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사거리 100만-40화 (40/301)

# 40

권제

“재미있으신가요?”

노인의 말에 제황이 입가에 작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이들이 이제는 벌린 입에서 흘러나오는 침을 닦을 생각도 못한 채 제황을 바라봤다.

누가 있어 그의 앞에서 저렇게 미소를 지을 수 있을까.

설마 그는 노인이 누군지 모르는 것일까? 노인의 이름은 중학교 기말고사에도 단골로 출현할 정도로 유명했다.

보통 권제가 이렇게 말하면 ‘미천한 잔재주일 뿐입니다.’ 라던가 ‘보잘 것 없습니다.’ 라고 말하는 게 보통이며 상식이다.

그를 지칭하는 단어...

권제(拳帝)

그의 두 주먹에 피떡이 된 고위 몬스터는 어림잡아 수천...

문제는 그가 한창 때 사람 피도 손에 적잖게 묻혔다는 거다. 물론 그가 죄 없는 이들을 죽인 건 아니었다. 무법의 시대에 세상의 해충 같은 쓰레기들에게 그는 저승사자였다.

그런 이가 재미있는 무술이라 칭해 줬는데 그 말을 받은 이가 이게 재미있냐고 되묻는다.

“묻고 싶은 게 있구나.”

“말씀하시죠.”

희대의 거인을 앞에 둔 제황은 담담히 말했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그리 좋은 상황은 아니다. 지금 제황은 권제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패도적인 기세에 오기 하나로 버티는 중이다.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패도는 모든 이들을 자연스럽게 무릎 꿇리는 힘이 있었다. 그러나 제황은 절대 그것에 굴하지 않았다. 자신은 무련가의 마지막 자손이었다.

무련가를 대표하는 이다. 무련가의 자존심이며 그 모든 것을 아우른 이가 그였다. 그렇기에 그는 강자에게 예우를 표할 지언정 꺾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죽어도 서서 죽을 것이다.

“후...대단한 아이구나.”

그리고 일순 권제의 몸에서 흘러나오던 패기가 씻은 듯 사라졌다. 아니 제황을 향해 집중시켰던 패기를 풀어버렸다는 게 옳은 표현일 것이다. 잠시 제황을 시험했던 권제는 제황의 눈에서 죽으면 죽었지 절대 꺾이지 않겠다는 신념을 봤고 또 그 신념을 그대로 관철시킬 의지도 봤다. 그렇기에 덧없는 짓은 그만두었다. 그보다 더 궁금한 게 있었으니까.

“네가 보인 그 봉술의 진짜 모습이 무엇이냐.”

권제의 물음에 제황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눈앞에 노인정도 되는 강자라면 알아챘을 것이라 짐작하고 있었다.

“그 봉은 네가 보인 봉술에 어울리지 않는다. 그리고 중간 중간 끊어짐이 있는데 처음 난 그것이 네 미숙함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다시 보니 그게 아니더군.”

여기까지 말한 권제는 잠시 입을 다물고 제황을 노려봤다. 사실 그에게는 제황에게 이것을 묻는 게 일종의 굴욕과 마찬가지였다. 세상 모든 무예를 안다고 자신하던 그가 타인에게 무술에 대해 묻는 것이었으니까.

“대체 갈무리한 그 공백의 의미는 무엇이냐.”

노인이 궁금해 하던 것이 드디어 밝혀지는 순간이다.

“알려드릴 의무는 없는 줄로 압니다.”

제황이 칼로 자르듯 대답했다. 대저 가문의 비전에 대해 알려달라니... 물론 노인이 가르쳐 달라는 게 그리 대단한 건 아니었다. 만약 그가 진심으로 자신에게 달려든다면 자신은 어쩔 수 없이 용혈무의 진정한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을 테니까.

제황의 대답에 권제가 인상을 팍 찡그리더니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러더니 양 허리에 손을 올리더니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뭐 바라는 게 있나?"

"없습니다.“

제황의 대답에 한껏 자세를 잡던 권제가 다시금 인상을 팍 찡그렸다.

대체 이 아이를 어떻게 구슬릴까하고 열심히 머리를 굴렸지만 딱히 떠오르는 게 없다.

그가 본래 이곳에 온 목적으로 꼬셔도 절대 넘어오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근래 전국을 돌아다니고 있는 이유는  재능 있는 인재를 찾기 위해서였다.

물론  제자를 들인다거나 하는 귀찮은 이유는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최근 서서히 불기 시작한 타차원 침략 전쟁의 첨병으로 삼을 엘리트무력집단을 육성하기 위한 것... 문제는 이놈에게는 그게 먹힐 것 같지 않다.

"거참 고민이군."

굳이 그 이유가 조금 불순하다 해도 자신에게 한가락 얻어가려는 이는 넘치고 넘쳤다. 왜냐고? 그에게 무술을 배우면 아주 높은 확률로 상대는 그것을 스킬로 얻을 수 있었다. 전지적 시스템 세이브조차도 인정한 인물이 그다.

