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
소화불량에걸린궁기
저스틴포인트 지하에는 근무하는 헌터들을 위한 모든 위락시설이 완비되어 있었다. 말 그대로 기지 내에는 하나의 작은 도시가 꾸며져 있었고 이곳에서는 지구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이 가능하도록 꾸며져 있었다. 작은 마트에서부터 하다못해 클럽과 공연장까지 운동장까지 완비되어 있다.
헌터가 생사가 오가는 현장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도 여러 가지다. 어떤 이는 이성의 살 냄새를 맡으며 그것을 잊고 어떤 이는 쇼핑이나 먹는 것으로 그것을 해결한다. 게이트에 들어올 실력의 헌터라면 일정 이상의 자산가이기에 그들이 필요로 하는 건 사치품이건 뭐건 모두 갖추어져 있었다.
고객층이 헌터이다보니 이곳의 물가는 정말 더럽게 비쌌다. 물론 이곳을 이용하는 이들의 씀씀이가 보통이 아니었기에 가능한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그리고 그 상가들 중 하나인 커피와 고급디저트를 취급하는 Dawn 에는 지금 눈에 번쩍 띄는 미녀가 제황이 함께 앉아 있었다.
"하나 먹어봐. 정말 맛있어."
"난 단거별로야."
새로 산 검은색 후드로 얼굴의 절반을 가린 제황은 저런 달디 단 음식을 먹기 위해 굳이 후드를 풀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흠, 그 동안 내가 돌아다녀 본 결과 이 Dawn 의 디저트가 최고야. 밤페이스트가 들어간 몽블랑이랑 이 반짝반짝 윤이나는 르트아루즈...랑 밀푀유가 정말 최고라고 생각해."
쉴 새 없이 제잘 거리고 있지만 아마 세상에 그 어떤 남자도 그녀에게 수다스럽다 이야기하지는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 Dawn의 주변 상가에 숨어 그녀를 훔쳐보는 남자들의 얼굴에는 뭔가 나사하나 빠진 듯 한 표정들이었으니까.
그러나 그들은 차마 그녀에게 접근하지 못했다. 제황이 무서워서? 아니다. 제황은 마치 그녀와 같은 일행이 아닌 듯 행동했다. 오늘 하.루.종.일....
그럼에도 그녀에게 접근하지 못하는 건 저스틴포인트에서 방귀 꽤나 뀐다는 미국소속헌터 한명이 그녀의 앞길을 가로막으며 '예쁜 아가씨 우리 같이 술이나 한 잔'이라고 영어로 작업질을 시작하려다가 앞길을 막아서인지, 아니면 못 알아먹는 영어로 말해서인지 인상을 찌푸린 궁기가 친히 그 헌터의 갈비뼈 수를 세어 주고, 치과 간호사와 새로운 인연을 만들 수 있도록 구강구조를 개조시켜줬으며 날카로운 콧대를 강제 성형수술 시켜줬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그녀의 머리 위를 장식하고 있는 작은 티아라에서 뿜어져 나오는 지배력이 사람들을 접근치 못하게 하는지도 모르리라. 흘러넘치는 위엄 또한 그녀와 잘 어울렸으니까.
뭐 그런 건 다 떠나서...
테이블에 한가득 쌓인 온갖 디저트들을 바라보던 제황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래서 언제까지 그런 상태로 있어야 한다는 거야?"
"글쎄? 네 말대로 아무도 두들겨 패지 않은 채 현신해서 얌전히 마나를 흩뜨린다면 한 일주일? 왜? 불편해?
“응. 무척이나”
머리가 지끈거리는 제황이었다.
목이 타서 입을 가리고 있던 후드를 내리고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냉수를 들이켰다. 이 후드는 참 지겹지만 어쩔 수 없다. 권제 할아버지가 권한 이 후드로 인해 귀찮은 일들은 많이 피했으니까.
“미리 말이라도 하지.”
“내가 내 능력을 너무 과신 한 거지. 설마 그 마나석에 그렇게 많은 힘이 있을 줄 몰랐다니까.”
그의 실수였다. 궁기가 들뜬 표정으로 4티어 마나석 하나만 쓰겠다고 했을 때 말렸어야 했다. 이렇게 심각한 부작용이 있을 줄 알았다면 그는 절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제황은 저주스럽다는 눈빛으로 그녀의 삼단 같은 붉은머리카락에 꽂힌 영롱한 티아라를 다시금 노려봤다.
