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사거리 100만-41화 (41/301)

# 41

진정한 용혈무

노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제황은 봉을 가슴 앞으로 모았다가 일순간 돌격 찌르기처럼 날듯 다가오는가 싶더니 몸을 횡으로 돌리며 바닥을 내리 찍었다.

"이크...그놈.."

봉에 담긴 파괴적인 마나가 심상치 않다. 맞받아치려면 같은 마나가 필요할 정도로 강한 공격이기에 권제는 회피를 택했다. 각성자들의 마나공격에도 끄떡하지 않던 바닥에 마치 용이 헤집고 지나간 것처럼 어지럽게 파였다.

"허허... 이정도일 줄이야."

그는 순수한 의미로 크게 놀랐다. 봉을 이용한 유술이 주를 이루는 줄 알았는데 마나를 집중하여 한순간 파괴력을 극대화하는 묘리까지 숨겨 있을 줄은 몰랐다. 솔직히 이정도만 해도 어느 정도 목적은 달성한 것이지만 이제 좀 더 본격적으로 용혈무라는 무술의 한계를 시험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왔기에 그는 사양 않고 제황을 향해 달려들었다.

퍼퍼엉! 펑펑!

이것이 진정 팔순을 넘긴 노인의 주먹에서 나오는 소리인가. 단순한 듯하지만, 그 속도와 파괴력은 무시무시하다. 2미터가 넘는 근육질의 몸이 돌진하며 날리는 주먹에 일순 제황이 수세에 몰렸다. 마나만 사용하지 않을 뿐 각성자로서의 수치화된 능력은 그대로다. 평생을 몬스터와의 싸움으로 보낸 노인이다. 레벨의 차이는 까마득하다 못해 보이지도 않을 것...

끼기긱...

제황의 봉이 비명을 지른다. 충분한 탄성을 지니고 있지만 극쾌에서 나오는 타격이 탄성을 그대로 죽여버리는 것이다. 과연 7성의 헌터가 어떤 것인지 가르쳐 주는 무자비한 공격이다.

"이건 내가 몬스터를 상대하며 창안한 무술이다. 몬스터들을 상대하다보니 기교보다는 마나소모가 적고 파괴를 중점으로 하는 공격법이 필요하더군."

극쾌의 속도로 주먹을 뻗는 와중에도 권제는 점잖은 목소리로 자신의 무술을 설명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제황은 그의 말에 대답도 하지 못한 채 연신 막기에 급급하다.

"저런..."

"대..대단해."

이제 체육관 내의 사람들은 모두 하던 것을 멈추고 권제와 제황의 대련에 집중했다. 평생에 보기 힘든 대련이다. 권제의 무적권은 물론이고 상대하고 있는 제황의 용혈무 또한 대단하다. 대체 왜 저런 실력을 가지고 힐러로 지망했는지 의구심이 들 지경이다.

그러나 그들의 이러한 경악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커져갔다. 왜냐하면 권제와 제황의 대략 10분가량 지났어도 전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내가 잘못 알았군.'

연신 주먹을 뻗는 권제는 자신이 용혈무를 얕잡아 봤다고 생각했다. 제황이 선공을 통해  용혈무의 진체를 어느 정도 봤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보니 그것은 그의 착각이었다.

'회피와 수비에 중점을 둔 무술이다.'

그렇다. 그가 연신 공격해 들어감에도 제황은 그 공격을 밀리는 척 하면서도 무리 없이 받아내고 있었다. 게다가 깊게 들어갈 수도 없는 게 조금의 틈만 보여도 봉을 이용해 그의 팔을 감아내려 한다. 물론 감기는 순간 유술기가 터져 나와 그의 관절들을 공략할 것이다.

완성도 하나만을 보자면 그가 가진 어떤 무술보다 차원이 높았다.

'허...이거 참...'

무적권이면 가능할 줄 알았건만 용혈무라는 이 신비스러운 고대무예의 진체를 보려면 조금 더 고위의 수법을 써야 했다. 마나가 없어도 충분하리라 생각했다. 각성자의 무기가 마나 뿐인가? 아니다. 시스템을 통해 개조된 신체는 레벨에 따라 엄청난 능력을 소유자에게 준다.

"돌아버리겠네."

권제는 정말 오랜만에 후회라는 걸 해봤다. 마나 없이는 아예 공략할 수가 없는 무술... 체감하기에 이것은 유니크 급의 스킬이었다. 물론 실제 용혈무는 레어급 스킬이었고 그가 이렇게 착각하는 이유는 그것을 유니크급 스킬인 궁기안이 보조해 주기 때문이었다.

2년간 함께 생사를 함께하며 보냈기에 이제 궁기안을 통해 보는 게 더 익숙해진 제황이었다.

아무리 권제의 무적권이 강하다 해도 직선공격 위주의 단조로운 패턴이 빠름을 상쇄시키고 있었다.

“붕괴권”

-추정 공격 후속 3연타! 피해!

권제의 주먹이 위에서 내려 꽂혔고 제황은 빠르게 뒤로 후퇴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반대편 팔의 팔꿈치와 손등 그리고 몸통 박치기가 날아왔다. 가벼운 회피만을 생각했으면 세 동작에 걸려 그대로 끝났을 것이다

-조심해. 저 늙은이... 눈빛이 구리다.

