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
권제
“수석감독관님 제가 그동안 수석 감독관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 참 많이 고민했습니다. 그렇지만 오늘 일로 저는 감독관님의 행태를 두고 보지 않기로 했습니다. 오늘 당장 저 11번 응시생을 보십시오. 그는 목숨을 잃을 뻔한 사람을 살려 냈습니다. 또한 체력장은 어떻습니까. 보십시오. 누구보다 뛰어난 성적을 거뒀습니다. 그렇지만 수석님은 그를 실기에서 육체 계열 응시생 중 가장 뛰어난 이와 가장 먼저 대결을 붙였습니다.
저희의 입장에서 사상자를 막아줬으니 최소한 가장 배려해야 할 이를 오히려 궁지에 몰아넣으셨습니다. 또한 아무리 시합의 대진이 감독관들의 재량에 따라 바뀐다지만 수석님은 저희 감독관에게 아무런 말도 없이 독단으로 바꿨습니다.”
속사포처럼 말을 내뱉은 그는 얼굴이 파랗게 질려 있는 수석의 눈을 노려보며 더 큰 목소리로 말했다.
“수석님이 체크하신 평가점수도 봤습니다. 흠잡을 수 없는 그런 인물에 그런 점수라니요. 저는 당신이 누구에게 무엇을 받아먹었든 상관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당신의 그 사사로운 욕심으로 우수한 인재가 사라진 것은 절대 좌시하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이 문제를 본청 감사부에 고발하겠습니다! 알겠습니까?!”
몇 년 간 묵혀왔던 말들을 한 번에 쏟아 부은 그는 홀가분한 표정으로 수석을 바라봤다. 얼굴이 파랗게 질려있던 수석은 이제는 다시 하얗게 변해 있다. 감독관은 예상과는 좀 다른 수석의 반응에 고개를 갸웃 했다. 본래대로라면 그는 자신에게 불같이 노하며 있는 협박 없는 협박 다했을 것이다.
그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한바탕 욕먹을 각오를 했는데 의외로 그는 학질이라도 걸린 것처럼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가 다시 수석에게 말을 붙이려 할 때 그의 등 뒤에서 으스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흠... 재미있는 이야기구나.”
바리톤의 굵고 묵직한 목소리에는 침범할 수 없는 위엄이 섞여 있다.
그 목소리에 수석은 지금 자신이 당면한 문제에 대해 깨닫고는 황급히 돌아서서 아직 문밖에 서있는 목소리의 주인공에게 말했다.
"권제님 이건 단지 작은 오해일...”
그러나 그 권제라 불린 이는 마치 썩은 고깃덩이를 본다는 듯 혐오스러운 표정으로 수석 감독관에 바라볼 뿐이다. 빛의 암영 속에서 수석을 바라보는 그의 눈은 얼음장과 같다.
“이 일에 대해서는 내가 네게 더 이상 들을게 없어 보이는구나.”
“허...어...”
그의 말에 수석은 줄 끊어진 꼭두각시처럼 자리에 쓰러졌다. 그런 수석을 문을 밀고 들어온 발이 옆으로 슥 밀어버렸다.
감독관은 정문을 열고 들어온 이를 올려다봤다. 가장 먼저 보인 건 금실로 용호가 수놓아진 하얀 장포다. 개량한복을 멋스럽게 입은 목소리의 주인공은 머리가 하얗게 샌 한 노인이었다. 그러나 단순히 노인으로 생각할 수 없는 건 그 몸의 다부짐과 몸에서 저절로 흘러나오는 패도적 기운 때문이다.
“허헉...”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는 지금 눈앞에 있는 인물이 실제로 자신의 앞에 있다는 걸 현실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왜냐면 그는 대한민국 모든 각성자들의 우상이자 대한민국 헌터의 살아있는 전설이자 신화로 받아들여지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권제(拳帝)
그 누가 그의 무력을 재량하랴. 전 세계 수많은 강자가 있지만 그들과 비교해도 전혀 부족하지 않을 그를 모든 이들이 존경과 두려움을 담아 7성의 좌에 올렸다.
대한민국에 있는 단 세 명의 7성헌터 중 1인... 그 이름 자체가 전설과 신화의 대명사 대한민국헌터사무국의 수석원로 권제 황정민이다.
