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사거리 100만-55화 (55/301)

# 55

구조임무

“꺼우웅...”

하늘 높은 곳에서 유유히 바람을 맞으며 밑을 내려다보는 테러버드의 눈에는 분노가 가득했다. 처음에는 너무 놀라 도망치기는 했지만 둥지에서 오매불망 어미를 기다릴 새끼들이 도망치는 테러버드를 일깨웠다. 그와 함께 분노가 일었다. 감히 한낱 먹잇감들의 발악에 밀려 도망치는 것이다. 그것은 용인할 수 없는 것...

“끼루루룩...”

매서운 불꽃이 날아오기는 했지만 그것은 자신을 위협하지 못했다. 빠르게 날자 따라오지도 못한다. 기회를 보다가 한차례 급강하를 해서 야무지게 두들겨 버리면 잠잠해 질 것이다.

급강하를 할 타이밍을 재고 있던 테러버드의 눈에 자신을 향해 매섭게 날아오는 한줄기 섬광을 발견했다. 이전의 따끔한 것과 다르게 불꽃도 소리도 없었기에 거의 근접해서야 알아차렸다.

경계하지 않았다면 발견하지 못했을 공격!

“꺼웅..”

그러나 테러버드는 당황하지 않았다. 가볍게 몸을 틀기만 해도 저것은 비켜나갈 것이다. 테러버드는 마치 그 빛줄기를 조롱하듯 가볍게 한쪽 날개를 접어 몸을 비틀었다. 날개를 접음과 동시에 동체가 빠르게 회전하며 측면으로 세찬 바람이 지나쳐간다.  이제 빛줄기는 자신을 지나쳐...응?

지나치는 듯하던 그 섬광이 직각으로 꺾이며 회피기동을 하는 자신을 향해 무섭게 쫓아 날아왔다.

“꾸어엉!”

테러버드는 비명을 내지르며 마저 다른 날개를 접었다. 저 섬광에 응축되어진 기운이 절대 만만치 않게 느껴진 것. 두 날개를 접자 테러버드의 몸은 순식간에 밑으로 떨어져 내렸다. 기민한 대처... 그렇지만 그 섬광은 다시 한 번 기형적인 움직임으로 방향을 전환하더니 이윽고 접힌  날개에 사정없이 내리꽂혔다.

콰아아아앙!

단순한 충격이 아니다. 그 섬광은 마치 날개를 갈아버릴 듯 계속해서 파고 들어왔다.

“꾸어엉!”

본능적으로 외부공격에 반응하는 방어막도 이 공격을 방어해내지 못했고 붉은 피무리와 함께 화려한 깃털과 육편이 하늘을 수놓았다.

"커어엉"

왼쪽 날개를 지탱하는 가장 커다란 뼈가 박살나버렸다. 밀려오는 고통에 비명을 지르는 것도 잠시 테러버드는 자신의 몸은 바닥을 향해 곤두박질치기 시작하는 걸 느끼고는 발버둥쳤다. 어떻게든 마나를 이용해 양력을 회복하려고 발악을 하는 테러버드지만 그것은 오히려 추락을 가속화 시킬 뿐이다.

"와우..."

그 광경을 바라보던 박중위는 입에서 작은 경탄성을 내뱉은 뒤 조준하고 있던 신궁을 바닥에 내려놨다. 본래 계획은 제황이 화살로 조금이라도 틈을 만들면 5발의 신궁으로 단숨에 요절을 내려 했는데 이제 그럴 필요가 없어져 버렸다.

날개가 박살나서 땅에 떨어지고 있는 테러버드에게 굳이 한 발당 1억을 호가하는 신궁을 쓴다는 건 낭비 중에 낭비다. 날지 못하는 테러버드 따위에게 겁먹을 위인은 이곳에 아무도 없다.

"전원 냉병기 들어. 오랜만에 피맛 좀 보자."

