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
소풍? 임무?
잠시의 대치 상황... 그런데 웃기게도 그 대치상황을 깬 건 시원스럽게 날린 풀페이스 헬멧 샷이었다.
빡!
“억...”
얼굴을 두들겨 맞은 도일이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눈에는 분노와 당황스러움이 가득하다.
헬멧을 휘두른 그녀가 도일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검고 긴 생머리에 하얀 피부... 흔히 볼 수 없는 매력을 지닌 미인이다. 전체적으로 오밀조밀한 이목구비에 서글서글한 눈을 지녔지만 그 눈에는 차가운 기운이 감돌았다.
“뭐...뭐...”
퍼퍽...퍽
입을 열려 했지만 그녀의 헬멧이 그의 입을 강제로 틀어막았다.
쓰러진 그를 내려다보며 그녀가 말했다.
“넌 도를 넘었다.”
“이러면 좋... 컥...”
퍽...
그녀는 무심한 얼굴로 그의 턱을 후려갈겼다. 적지 않은 고통인지 자신의 턱을 움켜쥐는 도일이다.
“난 네 밑이 아니다.”
그녀의 말에 그의 입가에 비틀린 웃음이 번졌다.
“아... 죄송합니다. 그분의 약혼녀인 것을 깜... 컥!”
퍼퍽...
묘하게 조롱기가 섞인 그는 말을 끝맺지 못하고 쓰러졌다. 환영처럼 그의 옆에 나타난 그녀가 수도로 목 울대를 쳐버린 것... 그가 리더였던 무리들은 그녀의 행사에 아무도 나서지 못했다.
“뭐 우린 끼어들 게 없는 것 같네. 가자.”
박중위가 소대원들을 인솔했다. 굳이 더 엮일 필요는 없는 것....목적은 모두 충족했다. 사실 그가 제황을 가로막지 않은 건 이곳에 있는 눈과 귀에게 하는 일종의 무력시위와도 같았다.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일을 만들었으니 그들에 대한 이야기가 터져 나가리라. 제황이 나서서 일을 벌인 건 굳이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나쁘지 않은 상황이다.
그들의 비록 군의 소속이기는 하지만 엄연히 각성자로 이루어진 팀이었다. 군에 소속되어 있기는 하지만 일종의 용병과 같은 계약 관계... 특히 순찰소대는 필드에서 각성자들과 부딪힐 일이 잦기 때문에 쓸데없는 시비를 피하려면 이런 무력시위가 꼭 필요했다.
이래야 어중이 떠중이들이 시비를 걸지 못한다.
수지라는 여자를 쳐다보고 있는 제황의 어깨에 박중위가 손을 올렸다.
“가지?”
“음...잠시만요.”
박중위에게 양해를 구한 제황이 수지라는 여자에게 다가갔다.
마침 그녀도 고개를 돌려 제황을 바라보던 차다. 그녀는 제황이 마지막에 썼던 것에 대해 궁금했다.. 자신이 보유한 고유 스킬과 너무나 비슷한 속사스킬이었기에 궁금했고 설마 제황이 자신의 스킬을 엿보고 흉내 냈다고는 생각 못하는 그녀였다.
둘 중 먼저 입을 연 건 제황이었다.
“오랜만이네.”
마치 안부인사하듯 툭 던진 제황의 말에 그녀가 눈이 커졌다.
목소리에서 자신을 아주 잘 아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
아니...너무나도 익숙하면서 또 너무나도 그리운 목소리라고 느꼈다.
“누구?”
그녀의 물음에 제황이 후드를 풀었다. 한결 시원해진 입가를 손으로 매만진 제황이 그녀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사고 후로 처음이네. 4년 만인가?”
“아?”
제황의 맨 얼굴을 올려다본 수지의 눈이 지진이라도 난 듯 마구 흔들렸다.
“아아...”
수지는 입을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의 눈에 제황의 얼굴이 가득 차올랐다. 많이 변했지만 한편으로는 또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그다. 그가 자신의 앞에 서 있다.
... 그가... 나타났다.
비틀...
수지는 자신의 다리가 풀려오는 걸 느꼈다.
머릿속이 하얗게 변한 그녀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나의 왕자님’
제황은 그녀의 첫사랑이었다. 그를 처음 봤을 때 그녀는 누군가를 보는 순간 눈이 부실 수도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티브이 속의 연예인에도 그녀의 얼굴에 혹해 고백하던 그 어떤 남자들에게도 열지 않았던 마음은 그를 처음 봤을 때 마치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열쇠를 만난 듯 활짝 열렸었다.
단 하루의 만남이었지만 그녀에게는 평생에 기쁜 일이었다.
심장이 요동쳐서 그날부터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제황을 잊을 수 없었고 끝내 그를 수소문해 그와 같은 중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다.