“권제님께서 어떻게...”
감독관은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는 걸 느꼈다.
머리가 전에 없이 빠르게 돌아갔다. 이제는 그가 왜 이곳에 왔는지도 중요하지 않다.
이것은 마치 미사일을 쏘려고 버튼을 눌렀는데 알고 보니 그 버튼이 핵미사일 발사버튼이었다는 철지난 유머와 같은 맥락의 상황이 되 버린 격이었다.
어쩌면 핵무기보다 무서운 인물에게 대구지부의 치부를 낱낱이 드러냈다.
‘내가 무슨 짓을...’
자신은 수석을 끌어내리려 했었지 대구지부 자체를 들어엎고 싶은 마음은 추호에도 없었다.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인물은 대구지부의 존폐 자체마저도 결정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의 손짓 한 번이면 대구지부의 지부장에서부터 말단직원까지 모조리 교체가 가능했다.
숨 막히는 공기가 흘렀다.
“넌 나를 따라라.”
“옛!...알겠습니다.”
그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 삼생의 영광이다. 그 한마디에 감독관은 모든 생각을 멈춘 채 권제의 뒤로 가서 조용히 따랐다. 반항은 할 수 없다.
“가지.”
“예!”
권제 황정민의 뒤를 따르던 모두가 그의 말을 지상에 내려온 절대적인 과제인 양 뒤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를 따르는 10인의 남녀는 모두 개량한복에 가벼운 방어구를 착용하고 있었는데 권제만의 개인무력단체 중 하나인 무영이 바로 그들이었다.
***
“내가 뭘 어쨌다고...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바닥에 엎드려 멍한 눈빛으로 바닥의 타일 무늬를 바라보는 수석감독관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의문은 그 하나였다. 이 대구지부에 발령을 받고 대구에 뿌리 내린지 어언 20년이 넘었다. 무려 20년이다. 그 시간동안 그는 착실히 자신의 힘을 키우고 발을 넓혔다.
적당히 얻어먹고 적당히 편의를 봐주고 적당히 밟아주고 적당히 기름칠 하며 올라온 이 자리였다.
조금 전 2층 참관실 에서의 기억이 떠올랐다.
이 대구에서 무시 못 할 큰손의 자제가 은밀히 요청했다. 자신이 지목한 한 인물을 떨어뜨려 달라고.... 성적을 엉망으로 만들어 달라고 말이다.
오늘 이곳에 대한민국헌터사무국의 수석원로인 권제가 오후 경 비밀리에 방문하실 거라는 중요한 정보도 일러주었다. 그리고 자신은 그의 눈에 들어야 하니 자신이 최고점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 달라는 것.... 문제는 그런 그의 앞을 근본을 알 수 없는 놈이 가로막고 있다는 것...
7성헌터의 위명에 가슴이 떨리기는 했지만 이미 수십 번 해본 일이기에 언제나처럼 가뿐히 처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자꾸 엇박자가 나는 것에 대해 짜증을 부리며 어떻게 처리할까 고심하던 그는 수석원로께서 원래 오기로 했던 시간보다 무려 4시간이나 일찍 도착한 것도 모자라 이미 이곳에 도착해 있다는 소리에 부리나케 달려왔다.
최대한 화려하게 그를 맞으려 했다. 그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간 것... 더 큰 문제는
권제는 하필 탈락시켜달라 청탁받았던 인물의 경기를 직관하고 있었다. 아주 흥미로운 눈으로 말이다.
“자네가 여기 책임자인가?”
“어...예?... 아... 네!! 허..헌터사무국 대구지부 헌터교육부서 수석감독관 남필경입니다. 이리 누추한 곳까지 왕림해 주신 것 감사드립니다. 황정민 수석고문님.”
“흠...그럼 여기를 잘 알겠군. 좋아... 앞장 서게.”
“네? 네! 어디로..."
"내려가 보고 싶군. 왜 안되는가?"
"아닙니다!"
전혀 생각이 정돈되지 않은 그에게 안내 할 것을 명령하자 그는 두말 할 것 없이 그를 안내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벌어진 엄청난 불상사... 그건 그의 일생 최악의 대형사고였다.
“아...아직 끝난 게 아냐!”
