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사거리 100만-44화 (44/301)

# 44

잃어버린조각을찾다

그런 유리케이스가 끝도 없이 이어져 있었다. 대체 몇 명의 유품이 이곳에 잠들어 있는 것일까. 그런 제황의 궁금증을 읽기라도 한 듯 권제가 말했다.

"현재 남은 것들은 정확히 3251점이다. 그나마 처음 만들었을 때보다는 많이 줄었지. 당시에는 길이 10킬로미터의 터널로도 모두 넣기가 불가능했으니까. 시간이 지나고  많은 유품들이 제 주인을 찾아 나갔다. 그리고 남은 이것들은... 이제 찾아주는 주인 없이 이렇게 자리를 지키고 있지."

권제는 추억에 잠긴 눈으로 그것들을 하나하나 쓸어보며 앞서 걸었다.

그 하나하나에 그의 손길이 닿았다면 권제는 대체 몇 명의 동료들을 저승으로 떠나보냈을까.

제황은 대답 없이 그를 따라 걸었다.  유품들에는 대충돌로 인해 일어난 참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한이 느껴지는구나. 맺히고 맺혀 응어리진 한이... 갈곳을 잃은 망자들이...

궁기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도  선홍색의 핏자국이 선명히 남아있는  붕대가 감긴 리볼버에는 빈 탄피들이 들어가 있었다. 두툼한 단면을 지닌 두 동강 난 대검 그리고 그 옆에는 잔뜩 녹슨 부러진 화살촉이 보였다.

"내가 이곳을 이런 모양으로 만든 이유를 알겠느냐."

"예."

권제의 물음에 제황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터널형식은 이곳에 들어오는 사람이 최대한 많은 유물을 보게끔 만든 구조였다. 그것은 마치 이곳에 들어올 때마다 이것들을 한번이라도 더 보고 그 때의 기억을 잊지 않으려는 몸부림처럼 보였다.

가장 아래에서부터 위로 올라오는 나선형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이곳을 나가기 위해서는 모든 유물들을 한 번이라도 봐야 했다. 이곳에 들어서는 이들이 어떤 마음가짐을 가지길 바랬는지가 느껴지는 대목이다.

권제와 한참을 걸어가던 제황은 권제가 발걸음을 멈춰 서자 고개를 돌려 하나의 유리케이스를 바라봤다. 그곳에는 손바닥만한 검은색 목패와 약 90센티 정도의 황동색 막대가 놓여 있었다.

딸깍...

권제는 유리케이스를 연 뒤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제황은 유리케이스의 앞으로 다가가 손바닥 만한 검은 목패를 소중히 집어 들었다. 낯설지만 익숙한 느낌... 산장에 모셔진 위패들과 같은 모양 같은 색이다.

"무련가 79대손 천제황 할아버님을 뵈옵니다."

목패의 앞에는 천병재라는 이름이 한자로 음각되어 있었는데 뒤편에는 작게 77대 라고 써져 있었다. 한동안 그 목패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제황은 이내 그것을 무한고에 집어넣었다.

이것은 궁기산 산장의 사당으로 가져가야 한다. 드디어 유일하게 주인이 없던 자리를 채울 수 있게 된 것, 무련가에는 조금 특이한 전통이 하나 있었다. 직진후계자를 삼아 가전무술을 가르치기 시작하면 스승 되는 자는 그 때부터 자신이 죽어 사당에 올릴 위패를 직접 깎는다. 보통은 그 아비가 자식에게 무예를 가르치게 되면 시작하는 이 전통으로 탄생하는 목패는 모두 사당에 보관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유일하게 빠져 있던 부분을 드디어 채울 수 있게 되었다.

'아버지가 좋아하시겠네. 아니면 많이 혼나시려나.'

할아버지를 많이 원망하셨지만 사실 속으로는 사무치도록 그리워하셨다. 그래서 평소에는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는 가급적 피하던 아버지였고 술만 마시면 할아버지 욕을 하며 눈물을 흘리셨다. 이제 두 분이 다시금 만나게 될 것을 생각하니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숙원 하나를 해결하게 된 것...

눈을 감고 상상하던 제황은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그 옆에 놓여 있던 통아를 향해 손을 가져갔다. 본래 한쌍이었을 철궁이 없어 아쉽기는 하지만 두 개 중 하나라도 다시금 돌아왔으니 고마울 따름이다.

그리고 제황의 손이 통아에 닿는 순간 제황의 눈앞에 한줄기 글귀가 떠올랐다.

'세트 아티펙트 [비천격]이 적합자를 찾아 계승을 시작합니다.'

깜짝 놀란 제황이 그것을 놓치려는 순간 후끈하고 달아오르며 손에 착 달라붙는 것과 동시에 통아로부터 금색의 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스으으..

"윽..."

제황은 손에 쥔 통아에서 뜨거운 뭔가가 손을 타고 흘러들어오자 짧게 신음을 흘리며 그 기운에 신경을 집중했다. 들어온 그 기운은 제황의 단전을 향해 빠르게 이동하기 시작했다.