함께 하며 서로 마음을 알아갔고 어느 순간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한 채 걷고 있었다.
차갑고 감정표현이 적으며 자신에게 무덤덤하게 굴었지만 그 안에 보이는 잔잔한 배려가 그녀를 기쁘게 했다.
모든 게 행복했던 어린 날의 시간... 그녀의 인생에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제황과 함께 하던 행복했던 시절이 떠오르려던 찰나 그녀의 귓가로 제황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약혼했다고...”
“아...”
그의 듣기 좋은 저음이 그녀를 꿈결에서 건져 올려 현실의 냉혹한 황무지 위에 올려놨다.
그의 말에 그녀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으...으응.”
“그렇구나. 축하해. 다음에 또 보자.”
고개를 끄덕인 제황이 손을 슬쩍 들고는 그대로 뒤돌아섰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제황을 붙잡을 뻔 했다. 그렇지만 그녀는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그 행동을 멈췄다. 자신에게는 그를 붙잡을 이유도 명분도 없다. 아니 이유와 명분을 떠나서 자신은 이제 그와 같은 꿈을 꾸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약속임과 동시에 그녀의 운명...
얼음장처럼 굳은 얼굴로 그녀는 멀어져가는 제황의 등을 바라봤다. 마치 그 모습이 담긴 기억이라도 소중히 간직하려는 듯...
-네가 전에 말한 그 암컷이지?
-응.
-뭐야? 일은 거창하게 벌이고 고작 인사 한마디?
궁기가 투덜거렸다. 함께한 기간이 오래되어서 이제 그녀는 제황의 몸 상태만으로도 의도를 파악할 정도가 되었다. 아까의 제황은 마치 터지기 직전의 화산이었는데 지금은 아무런 감정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냥, 인사만 해두려 했어. 어차피 그녀가 이곳에 있다면 언젠가 또 마주치게 될 테니까.
-쳇...싱겁군.
그녀의 투덜거림을 들으며 제황은 의미를 알 수 없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
부우우우웅....
암녹색의 위장도색이 그려진 무장버스가 공도를 달린다. 외장갑에 커다랗게 8이라는 숫자가 적힌 그 버스는 이윽고 공도를 벗어나 울퉁불퉁한 바윗길에 들어섰다.
-gwrqw345,221 수리 요청...gwrqw345,221 수리 요청...
“패스 패스...꺼버려.”
네비게이션에서 들려오는 구조요청 신호에 박중위는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피지가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네비게이션의 볼륨을 꺼버렸다.
“빌어먹을 초보자새끼들...”
첫 순찰을 나온 지 2주가 흘렀다. 처음 출발할 때는 기분이 참 좋았다. 무장버스의 수리는 너무나 완벽했다. 오크들에게 두들겨 맞아 우그러지고 도끼에 찍힌 외장갑은 새 도색에 번들거렸고 툭하면 빠지던 서스펜션도 깨끗한 새것으로 교체했다. 그뿐일까.
워낙 성능이 지랄 같아 금이야 옥이야 관리해야 했던 중계기들도 깨끗이 고쳐져서 8소대원들은 모두 날아갈 듯한 기분으로 첫 임무에 들어갔다.
순찰코스를 익힌다는 마음으로 자유임무는 따로 받지 않은 채 초보자들이 주로 노는 코볼트 섹터에서부터 소규모 공격대들이 레이드를 진행하는 곳까지의 순찰코스를 지정받았다. 그리고 순찰 첫 날 그들은 세 개의 수리요청 신호를 받았고 달려간 곳에는 자신들이 타고 온 캠핑카 하나 고치지 못해 쩔쩔매고 있는 초보헌터들의 기저귀를 갈아줘야 했다.
뭐... 수리요청이야 그냥 외면하자면 외면할 수 있다. 문제는 구조요청 신호였다. 초보자들의 구조요청 신호에 무장버스 엔진이 터지도록 달려간 곳에는 고작 코볼트 5마리에게 기습당해 두들겨 맞고 있는 초보헌터들이 있었다.
그곳에서 박중위는 폭발하고야 말았다. 아무리 초보 초보 거리지만 최소한 15개월 의무복무는 거친 이들이 아닌가. 자신의 소대에 있는 괴물이야 논외라지만 가장 평범하다는 최하사도 코볼트 5마리에 당황하지는 않는다.
“오크들이 그리워.”
“안전한 게 좋은 겁니다. 캡...”
박중위의 말에 피지가 실소를 흘렸다. 긴장감이 나쁜 것은 아니었지만 716전진기지의 오크들은 너무 와일드했다. 자신들도 조금은 이런 평화스러운 기분을...
콰콰쾅!!
박살내는 소리가 아니라면...
"우으..."
무장버스 바닥에 뭔가 거대한 물체가 내동댕이쳐지는 소리가 울렸다.
