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
구조임무
피지의 설명을 들으며 제황은 눈앞의 계기판을 바라봤다. 끔찍할 정도로 버튼이 많은 계기판이다. 이름조차 없는 그 버튼들을 피지가 툭툭 누르며 말했다.
”대부분의 버튼은 전투와 관련되어 있는 거니 지금은 상관없습니다. 일단 가장 중요한 사항은 이 네비게이션에 있습니다. 기본적인 것은 아시죠?"
피지가 운전석 오른쪽에 부착된 11인치 가량의 터치스크린을 손가락으로 치며 말했다.
"네. 몬스터의 이동이나 영역 정보가 상시 업데이트 된다고 알고 있습니다. 시험문제로 네비게이션 판독과 관련된 문제도 꾸준히 나왔었죠.“
"맞아요. 그만큼 헌터들에게 있어서 이건 매우 중요한 겁니다. 만약 무장버스를 포기해야 한다면 최우선적으로 챙기거나 혹은 파괴해야 하는 거구요.”
피지의 말에 제황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비게이션은 모든 공격대의 움직임이 체크되기에 악용될 소지가 컸다.
“평소 시간이 되실 때마다 여기 입력되어 있는 몬스터 종류를 보시는 게 좋을 겁니다. 어디에서 어떤 종류가 출현한다는 것만 알아도 판단하는데 도움이 될 겁니다. 그리고 이거 이거 이거는 절대 누르면 안 됩니다. 강제업데이트 버튼인데 한번 누르면 업데이트 탐색이 끝날 때까지 아예 켜지지 않거든요. 그리고 이 버튼은..."
뚜욱...뚜욱... 뚜욱...
피지가 제황에게 다른 것을 설명하려고 할 때 문득 계기판 맨 상단부에 붉은 빛이 점멸하며 비프 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피지는 설명을 멈춘 채 붉은 빛이 나오는 버튼을 눌렀다.
버튼을 누르자 기계음으로 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칙... 지원요청...칙... ZX5TRA193521...반복한다... 지원요청...ZX5TRA193521
"ZX 면... 보자..."
"진성공격대네."
어느새 운전석으로 다가온 박중위가 네비게이션을 쿡쿡 누르며 말했다.
버튼 몇 개를 누르자 붉은색 점과 선이 요란하게 그어진 곳에 푸른색 점이 깜빡이는 게 보였다.
"어떻게 합니까? 좌표로 보면 저희가 가장 가깝기는 하지만... 5티어 몬스터라면 위험합니다."
지원 요청 시 울리는 저 ZX 로 시작되는 단어는 신호를 송출하는 공격대에 대한 정보가 함축된 음어였다. 지원요청을 하는 대상과 상대하고 있는 대상에 대한 정보 그리고 좌표가 뭉뚱그려 울리는 건데 저걸 대충 해석해 보자면 진성공격대가 5티어 몬스터를 레이드 중 문제가 터졌다는 뜻이다. 문제는 중간에 'R' 은 몬스터의 숫자를 뜻하는 것인데 저 표식은 숫자 입력이 아예 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피지의 물음에 박중위가 한숨을 내쉬며 팔짱을 꼈다.
"일단 10분만 기다려보지. 근처에 있는 공격대가 지원을 갈 수도 있고 우리 쪽도 전투피로도가 있어서 힘들어. 진성 놈들은 원체 엄살이 심한 놈들이니까."
"알겠습니다."
박중위의 말에 피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비프 음이 나오지 않도록 조작해 버렸다.
그리고 10여분이 지나자 박중위의 말대로 해당 지원요청에 대한 응답하는 공격대가 나타났다.
"음...강철공격대네. 오케이 믿을 만하지... 그럼 우린 가던 길이나 열심히 가자구."
"예."
***
저스틴 포인트로 가는 길은 매우 길고 지루했다. 지구와는 완전히 환경이 틀린 엘어스다. 굽이굽이 돌아가는 건 둘째 치고 30톤 중량의 무장버스도 지나기 힘들 정도로 급경사가 그들을 반겼다.
군인 본연의 임무인 순찰임무도 의외로 지겨운 면이 없잖아 있었다. 첫날 오크정찰대와 부딪히고 삼일 째 되는 날 오크부락을 습격한 후 별다른 일은 없었다. 그 흔하다던 오크순찰대의 습격도 없다. 하루의 3/2는 거의 무장버스 안에서 생활했고 중간 중간 화장실이 급한 이들은 버스를 세우고 용변을 봤다.
