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
구조임무
콰콰쾅!!!
“꺄아악!”
“아악!”
순식간에 캠핑카 밖으로 몸을 빼낸 제황은 고개를 돌려 빠르게 굴러가는 캠핑카를 바라봤다. 유리도 민경도 보이지 않는다. 하늘을 보니 낯익은 테러버드 한 마리가 공중을 선회하고 있었다. 놈이 다시 돌아온 것이다.
투퉁투투퉁!!!
두 문의 30mm기관포가 맹렬히 불을 뿜었지만 테러버드의 양 날개에서 뿜어진 하얀 오오라와 부딪히자 튕겨나가는 듯 현란하게 산란했다. 4티어 이상 몬스터부터 본능적으로 사용한다는 방어막이 확실했다.
-칙... 제황씨 유리와 민경이 대답이 없다! 확인해서 데리고 나와. 아무래도 이 빌어먹을 새새끼를 확실히 침묵시켜야 겠는데...
-알겠습니다.
박중위의 말에 제황은 넝마가 된 캠핑카 안으로 들어갔다. 안은 난장판이었다. 기껏 치료를 끝낸 이들은 한곳에 쑤셔 박혀 있었는데 다시금 상태가 안 좋아졌다. 게다가 상태가 안 좋은 건 유리도 마찬가지다. 충격 때 민경을 감싼 것으로 보이는 그녀의 허벅지에는 큼지막한 쇳조각이 박혀 있다. 파워드 슈트는 착용자의 신체능력을 올려주지만 반대 급부로 이런 충격에 취약했다.
“하악..하악..”
"이런..."
제황은 혀를 찼다. 유리의 품에 안겨있는 민경은 손을 벌벌 떨며 숨을 헐떡이고 있었는데 우려하던 그것이 도진 모양이다.
“정신 차려!”
척 봐도 어떤 상태인지 깨달은 제황은 민경의 귓가에 대고 소리쳤다. 그러나 민경은 공포의 질린 눈으로 숨을 헐떡거린다.
“커억...커억...”
금세라도 숨이 넘어갈 듯 헐떡이면서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허벅지의 포켓에 작은 봉투를 꺼내 입과 코를 막고 깊게 심호흡을 했다.
공황장애가 있는 이가 흔히 겪는 과호흡 증후군이다. 호흡은 조금 진정되었지만 공포에 질린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리는 걸 보면 움직일 정신이 아닌 것 같다.
“후우... 미치겠군.”
무장버스에서 테러버드의 주위를 돌려주고 있기는 하지만 이 캠핑카는 그리 좋은 도피처가 아니다. 정신을 잃고 있는 유리는 쇳조각을 뽑는 순간 출혈로 인한 쇼크에 빠질 가능성이 컸다. 치료를 하자니 시간은 부족하고 소모마나도 클 것.... 가장 좋은 것은 민경이 제정신을 차리는 건데 그녀는 아직도 공포에 둘러싸여 허우적거리는 중이다.
“젠장...이런 짓은 하기 싫은데...”
제황은 혀를 차며 민경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뺨이라도 칠 요량...
“아아! 꺄아아! 날 내버려둬!”
비명을 지르며 제황의 손을 쳐내려 했다. 이정도면 중증이다.
기분 같아서는 살기를 퍼부어 그녀의 정신을 날려버리고 싶지만 제황은 한 번 참았다. 그런 짓을 하면 오히려 상황은 더 악화된다. 멍청한 것들은 충격요법 어쩌고 하겠지만 인간의 정신은 그보다 훨씬 복잡하고 섬세하다.
-어떻게 하지?
-일단 진정시켜야지.
누가 그 방법을 모르던가. 문제는 어떻게 진정시키냐는 것...
-좀 도와줘.
제황이 궁기에게 말했다. 무궁무진한 술법을 알고 있는 궁기라면 어떤 방법이 있을 것...
-나도 별 수 없어. 인간 암컷 따위를 진정시킨다니... 흐흥...
궁기가 코웃음을 친다. 그녀의 반응에 제황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도 그렇지만 궁기도 그런 것에는 인연이 없다.
"어쩔 수 없지."
진정을 시키자니 머릿속에 떠오르는 한 장면이 있었다.
훌쩍거리던 자신을 진정시켜주던 따스한 손길... 그 향기... 그 소리...
어쩔 수 없나?
덥썩...
제황은 민경을 가슴에 안았다. 상체와 머리를 끌어안은 제황이 그녀의 등을 토닥여주자 부들거리던 민경의 몸이 천천히 이완되기 시작했다.
“쉬이이이...”