그는 자리에서 주춤주춤 일어났다. 이미 권제님과 그 일행들은 자신에게 관심 없다는 듯 저편에 걸어가고 있다. 저들이 자신에 대해 파헤치기 전에 모두 꼭꼭 숨겨버리면 된다. 이때를 위해 배가 터지도록 쳐 먹인 것 아닌가.
"할 수 있어. 이...이 사태를 어떻게든..."
그는 비틀비틀 일어나 문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그가 정문을 열고 나서는 순간 권제는 뒤편에 시립해 있는 한 인물에게 조용히 말했다.
“조용히 뒤를 밟아 지금부터 놈이 연락하는 모든 인물을 추적해라.”
“존명!”
절도 있게 고개를 숙인 그 인물은 순간 신기루처럼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러자 서릿발 같은 눈빛의 노인은 고개를 다시 전면으로 돌린 후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쓰레기들을 한 번 치울 때가 왔군.”
그 말을 전해들은 감독관은 등을 타고 흐르는 서늘한 감각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자신의 단 한마디가... 오늘부로 영남지역 헌터계에 한바탕 비바람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그러나 노인은 그런 것 따위는 별 상관없는 듯 흥미진진한 눈으로 전면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이제 재미있는 녀석을 만나러 가볼까?”
노인의 눈이 경기장 관중석 한쪽 구석에 음침하게 앉아있는 한 인물에게 향했다.
-네게 온다!
눈을 감고 용혈기를 운용하고 있던 제왕은 궁기가 자신에게 속삭임과 동시에 눈을 번쩍 떴다. 강자의 출현은 이미 꽤 오래전부터 감지하고 있었다. 단지 달라진 것은 그 강자가 자신에게 볼일이 있다는 것이다.
노인과 제황의 눈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제황은 노인의 몸을 감싸고도는 패도적인 마나를 느꼈다. 정말 강한 인간이다. 그가 만난 인간들 중에는 정말 비할 데 없이 강하다. 아니 지금껏 만난 이들을 전부 합한다고 해도 이 노인의 발끝에나 따라갈 수 있을까?
-현세에 이런 인물이 있을 줄이야.
궁기의 심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로서도 매우 놀란 상태다. 제황과 함께한 2년간 전성기 때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다시금 잃어버렸던 원정을 회복하고 힘을 축적할 수 있게 되었다. 이미 신성을 가진 그녀였다. 원정을 회복했다는 건 다시금 그 신성을 키울 수 있게 되었다는 것, 시간이 걸리긴 하겠지만 그녀가 본래의 원정을 가지게 된다면 다시금 신수의 힘을 가질 수 있게 된다. 그렇기에 안심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그녀의 생각을 산산히 조각내는 인물이 나타났다.
그녀는 생각했다. 이 인물이 나쁜 마음을 먹는다면 자신은 절대 제황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그러면 그나마 간신히 회복한 원정은 모두 잃게 되는 것은 물론 한낱 평범한 미물이 되어 버릴 수도 있었다.
-긴장하지 마.
제황이 궁기에게 말했다.
-넌 내가 지킨다.
-...
제황의 말에 궁기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제 제황의 앞에 멈춰서 노인... 제황은 자리에서 일어나 노인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그것은 강자의 대한 예우다.
그런 제황을 말없이 바라보던 노인의 입이 처음으로 열렸다.
“이름이 무엇인고?"
“제황이라 합니다.”
"오... 임금 제(帝) 자를 쓰느냐?"
"그렇습니다."
"허허... 대단한 이름이구나."
노인의 뜬금없는 물음에 제황은 무덤덤한 목소리로 답했다. 누군가 이 장면을 본다면 평범한 청년과 노인의 대화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노인을 떠나서 그가 데리고 들어온 일행들이 내뿜는 기세만으로도 이미 시합장 안의 실기 시험은 정지 되었다.
마주한 채 최선을 다해 자신의 마법실력을 뽐내던 이들은 모두 시간이라도 멈춘 듯 멍하니 서 있었다.
장내의 모든 사람들이 둘을 쳐다보고 있었지만 그 대상이 된 둘은 그런 것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둘만의 대화를 이어갔다.
“재미있는 봉술을 쓰더구나.”
피식...