그나마 잠은 제대로 된 막사를 설치한 후 잤기에 다음날 피로는 없었지만 딱히 위협이 될 만한 몬스터는 나타나지 않았기에 제황은 이곳이 자신이 생사를 걸었던 엘어스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물론 그 이유에 대해서는 아주 자세히 들었다. 무료한 무장버스 생활에 심심해진 소대원들은 그나마 새로운 뉴페이스 제황에게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고 제황의 대답이 매우 짧다는 것에 실망한 것도 잠시 굳이 묻지도 않은 걸 하나하나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우리가 밀어낸 거예요."
지나라는 아가씨는 가느다란 손가락을 움직여 테블릿을 주욱 그었다. 테블릿 위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구불구불한 수십 개의 길들이 나타난다.
"피지 오빠가 경로설정을 잘해서 몬스터 경계를 잘 피해 다니는 것도 있지만 지금 말해준 지점 사이에 있는 고위몬스터는 거의 밀어냈죠. 인간의 자취가 많아지니 몬스터들도 물러나는 거고요."
"그렇군요.“
”또 뭐 궁금한 거 없어요?“
지나의 물음에 제황은 테블릿의 지도를 움직여 한참 남쪽에 있는 검은 부분을 손가락으로 찍었다.
”여긴 어때요?“
"음...대수림. 여긴 아마 손도 안댈 껄요. 조금만 들어가도 5티어에서 7티어 몬스터들이 우글거리는데...서쪽의 바다 영토와 맞닿아 있는 곳인데 지도도 없어요."
"그렇군요."
제황은 고개를 끄덕이며 검은 암영으로 가려진 곳을 응시했다. 그곳은 제황이 엘어스에서 2년간 살아남은 곳이었다. 거대한 나무로 이루어진 숲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다고 하여 이름은 대수림... 5티어의 몬스터도 한낱 먹잇감이 되는 곳이다.
제황은 그곳을 탈출하는 날까지 그 거대한 뱀은 손도 대지 못했다. 당시의 뱀이 내뿜던 그 무시무시한 존재감을 떠올리던 제황의 옆구리를 툭 건드린 지나가 교태로운 눈웃음을 치며 말한다.
"그건 그렇고 여자친구 있어요?"
지나가 옆에 찰싹 달라붙으며 말했다. 향긋한 냄새가 제황의 코끝에 밀려들어온다. 그와 함께 지나의 깊게 파인 탱크탑 안으로 소담스럽게 모인 가슴이 눈에 들어왔다.
"네. 있습니다."
그녀가 유혹적인 눈빛으로 제황을 바라봤지만 제황은 단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에... 역시인가. 하긴..."
은근한 눈빛으로 제황을 바라보던 지나가 조금 서운한 듯한 눈빛을 했지만 이내 다시금 눈을 빛내며 달라붙는다.
"어디 살아요? 서울? 역시 같은 각성자?"
"네.네.네."
제황이 고저 없는 단호한 목소리로 빠르게 대답하자 제나는 입안으로 '철벽남' 어쩌고 중얼거리다가 이내 다시 제황에게 달라붙으려 했다. 그러나 그런 그녀의 행동을 막아서는 목소리가 있었으니...
"지나야. 네 차례야."
유리라는 건장한 2티어 탱커 아가씨가 지나의 어깨를 툭 치자 그녀는 시간을 확인하고는 오만상을 찌푸린 채 투덜거리며 지붕으로 올라가는 사다리에 발을 걸쳤다. 그녀가 올라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국이 내려오더니 굳은 몸을 풀듯 스트레칭을 하다가 제황을 힐끔 보고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편하게 대하세요. 저 신입입니다."
"아뇨."
제황은 굳이 그들에게 위세를 떨 생각이 없었지만 제황의 대해 조금 알게 된 군각성자들은 제황을 매우 어렵게 대했다. 피지는 군각성자 중 고참이기에 제황에게 좀 편하게 대하기는 했지만 정국과 민구는 제황을 어려워했다. 무려 권제의 손자다.
가진바 무력은 소대장인 4성 헌터인 박중위에 맞먹고 그 외에 신비한 능력들도 갖춘 디바우저다. 아예 태생 자체가 틀려 보이는 제황이기에 그들의 반응은 당연한 것이었다.
"제 친구도 지금 군각성자로 복무 중이에요. 남 같지 않아서 그러니 편히 하셔도 되요."
제황의 말에 정국은 이채롭다는 눈빛으로 제황을 바라봤다. 헌터계의 3D라고 할 수 있는 군각성자에 이런 반물질수저의 친구가 있다는 건 언뜻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지만 제황의 말뜻을 알아들은 정국이 곧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친구가 군각성자라니 의외네요. 혹 이름이...”