물론 이런 식의 스킬 전수가 희귀한 건 아니었다. 육체계열에서 커먼스킬 정도의 등급은 재능과 노력이 있으면 전수를 통해 스킬로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권제가 전수하는 스킬은 최소가 스페셜 스킬 등급이다. 그렇기에 그에게 한 수 얻기 위해 오는 이들은 온갖 것들을 싸들고와 그에게 바치며 배움을 바랬다.

“가볍게 한 판 붙는 건 어떠냐?”

생각하기를 포기한 권제가 제황에게 그대로 돌직구를 날렸다.

오늘 이 궁금증을 해결하지 못하면 만성소화불량에 걸릴 것 같다.

“사양하겠습니다.”

제황의 목소리가 체육관을 울렸다. 그리 크게 말하지 않았지만 지금 이 공간 안에서 유일하게 소리를 내고 있는 건 권제와 제황 뿐이었기에 제황의 목소리는 모든 이들의 귀에 뚜렷하게 들렸다. 제황의 대답을 들은 이들은 이제 더 이상 놀랄 것도 없다는 듯 멍하니 제황을 바라볼 뿐이다. 감히 권제의 말을 거역하다니...

“흐으음...”

경지를 넘은 이후로는 별로 고민을 하지 않았던 권제는 오랜만에 찾아온 고민에 침음을 삼켰다. 궁금하다. 알고 싶다. 대체 숨기고 싶어 하는 게 무엇일까. 그런데 당사자는 요지부동이다.

'그냥 미친 척 하고 붙어봐? 아니야. 에잉!'

애초에 무리가 있는 말이고  억지로 밀어붙이기에는 자신의 체면만 깎일 짓이다. 그렇기에 그만 두는 게 맞지만 그의 호기심이 그런 그를 억지로라도 붙어보고 싶다 외치고 있었다.

“합당한 대가를 말하거라. 이뤄질 거다”

그의 말에 제황의 표정이 조금 달라졌다. 그도 눈치가 없는 건 아니다. 주위의 반응을 볼 때 이 노인은 절대 이런 시합장에나 나올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이라면 절대 내뱉은 말의 번복은 없을 것이다.

"승패 상관없이 2성 하이브리드 헌터 라이센스를 보장해 주시면 하겠습니다."

"겨우...그거면 되겠나?"

"예."

"허허..."

권제에게는 손바닥 뒤집듯 쉬운 일이었지만 그것이 목적인 제황으로서는 중요한 문제였다. 2성 하이브리드 헌터 라이센스는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는다. 그 정도의 역량을 보이지 못하면 꿈도 못 꾸는 게 2성 라이센스... 그렇기에 하이브리드를 선택했고 모든 부분에서 1위를 찍었다.

문제는 현재 누군가가 자신의 계획을 노골적으로 방해한다는 거다. 그렇기에 이 범상치 않은 노인을 통해 확인받고 싶었다. 물론 그 원흉인 수석감독관은 이미 쫓겨나간 상태지만 제황이 그걸 알 길은 없었지만 말이다.

"정녕 그것뿐이냐. 이건 정말 큰 기회다."

"없습니다."

"허...이거 참..."

별로 힘들게 없는 조건이지만 이러면 또 면이 안 선다. 자신이 누구인가. 고작 그런 일 따위 일을 들어주는 것으로 입을 닦을 위치는 아닌 것이다. 물론 제황은 굳이 필요 없는 걸 욕심 부리는 성격이 아니었다. 흔히 신세 진다고 말하는데 그건 절대 사양이다.

"좋다. 그건 차후 생각해 보자구나."

일단 궁금증을 푸는 게 먼저다.

"준비하거라."

"예."

고개를 끄덕인 제황은 오른손에 쥐고 있던 봉을 양손으로 가볍게 말아 쥐고는 사선으로 들었다. 그리고 그걸 보는 권제의 얼굴에 살짝 노기가 걸렸다.

"진짜 그 봉술의 진면목을 보여줄 생각은 없는가?"

"예."

제황은 단호했다. 너무 집착하는 듯 싶어 오히려 더 보여주기 싫어졌다.

"흠...뭐 위급해지면 알아서 꺼내겠지."

제황의 말에 권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두 주먹을 가슴에 모으며 자세를 잡았다. 자신의 애병이 없기는 하지만 어린 녀석도 본 실력이 아닌 바에야 자신도 굳이 그걸 꺼낼 생각은 없다.

"무적권이다."

"용혈무입니다."

