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
그는 누구인가.
젓가락처럼 삐쩍 마른 남자가 들고 있던 서류를 내던지며 외치자 그의 앞에 쩔쩔매고 있던 한 남자가 숙인 허리를 펼 생각도 못한 채 말했다.
“아... 그게 그 1소대장 또라이가 설마 그런 짓을 저지를 줄은 몰랐습니다.”
“이봐요. 당신네 중대장이랑 이야기는 다 끝났단 말이야! 당장 돌아오라고 무전 쳐!”
“저... 모든 통신이 불통인 상태입니다.”
“그게 말이 돼?! 우리 특전사에서 그를 차출하기 위해 이틀을 왔어!”
그가 외치자 허리를 숙이고 있던 남자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물론 특전사의 차출이 우선권을 지니고 있기는 하지만 1소대가 이번에 2주짜리 장기 자유 임무를 끊고 나갔습니다. 예상하건데 그 또라이가 숨으려고 마음먹으면 찾을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빌어먹을...”
그의 대답에 삐쩍이는 이를 갈았다. 생각 같아서는 이곳에서 2주 동안 기다리다가 그를 데려가고 싶지만 자신은 2주나 이곳에 버티고 있을 명분이 없다. 분명 그 1소대장이라는 또라이도 그걸 계산해서 중간에 채간 것이리라. 부대 안에서는 차출에 견딜 명분이 없으니 중간에 도망친 것...
그는 지금 그가 누구를 데려간 건지 알기나 할까.
“끙...”
당장 돌아가 내뱉을 변명이 궁색한 그가 신음을 내질렀다.
“되는 게 하나도 없군.”
얼굴을 손을 훑은 그는 이곳에 출발하기 전 자신에게 신신당부하던 상관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기필코 우리 쪽으로 데려와야 해.”
“질문 있습니다.”
“뭔가”
“아무리 2성하이브리드 힐러라도 우리 특전사가 이렇게 절차를 무시하고 데려와야 하는 겁니까?”
그의 물음은 합당했다. 의무복무에 들어간 예비헌터를 굳이 자신이 직접 움직여 데려와야 하는 이유를 찾지 못한다.
“이건 자네만 알고 있게.”
주위를 확인한 그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친구는 바로... 권제의 손자일세.”
“예?! 권제요?”
그의 말에 말라깽이는 눈을 크게 떴다.
“그래. 내부적으로는 쉬쉬하는 이야기지만 이미 그에 대해 눈독들이고 있는 곳이 한 트럭이야. 그 친구만 우리 쪽으로 데려올 수 있으면 자네나 나나 권제와 줄 하나 걸 수 있어.”
“아...알겠습니다.”
권제의 손자라는 말에 그 모든 것을 이해한 말라깽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만약 상관의 뜻대로 된다면 대한민국 최강의 7성 헌터와 인맥이 생기는 것이다.
“그랬었는데...”
회상에서 깨어난 그는 입맛을 다시며 핸드폰을 들었다. 일이 정말 이상하게 꼬여 버렸다. 그 미친 소대장은 지금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알기나 할까.
***
덜컹거리는 진동 속에 창밖으로 엘어스가 보인다. 신기할 정도로 지구와 비슷한 태양을 지니고 있기는 하지만 완전히 다른 생명체가 있는 이 땅은 1년 전 그 때처럼 후덥지근하다.
-그건 그렇고 다시 돌아왔네.
-응. 엘어스.. 아주 좋아. 그 귀찮은 암컷들을 안보니 더 좋군.
제황의 물음에 궁기가 대답했다. 제황과 지낸지 오래되어 그녀의 말투는 이전에 가끔씩 뱉던 고어체가 사라져 있었다. 아무리 제황이 덤덤한 성격이라지만 항상 몸에 달라붙어 있으니 좋은 꼴 나쁜 꼴 다 보이게 되자 어느새 그녀를 가족과 같이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 조용하니 좋네.
-음? 아쉽지는 않아? 네가 죽으라고 하면 죽을 미소녀들이었는데...
-전혀...
그의 말에 단언하듯 자른 제황이었다. 물론 이건 진심이었다. 아카데미에서의 1년은 참으로 고달팠다. 물론 그것은 수업 내용이 힘들었다는 게 아니다. 남들이야 멋을 부릴 수 없다며 불평했지만, 획일화된 제복과 단정한 용모를 중시하는 아카데미이기에 이전과 같이 허름한 옷을 입을 수 없던 제황이 멋들어진 제복에 제대로 된 스타일링을 하고 다니기 시작하자 군계일학의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고 특히나 2성 하이브리드 헌터라는 게 알려지자 1년 내내 여자들이 줄을 이었다.
그녀들 덕분에 되도 않는 후드를 쓰고 다녀야 했다. 1년 내내...
-권제 할아버지에게 부탁하지 않았으면 분명 여기까지 따라왔을 거야.
-그래. 특히나 그 미친년은 분명...
