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사거리 100만-42화 (42/301)

# 42

진정한 용혈무

“어떠냐.”

“후...”

라이센스를 두고 흥정하는 노인을 바라보며 제황은 한숨을 내쉬었다. 노인네가 집착이 정말 엄청나다. 마치 한이 맺힌 듯 보인다. 그렇지만 정답을 찍은 건 사실... 게다가 그리 나쁘지 않은 제안이다. 용혈무의 진짜 모습 정도는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알려지게 될 테니까.

시합장에서 물러나려던 제황이 다시 권제의 앞으로 걸어갔다.

“4성급 라이센스는 경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합당한 자격이 없으면 응시조차 할 수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합당한 자격이라... 자네는 그 자격이 뭐라고 생각하나.”

“...전투능력입니다.”

제황의 대답에 권제가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능력 안 되는 연놈들이 별 말 같지도 않은 조건들을 덕지덕지 붙여 능력자들과 자신들과의 격차를 줄이려고 발악하지만 권제가 생각하는 진짜 조건은 바로 얼마나 잘 싸우냐였다.

“맞아. 헌터의 본질은 어차피 싸우는 거다. 그리고 넌 자격이 있지.”

“저는 일개 응시생입니다.”

제황의 말에 권제가 큭 하고 웃어버렸다. 이건 뭐 새로 나온 개그인가? 만약 개그라면 이 어린 녀석의 개그센스까지 칭찬해주고 싶다.

“네 녀석은 마주하고 있는 내가 대체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냐.”

제황 만을 제외한 시합장 안의 모든 이들이 권제의 이 말을 이해했다. 무려 권제와 20분  가량을 겨룬 인간에게 자격을 논한다는 건... 어찌 보면 권제에 대한 모욕이 될 수도 있는 문제였다. 문제는... 제황은 진짜 몰랐다.

“누구신대요?”

“...”

“...”

“날 몰라?”

“예.”

제황의 대답에 경기장 안 모든 이들의 표정이 뜨악하게 변했다. 대한민국의 사람으로 권제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외국에서 왔느냐?”

“아뇨.”

“무적의 핵주먹 권제라는 말 못 들어봤어? 영화도 6편 찍었는데? 티브이도 안보니? 교과서에도 나올 텐데?”

권제의 물음에 제황은 머리를 박박 긁었다. 운동부라서 교과서는 베개로만 써봤다. 영화나 티브이는 원래 취미가 없다. 아마 티브이라면 자신보다 궁기가 더 잘 알 꺼다. 자신은 차라리 그 시간에 화살 한 발 더 쏘고 훈련을 한 시간 더 하는 게 재미있지.

“후... 일단 난 네게 4성급 라이센스를 줄 충분한 능력이 있다 알겠느냐?”

왠지 지친 듯 한 권제의 말에 주위를 힐끔 보니 모든 이들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는 뜻... 그러자 제황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몇 가지 조건을 더 들어주시면 응하겠습니다.”

“말해보거라.”

“차후 이 안에서 벌어진 일들은 밖으로 새나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제황의 말에 권제의 입꼬리가 삐죽 올라갔다. 사실 그도 바라마지 않던 생각이다. 이런 월척을 건졌다는 걸 다른 놈들이 알지 못하기를 바랐으니까.

“마음에 드는군. 전부 포위해!”

“존명!”

권제의 명이 떨어지는 순간 그의 뒤를 따라 들어온 무영들이 순식간에 움직여 경기장의 모든 문들을 포위했다.

“그래...어떻게 해주랴.”

권제의 말에 제황은 잠시 머리가 멍하게 변했다. 지금의  이 모습은 마치 이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을 죽여 버리기라도 하겠다는 듯 보인다. 아니 자신이 죽여 달라고 말하면 웃으면서 살인멸구를 지시할 양 보였다.

“저들에게 권제님의 뜻으로 함구할 것을 명령하면 될 것 같습니다.”

제황의 입에서 권제님이라는 말이 나오자 웬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지는 권제였다. 사실 살인멸구까지는 할 생각이 없었다. 단지 제황의 심성을 잠시 시험해 본 것 뿐...

“그래? 흠... 알겠다. 루미야.”

“예!”

그의 말에 뒤에 서 있던 여성이 고개를 끄덕이며 한 발 나섰다.

“이번 라이센스 시험에서 이 아이와 관련된 모든 정보를 삭제해라. 또한 이에 대해 알고 있는 이에 대해서는 내 이름을 대고 철저히 함구시켜라.”

“존명!”

뒤돌아선 루미라는 여성이 귀에 낀 작은 헤드셋에 뭐라고 한마디 하는 순간 경기장 안의 있던 모든 사람들은 썰물 빠지듯 빠져나가 버렸다. 일체의 반항도 없었다. 그 물결에 휩쓸려 창공 클랜의 막내아들도 어어 하다가 밀려 나갔다. 뭔가 저주를 퍼붓는 듯 싶지만 안타깝게 그 목소리는 제황에게 닿지 않았다. 하긴 닿았어도 신경이나 썼겠냐만...