-내가 막아줄까?

거침없이 치고 들어오는 기운에 제황이 저항하지 않자 궁기가 물었다.

-아니 그냥 둬.

제황은 궁기를 말렸다. 가문에 대대로 내려오던 가보다.  설마 그 후손인 자신에게 해를 가하랴는 생각에 제황은 그것이 하는 짓을 가만 놔두기로 마음먹었다. 단전을 향해 달려오던 그 기운은 제황의 단전 앞에서 잠시 주춤하더니 이내 천천히 흡수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기운이 모두 사라진 순간...

'세트 아티펙트 [비천격]의 계승이 완료 되었습니다.'

그 말과 함께 마치 아이템의 옵션들이 보이는 것처럼 눈앞에 황금색의 창이 나타났다.

비천격-슈페리어등급 세트 아티펙트

계승자:천제황

제질:황동

애기살 사용시 투사체 사거리 30프로 상승

애기살 사용시 투사체 속도 50프로 상승

액티브 스킬

무음살

세트 효과:???

비천궁(0/1)

비천격(1/1)

그것을 확인한 제황은 놀라 권제를 바라봤다. 그러나 권제 또한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오랜만에 보는 아티펙트 계승이군."

"이게 계승인가요?"

“그래. 계승이다.”

제황은 천천히 금빛이 사그러져가는 통아를 바라봤다. 아티펙트의 스킬을 이용해 싸운다는 로더에 대해서 들어보기는 했지만 실제 계승이라는 게 이루어지는 걸 본 건 처음이었다.

사실 현대에 들어서 로더들은 거의 사라졌다. 과거야  곳곳에서 순수하게 아티펙트를 들고 몬스터에 저항한 이들이 나타나 로더라 불렸지만 거의 대부분의 아티펙트들이 나타나고 1세대 로더들이 노쇠화 되거나 아티펙트를 탐낸 무리들에 의해 살해당하면서 그들이 사용하던 아티펙트들은 일부는 다른 이들에게 계승이 되거나 혹은 이곳저곳으로 팔려나가는 신세가 되었다.

워낙 수량이 한정되고 귀한 물건이기에 천문학적인 가치가 있기는 하지만 그 유물들의 이 지닌 능력의 대부분이 전투와 관련되어 있기에 그 아티펙트들은 자연적으로 헌터들에게 흘러들어갔고 이제는 로더를 만들어주는 물건이 아닌 헌터 장비의 개념이 더 커졌다.

"아무래도 진짜 주인이 나타나지 않아 계승이 일어나지 않았나 보군."

권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티펙트를 소유하는 방법은 세 가지였다. 첫째는 아티펙트의 소유자가 다른 이에게 계승시키는 것이고 두 번째는 포기하는 것, 마지막 세 번 째는 아티펙트의 소유자가 죽음을 맞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전 주인인 제황의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다른 헌터들이 그것을 계승 받아야 옳았다. 그런데 이때까지 잠잠하던 물건이 제황이 나타나자 계승을 이룬 것이다.

그러나 제황은 그 이유를 알 듯 했다.

"예. 이것의 주인은 저희 무련가니까요."

그나마 두 개의 가보 중 하나라도 다시 건진 것을 위안삼은 제황은 그것을 무한고 안에 집어 넣었다. 이것은 옵션에 나와 있는 것처럼 애기살이라는 짧은 화살이 없으면 사용할 수 없는 물건이었다.

"무련가... 무련가의 천병재... 후우... 드디어 그분에 대해서 알게 된 건가. 허허..."

권제는 홀가분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수십 년간 유품들의 주인을 찾아주는 일을 했지만 그의 기억속에 가장 인상 깊었던 영웅의 흔적을 찾았다는 것이 그는 기뻤다.

'형님... 그거 저도 좀 가르쳐 주면 안될까요?'

'뭘 말이냐.'

'그 신기한 활쏘기요. 무슨 화살이 그리 날아 다닌데요? 휙~휙~ 하늘에서 춤도 추는데...'

'땍! 어딜 감히! 눈독을 들여!'

‘아 뭐 그렇게 성질을 내고 그래요. 그깟 활쏘기 따위!’

‘그깟 활쏘기?! 이게 가뜩이나 집에도 못가서 심란해 죽겠는데 옆에서 혈압 올리고 있어!’

‘아 집에 못 간 사람들이 형님 혼자 뿐이에요?’

‘이놈아! 난 아들내미가 집에 혼자 있다고! 이런 썩을 것들 내가 오늘 손가락이 다 찢어지는 한이 있어도 뚫고 갈 거야!’

‘아! 가긴 어딜가요! 여기 싹 막힌 거 알면서!!! 체육관에서 털어온 화살도 얼마 안남았다고요. 야! 이 형님 좀 잡아봐! 또 발작한다. 뭔 각성자도 아니면서 이렇게 힘이 세!

’놔놔!!! 시박! 안 놔?!‘

성질을 부리던 모습이 선하다.

"후우..."

