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
잃어버린조각을찾다
옷이 갈가리 찢겨짐과 동시에 권제는 뒤로 물러났다. 믿겨지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아랫배를 내려다봤다. 한 대의 화살이 그의 손아귀에 잡힌 채 배를 가볍게 찌르고 있었다. 위치는 정확히 그의 비장(脾臟) 제대로 당했다면 아 소리도 못하고 쓰러졌을 것이다.
정신이 멍하다. 아무리 자신이 마나를 사용하지 않고 애병 또한 사용하지 않았다지만 이번에는 확실히 전력을 다했다. 그런데도... 당했다.
“헉헉...”
그는 눈을 들어 제황을 바라봤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전력을 다했는지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숨을 격하게 내뱉고 있었다. 들고 있는 커브스보우에 붙어있던 긴 뿔은 활에서 떨어져 바닥에 어지러이 뒹굴고 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세 대의 화살을 오른손에 든 채 한발은 이미 시위를 걸어놓은 채였다.
“허...”
근 몇 년 간 놀란 것 중 오늘이 가장 충격적이다. 뱀새끼 정도 되는 놈이 신기한 봉술을 사용하기에 욕심을 부렸는데... 아직 어리지만 온전한 용 한 마리를 본 것이다. 순간 그의 머릿속으로 이놈을 그의 그늘로 덮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만약 이 놈이 악한 마음을 먹고 성장한다면 그를 막을 수 있을까?
순간 그는 차라리 이 자리에서 죽여버릴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만큼 제황의 잠재력은 두려울 정도다. 그러나 그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다 늙어 무슨 망령된 생각인가 하며 속으로 자책한 그가 제황에게 물었다.
“더... 할 수 있겠느냐.”
권제의 목소리가 인자하게 변했다. 투기를 풀어버린 것... 그의 물음에 제황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대답한다.
“마나가 다 떨어졌네요.”
저렙의 한계다. 물론 그 전에 타인을 치료하며 소모된 마나를 회복하지 못한 것이지만 말이다.
“허허...그렇군.”
권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허탈하지만... 보고 싶던 건 다 봤으니 성과는 거둔 셈이었다.
‘결국 궁술이었군. 그 분과 같은...’
그는 마치 오랜 기억 속에 누군가가 생각나는 듯싶었다.
이토록 인상적인 궁술을 과거 오래 전 한 번 본 듯한 기억이 있다.
너무 찰나지간이었기에 그 분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는 못하지만 그가 날렸던 한 발의 화살은 아직도 그의 기억 속에 화인처럼 남아있었다.
활을 사용하는 고대무술... 천씨... 천씨?
눈을 감고서 제황의 움직임을 하나하나 음미하던 권제는 문득 상당히 익숙한 느낌에 눈을 번쩍 떴다. 신묘한 궁술을 사용하는 천씨? 분명 저 녀석의 대한 서류를 봤을 때 천씨로 나와 있었다. 이건 확인해야 할 상황이다.
“아이야.”
“예.”
권제의 몸에서 투기가 사라지자 제황은 시위를 놓으며 공손히 대답했다. 배에 한 발 맞추기는 했지만 제황은 그가 자신을 얼마나 봐줬는지 알고 있었다. 아마 조금만 더 강하게 밀어붙였으면 그의 머리는 수십 번 터졌을 것이다. 그나마 마지막에 내뻗은 무적세라는 스킬 한 번이 진짜였다.
“혹시... 네 할아버지의 함자가 병자 재자 쓰시느냐.”
제황은 권제의 입에서 갑자기 실종되신 할아버지의 이름이 튀어나오자 눈을 크게 뜨며 고개를 끄덕였다. 천병재... 할아버지의 이름이었다. 무려 60년 전... 대충돌로 인한 디멘션게이트가 온 사방에 열리던 날... 사람들을 구하겠다며 뛰쳐나가셔서 영영 돌아오지 않으셨다 전해들은 얼굴도 모르는 그의 할아버지...
“맞습니다만...”
“허어...”
권제의 몸이 비틀하고 흔들렸다. 그분의 손자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건 무려 60여년 전의 기억이었다. 무려 60년... 기억하지 못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지만 권제는 진심으로 자신의 기억력을 저주했다. 다른 건 모두 잊는다 해도 절대 잊어서는 안 될 이름을 그는 잊고 있었던 것이다.
“네가... 그분의 손자였구나.”
권제가 제황을 바라보며 슬픈 표정으로 말했다.
***
천병재...
그는 제황의 할아버지였다. 당시 궁기산에서 제황의 아버지에게 가전무예를 가르치던 할아버지는 디멘션 게이트가 열리자 몬스터에 학살당하는 사람들을 구해야겠다며 산장을 떠나셨다. 곧 돌아온다며 너는 절대 나서지 말라는 엄명을 아버지에게 남긴 채...말이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돌아오지 못했다.