“됐나?”

“예.”

사람들이 모두 빠져나가자 제황은 뒤돌아서 경기장의 끝으로 걸어갔다.

-내가 도와줄까?

궁기가 물었다.

-아니... 넌 내 최후의 보루야.

그녀의 존재와 진정한 힘은 가진 바 능력을 모두 공개한다 해도 최후까지 비밀로 삼을 참이다.

-알았다. 잘해라. 넌 이 궁기의 계약자니까.

-알고 있어.

굳이 그녀의 도움이 없더라도 궁기는 궁기안 만으로도 충분히 제 몫을 하고 있었다. 용혈무던 무련궁술이던 궁기안이 함께 함으로 150프로의 효율을 낼 수 있었다. 상대의 모든 공격을 간파해 줌과 동시에 눈의 능력 자체를 극대화 시켜주니까.

경기장의 끝에서 뒤돌아선 제황이 전면의 권제를 바라봤다. 그리고 무한고에서 한 자루의 커브스보우를 꺼내들었다.

“음...”

권제는 제황이 꺼내든 활을 보며 침음을 삼켰다. 뭔가 모양이 특이한 기형병기를 사용할 거라고 예측하기는 했지만 그것이 활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기껏 그가 생각해 낸 것은 뿔이 달린 거대한 월도였다. 쓰임이 유사한 건 그것뿐이다. 그런데 꺼낸 게 활이었다.

현대적인 느낌의 활에 이것저것 몬스터의 부산물을 가져다 묶어 만든 어찌 보면 조금 엉성해 보이는 붉은색 커브스 보우였다. 얼마나 낡았는지 곳곳에 덧댄 흔적이 역력한 커브스 보우의 손잡이에는 반대로 꺾어지는 주인의 정체를 알 수 없는 긴 뿔 두 개를 달아 놨다.

“그것이냐?”

“예.”

“특이하군.”

권제는 천천히 자세를 잡으며 생각했다. 활을 들었다. 용혈무라는 근접특화스킬이 있음에도 활을 든다? 그렇다면 활이 더 강하다는 것인가? 근거리 전문이 아니라 원거리 전문이라는 소리가 된다. 그런데 저 활 모양... 그렇게 낯설지 않다. 누구였지?

“후...”

제황에 대해 더 이상 예측은 그만두기로 마음먹은 권제는 오른쪽 손바닥을 제황을 향해 뻗었다.

“마나는 사용하지 않지만 이제 나도 힘 좀 써보마.”

“감사합니다.”

대체 권제라는 인간이 힘을 쓴다는 말이 어떤 뜻인지 아는지 모르는지 제황은 덤덤하게 대답했다. 손에 두 대의 화살을 소환해 들자 권제가 기이한 걸 본 듯한 눈으로 물었다.

“특이한 아공간을 가지고 있구나. 신상품이냐?”

“개인 맞춤입니다.”

“허... 나중에 어느 공방에서 샀는지 말해 주렴. 나도 하나 가지고 싶구나.”

“예.”

잠시 가벼운 대화가 오가고 곧이어 대결이 시작되었다. 시작은... 제황이었다.

파! 팟!

“헛!”

얼굴을 향해 정직하게 날아오는 화살을 고개를 까딱임으로 피해낸 권제는 자신이 피할 곳을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이미 코앞에 당도한 두 번째 화살에 헛바람을 집어삼키며 고개를 숙였다.

파파팡!!!

눈을 드는 순간 세 번째 화살이 다시금 얼굴을 노린다. 뒤이어 날아오는 화살들은 그가 피할 방향을 모조리 점하고 있었다. 이건 스킬이 아니다. 오로지 제황의 순수 활솜씨로 쏘아내는 것이었다.

“좋구나!”

파파팍!

권제는 날아오는 화살들을 모두 손으로 쳐내버렸다. 엄청난 속도의 속사다. 쏘는 방법이 특이하거나 활에 자동 발사 장치 따위가 달린 건 아니었다. 특이한 건 손에서 화살들이 그때그때 쏟아져 나온다는 것과 그 활을 쏘는 제황이 무지막지하게 빠른 속사를 한다는 것이었다. 마치 겨냥도 하지 않는 듯 보이는데 화살은 요소요소를 날카롭게 비집고 들어왔다.

“나도 가지!”

애초에 얌전히 화살만 받아줄 생각이 없던 권제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날아오는 화살들을 모조리 손으로 쳐내며 전진한다. 뻗어가는 그의 장(掌)에는 무시 못할 거력이 담겨 있었고 권제의 신묘한 움직임에 화살들은 덧없이 튕겨 나갔다.