블러드메리의 티아라-슈페리어 아티펙트
계승자:천제황
재질: 백금, 다이아몬드
지배
정화
도망치던 마지막 목표물의 몸에서 나온 그것은 영국의 국보급 아티팩트였다. 행여 남들의 이목을 살까봐 티아라의 모든 권능이 뭉친 장식물만 남기고 큰 머리핀처럼 꽂은 채 궁기의 힘으로 모양을 변형시켰다지만 아마 영국 헌터들이 이 사실을 알며 입에 거품을 물고 달려들었을 것이다.
지배라는 스킬은 말 그대로 단 1인에 한하여 완전한 정신지배를 할 수 있는 스킬이었다. 아마 그의 친구 마동철을 조종하기 위해 필요한 물건이었으리라.
아무튼 이 티아라는 이름으로 봐서는 영국의 블러드 메리로 유명한 메리1세가 사용하던 티아라 같은데 궁기가 주목한 특수능력은 두 번째 능력인 정화였다.
별 것 아닌 듯 보이는 특수능력이지만 이것은 정말 엄청난 옵션이었다. 마나엔진을 가진 이가 이걸 몸에 지니게 되면 그 소유자는 누구보다 순수한 마나를 몸에 축적하게 된다. 티아라가 몸에 축적한 마나를 정화시켜 가장 순수한 상태로 만들어 주니까.
그렇기에 같은 마나를 쌓더라도 좀 더 강력한 마나를 가질 수 있게 해주기에 단순한 가치로 따져도 억만금을 주고서도 살 수 없는 아티팩트였다. 그런데 이 특수능력이 궁기에게도 매우 유용한 것이라는 게 사건의 시발점이었다.
알다시피 궁기는 제황으로 인해 그 가진바 내단을 모두 소모했다. 그렇기에 다시금 처음부터 마나를 쌓아가야 하는데 그녀에게 이것은 이삼십 년으로 끝나는 작업이 아니었다.
인간과 다르게 그녀는 가장 순수한 마나로 내단을 형성해야 하는데 성급하게 마나를 흡수하면 그녀가 가진 마나가 천천히 변질되어 끝내는 타락할 수 있었다. 그나마 가장 좋은 건 차원이 충돌하기 전 온 세계 곳곳에 나고 자라는 영물들이나 영초 등을 섭취하는 것이었지만 지금 세상에서 그런 것을 찾기란 요원했다.
그런데 그런 그녀에게 순수한 마나를 쌓을 새로운 길이 열린 것이다. 바로 저 티아라로 인하여... 뭐 여기까지는 제황도 순수하게 기뻐해 줬다. 어쨌거나 그녀는 그의 동반자이며 조력자이자 함께 살아가야 하는 운명이었으니까.
문제는 그녀가 처음부터 너무 큰 욕심을 내버렸다는 것이다.
무려 4티어의 마나석을 흡수하려 했던 것... 그 부작용이 지금 눈앞의 성인 모양의 궁기였다.
티아라의 마나정화 능력과 궁기의 마나지배력을 뛰어넘는 마나집약체를 흡수하려 시도한 덕택에 이질적인 마나가 그녀의 영체를 가득 잠식한 상태였고 덕분에 그 마나가 모두 정화되는데 걸리는 시간이 무려 일주일이라는 것이었다. 가장 최악은 지금 그녀가 구현 유지할 수 있는 술법은 인간으로의 둔갑 단 한 가지 였다.
평소 그 무한한 편이성으로 인해 모든 물건을 무한고에 넣고 다니던 제황으로는 그야말로 날벼락을 맞았다. 뭐 어차피 한 짓이 워낙 스케일이 커서 무한정 출동대기 상태니 무기나 화살 관련해서는 상관없지만 제황의 모든 생활비가 든 지갑이 무한고에 들어있었다.
무한고의 유지는 가능하나 입출고가 불가능해졌고 덕분에 요즘 제황이 쓰고 있는카드는 바로 '박중위의 카드' 였다.
'오늘 입에 거품 좀 무시겠군.'
궁기의 먹성을 아는 제황은 그냥 포기해 버렸다. 포기하니 편하다. 어차피 소대는 저번 삼천교 빌런의 테러를 막은 공로를 치하 받았고 많은 현상금을 받았다. 삼천교 빌런들은 현상금도 어마어마했다. 게다가 저스틴포인트에서 지원이 오기 전까지 소대는 전력을 다해 전리품들을 수거했다.