박중위는 등에 차고 있던 기다란 검을 손에 쥐고 주욱 뽑아 들었다. 길이 1미터 30센티의 두툼한 양날을 지닌 바스타드 소드다. 비록 군에 몸을 담고 있기는 하지만 그는 4성의 근접 딜러다. 딜러가 무었일까. 근접계열 중 가장 강력한 공격력을 지녔다는 뜻이다.

"저게 얼마짜리야."

"작년에 잡았을 때 한명 당 4000만원씩 받았죠. 그 빌어먹을 중대장이랑 보급관이 그렇게 뜯어 먹었지만... 퉤..."

박중위와 같은 3성딜러인 성규가 마른 침을 뱉으며 등에서 거대한 양손 도끼를 뽑아들었다. 힘에 특화된 그는 무거운 중병기를 선호하는데 우락부락한 그의 외모와 어울려 마치 한 명의 야만인을 보는 듯 했다.

"딸... 아빠가 맛있는 거 사갈께."

어린 유부남 정국이 방패와 창을 손에 쥔 채 결의에 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쿠쿵!

테러버드가 단단한 땅바닥에 내리꽂혀 자욱한 먼지를 일으킴과 동시에 테러버드의 위로 두 개의 그림자가 날았다. 정신 못차릴 때 크게 베어 물어야 한다.

"최대한 비싸게 도축해 보자!"

"오케이! 대장!"

선공은 박중위였다. 근접딜러기는 하지만 노련한 경험과 높은 민첩수치를 통한 공격회피로  탱커의 자리도 마다하지 않는 전천후 헌터가 그다.

푸우욱...

박중위의 바스타드 소드가 테러버드의 목을 깊숙이 파고들었다.

공격과 회피가 모두 가능하기에 가능한 과감한 공격이다. 치명적인 공격에 테러버드의 부리가 거칠게 그를 찍어왔지만 박중위는 노련한 뒷걸음질로 테러버드의 시선을 자신에게 고정시켰다.

푹찍...

"꾸르르륵!"

테러버드의 정수리에 성규의 묵직한 양손도끼가 내리 찍혔다.

푸른색의 오러를 잔뜩 머금은 양손도끼가 테러버드의 머리에 절반 이상 박혀 든다.

'스피팅 코브라!'

고통에 비명을 지르는 테러버드의 턱밑으로 박중위의 스킬이 빠르게 쑤시고 들어갔다.

"꾸억!"

"야야! 아주 그냥 푹푹 박히네!"

테러버드가 반격을 가하기는 하지만 그는 느낄 수 있었다. 테러버드는 지금 추락으로 인한 데미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하긴 몇 톤에 달하는 몸이 그대로 내리꽂혔다. 아무리 그 몸이 강하다고 해도 내부가 진탕되는 건 어쩔 수 없었으리라.

굳이 그가 지시를 내리지 않아도 소대원들이 하나 둘 달라붙었다. 성규나 박중위처럼 과감하게 달려들지는 못하지만 그들도 뭉치면 충분히 한 명의 몫으로 괴롭힐 수 있었다. 다리를 버둥거리며 몸을 일으키려고 할 때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이 테러버드의 산산이 찢긴 날개에 꽂혔다.

가뜩이나 고통스러운 부분에 화살이 날아와 꽂히자 테러버드가 진절머리를 쳤고 화살의 의로를 깨달은 소대원들은 테러버드의 다친 날개를 중점적으로 공략해대기 시작했다.

"가자!"

***

"꾸어억...끼르륵"

발악하는 테러버드의 목에 성규의 거대한 양손도끼날이 떨어지는 순간 레이드는 끝났다. 날개 하나가 박살났음에도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는 테러버드를 잡기 위해 마나가 바닥날 때까지 공격을 펼치던 소대원들은 테러버드의 몸이 완전히 땅에 눕자 그제야 긴장이 풀리는 듯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후욱...후욱..."

박중위는 피가 번들거리는 바스타드 소드를 테러버드에 겨눈 채 숨을 헐떡였다.

