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사거리 100만-64화 (64/301)

# 64

숲속의 호랑이

“그런데 우린 어떻게 쫓아왔어요?”

지나가 물었다. 자신들은 이곳을 향해 곧바로 왔지만 감시자 넷을 발견한 것도 모자라 그 중 둘을 잡아오기까지 했다. 오는 와중에도 계곡하피들의 이목을 피하랴  최대한 흔적이 남지 않도록 한 채 기도비닉도 유지하랴  신경 써서 온 건데 제황은 곧장 그들의 뒤를 따라온 것이다.

“흔적 쫓아 왔는데요?”

제황은 그게 뭔 대수냐는 듯 대답했지만 그 성의 없는 대답은 소대원들이 자신들의 능력에 대한 회의감에 빠지도록 하는데 충분했다. 발자국도 남기지 않기 위해 일부러 바위 부분만 골라 밟고 남은 흔적들은 깨끗이 지웠건만 제황은 그 수고로움을 별로 의식하지도 않는 느낌이다. 마치 따라온 게 무슨 문제냐는 투로 말하며 소대원들을 자괴감에 몰아넣고 있었다.

"난..포기.."

"나도 포기..."

소대원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더 이상 평범한 잣대를 대는 것도 우습다.

"쩝..."

소대원들의 이상한 행동에 제황이 입맛을 다셨다.

물론 그들의 추적은 제황에게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운 일이었다. 궁기안이 화살표로 친절하게 가르쳐 줬으니까.

"성규야. 이거 두 개도 가져가서 정보 좀 잘 짜내봐."

"알겠습니다."

박중위의 말에 성규가 제황으로부터 두 팔과 두 다리가 부러진 걸레쪼가리들을 가볍게 받아들었다.

"소리 안 나게 재주껏 짜내보고..."

"예."

그 말과 함께 박중위가 소리 없이 목을 긋는 시늉을 하자 성규는 살기 띤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박중위와 함께 가장 오랜 경력을 지녔기에 그와 박중위는 이심전심이다. 다른 종류의 빌런들이라면 모를까 광신도 빌런들은 구제불능이다. 게다가 아까 전 이들이 벌인 참상을 목도했기에 그들의 마음에는 조금의 자비도 남아있지 않다.

균열의 안쪽은 상당히 넓었기에 성규는 취조술을 배운다며 따라붙은 민구와 함께 팔다리가 부러진 세 감시자를 데리고 안쪽으로 사라졌다. 저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 지는 관심 끊는 게 좋다.

8소대는 균열 안쪽으로 은신처를 마련하기 시작했다. 외부에서 관찰하기 힘들도록 이중으로 장소를 엄폐하고 안쪽에는 각자 아공간에서 꺼낸 침낭과 장비들로 채웠다. 은신처 정리가 끝나고 사방이 어두워질 무렵 균열 안쪽에서 성규와 민구가 돌아왔다. 들고 갔던 셋이 보이지 않지만 아무도 그에 대해 묻지 않는다. 동정의 가치도 없다.

성규가 알아온 정보를 모두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들이 개척성지라고 부르는 빌런들의 전진기지 위치와 본대의 위치 그리고 이번 습격에 동원된 빌런들의 숫자가 대략 150을 넘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해야 하는 건 삼천교 놈들의 정확한 병력과 개척성지의 위치 그리고 본대의 위치를 저스틴포인트에 알리는 건가.”

“내부에 내통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양혜지가 덧붙였다.

“음...맞아. 그렇지.”

박중위가 혀를 차며 말했다. 그는 지금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사실을 알리면 증원병력의 도착도 늦어질 것이고 그러면 8소대의 위험은 더 가중될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무전을 하는 순간부터 이곳도 그리 안전하지 않게 된다.

“캡... 죄송하지만 다른 문제도 있습니다. 여기서는 무장버스로 전파가 닿지 않습니다. 무전을 하려면 전파가 닿는 곳까지 움직여야 합니다.”

피지가 말했다. 그의 말에 박중위가 한숨을 내쉬었다. 쉬운 일이 없다. 그들이 저스틴포인트와 통신을 나눌 때 무장버스의 통신시설이 중계역할을 하는데 절벽의 균열에서는 전파가 닿지 않는 것이다.

“그건 이따 나와 적당한 때 함께 나가서 하지.”

“알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전파를 보내면 지원병력이 언제나 도착할까?”

"제 예상으로는 이틀입니다."

지구에서처럼 지원병력의 공중투사는 바랄 수 없다. 비행몬스터가 워낙 많기에 자칫하면 더 큰 대형참사가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반나절은 더 잡는 게 속편하겠군."

"상대가 모른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알리긴 해야 해. 저들은 범죄를 저지르고 도망치는 게 아니라 지원병력을 잡아먹으려 숨어있는 놈들이야.”