'우리는 깨끗합니다.' 하고 지원부대에 넘길 빌런들의 아이템들을 제외한 몰래 빼돌린 아이템만 처분해도 수십억은 거뜬히 넘어갈 것이다. 게다가 계곡하피들은 3티어 몬스터이기에 최하급이기는 하지만 백여 개가 넘는 3티어 마나석을 가졌다. 저스틴포인트에 넘길 양을 제해고서도 비록 꽤 많은 부분을 제황이 가져갔지만 나머지 소대원들이 챙긴 것도 모두 수억씩은 챙겼다. 하물며 박중위는? 정말 배부르게 챙기셨다. 건물주 어쩌고 하면서...
"그건 그렇고 동철이는 잘 있으려나."
턱을 괜 채 궁기가 우아한 동작으로 온갖 디저트들을 입에 쓸어 넣는 것을 감상하며 제황은 그의 친구 마동철에 대한 일로 생각에 잠겼다.
지원이 오기 전 마동철에 대한 것을 소대원들에게 설명하고 무장버스에 그를 숨기기는 했지만 의무복무 중인 제황으로서는 깨어나지 않는 마동철을 무한정 데리고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제황은 SOS를 청했다. 바로 가급적이면 부탁을 하고 싶지 않았던 권제 할아버지에게 말이다. 제황의 부탁은 아주 빠르게 처리되었다. 전화를 하고 딱 반나절 만에 권제가 보낸 이들이 관처럼 생긴 물건을 가지고 와 마동철을 챙겨 가버렸다.
물론 공짜는 아니었다.
마동철을 돌보고 마동철의 몸을 정상으로 되돌려준다는 조건으로 제황은 나중에 권제의 부탁을 하나 들어주기로 약속했다. 사실 제황이 가급적 권제의 손을 빌리지 않으려 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아무리 권제가 할아버지의 지인이라도 권제는 기본적으로 냉혹한 지배자였다.
수십 년간 대한민국 헌터계를 좌지우지하던 인물... 그런 인물이 제황이 부탁한다고 그냥 허허거리며 수염을 쓰다듬고 고개를 끄덕일 그런 인물은 아니었다. 권제는 제황을 대함에 있어 뚜렷한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
아마 제황이 그의 기대를 뛰어넘는 무서울 정도의 재능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면 제황을 친히 자신의 손자라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냥 생명의 은인의 가족 정도가 아니었을까? 그렇기에 제황은 권제를 가까이 하면서도 또 일정 거리를 유지하려 노력했다. 비록 이번 사건으로 어쩔 수 없이 신세를 지게 되었지만...
"괜찮을 거야. 그 늙은이 속에 구렁이 100마리를 키우고 있긴 하지만 널 대할 때는 항상 진심이었으니까."
"오히려 그게 더 두려운 거야. 자신의 하는 일이 옳다라고 믿는 사람... 하물며 그게 권제 할아버지와 같은 절대자라면 내가 할아버지의 손아귀에서 숨이라도 쉴 수 있을 것 같아? 그리고 웃기는 소리지만 난 절대 인간을 믿지 않아."
"나 빼고 말이지?"
궁기가 과장되게 웃으며 제황의 얼굴을 은근히 바라보자 제황은 풋 하고 웃으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궁기는 믿을 수 있다. 아마 제황이 악인의 길을 걷는다 해도 따라와 줄 것이다.
"그래. 너 빼고..."
"호홋..."
제황의 말에 궁기가 화사하게 웃었다. 주변이 환하게 빛나는 느낌... 그녀는 정말 천의 얼굴을 가졌다. 지금처럼 환하게 웃을 때는 마치 한 점 티 없는 영혼의 소녀와 같고 요염하게 웃을 때는 넘쳐흐르는 교태와 섹시함으로 제황마저도 가슴이 두근거리게 만든다.
분노할 때는 성난전사와 같으며 제황을 가르칠 때는 현기가 넘쳐흐르며 엉뚱한 짓을 할 때는 장난꾸러기 같다. 약간 푼수기가 가미된...
"반하지 마라. 호호..."
궁기가 입꼬리를 삐죽 올리며 오만한 여왕의 표정으로 제황을 바라봤다. 그녀 머리 위의 티아라가 묘하게 잘 어울린다. 하긴 그녀의 진신체는 여왕이나 마찬가지다.
“넌?”
“난 반했지.”
궁기와 같은 미녀가 스트레이트로 치고 들어오면 정말 답이 없다. 그렇지만 궁기는 이미 다블 아는 듯 피식 웃을 뿐이다.
그녀와는 이심전심이다. 숨기려야 숨길 수 없는 아니 이제 숨길 것도 없는 관계다.