-알았어.

제황은 지금 궁기와 함께 싸우고 있었다.

***

"이럴 수는 없어."

전성현은 시합장 한편 구석진 곳에 홀로 서서 그의 우상을 바라보며 이를 악물었다.  그가 자신을 바라봐주길 바랬다. 지금 저기 서 있는 전설의 앞에 서 있는 게 자신이기를 그토록 소망했다.

"왜...왜! 저 근본 없는 놈이..."

오늘 그에게 주목받기 위해 그 동안 얼마나 노력했던가. 받을 수 있는 최고의 각성시술을 받았다. 일반인이 받는 3억짜리가 아닌 무려 100억짜리를 5성까지 성장 가능한 발판을 만들었다. 또한 헌터가 아님에도 아버지의 힘을 빌러 몬스터 레이드에 참가해 레벨을 올렸다. 그뿐이랴. 거금을 들여 로더의 아티팩트를 사들였고 그를 통해 로더로써의 마법스킬 또한 얻었다.

스킬을 내제하고 있는 아티팩트는 무진장 비싸다. 아주 사소한 스킬이라도 일반인을 로더로 각성시킬 수 있기에 그 금액은 웬만한 재력으로는 어림도 없는 금액이다. 그 아티팩트를 사기 위해 아버지의 재산이 휘청거릴 정도였으니 말 다한 셈...

그렇게 온 정성을 다해 준비했건만 지금 저 시합장 위에 서 있는 건 자신이 아닌 전혀 엉뚱한 놈이다. 금수저로 태어났음에도 자신은 단 한 번도 게을리 살지 않았다. 다른 이들이 술과 여자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도 그는 더 높은 곳으로 뛰어오르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갈고 닦았다.

"거긴 내 자리야..."

그의 눈에 질투의 불꽃이 피어올랐다. 열등감의 감정이 가슴 속을 가득 채웠다. 필기에서 수석을 놓치고 체력장 모든 부분에서 1위를 놓쳤을 때부터 서서히 일어나던... 그 알 수 없는 감정, 금수저로 태어나 살면서 단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했던 생소한 그 감정을 그는 느끼고야 말았다.

***

"허...이럴 수도 있나..."

권제는 주먹에 남은 찌릿한 느낌에 손을 툭툭 털며 정면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무적권을 봉으로 막아내고 그 여파로 한참을 밀려난 제황이 봉 너머로 눈을 빛내며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게 얼마만인가."

무술과 몬스터 이외에는 이제 더 이상 그에게 감흥을 줄 건 없다 생각했다. 그나마 강자들과의 전투가 있었지만 몬스터의 존재로 인해 강자들 간의 전투는 많은 제약이 따랐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곳에서 새로운 욕망이 샘솟았다.

'이 놈... 거두고 싶다.'

디바우저라는 건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절대 평범하지 않은 놈이었으니까. 그러나 그리 탐이 나지는 않았다. 디바우저라고 다 대단한 건 아니다. 평범한 이들이야 디바우저라 한다면 모두 신주단지 모시듯 하지만 함량 미달의 디바우저는 일반 헌터들 보다 못한 놈도 부지기수였다. 좋은 스킬이 있어도 받쳐줄 역량이 되지 못하면 뛰어난 헌터가 되지 못한다.

그런데 ... 정말 탐나는 놈이 나타났다. 타차원 침략에 소모할 총알이 아닌 진짜 키우고 싶은 놈이다. 문제는 놈이 보인 행태를 보면 부르면 좋다고 졸래졸래 따라올 놈도 결코 아니다.

'납치해 버릴까. 그러고 보니 저놈 다른 놈들에게는 알려지지도 않은 놈이잖아. 아예 침 바를까? 같이 무술을 연구해보자고 꼬셔볼까? 뭘 줘야 하지? 뭘 가르칠 게 있을까?‘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 와중에 무에 대한 욕심은 또 한이 없어 어서 저 무술을 파헤치라고 난리다.

“환장하겠군.”

권태에 찌들었던 정신이 해일같이 밀려오는 새로운 욕망에 정신을 못 차린다.

그리고 그 순간 제황이 다시금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권제는 머리가 복잡하여 손발이 어지러워졌고 찰나 그의 팔은 제황의 봉에 휘감겨 있었다.

'걸었다.'

권제는 봉의 권역으로 자신의 팔이 밀려들어가는 걸 느꼈다. 물론 걸었다고 해서 관절기에 당할 자신이 아니다. 애초에 몇 차원의 실력 차이가 존재하니까. 그렇지만 그 잠시의 놀람에 권제는 팔을 떨치며 본신의 힘을 사용하고야 말았다.

푸칵!!

"큭!"

두 동강이 난 봉을 든 제황이 하늘을 날았다.

콰콰쾅!

제황은 벽에 그대로 처박혔다.