당시 할아버지에게 한창 무련가의 궁술을 배우던 어린 시절의 아버지는 미완의 궁술만을 갈고 닦으며 하염없이 할아버지를 기다렸다.
몇 년이 흘러 각성자들과 인간의 군대가 몬스터를 밀어붙이기 시작했다지만 할아버지는 소식이 감감무소식.... 당시 너무나 어렸던 그의 아버지가 할아버지에게 제대로 배웠던 것은 그나마 용혈기와 용혈무 두 가지 뿐...
궁술을 보조하는 모든 비전을 습득했지만 정작 궁술은 겉핥기 밖에 배우지 못한 비련의 후손이 바로 제황의 아버지였다.
“할아버지는 돌아가신 겁니까?”
“그래. 그분은... 홀로 추격을 막으신다며 그곳에 남으셨었지.”
너무나 오랜 기억의 한 자락을 끄집어내는 건... 그리고 그 중 가장 아픈 기억을 끄집어내는 건 권제에게도 고역이었다. 주름진 그의 눈가에 습막이 어렸다. 먼 곳을 바라보는 노인의 눈은 아직도 아련하게 보이는 그분의 마지막 뒷모습이 보이는 듯싶다.
“그분은... 각성자도 아니셨다. 그렇지만 그분이 목숨을 구한 이들은... 후우...”
말을 잇던 권제는 다시금 입을 다물었다. 다 늙어 격정에 차 목소리가 떨리는 걸 그분의 손자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각성자가 아님에도 신기에 가까운 활솜씨는 여느 각성자 못지않았다. 아니 오히려 모든 이가 그분을 당연히 각성자라고 생각했다.
단 일인이었지만 그가 날린 화살은 목숨이 경각에 처한 이를 수없이 구했고 무차별적으로 인간을 도륙하던 몬스터들의 숨통을 끊었다.
그 자신도 얼마나 많은 목숨을 그에게 빚졌는가.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뛰다가 몬스터에게 죽음의 위기에 달했을 때 항상 그의 목숨을 구했던 건 어디선가 날아온 한 대의 화살이었다. 그분이 없었다면 지금의 자신은 없었을 것이라 그는 생각했다.
아니 어쩌면 그분을 통해 목숨을 구한 이들이 무럭무럭 성장했기에 대한민국이 몬스터들을 좀 더 빨리 몰아낼 수 있었다고 그는 말할 수 있었다.
그와 함께한 시간은 짧았다. 고작 일주일... 밀려오는 몬스터에 밀려 잠도 아껴가며 싸웠다. 어떤 때는 싸우다가 잠들기도 했다. 그와 통성명은 일부러 하지 않았다.
너무나 많은 동료들은 몬스터의 아가리에 속에 잃었고 어느 순간 서로 통성명 하는 것을 두려워하기 시작했으니까. 서로 이름을 나누고 정을 나눈 동료가 다음날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났을 때의 기분이란...
제황은 권제의 헬기를 타고 서울로 향하고 있었다.
난생 처음 느끼는 이륙감에 처음에는 좀 불안했지만 굳이 권제의 초대가 아니더라도 가야 할 이유가 생겼다.
“전열을 재정비한 우리가 그곳에 돌아갔을 때 우리는 그분을 찾을 수 없었단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분이 돌아가셨다는 것을 알 수 있었지. 마지막 서 계셨던 곳에 그분이 항상 몸에서 떼놓지 않으셨던 것들이 흩어져 있었으니까.”
“신분을 확인 할 방법이 전혀 없었습니까?”
“당시 우리들은 뭐랄까. 체계화된 집단이 아니었다. 고립되어 있던 이들을 조금씩 흡수하는 식으로 조직을 늘리기도 했지만 자고 일어나면 워낙 죽는 이들이 많으니 누군가 나서서 그걸 관리할 이들도 없었지.”
“...”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제황은 학교에서 배웠던 것들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단 1년간 수백만이 죽었고 그 후 5년이 지난 후 인구의 절반이 사라졌다고 배웠다.
“게다가 몬스터 놈들은 옷이고 뭐고 죄다 집어 삼키는 놈들이었다. 소지품을 남기는 것 자체가 힘든 일이었지. 빌어먹을 다크어스의 악마들...”
그의 말을 듣던 제황이 눈을 번쩍 떴다. 잠시 잊고 있던 게 떠올랐다.
"몸에 지니고 계셨다는 걸 좀 알 수 있을까요?"
그러자 그는 천천히 기억을 더듬듯 입을 열었다.
"이름이 새겨진 검은색의 목패 하나와 통아 였지."
목패와 통아... 제황의 눈이 커졌다. 그가 찾아야 하는 것 중 하나가 나타난 것이다.
아마 그것은 제황이 찾아야 하는 것 중 하나가 맞으리라. 그런데 뭔가가 이상하다.