제황이 입에서 조그맣게 바람소리를 내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굳어졌던 민경의 몸이 완전히 풀어졌다. 이 방법은 과거 제황의 엄마가 제황에게 해주던 것이었다.
어릴 적 아버지의 훈련이 너무 힘들어 산장 밖으로 뛰쳐나가 골짜기 바위 밑에 숨어 홀로 훌쩍이며 울고 있을 때 조용히 다가온 엄마는 이렇게 꼭 안고서 등을 토닥여주며 그를 달래 주곤 했다.
제황은 민경의 고개를 들어 마주 바라봤다.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 눈에 눈물이 한가득한 민경의 얼굴에는 당황과 부끄러움이 혼재되어 있다.
“괜찮아.”
“...”
제황을 바라보는 민경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지금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공황장애로 허우적거리던 몸이 제황의 품에 안기는 순간 벼락이라도 맞은 듯 딱 굳었다. 낯선 이의 품이기는 하지만 이상하게 싫지 않다.
게다가 호흡을 나눌 정도로 가까워진 제황의 입에서 나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달콤한 향기와 따스한 온기, 그리고 수려한 그의 얼굴이 그녀의 눈에 한가득 담겼다.
마치 제황의 머리 뒤로 하얀 빛의 후광이 보이는 것 같다. 그의 얼굴이 그녀의 뇌리에 들어와 틀어박히는 순간... 마치 지울 수 없는 각인과도 같은 순간이다.
“이제 좀 괜찮아?”
끄덕끄덕
제황의 물음에 민경이 빨갛게 변해 터질 듯한 얼굴을 숙인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품에서 벗어나야 하는데 왠지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더 안기고 싶은 느낌이다. 머릿속이 진탕이 되고 조금 다른 의미로 숨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자...그럼 이제 이 안에 있는 사람들을 치료해줘. 테러버드는 내가 처리할게.”
“아... 알겠어요.”
제황의 말에 민경은 버스 안을 둘러보았다. 분명 바뀐 건 없었다. 아니 오히려 유리마저 정신을 잃고 있기에 더 안 좋은 상황... 그런데 날뛰어야할 공황장애는 잠잠했다.
제황이 사람들의 치료를 말하는 순간 그것이 마치 그녀의 지상과제가 된 듯 뇌리에 깊게 틀어박혔다.
제황이 손을 놓자 민경은 붉어진 얼굴을 감추려는 듯 서둘러 고개를 돌려 유리의 허벅지 상처를 돌보기 시작했다.
-또 하나 낚았네. 바람둥이...
-무슨 개소리야.
-아니...뭐 모른다고 잡아떼면 할 말 없지만...
궁기의 말을 귓등으로 흘린 제황은 스톰레이지를 꺼내 든 채 캠핑카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이 사태의 원흉의 머리에 화살을 꽂지 않으면 오늘 밤 잠을 자지 못하리라.
‘호랑이사냥’
최상급의 은신을 구현하는 호랑이사냥이 펼쳐지자 제황의 몸은 대낮임에도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이제 이곳에서 제황을 볼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다. 한줌의 자취도 기척도 없는 완벽한 은신....
"안 좋군."
밖으로 나선 제황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투투투투퉁!!!
테러버드는 내리꽂힐 타이밍을 재고 있는 지 하늘 높은 곳을 유유히 날고 있다. 간간히 기미가 보이면 30mm기관포가 견제를 하지만 언제까지 이런 식으로 대치할 수는 없는 법, 탄이 한정되어 있는 건 둘째 치고 기관포는 워낙 소리가 크기에 다른 몬스터를 불러들일 위험도 컸다. 게다가 유유히 나는 듯싶지만 테러버드 자체가 워낙 커서 그럴 뿐 사실은 엄청난 속도로 날고 있었다.
그때 궁기가 제황에게 말했다.
-가슴살이 맛있지?
-아아... 그래. 가슴살...
궁기의 말에 눈썹을 역팔자로 찡그리고 있던 제황은 실소를 터뜨렸다. 확실히 테러버드의 가슴살은 맛있다. 다른 양념이 필요 없을 정도로 맛있어서 한 마리만 사냥해도 며칠은 둘이 원 없이 포식을 했다.
가슴살만 맛있을까. 테러버드의 양 날개 끝에 있는 가장 큰 깃털은 가벼우면서 엄청난 강도를 자랑하기에 잘 다듬으면 훌륭한 화살로도 만들 수 있었다.
엘어스에서 화살이 거의 떨어졌을 무렵 임시방편으로 이것저것 가져다가 화살을 만들어 봤는데 그중 최고는 바로 테러버드의 양날개 끝 깃털이었다. 아니 이제 애기살도 만들어야 하니 작은 깃털도 쓸만하리라.