그녀의 말에 제황은 피식 웃었다. 아카데미 내내 거의 스토커처럼 따라붙던 붉은머리의 미녀의 얼굴이 떠오른 것이다. 단순한 스토커라면 그냥 내쫓기라도 하겠는데 그녀의 뒷배경이 워낙 어마무시해서 얽히는 것 자체를 피한 여자...물론 제황이 뒷배경으로 꿀릴 건 단 하나도 없었다. 아니 사실 제황이 마음먹고 배경 자랑 하면 아카데미 내에서 제황 앞에 고개 숙이지 않을 이는 없었으리라.
권제의 위엄은 아카데미 교장도 오체투지하게 만들 수 있으니까. 그렇지만 제황은 그런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기에 권제의 도움은 정말 최소로 받았다. 굳이 그런 게 아니더라도 권제에게 받은 건 이미 차고 넘칠 정도로 많았다.
"너 두고 봐! 어디라도 쫓아가겠어!"
그녀의 목소리가 아직도 귀를 울리는 것 같다.
이윽고 무장버스가 멈췄다.
“섹터8 도착입니다!”
“좋아. 좀 쉬었다 가지.”
피지라는 남자가 외치자 박중위가 안전벨트를 풀고 일어나며 외쳤다.
“소대 하차.. 쉬자.”
철컹! 철컥철컥
무장트럭의 외장갑이 위로 들어 올려지고 안에 숨겨진 부분을 소대원들이 넓게 펼치자 금세 하나의 근사한 막사가 만들어졌다. 10 여명의 소대원들이 움직이자 내부 정리가 순식간에 끝났다.
모두가 한 자리에 모이자 가운데 선 박중위가 제황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일단 자기소개 하지."
"네. 국가아카데미 제 53기 천제황 하사입니다. 2성 하이브리드 라이센스를 소유 중이며 힐러입니다."
15개월을 디멘션 게이트에서 복무하는 예비헌터들은 복무기간 한정으로 부사관 직급 중 하사라는 직급을 받는다. 징병제로 들어오는 병력과 구분하기 위한 것이지만 장교 계급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현재에 있어서 그다지 제대로 된 취급을 받지 못하는 계급이 하사였다.
"좋아. 부연설명하자면 딜러계열 스킬 보유자라고 나와 있으니까 딜러진에서는 특히 신경써주고... 양혜지씨 알았지?"
"예. 대장..."
그의 말에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건장한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자..그럼 일단 내무실 생활부터 가르쳐줘야겠지."
박중위가 리모콘을 누르자 위쪽에서 모니터 하나가 스르륵 내려오더니 화면이 켜졌다.
"일단 15개월간 지지고 볶고 할 이 무장버스에 대해서 먼저 설명하지. 정확한 명칭은 KM-09A 대형전술차량이다. 자잘한 건 설명할 것 없고 8륜구동에 공도에서는 최고속도 100킬로미터까지 도달할 수 있으며 마나전지를 사용하는 엔진을 탑재하고 있어서 한번 충전 시 한 달간 운용할 수 있다. 항속 거리는 대략 20000킬로미터 정도인데 딱히 재보진 않았고 15개월 동안 생활해야 할 집 같은 곳이니 마음에 안들어도 정 붙이도록 노력하게. "
"네."
디멘션게이트에서 군이 가장 많이 운용하는 대형전술차량이기에 이 차량에 대해서는 기본교육을 모두 받은 상태였다. 한국형이라 하여 앞에 KM이라 붙이지만 실제 엔진 부품들은 모두 독일제로 알려진 차량이다. 국산화에 성공했다고는 하지만 아직 마나전지로 구동하는 엔진은 대한민국에 요원한 물건이었다.
"소대생활에 대해 가르쳐주지. 이동하지 않을 시에는 버스를 중심으로 저쪽은 여자막사 이쪽은 남자막사 뒤쪽은 취사장 버스 앞은 식당 겸 회의실, 화장실은 여자막사쪽에 세면장이랑 같이 붙어있다. 참고로 화장실에 대해서 남자는 거의 알아서 해결하는 형편이니... 음... 혹시 대자연의 품속에서는 X가 안 나오나?”
“아닙니다.”
제황의 떨떠름한 대답에 박중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 꼭 쓰지 말라는 건 아냐. 그냥 나중 되면 그냥 아무데나 싸는 게 편해서 우린 그걸 선택한 거지. 그냥 쓰고 싶으면 쓰라고... 그렇지만 샤워하고 나오는 여자대원이랑 눈 마주쳐도 너무 놀라지마. 한 한 달 정도 같이 생활하면 같은 침상에 누워도 여자생각 따위는 들지 않을 테니까.”
“박중위님!”
여자들이 빼액하고 소리치자 박중위가 노인네 같은 표정을 지으면서 손을 설레설레 저었다.
“아무튼 이렇게 돌아가. 그리고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런 식으로 데려온 건 참 미안해. 쉴 틈도 없이 말이야.”
“아까 말씀드렸지만 별로 상관없습니다.”
“좋아. 뭐 나중에 지내봐야 진짜 성격을 알겠지만 드러난 성격은 까칠하지 않고... 그런데 왜 얼굴을 가리고 있나? 전입서류에도 그 후드를 벗지 않고 찍었던데... 얼굴에 무슨 문제라도...”