“내통자가 누군지도 문제입니다.”

“그래. 그것도 중요하지.”

여러 의견이 오갔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정보는 너무 단편적이었고 아군의 숫자는 적다.  일단은 휴식을 취하기로 잠정 결론이 났다. 각성자들이기는 하지만 잠을 자지 않으면 전투력이 떨어지는 건 일반인과 마찬가지다. 모두가 침낭에 들고 불침번을 나눌 때 제황이 박중위에게 걸어왔다.

"박중위님."

"아. 그래. 무슨 일이지?"

제황의 부름에 답하는 박중위의 목소리에 신뢰가 담겨 있었다. 이전에도 그 능력을 의심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이곳에서 보여준 제황의 모습은 앞전의 것을 아득히 뛰어넘는 것이었다. 아마 소대가 아닌 제황 개인이라면 혼자서도 자유롭게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다.

"혼자 야간정찰을 나가고 싶습니다."

제황의 말에 박중위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다른 이였다면 미친 소리 하지 말고 잠이나 자라고 하겠지만 제황의 능력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것이다. 사실 지금 상황에서 꼭 필요한 게 야간정찰이다.

적들이 이곳의 지리를 잘 아는 놈들이니만큼 불침번 하나 세우고 편하게 잠이 들 수는 없으니까. 그렇지만 그 일을 제황에게 떠넘기는 게 못내 마음에 걸리는 박중위였다.

"괜찮겠어?"

많은 뜻이 함축된 물음이다.

"예."

제황이 단호히 대답하자 박중위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혼자 나가서 쓸어버릴 생각인가?”

박중위의 말에 제황이 살짝 놀라 마주 바라봤다.

“뭘 놀래. 지금까지 보인 네 능력이라면 충분하지. 그리고 그 정도 예측은 누구나 한다고...”

그럴 능력이 없어서 그렇지 만약 자신이 소대를 이끄는 입장이 아니고 또 능력이 된다면 자신 또한 제황과 같은 생각을 할 것이다.

“놈들의 행위가 화나나?”

박중위의 말에 제황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그렇지만 굳이 그 이유가 아니라도 나갈 이유는 많습니다.”

제황이 침중한 표정으로 말했고 그 말에 박중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이곳에 숨어들기는 했지만 이것도 임시방편이지. 아마 저들은 우리가 어디 즈음에 숨었을지 곧 파악해낼 꺼야. 뭐 계곡하피 때문에 곧장 공격해 오지는 않겠지만... 이 때 한 번 야습으로 뒤흔들어 주는 건 정말 괜찮은 방법이야. 그렇지만 난 그 방법에 반대야.”

“휴...그렇군요.”

“음...”

박중위의 반대에 제황이 낮게 한숨을 내쉬었지만 박중위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야습 자체를 반대하는 건 아냐. 한다면 차라리 최대의 효과를 봐야지. 이런 방법은 어떨까?”

그 말과 함께 박중위가 테블릿을 꺼내들고 제황에게 계획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박중위는 드디어 제황을 어떻게 활용할지 서서히 감이 잡히기 시작했다. 제황을 자신들의 포메이션에 포함한다는 건 처음부터 넌센스였다. 개떼에 사자 한마리가 끼었다고 생각해보라. 아무리 개떼가 날고 기어도 그건 사자의 사냥에 방해만 될 뿐이다.

제황을 중심으로 야습계획을 만들어 이야기하자 제황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괜찮은 생각입니다.”

소대의 장을 허투루 맡은 건 아닌지 박중위의 계획은 아주 훌륭했다. 제황의 칭찬에 어깨를 으쓱한 박중위가 소대를 다시 끌어 모았다.

“자... 바뀐 계획을 설명한다. 저스틴 포인트로의 통신은 앞으로 3시 30분 후로 잡는다. 성규는 정국이 민구, 현준이를 데리고.... 나와 함께 야습을 진행할 이들은...”

“야습이요?”

“그래. 야습이다.”

놀라워하는 소대원들에게 박중위가 야습 계획을 설명했다. 박중위의 계획에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하는 가운데 지나가 손을 들었다.

“제황씨에게 너무 무리한 것 아닌가요?”

모두의 시선이 제황에게 돌아갔다. 모든 계획이 제황의 움직임을 중심으로 짜여있다. 그만큼 그에게 가해지는 위험도가 상상을 초월한다.

“쉽습니다.”

제황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그러자 손을 든 지나가 그 손을 내려 볼을 긁는다. 본인이 쉽다고 이야기하는데 걱정해 주는 것도 우습다.

피식 웃은 박중위가 모두를 돌아보며 말했다.