고개를 저은 권제는 생각에 잠긴 듯한 제황에게 말했다.

“가자. 그분의 손자에게 대접을 소홀히 할 순 없지. 내가 유물의 주인을 찾을 때마다 마시던 술이 있다. 너와 함께 하고 싶구나.”

“예.”

제황과 권제는 말없이 걸음을 옮겼다. 아직도 제 주인을 찾지 못한 유품들의 숲 사이로...

***

우우우웅...

30톤 중량의 거대한 무장버스 한 대가 희뿌연 먼지를 일으키더니 자리에 멈춰 섰다. 무장버스에는 알록달록한 군용도색이 칠해져 있었는데 곳곳에 검게 변한 피들이 거뭇거뭇 묻어 있고 외장갑면에는 도끼로 찍은 듯한 구멍도 보인다.

덜컹...덜컹

무장트럭의 장갑 한쪽이 열리더니 한 군인이 뛰쳐나왔다. 얼굴이 땀범벅이 된 그는 얼굴에 붙어오는 흙먼지에 눈살을 찌푸리다가 이내 걸음을 옮겨 군용도색이 칠해진 거대한 조립식건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아! 박중위! 이쪽에 주차하지 말라고 했지?”

꼬장꼬장한 얼굴의 남자가 밀려들어오는 먼지에 눈살을 찌푸리며 외쳤다.

“그럼 주기장을 좀 가까이 설치해 주시던가요. 가뜩이나 임무 다녀와서 힘들어 죽겠는데...”

“뭐?!? 이 새끼 간이 배 밖으로 나와서!”

“아! 네. 제 간은 제가 간수 할테니 보급관님은 걱정 끊으시고요. 아니면 계급장 떼고 한판 하시던가요.”

박중위가 눈 한번 부라리자 삿대질하던  이가 끙하며 입을 다물었다. 계급장을 떼면 자신과 같은 일반인은 트럭으로 와도 감당 못할 인물이다. 사이도 그리 안 좋은 인물... 게다가 저 박중위가 지휘하는 제1소대는 중대에서 가장 실적이 좋은 소대였다.

이전의 군대라면 윗 사람 비위 잘맞추고 사고 안터지면 장땡이었지만 이제는 군대도 실적과 실력이 더 중요해진 시대였다.

그렇기에  일반인인 자신이 말해봤자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는 걸 알기에 분을 삼킬 뿐이다.

박중위는 안으로 걸어 들어가 정면에 붙은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가니 차가운 공기가 뜨거워진 몸을 식혀줬다.

“충성...”

책상에 앉아 있는 이에게 가볍게 경례하는 박중위다. 박중위가 들어왔을 때부터 읽던 책에서 시선을 돌린 중년의 사내가 얼굴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어, 박중위 수고했다. 오크 수색대랑 부딪혔다며?”

“예. 다행히 저희 쪽에서 먼저 발견해서  버스로 로드킬해버렸습니다.”

그의 말에  중년의 군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뭐...별탈 없어 보이는군. 일단 앉지. 그래... 정찰 결과는 어때? 곧 원정대 시즌인데 무리 없겠어?”

그의 물음에 박중위라는 이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그러더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위에 꼰대들이야 뭐라고 말하던 지들 마음대로 진행할 것 아닙니까.”

“뭐 그거야 그렇지만 최소한 보고는 해야 하니 그렇지.”

중년의 능글맞은 대답에 박중위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뗐다.

“가급적 추천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요즘 오크들이 번식기가 끝나서 드세졌습니다. 원정대 애송이들 뒤치다꺼리하면서 피해 없이 그곳을 통과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거기에 일본 애들이 운용하는 드론 잔해도 몇 개 치웠습니다. 다음 원정에서는 어쩌면 다른 나라 애들이랑 만날지도 모릅니다.”

“클랜들은?”

“걔들이야 뭐 무소식이 희소식이죠. 일 없으면 안부르니...”

"빌런들은?"

"잠잠합니다."

“그래? 다행이군. 원주민들의 흔적은 찾았나?”

원주민이라는 말을 꺼낼 때 중년인의 표정이 조금 심각하게 변한다.

"원주민이라는 건 드라코도 포함입니까?"

"아니, 아직 세계헌터사무국이 가만히 있기는 하지만 드라코들도 오크들과 같이 몬스터로 지정될 확율이 높아. 일단 국제적으로 원주민은 수인족 들만 인정하는 분위기고..."

그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박중위가 말했다.

“수인족들은 아직 발견 못했습니다. 아무래도 남쪽을 끼고 도는 대수림이 있으니까요. 북동쪽에 초지와 늪지에서 드라코놈들 부락만 몇 개 발견했습니다.

“흠...그렇단 말이지. 알았어. 나가봐.”

“예. 알겠습니다. 그런데 김소령님"

“뭐야?”

박중위가 은근히 다가오자 김소령이 인상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김소령님... 곧 있으면 새내기들 들어오지 않습니까. 저희 쪽에 배당될 녀석 좀 미리 알 수 없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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