제황의 말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2층 참관실에서 봤던 그 몸놀림은 용을 연상케 했다. 힘차게 꿈틀거리며 세상 모든 걸 쓸어 삼키는 용

"용이라... 과연 그 발놀림이 이해가 가는군. 그러나 조심해라. 내 무적권은 사나우니 용이든 지렁이든 모조리 물어뜯을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오냐. 발과 마나는 사용하지 않고... 세 수를 양보하마."

"배려 감사합니다. 그럼..."

제황의 상체가 아주 살짝 숙여짐과 동시에 사방에 땅을 박차는 파공음이 울렸다.

파팍!

바닥을 박찬 제황이 빠르게 접근했다. 이전까지의 보여줬던 움직임은 장난이라는 듯 지금의 움직임은 극성의 환을 머금은 채 권제를 향해 사납게 접근하고 있다. 발바닥이 땅에서 그리 떨어지지 않은 밀듯이 전진하는 그 특이한 보법에도 역시나 상체의 움직임은 고요하다.

권제의 손이 제황을 향해 가볍게 뻗어졌다.

세 수를 양보하기로 했으니 이건 방어의 수단이다. 잠시 후 제황의 봉과 권제의 손바닥이 부딪히자 파공음이 아닌 째진 피리소리가 날카롭게 울려 퍼진다.

독니를 드러낸 독사가 먹잇감의 숨통을 끊으려는 듯 권제의 팔을 빠르게 타고 올라가려 하고 권제는 그것을 짧게 받아치는 것과 동시에 봉을 타고 회전하는 은근한 마나의 흐름을 얇게 빗겨냈다.

첫 공격이 무산되었지만 제황의 후속 공격은 신속했다. 곧바로 과감하게 권제의 품을 치고 들어가 봉을 휘두르는 척 하다가 가랑이를 향해 앞선 발을 밀어 올려 쳤다. 그러자 의외의 급소공격에 놀란 권제가 뒤로 세 걸음 물러났다. 하초를 치고 들어오는 은밀하며 세 번의 발길질이 너무나도 가차 없다.

"급소도 치나?"

"죄송합니다."

제황이 고개를 까딱 숙이자 혀를 찬 권제는 자세를 바꾸며 말했다.

"나 아직 장가 못 갔다."

다 늙은 나이에 급소 공격을 당한 것으로 기분 상한 듯 보이지만 사실 그는 속으로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있었다.

무술이라는 건 짧은 단면만으로도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그 정도 되는 이라면 말이다.

‘전쟁용 고대무술’

한국 내 모든 무학을 섭렵했다 알려진 권제답게 용혈무가 추구하는 무의 목적을 빠르게 파악한 그였다. 내기를 이용하는 상승의 무술인 주제에 철저한 실전무술이다.

어쩌면 지금껏 전혀 현대적으로 다듬어지지 않은 폐쇄적으로 이어져 내려온 고대의 무술이 아닐까 하는 마음에 마치 젊었던 시절의 열정이 다시 살아나는 느낌이었다.

대충돌이 일어났을 때 그의 나이는 지금 그의 앞에 있는 녀석과 같았다. 대충돌이 있기 전 그는 우리나라 최고의 무도인이 되겠다며 심산유곡에 은거한 기인들을 찾아다니며 하루가 멀다하고 두들겨 맞았고 또 그만큼 배우던 시기였다.

대충돌 후 자연각성을 이루어 수십 년간 몬스터와의 사투를 벌이게 되었지만 그의 본질은 무도인이었다. 새로운 무술이 나타났다고 하면 어떻게든 그것을 직접 보고 몸으로 견식해야 직성이 풀리는 그를 사람들은 미쳤다고 손가락질 하기도 했다.

시기하는 이들이 나타나자 그는 그들을 잔인하게 짓밟았다. 대항하는 이는  굴종시키건 싹을 잘라버리 건 둘 중 하나였다. 그래서 한 때는 명성보다 악명이 더 높은 때도 있었다. 그 모든 것은 무에 대한 그의 집착 때문이었고 충분히 광적이라 말할 수 있었다.

'보고 싶다. 새로운 고대무술을...'

그는 항상 목말라 있었다. 수십 수 백 가지의 무술을 접했지만 그가 진정 보고 싶던 고대무예는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아니 비슷한 것을 보기는 했다. 그렇지만 그것은 우리나라가 아닌 중국의 한 평범한 무도가에게서 봤을 뿐이다.

한국 내에서는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리고 이제 말년이 되어 거의 포기한 상태였는데 전혀 뜻하지 않은 곳에서 그것을 보게 된 것이다.

'마나를 사용하는 상승의 실전살인기예...'

그런 것을 고작 2성하이브리드 헌터 라이센스로 볼 수만 있다면 정말 수지맞는 장사가 아닐 수 없었다. 단 하나 걸리는 게 있다면 지금 보이고 있는 건 저 용혈무라는 무술의 진짜 모습이 아니라는 것... 자꾸 입술에 침이 마른다.

"한번 남았다. 신중이 사용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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