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사거리 100만-71화 (71/301)

# 71

낯선 곳에서 만난 친구

"헉헉..."

그는 전력을 다해 달렸다. 어서 교단에 이 충격적인 사실을 알려야 한다. 무려 개척성지 하나의 모든 병력이 단 한 인물로 인해 전멸해 버렸다. 물론 계곡하피여왕을 공격한 건 박중위지만 그가 생각하기에 그 또한 저 6성원거리딜러의 소행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이...원수는...크윽..."

그는 비통한 심정을 삼키며 걸음을 재촉했다. 6성헌터가 뒤를 쫓는다는 생각에  자신의 이동 경로를 철저히 숨기며 흔적을 교란했다.  강목사의 수족으로 일하며 온갖 궂은일을 해왔기에 도주와 추적에 대해서는 그도 일가견이 있었다.

"이 정도면... 후우...후우..."

그는 바닥났던 마나가 어느 정도 차오르자  걸음을 멈췄다. 사실 그가 피해야 하는 건 6성헌터 뿐만이 아니었다. 지금 그가 있는 곳은 3티어의 습지멧돼지가 출몰하는 곳이다. 3티어 몬스터의 공격이 두려운 것은 아니었지만 습지멧돼지를 주식으로 삼는 4티어의 습지트롤이 꼬리에 붙으면 정말 위험했다. 습지트롤은 습지 사냥에 정통한 사냥꾼들로 이곳에서 습지트롤에게 걸리면 그 때부터는 휴식 없이 도망쳐야 했다.

다행이라고 할 건 지금 이 경로는 개척성지까지의 이동로로 사용하는 바람에 인간의 흔적이 많아 몬스터들이 자연적으로 피한다는 것이었다.

"이제 조금만..."

슉.. 퍽...

아공간에서 수통을 꺼내 입을 헹구던 그 때 그는 순간 귀에서 이명이 들린다는 걸 깨달았다.

"응? 뭐.. 어엇..."

갑자기 몸에 힘이 빠져 갔다. 이상현상에 손으로 머리를 매만지니 이마에 뭔가 날카로운 게 만져졌다. 그것은 앞이 날카로운 것이었는데 그것이 어떤 것이라는데 결론을 내기 보다는 검게 변하는 시야 속에  그대로  머리를 습지에 처박았다.

"사냥 끝."

그의 머리에 돋아난 화살 위로 한 마리 붉은매가 사뿐히 내려앉았다.

"흐음... 그러게 조심했어야지. 차라리 곧장 도망쳤으면 사거리에서 벗어났을 텐데..."

궁기는 뒤통수에 애기살을 얻어맞고 죽은 시체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사내가 실수 한 것은 세 가지였다. 첫째는 쓸데없이 빙빙 돌아 움직였다는 것... 사실 사내가 움직이는 내내 사내의 머리 위에는 궁기가 있었다. 단지 제황의 마나가 모자라 공격하지 않았을 뿐이다. 두 번째 결정적 실수는 자리에 멈춰 섰다는 것이다.

아무리 제황의 화살이 멀리 날아간다지만 그 거리가 길어지면 불안정성이 높아진다. 화살의 지배력이 흔들리는 것... 그래서 빠르게 움직이는 것은 맞추기가 힘들다. 그런데 사내는 자리에 멈췄다. 그 순간이 자신이 죽을 시간인 줄 모른 채....

마지막 세 번째는 제황의 집요함을 몰랐다. 제황은 한 번 사냥감으로 찍으면 그것에 상당히 집착하는 성미가 있었다. 일단 한 번 찍으면 사냥이 끝날 때까지 쉬지 않는다. 포기하지도 않는다. 끝까지 쫓고 쫓아 마무리 지어야 직성이 풀린다. 엘어스에 단 둘이 떨어졌을 때도 제황은 한 번 찍은 사냥감은 위험을 감수해서라도 완전히 끝장을 내야 그날 밤 잠을 제대로 잤다.

-얼른 와.

-알았어.