제황은 경기장을 측면으로 빠르게 돌며 계속해서 화살을 쏴대고 권제는 그걸 쫓는다. 문제는 그 격차가 좁혀지지 않는 것... 그러나 권제의 표정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이것이었군. 이것이었어. 그 발놀림의 정체가!’

속이 후련한 느낌이다. 그는 용혈무의 정체를 알 수 있게 된 것이 기뻤다. 용혈무는 지금 이 궁술을 보조하기 위해 있는 무술이었던 것이다. 철저히 방어와 회피에 집중되었다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진짜 공격 수단은 따로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지!”

권제는 마치 기어를 한 단계 올린 듯 더욱 빠르게 접근했다. 사실 그는 아직도 전력을 하지 않은 상태였다. 앞선 시합에서의 어이없는 실수를 하지 않고 제황이 가진 바를 모두 보기 위해 조절하는 중이다.

권제와 제황의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졌다. 활을 사용하는 궁사에게는 가장 치명적인 거리다. 초근거리가 되면 활은 거치적거리는 물건이 되어 버린다.

팡!

뒤로 당긴 권제의 장이 앞으로 쭉 뻗어나갔다. 단지 마나가 없었을 뿐 그 공격에 담긴 순수한 힘은 무시무시하다. 맞는 순간 뼈 한두 대는 부러질 각오를 해야 하고 운이 없으면 단숨에 즉사다.

스슥...

그때 제황의 보폭이 사선을 향해 빠르게 길어졌다. 거의 몸을 뉘이다시피 한 그 자세이지만 그 근거리에서도 활시위를 만궁하는 것은 아무 무리가 없어 보였다. 근거리에서는 활이 약하다는 고정관념을 깨버리는 변칙공격...

팟!

“큭!”

턱밑에서 쑤시고 올라오는 무음의 화살에 권제는 기겁을 하며 그것을 손바닥으로 막았다. 제황은 근거리에서도 활을 놓지 않았다. 이미 그것이 막힐 것이라 생각했는지 내뻗은 권제의 팔을 박차며 다시금 거리를 벌렸다.

공중으로 날아오르면서도 두 대의 화살을 날렸다.

마치 접근을 불허한다는 듯 두 다리를 노리는 화살...

"좋구나!"

팡!

권제가 바닥에 있는 타일을 걷어차자 타일은 전면을 향해 폭파하듯 비산했다. 두 대의 화살들은 파편에 휩쓸려 땅에 떨어졌고 그 사이를 뚫고 그가 탱크처럼 전진해 들어왔다.

"이것이 끝이냐!"

머리를 노리고 두 대의 화살이 더 날아왔지만 그것을 고개짓으로만 피해낸 권제가 외쳤다. 땅에 내려선 제황의 이마에서 한줄기 땀방울이 흘러 내렸다.

"받은 게 있으니 나도 돌려주마."

두 주먹을 불끈 쥔 그가 제황을 향해 빛살같이 뛰어 들었고 제황은 빠른 걸음으로 물러서며 다시금 화살을 꺼내들었다.

또다시 술래잡기를 시작하려는 걸까...하고 생각했지만  이어 벌어진 제황의 행동은 권제마저 다시금 당황하게 만들었다.

뒤로 물러나는 척 하더니 화살을 시위에 거는 순간 몸을 돌려 품으로 뛰어든 것이다.

휘이이이...

“하... 가소롭구나.”

권제의 손이 어지러이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이내 그의 입에서 노호성이 터져 나왔다.

“무적세!”

오른손으로 장영을 일으키더니 이어 그 장영을 뚫고 튀어나온 섬전 같은 왼손 주먹이 제황을 꿰뚫었다. 조금 전까지 제황의 머리가 있던 자리를 권제의 주먹이 후비고 지나갔지만 제황은 그것을 단 한걸음을 통해 간만의 차로 피해냈다.

‘일보(一步)에 생사를 건다.’

용혈무의 가장 중요한 요체이며 요결이다.

얼굴을 치고 지나가는 권제의 소맷자락도 아프지만 제황은 그런 아픔 따위는 무시했다. 일보를 통해 삶을 얻었으니 그 삶을 통해 생사결을 논한다.

휘이이잇!!! 팟팟!!

활에 덕지덕지 붙어있던 두 개의 뿔이 권제의 치렁치렁한 자락에 걸리고 제황의 팔놀림에 따라 감겨들어가기 시작했다.

턱!!

“큭...”

권제는 감히 자신의 배에 발을 올린 제황을 황망한 눈으로 내려다봤다. 커브스보우에 달린 뿔에 옷이 엉켜들었고 배에 발을 붙인 채 활을 잡아당기자 순간적으로 몸이 옷에 구속되어 버렸다. 그와 함께 장전된 새로운 화살은 이미 만궁의 상태다.

‘잡아놓고 쏴?!’

찌이이익! 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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