“이야압!”
“그런데 캡...”
"크앗!"
“왜?”
“저건 저거대로 괜찮을까요?”
피지가 슬쩍 고개짓으로 뒤를 가리키자 그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본 박중위가 한숨을 내쉬었다.
“뭐 민경이도 있으니까 괜찮겠지.”
“그래도...”
피지는 뒤에서 벌어지고 있는 참상을 슬쩍 바라보고는 이내 고개를 돌렸다. 거대한 덩치의 성규가 바닥에 깔린 매트에 얼굴을 짓이기고 있다. 가뜩이나 인상이 더러운 그의 일그러진 입에서 침이 질질 흘러나와 바닥매트를 더럽힌다. 연신 발버둥을 치고는 있는데 애처로운 발버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으...으우우웁...”
어깨에서 올라오는 고통에 억지로 버티는 성규가 이를 악물고 팔에 힘을 줬다. 그는 탱커였고 탱커는 고통에 익숙하다. 고통을 감내하며 기회를 노리는 탱커들은 감당치 못할 고통도 우직하게 버티는 습성이 있다. 분명 버티다 보면 기회는 오기 마련이다. 그러나 때로는 그 우직함이 감당하지 못할 고통을 선사하기도 한다.
우드드득...
섬뜩한 탈골음과 함께 어깨가 뽑혀 나왔다.
“으아아악! 탭! 탭! 탭!”
제황에게 팔을 꺾여 있던 성규가 텝을 치자 민경이 서둘러 성규에게 달라붙었다. 사건의 발단은 이렇다. 긴장감 없는 순찰에 무료해진 성규가 저번 내기로 얻은 공격력이 붙은 장갑에 대해 제황과 이야기하다가 즉석에서 맨손 격투와 레슬링을 가르쳐 준다고 나선 것이다.
물론 성규가 어쭙잖게 나선 것은 아니었다. 근력 위주의 파워딜러인 그는 맨손격투술과 레슬링 등에 대해서도 소양이 깊었다. 특히 레슬링은 강력한 근력과 기술을 바탕으로 웬만한 이들은 3분 안에 항복을 받아 낼 정도의 고수... 그보다 높은 별을 지닌 박중위도 그에게 맨손으로는 이기지 못했다.
그렇게 원거리 스페셜리스트인 제황에게 근거리에서 써먹을 레슬링 기술과 맨손격투술을 가르쳐 준다며 붙었지만 약 5분이 지난 후 제황에게 관절이 뽑혀버린 건 오히려 성규였다.
민경의 힐로 어깨를 치료한 성규가 허탈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아무리 각성자들 사이에서는 체급차가 크게 의미 없다지만 정말 큰 충격을 받았다. 힘 위주의 트레이닝과 높은 힘 수치를 통해 우위를 점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제황에게 순수한 힘으로도 밀렸다.
격투술 명함을 꺼내보지도 못했다.
엉키는 순간 측면에서 팔을 잡혔고 옆구리와 상완근에 다리가 올라오는 걸 방비하는 사이 이미 기술이 완성되어 있었다. 5분간도 굳히기기술을 억지로 참으며 끈 시간이다. 기술도 처음 경험하는 생소한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 간단한 조르기 같아 보이지만 밀려오는 압박의 강도가 틀리다.
가볍게 일어선 제황이 다시금 자세를 잡자 성규가 손을 휘휘 저었다.
“그...그만...”
성규의 말에 제황이 김빠졌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 하고는 수건으로 몸에 묻은 성규의 땀을 닦아내다가 몸에 코를 대고 킁킁대더니 이내 인상을 확 찡그리고는 무장버스 내에 비치된 개인 보관함으로 가서 상의를 갈아입기 시작했다.
“괴물 같은 놈...”
원망스러운 표정으로 그것을 노려보던 성규가 박중위의 옆으로 비틀거리며 걸어오더니 털썩 앉았다.
“털렸네?”
“예.”
“어때?”
“기가 차서 말도 안 나와요.”
성규는 힐끔 뒤를 돌아보고는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힘도 밀리고 기술도 압도적으로 밀려요. 나 원... 사람이 맞아?”
상당히 계산을 하고 들이댄 그였다. 근거리와 관련된 소양을 본 적은 없지만 기본만 하더라도 상당히 강할 거라고 예상했다. 그래서 들이대 본 게 맨손 싸움이었다. 사실 몬스터와의 싸움에서는 별로 쓸 곳이 없는 게 맨손이었으니까.
그런데 맨손싸움도 잘한다. 기가 찰 일이다.
기술도 있는데 감각도 좋았다. 원거리 딜러의 사각을 파고들었다고 좋아하며 제황에게 달려든 것들은 아마 또 다른 벽에 막혀 절망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