-저 녀석은 알까. 우리 뱃속에 몇 마리의 테러버드가 들어갔는지....
그녀의 농담 아닌 농담에 제황은 한결 홀가분한 마음으로 손에 비천격과 애기살 한 대를 소환해냈다.
-30마리 이후로는 안셋지 아마?
-꺄하하...
궁기의 웃음을 들으며 제황은 헤드셋을 켰다.
-대장님 저 제황입니다.
-아. 제황씨! 상황은 어때?
-무사합니다. 충격이 크긴 했지만 안에서 미경씨가 치료 중에 있습니다.
-그래? 후...불행 중 다행이군. 저 빌어먹을 테러버드만 아니라면 말이야.
박중위는 제황의 무사하다는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판단 실수였다. 테러버드가 완전히 도망쳤다고 판단했는데 그 판단이 틀렸던 것... 놈은 생각보다 교활했다. 구조활동을 시작하자마자 달려들어 캠핑카를 공격한 건 신의 한수였다.
자고로 적의 취약한 곳을 가장 먼저 공격하는 건 상식 중에 상식...덕분에 방비할 곳은 두군데로 늘어났고 효과적인 방어가 힘들어졌다. 그것은 마치 새의 둥지를 습격할 때 어미가 아닌 새끼들을 먼저 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 때 헤드셋으로 제황의 목소리가 다시금 들려왔다.
-저 테러버드... 제가 떨어뜨리겠습니다.
-자네가?
제황의 말에 박중위는 고개를 갸웃 했다. 그의 활솜씨가 대단하다는 건 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본적이 없는 초장거리저격을 하는 괴물이니까. 그렇지만 저 테러버드는 이전에 상대한 것들과는 좀 틀린 것이다.
제황의 화살보다 몇 배는 더 빠른 30mm 기관포로도 맞추기 어려울 정도로 빠르다. 아니 몇 대 맞추기는 했지만 그 정도 충격으로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신궁을 사용할까도 생각했지만 신궁으로는 테러버드의 신출귀몰한 기동력을 따라가지 못한다.
'가능할까.'
무려 5티어 상위의 몬스터 테러버드를 사냥하기 위해서는 날짐승에 대비한 철저한 레이드 준비를 갖춘 정규공격대가 달려들어야 한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박중위가 이를 질끈 깨물었다.
-좋아! 이쪽도 준비하지.
허황되게 들리기는 했지만 박중위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떨어뜨린다면 떨어뜨린다는 거다. 짧은 시간이지만 제황은 믿음이 가는 이였다.
허튼 소리를 하지 않을 이다.
“후우...”
제황은 심호흡과 함께 스톰레이지에 비천격을 걸었다. 애기살을 장전한 채 천천히 시위를 잡아당긴다. 지금 하려는 것은 제황이 현재 할 수 있는 최강의 공격이었다.
한 번 쏘면 거의 보유마나의 삼분에 일이 날아가기에 함부로 쓰진 못하려니와 의외로 이 방법은 상당한 난이도를 자랑했다. 스킬이라는 건 게임처럼 버튼 꾹 누르면 나가는 게 아니었다.
머리와 몸에 각인된 그 스킬을 꺼내는 건 온전히 보유자의 몫...
그래서 과거 엘어스에서 몇 번 시도했다가 마나가 꼬여 몸이 크게 상한 기억이 있다.
-이전에 3중첩에 실패하면 항상 내가 네 뒤치다꺼리를 해야 했는데 이제 그런 걱정은 덜었군.
왠지 조금 아쉬워하는 듯한 궁기의 목소리다.
그렇다. 이제는 그녀만이 아닌 타인이 함께 한다.
-이제 동료라는 게 있으니까.
그녀의 말에 답한 제황은 천천히 스킬들을 일깨웠다.
‘무음시’
쉬잇...
비천격에 내제된 무음시를 쓰자 통아에서 황금빛 기운이 일어나 애기살로 스며들었다.
상당한 마나의 소모가 있었지만 제황은 곧바로 시위를 놓으며 무련궁술의 정수를 머릿속에서 끄집어냈다.
‘비상하며...'
우드드득...
'춤추는...'
츠츠츳...
'힘의 화살’
파파팡!
시위를 놓는 순간 소리 없는 거친 대기의 울림이 제황을 내리 덮쳤다. 제황을 중심으로 먼지가 사방으로 훅하고 밀려나간다. 먼지구름에 눈 한번 깜빡일 만하지만 제황은 자신이 쏜 화살의 궤적을 쫓았다. 화살을 인도하는 것은 오롯이 제황의 궁기안이다. 비로소 그의 사냥이 시작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