공유하는 시야를 통해 사내가 확실히 죽은 걸 확인한 제황이 궁기에게 돌아올 것을 재촉했다. 궁기를 실체화하는데는 마나가 필요하다. 특히나 지금처럼 멀리 날아온 경우에는 소모되는 마나가 만만치 않다. 날아오르려던 궁기는 문득 사내의 옆에 떨어져 있는 빛나는 물건을 발견하고는 고개를 갸웃 하며 다가갔다.

그것은 백금으로 되어 가운데 다이아가 박힌 작은 티아라였는데 왠지 모르게 범상치 않은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티아라가 내뿜은 기운을 잠시 가늠한 궁기가 빙그레 웃었다.

"좋은 걸 가지고 있네."

궁기는 사내가 가지고 있던 것들을 발로 툭툭 건드려 샅샅이 확인했다. 잠시 후 티아라 외에는 대단한 게 없다는 걸 확인한 뒤 티아라를 입에 물고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그건 뭐야?

궁기안으로 시야를 공유하는 제황이 물었다.

-재미있는 기운이 느껴져서... 어쩌면 내가 좀 더 빨리 강해질 것 같다.

***

“이야...으스스하네.”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성규가 질린 얼굴로 입을 열었다.

“흐으으...”

민경은 그 동안 잠잠해졌던 공황장애가 다시 돌아올 것 같은 기분에 오들오들 떨었다. 사방에는 찢긴 살덩어리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여럿이 죽은 곳은 땅을 밟자 발자국에서 붉은 피거품이 올라왔다. 대체 얼마나 많은 피가 스며들었는가.

“조용히 해라.”

선두에 선 박중위가 날선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말에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보통 녀석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박중위는 지금 머릿속이 복잡했다. 워낙 갈기갈기 찢겨 사방에 흩어져 있지만 오랜 경험을 가진 그는 금세 상황을 판단할 수 있었다.

“나무에 박힌 것들은 피가 굳은 상태에서 하피들이 들고 찢었다.”

박중위의 넋두리 같은 말에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나무에 시체를 박아 넣은 화살들의 주인이 누군지는 쉬이 짐작이 되기 때문이다.

“대체 몇을 죽인거야.”

교란임무를 지시했던 박중위는 그놈 참 시끄럽구나 하거 좋아했는데 막상 내려와서 보니 거인의발자국에 울려 퍼지던 곡소리는 모두 제황의 소행이었다. 후방교란이 아니라 그냥 사냥을 해버렸다. 그 방법도 잔인했다. 분명 첫 살인이라고 했는데 그 손속에 사정 따위는 없었다.

“싸이코패스냐.”

첫 살인에 이 정도 인간을 죽이고서 정신이 멀쩡하다면 그 또한 문제다.

지금 제황을 마주쳤을 때 제황이 자신들을 적으로 판정한다면? 운 좋아도 최소한 둘은 죽는다.

아니 제황이 삼천교의 빌런들을 사냥하듯 대한다면 몰살은 기정사실이다.

“모두 장비 챙겨라. 재수 없으면 이 참상을 만든 막내랑 한 판 붙을 수 있다.”

박중위의 말에 모두가 침을 꿀꺽 삼켰다. 제황의 능력이 보통이 아니라는 건 이미 모두 알고 있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지금 그들의 눈앞에 놓인 참상이 대변해 주니까. 무려 활 한 자루로 4킬로미터 저격을 날리는 인간이다. 도망치는 건 일찌감치 포기해야 한다. 그런 인간과 싸울 수 있다고 하니 삼천교의 빌런보다 그가 더 두렵게 느껴졌다.

그러나 여기는 박중위가 모르는 게 하나 있었다. 그것은 제황의 혈통에 기억되어 있는 ‘신벌의 집행자’ 의 피가 각성을 시작했다는 것과 제황의 용혈기에는 본래 그런 오욕칠정의 감각을 마비시키는 기능도 있다는 것이다. 신벌의집행자가 가져야 할 가장 큰 덕목이 무었일까.

그건 바로 무정이었다.

“저기군.”

박중위가 가장 먼저 제황의 기척을 찾았다. 다가가니 거목에 등을 기댄 채 앉아 있는 제황이 보인다. 제황을 향해 가다가던 박중위는 제황의 앞에 한 사람이 누워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아니 그게 사람이 맞을까? 일단 덩치 자체가 엄청나게 컸는데 마치 미이라처럼 삐쩍 말라 있었지만 가슴에 기복이 있는 걸 보면 시체는 아니다.