그가 아무리 4성의 근접딜러라도 테러버드는  역시 그가 상대하기에는 좀 이른 고위몬스터였다. 단전에 바닥나 버린 마나를 박박 긁어 스킬을 사용했기에 일시적인 현기증까지 일었다.

땅으로 떨어진 충격으로 정신을 놓은 상태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피해 없이 잡기는 거의 불가능한 몬스터가 테러버드다.

"후우..."

심호흡과 함께 칼을 거둔 박중위는 이채로운 눈빛으로 한쪽을 바라봤다.

테러버드를 잡은 것도 기쁜 일이지만 그를 더욱 기쁘게 하는 건 바로 애물단지였던 민경이었다. 전투 중반부터 합류한 유리와 민경이 아니었다면 전투가 훨씬 힘들었을 것이다.

이전 같으면 진즉에 공황장애로 허우적거렸을 그녀가 기민하게 움직여 포메이션을 다잡았고 후반에 테러버드의 앞발에 맞고 날아갔던 지나와 현준이 덕분에 무사했다.

제황은? 두말 할 필요도 없다. 레이드 중간 중간 테러버드가 요동칠 때마다 적재적소에 날아간 화살들은 테러버드의 공격을 번번이 무산시켰다. 크게 데미지를 주는 것 같지는 않지만 딱 적당한 공격으로 테러버드를 저지하니 모두가 자신의 능력을 120프로 발휘하는 레이드를 펼칠 수 있었다.

조금 이상했던 건 그렇게 강력한 화살을 날려대던 제황이 딜러로써의 역할은 하지 않았다는 것. 그렇지만 지금까지 넘치도록 활약했기에 대만족이었다. 박중위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성규의 몸에 난 자잘한 상처에 힐을 끝마친 민경에게 말했다.

"민경아."

"네. 대장..."

개운해 하는 성규의 얼굴을 보며 기분 좋은 미소를 띠고 있던 민경은 박중위의 부름에 고개를 돌려 대답했다.

"네가 우리 소대의 메인 힐러다."

"..."

박중위의 말에 순간 민경의 얼굴이 기묘하게 변했다. 우는지 웃는지 알 수 없는 표정이다. 몬스터를 죽이겠다는 마음으로 게이트에 들어왔는데 전혀 알지도 못했던 공황장애가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

소대 내의 유일한 힐러지만 전투에는 전혀 쓸모없는 반쪽짜리도 되지 않는 자신의 모습에 얼마나 괴로웠던가. 자신을 배려해주는 박중위와 소대원들의 친절이 어느 샌가 부담으로 느껴졌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외나무다리 위의 생사대결과 같은 게이트 내에서 자신과 같이 쓸모 없는 이를 보호하는 동료들에게 너무 미안했다.

그런데 이제 그런 걱정이 사라졌다. 그로 인해...

"여...열심히 하겠습니다. 흑...“

왈칵 눈물을 흘리는 민경의 등을 토닥인 박중위가 말했다.

"그래. 가서 애들 마저 봐줘."

"네!"

칙...치....

민경이 다른 이들의 상처를 보러 달려가자 박중위는 호주머니에서 담배를 하나 꺼내 물은 뒤 지포라이터로 불을 붙이고는 폐부 깊숙이 니코틴을 들이마신 뒤  중얼거렸다.

"담배 맛 좋네."

사실 이번 임무가 끝나면 민경을 내보내려 했었다. 사연이 안타깝기는 하지만 15명 정원의 티오도 다 채우지 못한 소대에 전투에 쓸모없는 힐러는 소대를 책임지는 입장에서 쳐내야할 가지였다. 그런데 그런 민경이 공황장애를 극복한 듯 보인다.

앞으로 좀 더 두고 봐야 할 테지만 공황장애만 없다면 민경은 정말 훌륭한 헌터였다.

"복덩이야. 후후..."

***

-괜찮아?

-쯧. 하루 정도만 고생하면 되겠지.