“마동철... 대략 3년 전에 군각성자가 되었습니다. 투입된 게이트는 서울게이트고요.”
제황은 혹시 정국이 동철을 알까 하는 마음에 조바심을 내며 물었다. 너무 오래 연락이 끊긴 건 둘째 치고 그의 친구 동철은 최소한 고아원 수녀님한테는 연락을 할 이였다. 동철이 군각성자로 각성시술을 받아 게이트 너머로 넘어간 것까지는 확인했는데 그 이후의 행적은 묘연했다.
“마동철...마동철이라...”
동철의 이름을 곱씹던 정국이 이내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네요.”
“네.”
사실 별로 기대하지 않았다. 틈틈이 혼자 찾아보기도 했고 권제할아버지의 도움도 받아봤지만 이상하게 동철의 행적은 게이트 안에서 뚝 끊겨버렸다. 이제는 어딘가에서 죽었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도 혹 모르니 한번 알아보죠. 우리들끼리 소통하는 연락망이 있으니 물어보면 될 거에요.”
“감사합니다.”
정국의 말에 제황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사람의 생사가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지만 죽었더라도 최소한 친구가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는 알아야 했다. 그것이 마음을 나눈 친구에 대한 도리다.
그 때 앞쪽 조종석에서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칙... 구조요청...칙... ST5TRA239411...반복한다... 구조요청...ST5TRA239411
“구조요청이군.”
앞전의 것과 다르게 박중위는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원요청과 구조요청은 이야기가 틀리다. 지원요청은 레이드 중 사고가 발생했을 시 울리는 경보라면 구조요청은 레이드가 아닌 생존을 위해 날리는 신호였다.
“옵서치 공격대..라... 소규모 공격대인가. 제길...일단 가보자. 지나는 길에 모른 척 할 수는 없지. 모두 전투준비! 5티어이니 정국, 민구, 현준은 기관포를 맡는다. 백병전이 될 수 있으니 각자 개인무장 점검하고 제황씨랑 민경이는 사상자가 있을 테니 마음에 준비 해줘!”
“알겠습니다!”
박중위의 명령에 모두가 기민하게 움직였다. 제황은 자신과 함께 움직이게 될 민경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자신의 개인사물함에서 장비들을 챙기고 있었는데 그녀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 모두가 신속히 움직이는데 그녀 혼자 멍하니 서 있는 것 이상함을 느낀 재황이 그녀의 어깨로 손을 뻗었다.
“괜찮아요?”
제황이 어깨를 툭 치자 그녀는 화들짝 놀라 제황을 바라보고는 이내 다시금 눈을 사물함에 고정시켰다.
“괘...괜찮아요.”
입으로는 괜찮다 이야기하지만 표정이 영 아니다. 찰나지만 하얗게 뜬 얼굴과 쉴 새 없이 흔들리는 동공이 보였다.
낮게 한숨을 내쉰 제황이 박중위를 돌아보며 말했다.
“민경씨는 아무래도 안될 것 같습니다.”
제황의 말에 민경이 화들짝 놀라 제황을 돌아보며 외쳤다.
“하..할 수 있어요!”
굳은 표정의 박중위가 그녀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얼굴 기색을 살피더니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넌...남아.”
“할 수 있어요!”
“고집 부리지 마! 넌 기관포 지원으로 올라가. 유리! 제황씨한테 붙어.”
박중위는 항명은 듣지 않겠다는 듯 운전석 쪽으로 갔다. 민경은 얼굴이 빨갛게 변했다가 제황을 획 노려보더니 외쳤다.
“당신이 뭔데! 나를 판단하는 거야! 난 할 수 있... 악!”
짝!
제황을 향해 소리치던 그녀의 목소리는 유리라는 아가씨의 따귀에 끊겼다.
“작작해! 등을 맡길 수 없는 동료를 데려갈 수 없다는 건 당연한 거야!”
“우욱...”
유리는 2성 탱커였기에 상당한 근력의 소유자였다. 그런 그녀가 아무리 약하게 쳤더라도 힐러인 민경에게는 강펀치다. 뺨을 맞은 민경은 볼을 감싼 채 자리에 주저앉았다.
“극복하려면 일단 네 현재 상태를 인정하는 게 먼저야. 우리 천천히 극복해 보자.”
“흐흑...”
민경이 고개를 푹 숙인 채 고개를 끄덕이자 유리가 한숨을 푹 내쉰 뒤 그녀의 어깨를 토닥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