“잘하면 놈들에게 크게 한 방 먹일 수도 있다. 놈들은 곧 우리들이 자신들의 규모를 파악했다는 걸 알 거다. 그러니 오늘 밤 우리가 반격 한다는 건 꿈에도 상상 못하겠지. 그리고 모두 그냥 잠들기에는 좀 찝찝했지?”

박중위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원광공격대에 당한 참상을 모두  봤고 뼛속 깊이 분노했다.

“그런 이유로 한 번 제대로 흔들어 보자. 그런 의미에서 이번 작전명은 ‘이니시에이팅’ 이다.”

박중위의 말에 성규가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애들 데리고 저스틴포인트 피씨방을 그렇게 휩쓸고 다니더니... 작전명을 그렇게 정하는 게 어디있습니까. 휴우...”

작전명이 게임에서 쓰이는 용어를 쓴 게 마음에 안 드는지 성규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그게 뭐 어때서...지금 상황에 딱 알맞은 거지.. 자자... 피지랑 지나는 나와 함께 무전기 터질만한 최적지를 찍어보자. 나머지는 모두 작전개시 전까지 휴식!”

“예에...”

***

푸드드득...  캬아아아! 캬앗!

절벽에서 내려온 계곡 하피 하나가 시뻘건 고기 덩어리로 내려꽂혔다.

오도독...오독...

고깃덩어리의 가운데를 죽 가르더니 머리를 처박고 열심히 내장을 파먹는다. 신장 150센티 날개 길이 3미터... 흔히 지구의 신화나 판타지에 나오는 하피들은 아름다운 여성의 상반신에 독수리의 날개와 다리를 지닌 괴수로 묘사한다.

그래서 때로는 인간남자를 매혹시키거나 유혹하여 관계를 가지고 임신을  한다고는 하는데 아마 지금 이 모습을 본다면 그런 내용을 판타지 소설로 썼던 작가들은 아마 모두 책을 입에 물고 쓰러졌을 것이다.

상반신이 인간과 비슷한 것 같기는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부리가 아닌 유사인종의 머리 비슷한 게 달리고 머리카락과 같은 깃털이 등을 수북하게 덮지 않았다면 그냥 특이하게 생긴 거대 조류로 봤으리라. 입가에 붉은 피를 잔뜩 묻힌 그것은 남은 고깃덩이를 두 다리로 붙잡은 채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타탁...

그때 하피의 머리 위로 한 거대한 그림자가 나타났다. 온몸을 검은색 철갑으로 두른 그 그림자는 그대로 건틀렛을 뒤로 당기더니 하피의 머리를 향해 수박 깨듯 으깨버렸다.

퍼석...

파편처럼 터져 나가는 하피의 머리... 3티어의 몬스터라고 하기에는 너무 허망한 죽음이다. 땅에 떨어진 하피의 옆으로 내려선 검은 철갑의 인영은 이미 죽어버린 하피의 사체를 들고 터벅터벅 걷기 시작했다. 얼마의 시간이 흘러 그가 도착한 곳에는 수십 마리의 하피사체가 쌓여 있었고 그는 끌고 온 하피를 그 위에 던져 올렸다.

“훌륭해.”

검은철갑의 옆으로 한 남자가 걸어왔다. 발목까지 내려오는 검은 코트를 입은 그의 가슴에는 황금빛의 십자가가 작게 그려져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카톨릭의 신부를 연상케 했다.

물론 이 남자는 카톨릭과는 단 일 푼의 인연도 없는 삼천교의 빌런들을 지휘하는 목사 중 하나다.

젊은 남자는 머리카락을 올백으로 바짝 붙여 올렸는데 그 밑으로 죽 찢어진 눈이  좋은 인상을 만들고 있다. 그러나 그를 아는 이들이라면 그를 절대 사람좋다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본단에서 이단심문관이라는 직책을 가지고 있었는데 삼천교를 거부하는 이를 고문하는 소리를 반주삼아 식사를 하는 취미를 가진 것으로 유명했으니까.

“천군천사 정말 강합니다.”

그는 검은철갑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갑주 안에서는 가끔 ‘스읍..하’ 하는 소리가 들려오는데 그럴 때마다 투구 안쪽으로 붉은 안광이 번쩍였다.

“이제 우리 삼천교국 성전의 선두에 설 천군천사는 저 우리를 탄압하는 저스틴포인트의 어리석은 이들에 대하여 삼위일신의 징벌을...”

“강목사님!!”

그가 한창 말하고 있을 때 어디선가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사람좋은 인상을 짓고 있던 그의 미간이 꿈틀하더니 이내 손가락을 딱 하고 튀기며 말했다.

“촬영 중지...”

그의 말과 함께 그의 앞에서 한참 녹화를 하고 있던 카메라 불들이 꺼졌다. 카메라의 불이 꺼지자 강목사라 불린 그는 자신을 부르며 헐레벌떡 뛰어오는 남자를 향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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