"쿨럭쿨럭"

밭은기침을 하던 제황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키더니 박살난 봉을 씁쓸히 바라보다가 이내 권제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제황의 인사에 권제는 허탈한 표정으로 제황을 바라봤다. 저 어린놈에게 완전히 당해 버렸다. 외면상으로 보이는 그림이야 권제가 제황에게 손수 지도해 준 것 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의 완벽한 패배였다. 원하던 건 단 하나도 얻지 못했다. 그뿐이랴. 사실 내용을 보면 마지막에 그가 마나를 사용해 버렸으니 내용도 그의 패배였다.

아니... 그가 하나 더 얻은 게 있긴 하다.

‘진짜 대단한 건 저 괴물 같은 전투센스구나. 허허... 빌어먹을 어디서 이런 괴물이...’

대한민국을 호령하는 절대자 중 한명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당해버렸다. 완벽하게... 그런데 기분이 그리 나쁘지 않다. 아니 기분 나쁜 감정을 더 큰 욕심이 덮어버렸다.

'놈을 가져야겠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대체 저 응시생 뭐야!"

"어떻게 저분과..."

"정체가 뭐지? 실력을 숨긴 고위헌터였나?"

둘의 대결이 끝남과 동시에 시합장 안에 있던 모든 이들은 일제히 침묵의 마법에서 깨어난 듯 소리쳤다. 그들로서는 마치 도깨비에 홀린 기분이었다. 뜬금없이 권제라는 절대자가 시합장에 나타나더니 응시생과 대결을 벌이기 시작했다.

위의 사실만으로도 혹시 환각이나 꿈속이 아닌가 의심이 가는데 그 응시생은 무려 15분가량을 권제와 겨누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신기막측한 봉술로 말이다.

모든 부분에서 1위를 하는 걸 보며 평범한 능력자는 아닐 거라 생각했다. 유수의 클랜들이 지원하는 유망주들을 제치고 나타난 신성이라고 자신들끼리 이야기를 나눴다. 그런데 그 인물은 자신들의 빈약한 상상력을 비웃기라도 하듯 더욱 엄청난 걸 보여 버렸다.

그들 중 일부가 제황을 향해 슬금슬금 다가갈 때 그 걸음을 멈추게 하는 진동이 있었다.

콰콰쾅!!!

권제의 진각이 바닥을 찍자 시합장 건물 자체가 우르르 진동한다.

"네게 새로운 제안을 하겠다."

"..."

권제의 말에 제황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노인을 바라봤다. 얻고자 했던 2성 하이브리드 라이센스는 이미 얻었기에 굳이 그와 다시 붙을 필요가 없었다. 아니 이제 가장 귀찮았던 면접도 패스할 수 있게 되었으니 라이센스 발급 받은 후 1년간 국가 아카데미에 들어갔다가 마지막으로 15개월간 게이트에서 국가 소속으로 복무하며 1회의 장기국가원정대 참가만 하면 된다.

“4성 헌터 라이센스를 주지.”

우뚝...

노인이 어떤 유혹을 하던 거절할 준비를 하던 제황은 뒷걸음질 치던 발을 멈췄다.

‘4성 헌터 라이센스’

가급적이면 상대의 의도대로는 절대 움직이지 않는 걸 철칙으로 삼고 있는 제황이지만 지금 이 유혹은 상당히 컸다. 4성 헌터 라이센스는 정말 엄청난 걸 가능하게 해준다. 대한민국의 모든 헌터들은 라이센스를 획득하는 순간 하나의 의무조항이 생겨난다.

‘국가 동원령에 무조건 참여할 것’

물론 편법을 이용해 이것을 회피하는 헌터들은 많다. 의외로 구멍이 많은 의무조항이었는데 디멘션게이트 내에 장기체류 중일 때는 이 의무조항이 발효되지 않기에 국가로부터 공인 받은 클랜에 소속된 헌터는 클랜에 부탁하여 디멘션게이트에 상시 대기 중인 것으로 서류를 꾸며 의무조항을 피한다.

문제는 클랜에 소속되지 않은 이들은 이 편법을 쓰기 힘들다. 본디 제황이 2성 하이브리드 라이센스를 취득하려는 이유는 홀로 움직이기 위해서였다. 홀로 디멘션 게이트에 들어갈 수 있으면 편법을 통해 동원령을 회피할 수 있으리라는 계산도 있었다.

누군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신성한 의무를 회피하는 비겁한 짓이다.’

그러면 대부분의 헌터가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지랄은 자기 집에서 혼자 떠는 거라고... 국가 동원은 의외로 사망확률이 높다. 돌발적으로 발생하는 몬스터 웨이브에 근처에 있는 헌터들을 끌어 모아 대응하니 몬스터에 대한 확실한 대책 없이 전투가 벌어지게 된다.

몬스터사냥 시 나오는 부산물의 90프로를 헌터소유로 인정해주고  소정의 동원 위로금이 나오기는 하는데 헌터들 입장에서는 X이나 까잡숴 라고 말하며 공무원의 얼굴에 내던질 것이다.

그런데 4성 헌터 라이센스는 그 신성하신 의무를 지워주시는 라이센스다. 물론 4성 헌터 라이센스를 따는 헌터는 보통 10년 이상의 경력을 기본으로 전제하고 자격을 심사하는 라이센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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