 제황은 고개를 갸웃하며 종이를 받아들었다. 포상은 다 함께 받는 건데 개인포상이라고 하니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다.

“최근에 저스틴포인트의 고위 인사가 내게 접촉했다. 저스틴포인트에서는 우리 8소대에 대한 완전한 보호가 불가능하다고 하더군. 정확히 말하면 너...”

“예?”

“내용은 간단해. 너를 이번 사건의 가장 큰 공로자로 지목하고 소집해제 시켜 준다고 하더군.”

그의 말에 제황은 맥이 탁 풀림을 느꼈다.

“보호해 줄 수 없으니 내보내겠다는 거군요.”

“뭐 나쁘게 말하면 그렇지만 네게는 좋은 거야.”

박중위의 말에 제황은 입을 다물었다. 의무복무를 시작한지 이제 고작 한 달도 채 안되는데 소집해제란다. 물론 나쁜 건 아니다. 누가 굳이 의무복무를 하려 하겠는가. 아무리 헌터라고 하지만 자유는 좋은 것이다.

“이미 다른 애들이랑은 이야기가 끝났다.”

“미리 좀 말씀해 주시지.”

제황이 조금 실망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름 8소대원이라 생각했는데 자신만 두고 이야기하다니...

“어제 받은 거야. 그리고 네놈이 미녀와 화끈하게 즐기고 있는데 부르기도 좀 그렇고...아, 너무 실망하지는 마. 절반은 내가 설득한 거니까. 솔직히 말해서 소대장의 입장에서 볼 때 우리 소대는 네 능력을 따라갈 수 없어. 이번 일같이 좋은 일도 있겠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 소대에는 득이 없어. 아니 위험하지. 이해하지?”

“그렇군요.”

제황은 고개를 끄덕였다. 바보가 아닌 바에야 이해가 된다. 제황과 함께할수록 그들은 제황에게 끌려가게 될 테니까.

“알겠습니다.”

제황이 고개를 끄덕이자 박중위가 조금 씁쓸한 표정으로 종이를 호주머니에 넣었다. 사실 소대 입장에서 보면 제황과 손발을 맞추는 게 안 좋기는 하지만 박중위 정도의 능력자에게는 도움이 된다. 자신은 최소한 제황의 발목은 잡지 않을 자신이 있으니까. 그러나 그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도움 보다는 소대원들의 목숨과 관련된 일이다. 제황과 함께 한다면 앞으로 그들의 역량을 벗어나는 숱한 경우와 마주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헌터가 역량에서 벗어나는 일에 직면하면? 불구가 되거나 재수 없으면 뒈지는 거다.

“소집해제 날짜는 앞으로 일주일 뒤야.”

“예.”

고개를 끄덕인 제황이 밖으로 나가자 박중위는 한숨을 내쉬며 제황이 놓고 나간 커피잔을 바라봤다.

“함께하고 싶지만...”

그에게는 목숨을 책임져야 하는 소대가 있었다. 소대를 위한 것... 그러나 그는 이때까지 알지 못했다. 곧 그들 전부의 목숨을 위협할 일이 닥쳐온다는 것을 말이다.

***

어두운 공간에 두 남자가 앉았있다.

“삼위일신의 영광을...”

“좋지 않은 일로 만난 것이 유감이오. 형제여.”

“그렇습니다. 교단과 교주님의 분노가 하늘을 찔렀습니다.”

“이해합니다. 그렇지만 이번 일에 대해서 교단에서 좀 더 신중해 주시길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조금 격앙된 목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이번 일에 관계된 이들 중 권제와 관련된 이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흠, 그 늙은 노괴물과 관련된 이라...그렇다면 입장이 난처하시겠군요.”

“그렇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이번 일과 관련해서 비밀리에 내부감사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설마 제가 지목되지는 않겠지만 저 또한 어느 정도 꼬리를 잘라야 할 판입니다.”

“알겠습니다. 교주님과 교단에는 그렇게 보고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렇지만 이미 시작된 흐름은 거스를 수 없습니다. 예정대로 준비하시길 바랍니다. 설령 권제 본인이 이곳에 있다 해도 삼위일신의 성전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교단에서 오래도록 준비한 일이니만큼 어쩔 수 없는 걸 이해합니다.”

“네. 본래라면 거인의발자국에 분란을 일으켜 이목을 빼앗고 성동격서를 통해 피를 줄이려 했지만 어쩔 수 없지요. 곧 진군이 있을 겁니다. 날짜는 앞으로 일주일 후 정도로 추정 중입니다. 아시다시피 저희가 컨트롤하는데도 한계가 있어서 말입니다.”

“아닙니다.”

“그러니 이제 성도님도 준비하셔야 할 겁니다.”