"혹시 활은...활은 없었나요?"
제황의 물음에 권제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분이 쓰시던 그 특이한 모양의 쇠로 된 정량궁을 말하는 거구나. 없었다. 그걸 찾기 위해 그 주변의 모든 몬스터의 씨를 말렸지만 그건 회수하지 못했다."
"그렇...군요."
맥이 탁 풀렸다. 찾았는가 싶었는데 반쪽뿐이다.
" 그 검은색의 목패에 적힌 이름이 그나마 그분의 이름이 아닐까... 난 생각했다."
"네. 할아버님의 성함이 맞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제황은 헬기좌석에 몸을 깊이 뉘이며 생각에 잠겼다.
거의 잊고 살았던 할아버지의 대해 알게 되니 머릿속이 조금 복잡하다.
그의 아버지는 술을 그리 자주 마시지는 않았지만 가끔 취할 때가 계셨다. 그리고 그 때마다 항상 할아버지에 대해 말씀하셨다.
"가문의 전 재산을 쳐 가지고 나가셨으면 혼백이 되어서라도 돌아와서 돌려놓고 가셨어야지요. 아버지..."
아버지는 할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많았던 분이셨다. 비록 그 원망이 술의 힘을 빌렸을 때나 쏟아졌지만 어머니를 일찍 여위었던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실종되신 후로 말 그대로 어린나이에 혈혈단신의 천애고아가 되셨다. 거기에 집안의 가보는 둘째 치고 가전무술마저도 제대로 다 배우지 못한 반쪽짜리 후계자라는 자괴감에 어릴 때는 술로 세월을 보내기도 하셨다.
나중에 정신을 차려 그나마 남은 기억을 긁어모아 그럭저럭 비전을 완성했지만 그것은 아버지가 가슴에 품고 있던 첫번째 한이었다.
두 번 째 한은 가보들의 실종이었다. 대대로 내려오던 철궁 한 자루와 황동으로 된 통아였는데 그 모든 걸 가지고 나간 할아버지가 실종되셨으니 가문의 전부가 사라졌다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으리라.
"이렇게 늦게 찾아서 미안하구나."
권제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 왔지만 제황은 말없이 눈을 감았다.
두두두두...
헬기가 요새와 같은 거대한 저택 중앙에 있는 헬기 착륙장에 내리자 제황이 내려섰다.
헬기장에 도열한 개량한복 차림의 나이가 지긋한 남녀노소가 서 있었는데 그 수가 약 40여명이었다. 권제와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한 노인이 선두로 나서서 고개를 깊이 숙였다.
"태사부 어르신... 다녀오셨는지요."
"그래. 별다른 일 없었는가."
"예. 언제나처럼 같았습니다. 옆에 계시는 분이 그분의 핏줄이신가요."
"그렇다네."
"제가 뫼시겠습니다."
"그래."
환영인사 같은 건 없었다. 제황의 마음을 헤아린 권제는 그대로 그를 데리고 길을 걷기 시작했고 그의 뒤를 남녀노소가 말없이 뒤따랐다. 십여 개의 거대한 문을 지나 저택의 심처에 도달한 권제가 말했다.
"모두 여기서 기다려라."
"예."
권제는 제황을 이끌고 앞서 걸었다. 잠시 후 철제 엘리베이터가 나타났고 거기 올라탄 제황과 권제는 가장 최하층으로 내려갔다.
철컥...철컥...철컥.. 투퉁...끼이익...
가장 최하층에 도착하니 거대한 문이 그들을 맞이한다.
잠시 후 상하좌우에 설치되어 있던 거대한 기관이 움직이고 거대한 문이 열렸다. 전면에는 큼지막한 현판이 그들을 맞이한다.
'영웅지묘'
안으로 걸어 들어가자 드러난 영웅지묘라는 곳은 하나의 거대한 터널이었다. 비스듬하게 나선형으로 회전하듯 위로 뻗은 거대한 터널이었는데 군데군데 보수한 흔적들이 보이는 그런 곳이다. 그곳을 권제와 함께 걸으며 제황은 양 옆으로 만들어진 유리케이스를 둘러보았다.
"모두... 유품인가요?"
"그래."
긴 유리케이스 안에는 1미터 간격으로 유품으로 보이는 물건들이 들어있었다. 대단한 물건들은 없었다. 가장 많은 건 손때 묻고 구겨진 편지... 그 외에는 일상생활에 쓰이는 물건들이었다. 어떤 것은 손목시계, 또 어떤 것은 구형의 스마트폰 가끔씩 부러진 검이나 낡아빠진 총기류 같은 것도 보였다.
이름이 써진 작은 팻말이 있는 것도 있고 없는 것도 보인다. 마치 쓰레기 전시장 같이 보이기도 하지만 그 하나하나에 담긴 이야기를 생각하면 그런 생각 자체가 불경스러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