제황은 힘이 들어가지 않는 오른손을 쥐락펴락하며 혀를 찼다. 3중첩의 영향이다. 덕분에 레이드 후반부에는 일반적인 화살공격 밖에 하지 못했다. 손의 기혈... 요즘 말로는 마나로드라 부르는 것이 상처나 버렸다. 재생을 통해 복구하기는 했지만 힘이 완전히 돌아오지는 않았다.

무련궁술의 네 가지 속성은 겹치면 겹칠수록 다양하고 파괴적인 능력을 보이지만 반대급부로 세심한 마나 테크닉을 필요로 했다. 아차 하고 정신줄 놓으면 양팔 중 하나는 며칠 못쓸 각오를 해야 하는 난이도 있는 유니크 스킬...

-그냥 예전처럼 폭발 속성이나 쓸 것이지 왜 거기서 힘의 화살을 넣었냐.

-뭐 항상 같은 패턴만 연습할 수는 없잖아. 믿을 만한 사람들이 있을 때나 실험 할 수 있는 거고... 또 덕분에 얻은 것도 있어.

-그래? 뭘 얻었지?

-진명이 바뀌었어.

그 말과 함께 제황은 상태창을 열었다. 기존의 진명인 마궁의저격수가 무련궁술의 랭크가 상승함에 따라 마궁의 주인으로 변했다. 부가 효과로는 근력보정+1... 적은 듯 보이지만 무려 450퍼센트 에서 550퍼센트로 힘이 상승하는 것과 같은 효과다.

후에 안 일이지만 진명이라는 걸 가진 헌터는 정말 손에 꼽았다.

또한 가졌다고 해도 제황과 같이 레어급의 진명을 두 개나 보유한 이는 아예 없었다.

진명이라는 것은 일종의 하나의 포지션에 대한 완성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앞으로 랭크가 상승함에 따라 이것들도 함께 성장할 것이고 종국에는 타인과 크나큰 격차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빨리 4중첩을 해내고 싶어.

세이브라는 이 엄청난 시스템은 정말 성장에 대한 마약과도 같은 중독성을 가지게 한다. 조바심이라는 건 알지만 어쩔 수 없다. 하루하루 급격히 성장하는 자신을 보는 건 정말 치명적인 유혹이니까. 그러나 제황은 한 발 물러났다.

성급한 성장은 독과도 같은 것이니까. 그렇지만 그런 것을 떠나서라도 이 수치화라는 건 정말 대단하다.

-아서라... 4중첩의 실패를 상상하면 절대 말리고 싶군.

-알아.

그녀의 말에 제황은 피식 웃었다. 현재 상태로는 4중첩은 절대 무리였다. 지금보다 레벨을 한참 더 올리면 가능할까. 그 때 그의 곁으로 민경이 다가왔다.

"괜찮으세요? 혼자 그렇게..."

"아. 괜찮...아요."

전에는 데면데면 하게 굴던 그녀가 갑자기 존댓말을 하자 제황은 조금 당황해 버렸다. 아까 전 안정을 시킨다며 마음대로 안아버린 게 머릿속에 떠오른 것...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뭐... 신경 쓰지 말아요."

"...네? 네..."

제황의 대답에 민경의 얼굴이 조금 시무룩하게 변했다가 이내 표정을 지우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를 지은 그녀는 제황에게 다시금 꾸벅 인사하고는 뒤돌아 가버린다.

-아주 자알 하는 짓이다. 나쁜 놈...

-내가 뭘?

-모르는 게 더 죄인이다!

"여어! 다른 몬스터가 몰려들기 전에 얼른 뒷정리 시작하자. 후우... 이걸 언제 다 해."

제황이 궁기와 티격태격하는 사이 담배를 바닥에 비벼 끈 박중위가 크게 외쳤다. 눈앞에 쓰러진 거대한 몬스터 사체를 바라보니 가만히 있어도 이마에 땀이 흐르는 것 같다. 족히 몇 톤은 넘을 저것을 실을 생각하니 괜히 잡았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뭐...전부 돈인데 뭐..."

어깨를 휘휘 돌린 성규가 기분좋은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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