“혜지야.”

제황에게 다가가기 전 박중위는 양혜지를 불렀다.

“예.”

“식별...”

“네.”

박중위의 말에 양혜지가 굳은 표정으로 전방을 스캔했다. 그녀의 능력 중 하나인 ‘적아식별’ 이다. 만약 제황이 그들을 적대시한다면 붉은 표시가 뜰 것이다.

“괜찮아요.”

“하아...”

양혜지의 말에 소대원들은 일제히 격한 한숨을 내쉬었다. 모두 내심 긴장하고 있었다.

박중위가 먼저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제황이 고개를 들어 박중위를 바라봤다.

“아...”

박중위는 저도 모르게 감탄을 내뱉었다. 마주 바라본 제황의 눈이 너무나 투명했다. 저 수많은 인간을 죽인 이의 눈빛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이 맑다. 잠시 혼란에 빠졌던 박중위는 이내 마음을 다잡고 제황에게 말했다.

“괜찮냐?”

박중위의 말에 제황이 고개를 갸웃했다. 일순 박중위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끙...”

박중위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차라리 다른 놈들처럼 사람 죽였다고 질질 짜거나 일시적으로 정신착란이라도 일으키면 얼마나 좋은가. 그럼 판단하기도 쉽고 해결도 쉽다. 그런데 이놈은 디바우저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반응도 독특하다.

박중위가 천천히 제황과 시선을 맞췄다. 현실을 인식시켜야 한다. 그래야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는 것이다.

“잘 들어. 넌 지금 무려 30명 이상의 인간을 죽였다. 30명이라고...”

“아...”

박중위의 말에 제황이 무슨 뜻인지 알아차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처음에 작게 끄덕이더니 이내 크게 끄덕인다.

‘빌어먹을...’

제황의 반응에 박중위는 깜짝 놀라 두 다리에 마나를 집중시켰다. 상상하던 최악의 상황이다. 자신이 벌인 살육을 이제야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다면 발작의 시작이 지금일 수도 있다. 재수 없게 아직 터지지도 않은 시한폭탄을 건드려 버린 것이다.

“모두 물러...”

박중위가 외치려 할 때 제황이 박중위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저기 박중위님.”

“흡!”

제황에게 어깨를 붙잡힌 박중위는 자신의 실수를 자책했다. 그의 무기는 바스타드소드다. 그런데 어깨를 잡혔다는 건 검을 뽑을 겨를도 없이 당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박중위가 다음 행동을 취하기 전 제황의 입이 먼저 열렸다.

“제가 괜찮은 이유는 스킬 때문입니다.”

“응?”

뜬금없는 말에 박중위가 순간 멈칫했다.

“무슨 말이야?”

“스킬입니다. 부동심이라고... 정신 충격은 다 막아내죠.”

“허...”

제황의 말에 박중위의 다리가 탁 풀렸다. 부동심... 그도 알고 있는 스킬이다. 스페셜 등급의 스킬이던가. 안심이 된 박중위가 상황해제를 알리는 손짓을 하자 소대원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제황은 그런 소대원들을 바라보며 쓴웃음을 삼켰다. 이런 상황은 이미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궁기도 경고했던 것이니까. 그래서 차라리 거짓말을 하는 것으로 했다. 스킬이라고 하면 거의 설명이 된다. 물론 거짓말로 말한 부동심이라는 스킬은 굳이 필요없다. 제황이 보유한 궁기안에는 정신보정 능력도 있으니까.

“아아... 피곤하다. 일단 좀 쉬자. 그건 그렇고 이건 뭐야?”

박중위가 동철을 발끝으로 톡톡 치며 물었다. 그러자 제황이 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친구요. 오랜만에 만났네요.”