박중위가 제황의 후드를 턱짓하며 말했다.
“예. 조금 문제가 있어서 가급적이면 벗지 않습니다.”
“음...그런가. 그래도 가급적이면 드러내고 다니게나. 돌발상황에 행여 못알아보면 안되잖아.”
그의 말에 제황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소대원 구분 못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어림 짐작된 까닭이다. 제황은 목 뒤로 손을 움직여 벨크로를 풀었다. 어차피 딱히 가리고 다닐 생각도 없었다.
찌이익...
후드를 벗어내자 곧이어 제황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러자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제황의 얼굴을 바라보던 소대원들의 얼굴에 놀람의 표정이 드러났다. 후드를 뜯어낸 제황이 조금 개운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잘 부탁드립니다.”
“...”
막사 내에 침묵이 흘렀다. 그나마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건 소대장인 박중위다.
“연예인이여?”
“꺄!!!”
박중위의 말에 마법에 풀린 이들이 하나 둘 입을 열었다. 특히 여자 부대원들의 환호성이 가장 크다.
“꽃미남이야아!!!”
“꺄! 저 썩은 면상들 보다가 눈이 힐링 되는 것 같아.”
여자들이 들썩거렸다. 남자들 쪽은 그나마 잘생긴 동성의 출현에 크게 동요하지는 않았지만 심하게 잘생긴 이가 새로 들어오자 썩은 면상들의 주인공들은 서둘러 고개를 숙이기 바쁘다.
“이거야. 원... 오늘부터는 여자막사 쪽에서 남자막사 쪽으로 습격 들어오는 걸 방어해야겠군.”
“하하하...호호호!”
분위기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징병된 이들이 아닌 모두 국가로부터 제대로 된 대접을 받는 헌터들이고 실전을 업으로 삼는 이들이기에 쓸데없는 똥군기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아카데미에서 공부하기로는 그런 곳이 상당히 많다고 들었다.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신참을 교육이라는 명분 아래 몬스터들 한가운데 던지고 가는 것도 다분하다고 했다. 그런데 이곳에는 그런 게 보이지 않았다. 함께 고생하며 사는 동료 의식이 끈끈해 보였다.
"조심해야 할 건 지나 뿐이군. 지나야. 요즘 여자들도 성군기 위반하면 영창이다."
그의 말에 꽤 조신하게 앉아있던 미모의 여성이 도끼눈을 뜨며 박중위를 노려보다가 제황을 힐끔 바라보더니 다시금 고개를 숙인다.
“지나 연애세포 깨우느라 힘들어 보이네. 무서워라. 일단 농담은 이것으로 하고... 몇 가지 주의사항이 있다.”
박중위의 말에 웃음이 잦아들었다.
“첫째 모든 전투 및 레이드 시 리더의 말에 절대복종이다.”
“끄덕...”
그의 말에 제황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아카데미에서부터 숱하게 듣던 말이다. 자신이 얼마나 잘났건 능력이 뛰어나건 소대에 든 이상은 소대 리더의 말에 절대 복종이다. 물론 리더의 사망 시나 부재 시에는 개인 행동하는 게 옳지만 소대에 포함되어 움직일 때는 절대 복종해야 했다.
“둘째 우리 1소대에는 군각성자가 3명 있다."
그의 말에 세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 정국이는 어려보이지만 유부남에 딸바보, 여기 민구는 가족부양하겠다고 뛰어든 미친 꼬맹이, 마지막으로 여기 평주는 피부가 곰보라서 별명이 피지야. 자네도 차차 알겠지만 군각성자는 군대에 메인 상태라 헌터들처럼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해. 그러니
노파심에 하는 말이지만 차별적 언어나 잔심부름을 시키는 짓은 무조건 금지다."
“네.”
군 각성자... 박중위가 많이 순화시켜 말했지만 다른 이들이 군으로부터 제대로 된 대우를 받는 반면 그들은 군에 소속된 노예라고 보는 편이 좋았다. 군 각성자는 재능등급보다는 본인의 자원으로 들어오는 것이기 때문에 능력이 떨어진다는데 있었다.
재능이 떨어지기에 좋은 스킬을 가지고 있기도 힘들어 중요 자원이 아니니 어느 부대에서는 그런 군각성자들을 모아 위험한 곳에 투입한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런 이유로 어느 순간부터 군각성자들은 일종의 소모품 취급을 당하게 된 것이다.
군각성자에 대해 생각하며 제황은 그의 친구 마동철을 떠올렸다. 군각성자가 된 후로 제대로 된 연락도 하지 못했다. 이후 휴가 때 찾아보려 했지만 고아원 수녀님도 편지 몇 장 받은 게 전부라고 하니 연락은 요원한 것...
“마지막으로 난 우리 소대의 누구도 포기하지 않는다. 모든 행동방침은 소대의 안전을 기반으로 움직일 테니 차후 행동방침을 정할 시 그에 따르면 단독행동도 용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