준비라는 말에 맞은편의 앉은 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습니다. 그때까지 내응에 대한 계획을 보완하겠습니다.”

“예.”

***

“잘가요.”

“나가서 봐요.”

“잘가라.”

이별은 단출했다. 소집해제 전날 모두가 모여 조촐한 송별식을 열어줬다. 대단할 것은 없지만 술집 하나를 전세 내서 밤이 새도록 이야기를 나눴다. 비록 함께한 기간은 짧지만 제황은 그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겨 줬다.

아니 제황 또한 그들과 함께 하며 배우고 깨달은 게 많았다. 궁기가 있었지만 언제나 혼자였기에 타인과 손발을 맞춘다는 게 어떤 건지 몰랐다.

자신보다 훨씬 능력이 떨어지는 이들에 보폭을 맞춰야 했고 수준에 낮춰 힘을 가감해야 했다. 그뿐일까. 박중위가 가르쳐 준 소소한 것들은 아카데미에서 배웠던 것들을 살아있는 지식으로 만들어줬다. 스승이라면 그들도 제황의 스승이었다.

“아아앙! 날 두고 가면 어떻게 해!”

“아...민경아! 정신 좀 차려라!”

가장 아쉬워했던 건 역시 민경이었다. 제황 덕분에 전투공황장애를 벗어났으니 어쩌면 은인이었다. 숙소를 함께 쓴 여인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제황에 대한 연정은 버렸지만 감정은 어쩌지 못하는 것이다.

송별회의 끝이 술에 취한 민경의 대성통곡으로 끝난 건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제황은 다음날 짐을 챙긴 뒤 수속을 마쳤다. 작별을 끝낸 제황은 게이트 출입소와 저스틴포인트를 정기운행하는 무장버스에 올랐다.

저스틴포인트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게이트는 지구의 평양 외곽 야트막한 산에 있는 게이트였는데 평양은 저스틴포인트에서 나오는 몬스터 사체와 지하자원을 통해 제 2의 도약을 하고 있는 도시다.

부우우웅...

무장버스가 멈춰 서자 제황은 버스정류장에 내려섰다. 가장 먼저 보인 건 거대한 게이트출입관리소다. 게이트는 수많은 인적 물적자원이 오가는 창구이기에 거의 작은 공항과 같은 모양이다.

본디는 거대한 요새의 모양이었다고 하지만 사람이 모이고 물자가 모이며 자연스럽게 상업지구가 형성되어 지금은 시가지의 형태가 되었다. 몬스터로 인한 위험으로 인해 외곽으로의 확장은 막고 았지만 조만간 엘어스 내 건축물에 대한 고도제한을 풀려는 노력이 진행 중이라 한다.

안으로 들어서니 세 개의 검색대가 보이고 그 뒤로 긴 줄이 형성되어 있다. 엘어스에서 지구로 넘어가는 사람들은 모두 철저한 검색을 거친다. 행여 금지된 식물이나 신고 되지 않은 희귀광물 등이 넘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황은 헌터이기에 일반인들의 줄이 아닌 헌터 전용으로 만들어진 검색대로 향했다. 헌터에 대한 검색은 의외로 일반인들 보다 약하다. 헌터들은 기본적으로 아공간을 운용하기 때문에 검색이 무용지물이기 때문이다. 물론 단순한 약식 검색은 아니다. 정신탐색 계열의정신계헌터가 상주하기 때문이다.

3성 이하 헌터는 이들의 질문에 거짓을 말할 수 없다. 뭐 그 이상의 헌터라면 굳이 밀수를 할 필요가 없고 말이다.

“금지품목은 소지하지 않으셨죠?”

“네.”

매우 상투적인 문답이 오간 후 제황은 검색대를 지나 안으로 들어섰다.

-3티어 마나석 하나 더 줘.

-게이트 지나서 줄게.

궁기는 얼마 전부터 3티어마나석을 녹이는데 푹 빠져 있었다. 대체 무한고 안에서 어떤 짓을 하고 있는지 거의 12시간마다 한번씩 3티어 마나석을 요구한다. 3티어 마나석이 아무리 가장 하급의 마나석이라도 그 가격은 만만치 않다. 아마 계곡하피들에게서 추출한 마나석이 아니었다면 제황도 마나석 수급에 애를 먹었을 것이다.

-가면 어떻게 할 거야?

-일단 할아버지한테 들러서 인사 드려야지. 동철이도 봐야 하니까.

궁기와 잡담을 나누며 게이트 이용을 위한 신분확인을 마친 제황이 게이트로 들어가는 줄에 섰다. 이제 이 줄이 끝나고 게이트를 통과하면 엘어스는 한동안 안녕이다. 그 때....

위이잉! 위이잉!

게이트 출입소 내에 있는 모든 경보기가 일제히 붉은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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