***

거인의발자국에서 있었던 삼천교 빌런들의 대규모 준동은 의외로 사회에 많은 반향을 일으켰다. 물론 빌런들의 테러가 하루 이틀이겠냐 마는 이번 테러에 투입된 빌런의 숫자가 거의 300명에 달한다는 것과 그들이 삼천교국이라는 괴뢰국을 표방한다는 점에서 최근 인터넷과 언론에 불거지고 있는 정치세력과 결탁한 대법원의 민낯이 공개된 사건을 덮을 호제로 생각했다.

그런 이유로 군과 결탁한 대한민국의 정치권은 이 사건을 의도적으로 부풀리려 노력했고 8소대를 전면에 내세워 영웅화 시키려 노력했다.

다행이라고 할 건 8소대가 한미연합기지인 저스틴포인트의 소속이라는 것이었는데 미국에서는 8소대원 개개인의 인권과 안전을 위해 해당 소대에 대해서는 모든 정보 공개가 불가하다는 지시를 내렸다. 게다가 공동으로 관리하는 한국 쪽 인물들도 대쪽과 같은 이들이라 정부와 군고위층의 압력을 가뿐히 무시했다.

그러자 8소대를 이용해 여론몰이를 하려던 정치권과 언론은 연일 위 사건에 대해 파악하려 이곳 저곳을 들쑤시고 다녔다.

대한민국 서울 청담동의 한 커피숍 밀실에는 두 남녀가 테이블을 마주한 채 앉아 있었다.

남자는 머리를 짧게 깎은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젊은 남자였는데 표정에는 뭔가 모르게 불안함이 역력했고 반대편에 앉은 여자는 4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짙은 화장의 커리어우먼이다.

여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김소위님의 어려운 결단에 감사드려요."

그녀의 말에 맞은편에 앉은 남자의 얼굴이 살짝 울긋불긋 해진다.

지금 그는 여자의 가증스러움에 속으로 치를 떨고 있었다.

"기자증 먼저 보여주시죠."

"호호... 군인이라서 그러신지 많이 철저하시네요."

그녀는 과장되게 웃으며 속주머니에서 은색의 플라스틱 카드를 꺼내 탁자에 내려 놓았다.

'뉴마드페미뉴스 -저널리스트 박아람...'

3류 찌라시 소리를 듣기는 하지만 여성계에서는 꽤 인지도 있는 인터넷 언론이다.

카드를 들어 앞뒤를 꼼꼼히 확인한 그는 한숨을 푹 내쉬며 카드를 여자에게 돌려줬다.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인터뷰를 시작하죠. 참고로 오늘 말씀해주시는 모든 이야기는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이보쇼."

"네?"

"적당히 합시다. 당신 내가 여기 무슨 마음으로 나온 지 모르고 지껄이는 거야?"

남자는 이를 갈며 말했다. 사실 그의 신분에서 기자는 절대 만나서는 안 되는 부류 중 하나였다. 그 자신이 저스틴포인트의 정보장교로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최근 특별지시가 내려져서 보안이 더욱 강화되었다. 그런 와중에 이렇게 기자를 만난다는 건 자칫 군복을 벗어야 하는 사태까지 초래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오늘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약 2개월 전 나이트클럽에서 원나잇으로 즐긴 여자가 다음날 아침 그를 성폭행범으로 고소하면서 그의 인생은 완전히 끝날 뻔 했다.

다행히 여자가 고소를 취하하는 조건으로 1억을 요구했고 울며겨자먹기로 돈을 주는 선에서 잘 마무리 했던 것... 그런데 바로 어제  기자라는 사람이 그 사건을 들먹이며 그에게 만남을 요청했다. 만약 만나주지 않을 시 그 사건을 세간에 알리겠다는 은근한 협박과 함께...

"어머 그러게 왜 그런 파렴치한 죄를 저지르셨어요."

여자의 눈이 초승달처럼 휘며 주름이 자글자글하게 잡힌다.

“이봐! 그때 난 술에 취해 내가 그런 짓을 한 지도 몰랐어! 아침에 일어나보니... 후우...빌어먹을... 당신 그 정보는 어떻게 알아낸 거지?”

남자는 여자를 추궁했다. 분명 여자에게 1억을 넘겨주며 이번 일과 관련하여 함구하고 어떤 법적인 조치도 없을 거라는 각서도 받았다. 그런데 왜 그 사실을 이 기자가 알고 있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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