아침에 일어나 제황의 그것을 보며 '어머 오늘 텐트는 대형인데?' 하고 농담도 날린다.
"내가 반..."
입을 떼던 제황은 문득 다른 이가 그들의 근처로 접근하는 것을 느끼고는 입을 다물었다. 그다지 반갑지 않은 기척이다.
"안녕?"
궁기와 제황이 앉은 테이블의 곁으로 한 여인이 다가와 제황을 향해 가볍게 손을 들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친했던 이처럼... 전투복 안에 받쳐 입는 몸에 착 달라붙는 검은색의 슈트 위에 가벼운 조끼와 날씬하고 긴 다리에 스키니진을 입은 그녀는 긴 머리카락을 허리까지 늘어뜨리고 있었다. 여자의 인사에 제황이 슬쩍 그녀를 쳐다보더니 고개를 갸웃 했다.
"음. 안녕."
그녀는 바로 제황의 오래 전 연인 한수지 였다.
"특이하네. 넌 이런 절대 곳에 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뭐 어쩌다보니..."
그녀의 말에 제황은 어깨를 으쓱했다. 딱히 궁기가 졸라대지 않았으면 절대 오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따분하게 앉아 시간을 죽인다는 건 제황의 성격상 어울리지 않았다. 차라리 이 시간에 용혈기를 한 번 더 돌리고 말지.
"이분은...?"
수지가 궁기에게 고개를 슬쩍 숙이며 물었다. 그녀의 물음에 제황은 잠시 그녀를 어떻게 소개할까 망설였다.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기에는 오해의 소지가 좀 있다. 그러나 제황의 그런 고민은 궁기가 가볍게 치워버렸다.
"영혼의동반자"
몸을 뒤로 뉘이며 긴 다리를 슬쩍 꼬는 그녀의 표정에 교태가 가득하다. 주위에서 그녀를 훔쳐보던 남자들의 숨넘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만지면 하얀 분이 묻어날 것 같은 뽀얀 허벅지가 살짝 드러나자 뇌쇄적인 아름다움이 폭발했다.
"영혼의...동반자?"
그녀의 말에 수지의 말문이 막혔다. 제황을 슬쩍 쳐다보는 제황 또한 그녀의 말에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 사실이라는 뜻이다.
"여...영혼의 동반자라면...?"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조금 말을 더듬거리고 말았다.
"저기...수지야?"
그때 제황이 수지를 쳐다보며 말했다. 수지는 제황이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자 마치 그의 눈빛에 감전이라도 된 것 마냥 움직일 수 없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제황의 눈빛이 너무나 무감각하다. 같지만 틀리다. 아니... 같다. 사랑했던 자신 외의 타인을 바라보던 그 눈빛과...
"지금 좀 심각한 이야기 중이니까 다음에 만나서 이야기 하면 안 될까?"
"아... 으응. 미안...방해해서... 응..."
제황의 말에 수지는 자신도 뭐라고 횡설수설했는지도 모른 채 서둘러 그곳을 빠져 나왔다. 머릿속이 너무 복잡했다. 사실 이 만남이 의도적인 건 아니었다. 음료를 사러 왔다가 남자들이 모여 있어 호기심에 와 봤던 거니까. 그러나 카페에서 발견한 제황이 후드를 벗고 맨얼굴을 드러냈을 때가 문제였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카페에 발을 들이고 있었다. 그의 입가에 걸린 작은 미소가 너무 눈부시고 또 애가 타도록 그리웠다. 한때 그 미소의 주인은 오롯이 자신이었다. 다른 이성에게는 절대 보이지 않았던 미소... 그런데 지금 그녀는 그 다른 이성들이 어떤 기분이었을지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사실 그녀는 제황과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너무 많았다.
제황을 다시 만났을 때 마치 과거로 시간여행을 떠난 느낌이 들었다. 그는 여전히 찬란했고 눈부시게 빛나는 보석이었다. 참을 수 없었던 그녀는 제황에 대해 알아봤고 그가 디바우저로 각성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4년 전 제황이 여름과 겨울방학이면 항상 가던 시골에 언제나처럼 수련을 떠났을 때 그녀에게는 엄청난 일이 벌어졌었다. 바로 그녀가 디바우저로 각성하게 된 것... 난리가 났었다. 그녀의 능력을 알아본 유수의 클랜들이 접촉해 왔다. 수많은 쟁쟁한 이들이 선물을 싸들고 그녀의 집에 찾아왔다. 그 일로 작은스포츠용품기업을 운용하던 부모님은 야망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